시와 음악 723

[시를 쓰는 이유]/신평

[시를 쓰는 이유] /신평 늦가을 낮게 깔린 적막 안 가늘게 들여다보며 겨울 함박눈 소복이 내리는 밤 하얀 숨 내뿜으며 나는 시를 쓴다 그것은 내가 나를 대하는 온전한 방식 그리고 존중이다 시가 그리는 세상에서 나는 비로소 사람이 되어 걸리적거림 없는 자유를 얻었다 꽃 피는 봄 눈물겹게 다시 찾아오면 먼 아지랑이 하염없이 바라보리 하늘과 바람과 별, 구름과 나무와 맺은 우정에 취해 기쁨의 소리에 잠겨 또 시를 쓰리 그것은 나를 나로 있게 하는 시다 . 덧: 제가 시를 쓰고 책을 읽는 공간입니다. 추운 겨울에도 햇볕만으로 덥혀집니다. 그리고 하루 내내 절간처럼 조용합니다. 경향신문 문광호 기자가 제 시 ‘슬픔의 의미’에 관해 말을 꺼내자 저는 좀 뜨악했습니다. 주춤하는 저에게, 문 기자는 그 시에 윤 대통..

시와 음악 2024.01.18

어항 속 물고기 /기각(綺閣)* /이해우 시인 해설

어항 속 물고기 /기각(綺閣)* 작은 동이에 물을 담으니 비록 깊지 않으나 물고기 때때로 떴다 잠겼다 마음껏 하네 그것을 보니 결코 동이 속에 있을 물건이 아니니 활발하여 스스로 강호로 나가고픈 마음이 있네 * 기각은 19세기 중반 조선의 여시인이다. 그리고 그녀는 순한글 시를 썼다. 그녀가 쓰는 한글시법은 독특했다. 먼저 한시를 짓고 음을 한글로 적은 뒤 우리말로 다시 풀어썼다. 그러니 한자는 등장하지 않았다. 한글이 나온 지 얼마 안 되었을 당시의 여성 지식인이 한글을 썼던 방식이다. //어항 속의 물고기가 물을 만났으나 떴다 잠겼다만 할 뿐이다. 달리지도 못하고 떴다 잠겼다 하는 피상적 운동뿐이다. '제 물 만난 물고기처럼'이란 말이 있듯이 우리도 뜻을 펼치는 공간이 따로 있다. 뜻은 컸지만 그 뜻..

시와 음악 2024.01.17

사람의 향기 /최림서 /이해우 해설

사람의 향기 /최림서 오십견이 처음 찾아왔을 땐 노래 「청춘」을 듣다가 밤 부엉이처럼 울었다 육십 고개 넘어서면 나이도 재산으로 쌓이는가. 머리가 희끗희끗해질수록 목소리가 깊어가는 가객을 생각한다. 늦은 가을 저녁, 나무는 잎사귀를 떨어뜨리면서 비로소 나무가 된다. 껍질도 갈라터지고 속이 단단하게 채워질수록 나무의 향을 제대로 맡을 수 있다. //이 시는 나의 페친이기도 한 최서림 시인의 작품이다. 제목으로 미루어 보아 성품이나 인격에 관한 시가 아닌가 싶다는 생각을 갖고 읽으면 쉽게 다가온다. 그는 오십견이 왔을 때 나이듬을 알았고, 육십 쯤 되자 그간의 삶이 안에 자산으로 쌓였음을 깨닫는다. 젊은 시절 남의 책에서 읽고 훔치던 남의 지식과는 다른 자산이다. 시인은 나이듬을 혹은 사람됨을 나무로 비유되..

시와 음악 2024.01.16

[슬픔의 의미]/신평

[슬픔의 의미] /신평 이제는 나의 때가 지나갔다고 헛헛한 발걸음 돌리니 슬픔의 쓰나미로 변한 과거 갑자기 거세게 밀어닥친다 원래 삶이란 슬픔의 바다이건만 구태여 외면해 오던 쓸쓸한 과거 성을 내고 달려든다 슬픔의 격정에 몸을 떨면서 슬픔의 안에 숨은 애틋한 마음 애써 꺼내 너와 나의 굽은 사연들 조심스레 살핀다 해가 달이 되고 바람이 새가 되어 나는 사이 먼 세월 거치며 빛이 바랜 젊음의 탁자 위 메마른 눈물 흔적 한 방울 눈물 다시 떨어진다 . 덧: 경주의 고분이 석양을 받으며 너럭바위처럼 쓸쓸하게 누워있군요. 옛날 어릴 때 장 자크 루소의 ‘고독한 산보자의 꿈’이란 수상록을 읽은 기억이 얼핏 납니다. 4.19 세대를 대상으로 펴낸 책이었지요. 책 내용이 기억난다기보다 책의 표지 정도가 겨우 머리에 ..

시와 음악 2024.01.15

늙은 호박 감자조림 /김옥종

늙은 호박 감자조림 /김옥종 그런 날이 올 것이다. 고단한 저녁의 혈 자리를 풀어주는, 가을 끝자락의 햇볕을 모아 한철 시퍼런 겨울을 이겨낼 수 있는, 절망의 밑동을 잘라내어 그 즙으로 조청을 만들고 끈적끈적한 세월 맛볼 수 있게 만드는 요리, 적어도, 그 계절의 움푹진 골짜기에서 흐르는 향기만이라도 담아서 덖어주고 쪄내고 네 삶 또한 감자처럼 포근히 익혀줄 것이니 때를 기다려 엉겨 붙어주시게나. 전분이 할 수 있는 가지런한 사명감에도 한 번씩 우쭐대고 싶은 날들도 있으니 늙은 호박과의 친분이 새삼스럽기는 하지만 갈치인들 어떻고 고등어인들 나무라겠는가. 그저 호박과 어우러져 등짝 시린 이 세월의 무게만큼만 허리 깊숙이 지지고 있다 보면 뒤척이지 않아도 가슴 빨갛게 농익지 않겠나. 기다림의 끝은 이렇듯 촉..

시와 음악 2024.01.14

이별離別에게/김현승

이별離別에게 /김현승 지우심으로 지우심으로 그 얼굴 아로새겨 놓으실 줄이야…… 흩으심으로 꽃잎처럼 우릴 흩으심으로 열매 맺게 하실 줄이야…… 비우심으로 비우심으로 비인 도가니 나의 마음을 울리실 줄이야…… 사라져 오오, 영원永遠을 세우실 줄이야…… 어둠 속에 어둠 속에 보석들의 광채를 길이 담아 두시는 밤과 같은 당신은, 오오, 누구이오니까! //이 시는 좀 어려운 시다. 제목이 '이별에게'이니 이별이 이 시의 주인공이 분명하다. '이별'이란 단어에 '에게'를 붙여 의인화하였다. 그는 누구일까? '지우심으로', '흩으심으로' 그리고 '비우심으로'라는 존댓말을 썼다. '비인 도가니 나의 마음을 울리실 줄이야'란 귀절에서 우린 그가 나를 주관하는 절대 존재임을 짐작할 수 있다. 그가 떠난 이의 기억을 지우는..

시와 음악 2024.01.13

시를 훔쳐가는 사람 /이생진/이해우 해설

시를 훔쳐가는 사람 /이생진 'oo 시인님 시 한편 훔쳐갑니다 어디다 쓰냐구요? 제 집에 걸어두려고요' 얼마나 귀여운 말인가 시 쓰는 사람도 시 읽는 사람도 원래는 도둑놈이었다 세상에 이런 도둑놈들만 들끓어도 걱정을 않겠는데 시를 훔치는 도둑놈은 없고 엉뚱한 도둑놈들이 들끓어 탈이다 내 시도 많이 훔쳐가라 하지만 돈 받고 팔지는 마라 세상은 돈 때문에 망했지 시 때문에 망하지는 않았다 //시를 훔쳐간다고 말했다. 시를 훔칠 수 있는 것일까? 노래방에서 노래를 불러도 그 대가가 가수와 작곡가와 작사가에게 돌아간다. 시인의 시에는 그러한 대가가 없다. 대가 없이 남의 것을 가져가는 것은 훔치는 행위이다. 그럼에도 시인은 그런 이가 귀엽다고 한다. 시를 쓰는 이는 훔쳐가라고 시를 쓰고, 도둑은 태연하게 시를 ..

시와 음악 2024.01.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