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음악

산판그뒤에그곳에는 대숲 박정열

양곡(陽谷) 2024. 8. 15. 22:09

#산판그뒤에그곳에는
                    대숲 박정열

성주봉 산그늘에
장끼가 캥캥 푸드덕 날아오르면
산비탈 돌아가는 해수咳嗽끓는 소리
부릉부릉 탈곡기 소리 내며
거칠게 논두렁 사잇길로
토막 낸 아름드리나무를 싣고
집채만 한 트럭이 지나간 뒤로
널찍한 찻길이 냇가에 새로 생겼다

도랑물 언 돌 가에  
얼음이 채 녹지 않은 이른 봄부터
황령荒嶺에서 시작한 벌목은
장마철이 아닌 데도
수렁 같은 물꼬에 빠진 트럭을
온 동네 사람들이 밤을 새워 빼냈다

논둑에 버티고 섰던 토종 뽕나무가
밤새도록 진한 몸부림에
얼마나 시달렸던지
허리가 벌겋게까진 채
날이 밝은 아침이 되어서는
헝클어진 대가리로 반쯤 누워있다

민대가리가 된 황골荒谷에는
이듬해 봄부터 눈 한 번을 못 감고
미영木花 잣는 구름 아래
참꽃이 온통 고깔 굿판을 벌이더니
복중伏中에 푸나무 지게는
세상이 다 푸르도록 눈이 부시었다

유리알 갈 볕 아래 나락꽃 필 때쯤
우쭐우쭐 너른 들판 걷고 싶어 하는
해쓱하고 파리한 청 도라지꽃  
생 잎 굴참나무 햇순을 가리개로
꿀잠 속 평화를 즐기는 새끼 산토끼

절 골에는 옻칠한 관하나 만들라고
불정 어른이 굵은 삼베옷 입고
그 안에 누우려고
평생을 공들이고 키운
풍채 좋은 붉은 소나무 하나가
망루 같은 산마루에 홀로 서서
밤낮 가리지 않고 지키고 섰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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