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명사 연재 24. 19세기 유럽의 경제사상 (Continued 4)
(f) 역사와 제도주의자(Institutionalists)
신고전 경제학 이론은 1900년 전후하여 영국과 프랑스의 학계를 휩쓸었으나, 독일의 역사학파는 이를 비판하였고, 독일에 유학했던 미국의 젊은 학자들이 독일의 영향을 받았다. 독일 역사학파는 경제학 원리의 보편적 타당성을 거부하였다. 그들은 경제학을 논리나 수학 대신에 사려 깊은 경험적 역사적 분석의 결과로 보았다. 그들 대부분은 산업혁명 기간에 사회개혁이나 보통사람들을 위한 개선된 생활여건에 관심을 가졌다. 영향력 있는 사회학자 맥스 웨버도 역사학파였으며, 역사학파에 영향을 받은 조셉 슘페터는 미국에 와서 교육과 저술로 제도 경제학에 영향을 주었다. 다음은 신고전 경제학을 비판한 미국 학자들이다.
토스타인 베블런(1857-1929)은 1884년 예일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1892년 시카고대학 정치경제학술지 편집부에서 일하였다. 그는 유한 계급론(1899)에서 신고전 경제학을 비판하였다. 인간은 생산수단으로 약탈하여 부와 사회적 지위를 얻고 유한계급이 세상에 출현하였다. 마셜의 수요 법칙은 일반적으로 적용되지만, 특정 재화의 경우 적용되지 않는다. 경영자의 관심은 이윤추구에 있어 기술자의 창조적 욕구를 경시한다고 하였다. 웨슬리 미첼(1874-1948)은 1899년 시카고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컬럼비아대학 교수로 봉직하며 정부 기관의 연구와 정책에 참여하였다. 그는 부의 배분(1893)에서 충분한 경제성장과 소득의 평등분배를 성취하기 위하여 한계효용의 경제학과 (법률학의 중요성을 인정하는) 독일 역사학파의 입장을 결합하려고 시도하였다. 그의 저술 자본주의의 법적 기초(1924)와 제도 경제학(1934)에서 경제적 집단 행위는 국가, 기업, 노동조합 등 모든 조직을 포함하여 분쟁 속에 상호주의적 이해를 포함하는 경제적 행위라고 주장하였다. 존 커먼즈(1862-1945)는 존스 홉킨스 대학에서 수학하고 1904년 시라큐스대학에서 가르쳤다. 그는 저술을 통하여 개인의 선호와 선택은 사회규범이나 제도에 영향을 받으며, 자원의 배분은 시장의 가격구조에 따르지 아니하고, 조직과 권력 구조에 의해 이루어지며, 제도적 환경변화는 경제행위의 결정요인을 변화시킨다고 주장하였다.
(g) 오스트리아 경제학파: 미제스와 하이에크
전술한 바와 같이, 오스트리아의 칼 멩거와 영국의 윌리엄 제본스는 상품의 가치는 소비자에게 주는 효용(Utility)으로 결정된다는 한계효용 가치이론을 비슷한 이름의 저술로 1871년 각각 독립적으로 출간하였다. 칼 멩거(1840-1921)는 상품의 가치는 완전히 주관적이고 소비자의 수요를 만족시키는 능력으로, 실제의 가치는 소비자가 최종적으로 원하는 최저의 한계효용(Marginal Utility)이라고 주장하였다. 이는 마르크스가 상품 가치는 상품제조에 사용된 노동 가치라는 주장과 상이하다. 프리드리히 폰 비제르(1851-1926)는 한계효용 이론을 기회비용(Opportunity Cost)—어느 한 가지를 선택함으로써 포기하는 것 중 가치가 가장 큰 것—개념으로 생산에 적용하였다. 소비의 한계효용과 생산의 기회비용은 현대 경제학에서도 그 개념이 광범위하게 사용되고 있다. 오이겐 폰 뵘-바베르크(1851-1914)는 3권으로 된 대표작 자본과 이자(1884, 1889, 1921)에서 수입이 생산요소에 어떻게 배분되는가는 정치적 문제가 아닌 경제적 문제이며, 가치와 가격에서 한계주의(Marginalism)를 분명히 하였다. 20세기에 미국과 영국에서 활동한 오스트리아학파의 두 경제학자를 아래에 소개한다.
루트비히 폰 미제스(1881-1973): 미제스는 오스트리아-헝가리의 렘베르크(현 우크라이나)의 유대인 귀족가정에 태어나 기본교육을 마치고 비엔나대학에서 1906년 법학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오스트리아 재무부에 취직하여, 제1차 세계대전 중 포병장교로 복무하면서 전쟁부 고문을 하였다. 그는 오스트리아 상무부의 경제수석과 오스트리아 황제 예정자 오토 폰 합스부르크의 경제고문이 되었다. 1934년 그는 스위스 제네바로 이주하여 국제대학원에서 가르치고, 1940년 록펠러재단의 후원을 받아 뉴욕으로 망명하여, 1945년 뉴욕대학의 방문교수로 시작하여 1969년에 퇴직하였다. 미제스는 화폐와 신용이론(1912), 사회주의(1922), 인간 행동론(1949) 등 대작을 출간하고, 전능한 정부(1944), 관료제(1944), 이론과 역사(1957), 경제학의 인식론적 문제(1960), 경제학의 궁극적 기초(1962) 등의 광범위한 창의적 저술을 남겼으며 명성 있는 많은 후학을 양성하였다.
프리드리히 에이 하이에크(1899-1992)는 비엔나 시정부 의사 가정에 태어나 기본교육을 마치고, 1917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육군에 입대하여 이탈리아 전선에 참전하였다. 비엔나대학에서 1921년에 법학박사, 1923년에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1919년 재학 중 그는 프리드리히 폰 비제르의 추천으로 루트비히 폰 미제스에 채용되어 오스트리아 정부를 위하여 생제르망조약의 법과 경제 전문가로서 일하였다. 1923-24년 하이에크는 뉴욕대학의 제레미아 젠크스 교수의 연구조교로 일하였다. 1920년대 후반에 미제스의 도움으로 사업주기연구소를 비엔나에 설립하였고, 1931년 런던경제대학에서 취직하여 빠르게 유명한 경제학자로 인정을 받았다. 1932년 하이에크는 정부의 소비계획보다 공공분야 민간투자가 부와 경제협력에 더 좋은 길이라고 하였으며, 영국의 금융 및 재정정책이 케인스 이론에 영합하는 것에 동의하지 않았다. 그는 1938년 영국 시민이 되었다.
하이에크는 파시즘이 사회주의에 대한 자본주의의 반응이라는 영국 학계의 견해를 우려하여, 노예의 길(1944)을 출간하였다. (1) 민주주의는 개인의 자유를 신장하고, 사회주의는 이를 제한한다. 마르크스주의를 통하여 자유와 평등을 성취할 가능성은 전혀 없다. (2) 사회주의는 사기업과 생산수단의 사유화를 철폐하고, 중앙 계획부서가 기업이윤을 관장하므로, 자본주의 경쟁은 부재하고 사회주의 계획만 있을 뿐이다. (3) 집단주의, 공산주의, 파시즘 등은 목적의 본성이 자유주의나 개인주의와 다른 전체주의이다. (4) 정부가 계획하는 전체주의의 통제 속에는 국가의 이름 아래에서 개인의 권리는 없고 개인의 의무만 있을 뿐이다. (5) 전체주의에서는 모든 경제활동을 지시하는 권한은 우리들의 생활을 통제할 뿐만 아니라 우리의 삶을 위한 제한된 자원의 분배를 통제한다. (6) 모든 재산권을 국가가 소유하면, 이를 통제하는 사람은 권력을 가진 특정 개인이다. (7) 국가가 안전을 보장하고 개인 자유를 보존하는 것은 양립할 수 없다. (8 ) 권력은 부패하고, 절대권력은 절대적으로 부패한다. 집단주의는 자유주의에 기초한 인도주의가 서식할 공간이 없으며, 그 사상의 비극은 집단주의적 선전이 올바른 결정을 하는 이성을 파괴한다는 것이다. (9) 보다 나은 세계를 건설하려면, 새롭게 출발하는 용기를 가져야 한다.
(h) 사회 문화적 진화
지금까지 정치철학과 경제사상을 시대마다 각각 한 연재 씩 다루었다. 문명이 발전하고 사상이 분화되어 19세기부터 사회 문화적 발전이 학문 영역에 영향을 주어 사회학의 발전을 가져왔다. 다음에서 오귀스트 콩트, 허버트 스펜서, 막스 베버의 사상을 요약한다.
오귀스트 콩트(1798-1857): 콩트는 프랑스 철학자이며 사회학의 창시자이다. 그는 충성스럽고 가톨릭 신앙을 가진 세무관리 가정에 태어났으나, 프랑스혁명 이후 공화주의와 회의주의가 사회를 휩쓸어, 어린 나이에 가톨릭 종교와 왕당주의를 버리고 자신의 갈등을 해소하였다. 1814년 파리 에콜 폴리테크니크에 입학하여 역사와 철학에 관해 광범위하게 독서를 하고, 프랑스 계몽주의 사상가들의 저술을 소화하였다. 그는 유토피아 사회주의자인 헨리 생시몽과 교류하였으나, 그가 이론보다 사회를 개선하려는 실질적 행동에 더 비중을 두어 1824년 결별하였다. 1825년 결혼 후 다음 해에 정신병으로 입원하였으나 완치하지 못하고 퇴원하여 계획대로 일하지 못하였으며, 1827년 자살을 시도하였고, 1842년 이혼하였다. 콩트는 이 기간에 실증적 철학 강의(1830-42)를 저술하였다. 콩트는 1846년 연인이 사망한 후 마음을 정리하고 실증적 정치체계(1851-54)를 발간하였으며, 이 외에 실증적 종교의 문답집(1852)과 주관적 합성(1856) 등을 저술하였다. 그의 대표작인 실증적 철학 강의를 다음에 간략히 요약한다.
사회학적 이론의 원칙: 자연현상의 법칙처럼, 사회학이란 학문을 자연법칙에 종속되는 하나의 과학으로 정립하려고 생각하였다. 사회는 서로 연관되는 유기체로서, 첫째 사회를 관찰하고, 둘째 과학적 방법을 사회학적 방법으로 실험을 대치하며, 셋째 비교와 역사적 분석을 통하여 인과관계를 지배하는 근본적이고 기초적인 법칙들을 발견하여 사회학 이론을 정립한다. 사회를 생물학적 유기체로 보고, 사회학적 구조를 질서의 개념(사회정학)과 진보의 개념(사회동학)으로 구분하였다. [사회정학] 사회의 전제조건은 질서이며, 인간의 전제조건은 조화에 있다. 사회의 진정한 구성요소는 사회유기체의 특성을 가진 가족으로, 가족은 개인의 이기심을 중화시키고 사회로 통합하는 기본적 구성단위이다. 사회가 발전할수록 사회의 기관들이 분화되고 전문화되지만, 유기체와 마찬가지로 통합을 유지할 것이다. 통합을 이루는 통로로, 하나는 통합을 유도하는 지배력과 권위의 집중이고, 다른 하나는 구성원 간의 보편적 합의이다. [사회동학]은 진보의 개념으로 문명의 발전을 단계적으로 계승하는 계승의 법칙을 찾아내는 것이다. 콩트는 3단계 계승의 법칙을 제시한다. (1) 신학적 단계: 모든 현상은 초자연적 힘을 가진 신에 의존한다. (2) 형이상학적 단계: 여러 현상은 본질이나 본성의 추상적 개념으로 설명된다 (합리주의적 개념). (3) 실증적 단계: 현상을 관찰하여 가설을 세우고 실험을 통해 가설을 검증한다 (경험주의적 개념). 콩트는 지식의 진보가 선행하여야 사회가 진보한다고 보았으며, 인구의 증가가 사회적 진보를 가져온다고 보았다.
허버트 스펜서(1820-1903)는 영국 더비에서 출생하여 기본교육은 부친으로부터 받고, 수학 물리학 등은 목사인 숙부에게서 배웠다. 스펜서는 대부분 지식을 좁은 범위의 독서와 친구나 지인과의 대화로 얻는 독학자였다. 그는 20세 전후 철도공으로 일하면서 지역 신문에 기고하였고, 자유무역을 옹호하는 이코노미스트의 부편집장을 지내면서, 방대한 저술을 하였다. 그는 다윈의 진화론에 영향을 받아 진화가 우주의 원리라고 생각하여 인간 사회에도 강한 사람만이 살 수 있다는 [생존경쟁 속의 적자생존] 이론을 전개하여 1870년대까지 유명한 사상가가 되었다.
스펜서 사상의 전반적인 방향은 스미스의 자유 방임과 벤담의 공리주의 연장선에 있었으나, 독창적인 진화사상을 발전시켜, 자신의 사상을 종합 철학(1896)이라 불렀다. 그의 [종합 철학]은 진화론에 입각한 자연법의 존재를 설명하고, 이들 자연법칙은 변경할 수 없는 진화로 유도된다고 하였다. 콩트가 과학적 방법의 단일화를 강조한 것과 대조적으로, 스펜서는 모든 자연법을 하나의 기본적 법인 진화의 법칙의 형태로 과학적 지식의 통일을 추구하였다. 스펜서는 사회적 정역학(1851)에서 사회적 진화는 증가하는 개별성의 과정을 반영하는 것이라 하였다. 인간 사회는 증가하는 분업의 수단에 의해 획일적인 유목집단에서 복잡한 문명으로 진화한다. 그의 기본적인 사회학적 분류는 (힘으로 협동이 보장되는) 군대 사회와 (자발적으로 협동하는) 산업사회 사이에 있다. 스펜서가 적용하는 진화는 생물학적 개념뿐만 아니라 사회학적 이론에도 적용하였다. 동물의 유기체와 인간 사회를 비교하여, 그는 규제 시스템, 유지 시스템, 분배 시스템을 발견하였다. 동물과 사회적 유기체 간의 가장 큰 차이는 동물에게는 전체에 대한 하나의 의식이 존재하지만, 개인이 자아의식을 가지는 사회는 그들 회원의 복지를 위하여 존재한다고 하였다. [개인주의]는 스펜서 저술의 핵심 개념이다. 산업사회에서 아무도 기획하지 않았지만, 당사자 모두의 필요에 적응하여 질서가 성취된다고 그는 믿었다. 그는 심리학 원리(1855)에서 인간의 심리조차도 자연법이 지배한다고 하였다.
막스 베버(1864-1920)는 독일 에르푸르트의 방직공장을 경영하는 부유한 가정에 태어나, 어려서부터 많은 독서를 하였다. 1882년 하이델베르크 대학에 입학하여 2년간 군에 복무하고 제대 후에 베를린대학으로 전학하였다. 1886년 변호사 시험에 합격하였고 1889년 베를린대학에서 법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894년 프라이부르크대학, 1896년 하이델베르크대학 교수에 임명되었다. 그는 1893-99년 범 독일리그에 가입하여 폴란드인의 유입반대 운동을 하였으며, 1903년 교수직을 사임하고 저술과 출판 활동에 전념하였다. 1918년 베버는 하이델베르크 노동자 군인 위원회에 가입하였고, 전후 파리평화회의에 독일파견단 그리고 바이마르 헌법을 초안하는 비밀위원회에 자문관으로 봉직하였다. 베버는 독일민주당의 국회의원으로 입후보하였으나 실패하였으며, 이 시기에 그는 비엔나대학과 뮌헨대학에서 강의하였다. 막스 베버는 카를 마르크스, 에밀 뒤르켐과 함께 근대 사회학의 태두로서 현대 사회과학 전반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1904-05): (1) 기본개념: 베버는 여러 종교를 연구하면서, 종교적 개념과 경제학과의 상호작용으로, 청교도 윤리와 개념이 자본주의 발달에 영향을 주었다고 보았다. 자본주의 정신은 형이상학적 정신이 아니라 열심히 일하고 발전하는 정신으로 가치의 한 묶음이다. 종교적 헌신은 부나 소유를 추구하는 세속적 업무를 거부하였으나, 자본주의 정신은 경제적 이득을 합리적으로 추구하는 것이다. (2) 신교도 노동윤리: 가톨릭교는 성례(세례와 성찬)를 받아들이고 성직 권위에 복종하는 개인에게 구원을 약속한다. 그러나 종교개혁은 이러한 보장을 제거하였다. 칼뱅교회는 처음부터 신은 한 사람에게는 구원을, 다른 한 사람에게는 저주를 선택한다는 예정 교리를 가르친다. 구원을 받을 사람은 절대적 의무가 있다. 확신의 부족은 불충분한 믿음으로 저주의 신호이다. 따라서 구원에 대한 확신은 신의 축복을 약속하는 신부의 자리에 오게 된다. 세속적 성공은 자기 확신의 한 방법이라고 베버는 믿었다.
(문명사 연재 24. 19세기 유럽의 경제사상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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