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명사 연재 25. 19세기 유럽의 역사적 교훈
자유와 평등을 기본가치로 삼는 계몽주의 사상과 루소의 사회계약론은 거대한 충격으로 미국혁명과 프랑스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다. 정치적 혼란에 빠진 프랑스의 총재정부는 나폴레옹에게 질서유지를 위임하였다. 그는 프랑스혁명이 나던 1789년에 20세 청년 포병장교로서 육군 대위가 되었고, 많은 전투에서 전공을 세워 24세에 준장으로 승진하였다. 그 후 이탈리아 방면군사령관, 이집트 방면군사령관을 거쳐 1899년에 프랑스 공화국 제1 집정관으로 추대되어 실권을 장악하고, 1804년에 35세의 젊은 나이로 프랑스 황제로 등극하여 나폴레옹의 시대를 개막하였다.
수많은 전쟁에서 승리한 그는 유럽을 지배하였고, 다만 영국과는 해군의 약세로 트라팔가르 해전에 패하여 무역 억제전략으로 대륙을 봉쇄하였으나 밀거래를 막을 수 없었다. 그는 영국과 스페인의 거래를 차단하기 위하여 1806년에 스페인을 공략하였으나 게릴라전으로 고전하여 20만 병력이 묶이게 되었고, 1812년에 68.5만 명을 동원하여 러시아를 공략하였으나, 모스크바에서 러시아군의 초토작전으로 인해 겨우 7만 미만의 병력이 간신히 살아 돌아왔다. 그의 러시아 공략은 전략적 잘못이었고, 스페인과 러시아에서 동서 양면 전쟁을 한 것은 더 큰 실수였다. 그가 파리에 와서 재기를 시도하였으나 패하여 1814년 엘바섬에 유배되었고, 1815년 탈출하여 100일 천하를 하였으나 다시 패하고 대서양의 고도에 유배되었다.
(a) 19세기 유럽의 역사적 유산
자유주의와 국민주의: 나폴레옹은 젊어 활력이 넘쳤고, 구질서와 대치하여 새로운 질서의 새 시대를 열려는 의지로 매사에 자신감이 넘쳤다. 그는 바른 원칙을 가진 정부가 프랑스 혁명정신에 입각한 법으로 다스려야 한다는 확신으로 개인의 자유, 기회의 평등, 성과주의, 이상에 합당한 통치, 종교의 자유, 현대 공교육, 화폐와 도량형의 표준화 등을 추구하였다. 이에 더하여 합리적인 지방행정, 농촌의 약탈 금지, 과학과 예술의 중흥, 봉건제도의 폐지, 교회 재산의 몰수 및 재분배를 실천하였다. 중세 길드(노동조합) 제도를 폐지하고, 농노를 해방하며, 노동자들의 자유로운 이주를 허용하였다. 그의 전쟁은 문제도 많았으나, 프랑스의 군사체제가 발전하였고, 군대의 규모가 커지고, 정신 무장이 크게 강화되었다.
나폴레옹은 계속적 전승으로 인해 프랑스 국민의 자존심과 애국심을 고양 시켰고, 그와 반대로 나폴레옹에 정복당한 프러시아, 오스트리아, 스페인의 국민은 자국 독립의 소중함을 실감하여 애국심을 자가 발전하게 되었다. 나폴레옹 전쟁은 유럽에 자유주의를 전파하였고, 국민이 국가로부터 보호받는 국민주의를 불러왔다. 나폴레옹 몰락 이후에 오스트리아, 프러시아, 러시아, 영국 등의 전승국들이 1814-15년 비엔나 회의에서 1789년 이전의 왕정체제로 환원할 것을 결정하였으나, 유럽은 이미 자유와 평등을 추구하는 새로운 혁명의 물결이 넘쳐흘러 되돌아갈 수가 없게 되었다. 따라서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해외 식민지는 1823년까지 대부분 독립을 쟁취하였고, 유럽 전역에는 산업혁명의 기운으로 인하여 사회주의 사상이 가난하고 소외된 노동자 계층을 파고들어 (자유 평등사상과 함께)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선동으로 계급투쟁의 이념이 사회 저변을 형성하였다.
산업혁명과 사회주의: 나폴레옹 전쟁이 끝나 정치와 경제의 문호가 개방되면서, 영국에서 개발한 산업기술이 유럽 각국에 전파되고, 축적된 자본으로 이윤이 생기는 곳에 큰 장벽 없이 투자되고, 교통과 통신이 발전하여 경비절감으로 산업화가 촉진되었다. 농촌의 노동자들이 도시의 공장지대로 구직을 위해 모이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영국의 경우만 해도, 도시의 노동자 계급은 도시인구의 80%나 되었는데, 정규직 일자리는 절반이고, 나머지 절반은 일자리가 없어 실업으로 고통을 당하였다. 따라서 저임금 장시간 노동은 보통 이고, 그들의 주거환경은 열악하였으며, 위생상태도 좋지 않아 1841년에 농촌의 평균수명이 45세였는데, 런던은 겨우 37세였다. 아이들이 직물공장에서 값싼 임금으로 일하였다. 산업화로 인하여 자본가와 노동자계급의 소득 격차가 심대해지니, 자신들의 이익을 추구하는 노동운동이 유럽 여러 나라에서 뿌리를 내리기 시작하였다.
한편 영국은 의회가 개혁 입법을 1832년부터 여러 차례에 걸쳐 통과시켜 개선해 가는 동안, 프랑스는 노동운동이나 민주화 욕구를 억누르고 1848년 혁명으로 왕정을 폐지하고 공화정을 수립하여 나폴레옹 3세를 대통령으로 선출하였다. 1848년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런던에서 익명으로 공산당선언을 발표하고, "우리의 역사는 계급투쟁 역사이다." "노동자 계급은 그들의 정치적 힘을 이용하여 자본가계급을 타도하고, 국가가 생산수단을 통제하여 생산성을 증대해야 한다." "공산주의 혁명에 지배계급이 떨게하라. 노동자 계급은 쇠사슬 외에는 아무것도 잃을 것이 없다. 그들에겐 승리할 세상만 있을 뿐이다. 노동자 계급이여 단결하라!"라고 혁명적 사회주의를 전파하고 노동자 계층을 향해 선전 선동을 하였다. 마르크스는 자본론에서, 노동자들에게 돌아갈 잉여가치를 자본가가 이윤으로 착취한다는 이론을 전개한다. 레닌이 마르크스주의를 계승하여 1917년 러시아혁명이 성공하였고, 1924년 중국에 전파하여 모택동이 중국을 공산화하였다.
이처럼 19세기를 풍미했던 사회주의 이념은, 마르크스가 헤겔의 변증법을 적용하여, 자본가와 노동자 간의 계급투쟁에서, 노동자 계급이 독재정권을 수립하여 사유재산을 국유화하고, 국가가 생산-소비-분배를 통제하여 가난이 없는 평등한 사회를 건설하려 하였다. 독일군의 호위 수송으로 러시아에 도착한 레닌이 혁명에 성공한 후, 국가가 모든 재산을 소유하고 사회주의 정부를 수립하여, 공산혁명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점차 생산성 저하로 인하여 경제가 정치 군사적 체제를 지원할 수가 없게 되어, 1980년대 후반에 고르바초프는 공무원에게 봉급조차 제대로 주지 못해 부정부패가 만연하여 법과 질서를 유지하지 못하였고, 결국 1991년에 소비에트 연방 체제가 붕괴하여 자본주의 경제로 전환 되었다.
통일국가 정립과 제국주의: 유럽에서 이탈리아와 독일은 하나의 국가로 통합되지 못하고, 신성로마제국이라는 이름으로 크고 작은 수많은 독립국으로 천년 넘게 분할되어 있었다. 이탈리아반도에서 로마의 교황청은 교주이며 군주로서 오랫동안 유럽정치에 간여하고 영향력을 행사해 오면서 반도의 통일을 방해해 왔다. 1815년부터 오스트리아가 북부 이탈리아를 지배하였고, 1859년에 프랑스에 패하여 롬바르디에 있던 오스트리아 점령군이 베네치아로 철수하자, 가리발디가 시칠리아에 상륙하여, 해협을 건너 나폴리를 점령하고 사르디니아 왕에게 그의 군대를 인계하여 베네치아와 로마를 제외한 통일된 이탈리아 왕국을 수립하였다.
한편 비엔나 회의에서 메테르니히가 주도하여 39개 신성로마제국 국가들이 독일 연방을 형성하였다. 오스트리아의 메테르니히와 프러시아의 비스마르크가 두 나라의 운명에 지배적 역할을 하였다. 메테르니히는 변화 없는 혁명 이전의 체제로 오스트리아의 영광을 추구하였으나, 비스마르크는 군사력을 강화하여 1866년 오스트리아와의 전쟁에 승리하였고, 프랑스와 전쟁으로 1871년에 파리에서 빌헬름 1세가 독일제국을 선포하였다. 독일은 비스마르크 재상, 분 전쟁장관, 몰트케 총사령관이 삼위일체가 되어, 황제를 보좌하면서 독일을 통일하여 중흥시켰다. 베네치아에서 주둔하던 오스트리아 군대는 1866년 오스트리아-프러시아 전쟁으로 철수하여 이탈리아에 환속 되고, 로마도 이탈리아에 흡수되어 이탈리아는 통일하였다. 독일과 이탈리아가 통일됨으로 인해 유럽은 외교 관계에서, 독일의 영향력이 대폭 증가하여 오스트리아를 넘어서게 되었다.
독일과 이탈리아가 통일하고 국제관계에서 적극적으로 나섬으로 인하여, 서로 이해가 얽혀서 국가 간 제국주의 전쟁이 점차 치열하게 되었다. 영국과 프랑스는 오래전부터 활발하게 식민지를 개척하였고, 후발주자인 독일도 아프리카의 식민지 개척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미국도 멕시코와의 전쟁으로 접경지역의 영토를 확장하였고, 스페인과의 전쟁으로 필리핀을 병합하였다. 일본은 한반도와 만주를 침략하여 식민지로 만들었고, 러시아는 만주에서 발판을 구축하였다. 제국주의 침략의 대표적 예는 아시아에서 인도와 불령인도지나 외에도, 1899년 복서 반란으로 열강의 군대가 베이징에 진입하여 중국 여러 지역을 조차하였고, 이로 인해 중국은 청조에 반기를 든 민주적 혁명이 지방에서 일어났다. 세계는 산업혁명과 국가주의의 결합하는 제국주의 연장선에서, 1914년 독일의 동맹국과 대항하는 영-불-러가 삼국협상을 결성하여 제1차 세계대전으로 진입하였다.
TO BE CONTINUED
(b) 정치이념과 철학의 발전
(c) 경제사상과 이론의 발전
(d) 계급투쟁은 성장과 분배의 문제 (에세이)
REFERENCES
Kim, Hugo W. The Consolidation of Nation States and Industrialization From 1815 To 1914: Nationalism and Socialism (Part II). North Charleston, SC: CreateSpace, 2020, 701-908.
김휘국. 정치철학*경제사상과 함께 읽는 세계문명사. 서울: 한국전자도서출판, 2022, 631-6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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