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음악

늙은 호박 감자조림 /김옥종

양곡(陽谷) 2024. 1. 14. 06:31

늙은 호박 감자조림
/김옥종

그런 날이 올 것이다. 고단한 저녁의 혈 자리를 풀어주는, 가을 끝자락의 햇볕을 모아 한철 시퍼런 겨울을 이겨낼 수 있는, 절망의 밑동을 잘라내어 그 즙으로 조청을 만들고 끈적끈적한 세월 맛볼 수 있게 만드는 요리, 적어도, 그 계절의 움푹진 골짜기에서 흐르는 향기만이라도 담아서 덖어주고 쪄내고 네 삶 또한 감자처럼 포근히 익혀줄 것이니 때를 기다려 엉겨 붙어주시게나. 전분이 할 수 있는 가지런한 사명감에도 한 번씩 우쭐대고 싶은 날들도 있으니 늙은 호박과의 친분이 새삼스럽기는 하지만 갈치인들 어떻고 고등어인들 나무라겠는가. 그저 호박과 어우러져 등짝 시린 이 세월의 무게만큼만 허리 깊숙이 지지고 있다 보면 뒤척이지 않아도 가슴 빨갛게 농익지 않겠나. 기다림의 끝은 이렇듯 촉촉한 가을비처럼 스며드는 맛이었음을 오래 잊고 살지 않겠나.

//이 시를 읽다보면 내 자신이 늙은 호박이고 감자가 되어 냄비 속에 누워있다. 바로 그것이 시인이 은유하는 늙은 호박과 감자다. 한 세상 잘 지내고 마지막을 기다리는 나는 누구인가? 한번도 시인을 만나지는 못햇지만 난 그의 시를 읽으며 그를 좋아한다. 고교 1학년 때부터 전남 목포 어느 조직에서 일했고 스물한 살에 그 바닥을 떠나 킥복싱 도장을 운영하였던 주먹 시인. 킥복싱으로 24전 24승을 거두던 김옥종은 1995년 일본에서 열린 K-1 격투기 대회에 한국인 최초로 참가했다가 1회에 KO패를 당했다. "묵직한 것에 당해 평생 처음 링에 드러누웠는데 내가 KO시킬 때하고 쾌감이 똑같았어요. 이겨야 한다는 강박을 내려놓게 됐습니다. 힘이 어마무시했는데 지고 나서부턴 없어져 부렀어요." 지금은 그 험한 주먹으로 요리를 한다. 그가 운영하는 식당의 이름은 '행복한밥상지도로'란다. - 이해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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