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음악

행복(幸福) /유치환(柳致環)

양곡(陽谷) 2024. 1. 6. 11:27

행복(幸福)
/유치환(柳致環)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에메랄드빛 하늘이 환히 내다뵈는
우체국 창문 앞에 와서 너에게 편지를 쓴다.

행길을 향한 문으로 숱한 사람들이
제각기 한 가지씩 생각에 족한 얼굴로 와선
총총히 우표를 사고 전보지를 받고
먼 고향으로 또는 그리운 사람께로
슬프고 즐겁고 다정한 사연들을 보내나니.

세상의 고달픈 바람결에 시달리고 나부끼어
더욱 더 의지삼고 피어 헝클어진 인정의 꽃밭에서
너와 나의 애틋한 연분도
한 망울 연연한 진홍빛 양귀비꽃인지도 모른다.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너에게 편지를 쓰나니
그리운 이여 그러면 안녕!
설령 이것이 이 세상 마지막 인사가 될지라도
사랑하였으므로 나는 진정 행복하였네라.

//시인에게는 미안한 이야기지만(하지만 이제는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기혼자인 청마 유치환은 시조시인 정운 이영도와 플라토닉한 사랑을 하였다. 그가 그녀를 처음 만난 곳은 통영여중의 국어교사로 부임했을 때다. 그때 그는 38살이었고, 이영도 시인은 29살의 미망인이고 같은 여중의 가사선생이었다. 단아한 시조 시인 이영도의 오라비가 시조 시인 이호우 선생이었으니 그가 관심을 갖지 않는다면 오히려 이상할 것이다. 청마 유치환이 1967년 귀가 중에 버스에 치어 별세할 때 까지 그가 이영도 시인에게 보낸 편지가 2천 여통이 넘는다고 한다. 감추려 하였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그의 가슴은 더욱 뜨거워졌으니 그는 그를 시와 편지로 해소하였던 것 같다. 육체적 사랑은 시간이 지나면 시드는 법이니 그런 것은 사랑이라 할 수도 없는 것이다. 하지만 이 두 사람의 사랑은 모두가 인정한 플라토닉한 사랑이었으니 아름답기 그지없다.

유부남인 그이기에, 위 시에 나온대로, 그는 편지를 집에서 쓰지 못하고 우체국에 와 하늘이 환히 보이는 창문 앞에서 썼던 이유이다.

이 시의 주제이면서 이 시를 빛나게 하는 구절은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란 구절이다. 현대사회에서 사랑은 일체성이 아니라 평등성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다. 즉, 받은 만큼 사랑을 준다는 것인데, 이것은 엄밀히 말해서 사랑이 아니라 상인의 거래인 것이다. 그래서 이런 사랑은 균형이 깨지는 순간 어느 한 쪽은 손해를 보았다 생각하고 사랑이란 감정은 깨어져 버린다. 그러니 사랑이 아니다. 어머니의 사랑이 깨어진 적이 있던가? 없다. 일방적으로 주기만 하여도 변치 않고 오히려 차고 넘치는 것이 진정한 사랑이다. 오래 가는 남녀간의 사랑도 그와 마찬가지다. 주기만 해도 기쁘고 행복한 것이 진정한 사랑인 것이다. 이기적 사랑은 늘 깨지게 되어 있다. 남자들의 첫사랑이 평생동안 뇌리에 남는 이유가 이것이다. 무엇이던 주어도 아깝지 않았던 시절의 순수한 사랑의 추억이기에 그렇다. - 이해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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