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명사 연재 11. 근세초기 유럽(1400-1715)의 정치와 종교 (Continued 3)
(d) 종교전쟁과 30년 전쟁
신성로마제국의 찰스 5세는 이탈리아에서 합스부르크-발루아 전쟁, 오토만 제국의 진출을 저지하기 위한 분투, 독일 제후들 간의 분쟁으로 인한 종교개혁의 3가지 분쟁에 동시 직면하였다. 찰스의 동생 페르디난드는 황제를 계승하였고, 찰스의 아들 필립 2세는 스페인을 계승하여 네덜란드와 이탈리아를 지ㅡ배하였다. 1559 년 프랑스와 스페인은 전쟁을 종식한 후, 스페인은 이탈리아를 150년간 통치하였다. 필립 2세는 국력의 절정을 이루어 스페인 황금시대를 열었으나, 네덜란드의 독립과 포르투갈의 병합 등으로 여러 차례의 국가 부도에 직면하였다. 프랑스는 헨리 2세 사후에 그의 세 아들이 비효율적으로 통치하여, 가톨릭과 신교 간 종교전쟁으로 많은 휴그노가 희생되었다. 헨리 4세는 1589년 낭트칙령을 선포하여 모든 종교의 공존을 허용하였다. 영국은 헨리 8세 사후 에드워드 6세가 6년간, 매리 1세가 5년간 재임하고, 엘리자베스 1세가 44년간 통치하면서, 1588년 스페인 함대를 침몰시켰고, 프랑스와 스페인을 약화하려고 휴그노와 카뱅 교도를 도왔다. 유럽은 버번-합스부르크 갈등으로 30년 전쟁을 하였고, 1648년 웨스트팔리아 조약으로 국제관계에서 질서를 정립하였다.
영국 엘리자베스 (1558-1603): 종교-신교: 16세기에 신교는 미래를 위해 싸우는 새로운 이념에 불타는 정열을 가지고 있었다. 엘리자베스는 개신교 신앙으로, 최초 의회는 1559년 동일성의 법령 (Act of Uniformity) 을 공표하여, 모든 영국인은 일요일에는 성공회에 출석 하고, 모든 다른 종교의식을 철폐하였다. 최고의 법령 (Act of Supremacy) 은 영국 여왕이 최고의 통치자로서 종교적 통치권을 가졌으며, 고위 성직자나 공직자에게 선서를 요구하고, 교황의 권위에 대한 어떠한 방어도 종신형에 처하였다. 영국의 청교도(Puritans)는 매리 1세 때 망명하여 귀환한 세력으로, 1569년 케임브리지 신학 교수 토마스 카트라이트는 장로교조직과 성공회 조직이 다르다고 성공회를 비판하였다. 그는 해고된 후 스위스에 가서 장로교 신학에 심취하고 영국으로 돌아와, 1572년 장로교 최초 교회를 세워 청교도가 번창하였다. 이때 청교도는 런던의 신교와 의회의 주류가 되었다. 청교도 운동에 위협을 느낀 엘리자베스는 그들의 출판과 교회 활동을 억제하고, 의회에서 정치적으로 청교도 세력의 주장을 억제하였다.
영국과 아일랜드: 엘리자베스는 가톨릭인 아일랜드가 신교 영국에 위협이라고 생각하여, 섬 전역에 신교를 완전히 시행하도록 명하였다. 1565년 여왕은 헨리 시드니를 왕실 대리인으로 임명하여 레인스터의 게일 세력과 울스터의 스코트 세력을 파괴하려 하였다. 시드니가 문스터에 영국 정착촌을 형성하여 식민지화하려 하자, 데스몬드 공작 피처랄드 장군이 반란을 일으켜, 1579년 소수의 이탈리아 및 아일랜드 상륙군과 합세하였다. 영국은 그레이 경 지휘하에 함대를 파견하여, 600명의 아일랜드-스페인군의 방어 요새를 공략하여 함락하였고, 문스터 반란을 평정하는 데 4년이 걸렸다. 문스터의 토지를 몰수하여 1585년부터 영국 정착자들에게 분배하고, 여왕은 터로우 오네일을 타이론 공작에 새로 임명하였다. 그는 로마, 스페인, 아일랜드 적대세력과 접촉하여, 1595년 반란에 합세하고 영국 수비대에 적대하였다. 영국은 스페인의 위협을 우려하여 제한된 병력을 파견하여 결국 타이론이 승리하고, 영국 정착자들은 주거지로부터 철수하였다. 여왕 은 1600년 마운트조이의 남작 찰스 불로운트를 아일랜드에 보내 그들을 격퇴했으며, 반란군은 1603년 항복하였다.
호킨스와 드레이크: 존 호킨스 (1532-95) 는 영국의 항해사로서 민간무장선으로 대서양 노예무역에 가담하였다. 그는 1562년 세 함선으로 아프리카에서 노예 300명을 잡아서 서인도 섬에 가서 설탕, 양념, 약초 등과 교환하여 영국으로 돌아왔다. 그는 제2 투기로 투자자를 모았고, 여왕의 배 한 척을 지원받았다. 그는 네 함선으로 아프리카로 항해하여 400명의 노예를 잡아 서인도 섬에 팔고 영국에 돌아와 여왕에게 투자이익 60%를 바쳤다. 1567년 그는 여왕에게 배 한 척을 빌려 다른 4척과 함께 출항하여 같은 방법으로 거래하고 거액의 물건을 싣고 귀환 중, 멕시코 해안에서 스페인 함대에 붙잡혀 모두 손실되고, 1569년 어렵게 귀환하였다. 프랜시스 드레이크(1540-96)는 본 항해 생존자로 복수를 결심하고, 파나마 해안에서 스페인의 은 수송선을 나포하여 영국으로 돌아왔다. 여왕은 1577년 아메리카의 태평양 해안에서 스페인에 대항하는 탐험을 시작하려고 드레이크를 보냈다. 그는 5개 함선에 164명이 분승하고 1577년 플리머스를 출항하여 마젤란 해협에서 폭풍으로 흩어졌고, 드레이크 배는 샌프란시스코까지 북상하여 필리핀, 몰루카, 자바, 인도양을 거쳐 1580년 귀환하였다. 그는 60만 파운드의 전리품 중 27.5만 파운드를 여왕에게 바쳤다.
영국-스페인 전쟁 (1585-1603): 1568년 스페인 함선 수 척이 15만 파운드를 싣고 네덜란드로 항해 중, 영국의 민간무장선이 습격하여 영국으로 끌고 왔다. 이로 인해 네덜란드의 알바 공작이 영국인을 체포하고 화물을 압류하자, 엘리자베스는 스페인 국적자를 체포하였다. 영국은 계속 스페인 함대를 습격하였고, 필립의 여왕 암살 음모에 관련자들을 투옥하였다. 1584년 엘리자베스는 스페인 대사를 축출하고, 네덜란드 독립을 지원하였다. 1585년 드레이크는 30척의 함대로 대서양을 횡단하여 산토도밍고를 습격하고 뇌물로 30,000파운드를 받고 플로리다의 오거스틴을 약탈 방화하고 1586년 돌아왔다. 영국이 스코틀랜드 여왕 메리를 처형한 보복으로, 스페인이 영국침공을 계획하는 동안, 드레이크는 카디즈 항에 정박 중인 스페인 전함 37척을 불태우고, 스페인의 침공계획을 지연시켰다. 스페인은 시도니아 공작 지휘하에 함선 130척, 항해 요원 8,050명, 전투병력 19,000명으로 무적함대를 편성하고 1588년 5월 출항하였다. 영국의 드레이크는 하워드 휘하에 전함 82척의 부제독으로 플리머스에서 스페인 함대를 기다렸다. 무적함대가 북상하여 칼라이스에 정박하자, 영국해군은 함포사격으로 스페인 함대를 해상으로 유인하여, 다수의 함대를 괴멸시켰다. 스페인 제독은 철수를 명하였고, 잔여 선은 (선박 조종술이 부족하여) 바람에 밀려 북상하여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 해안을 따라 퇴각하였다. 이들은 해안에서 아무런 지원 없이 10,000명의 병력이 54척에 분승하여 많은 부상자를 싣고 패퇴하여 스페인에 도착하였다.
스코틀랜드: 메리 스튜어트(1542-67)는 스코틀랜드 제임스 5세의 딸로, 출생 시 부친이 전사하여 여왕이 되었다. 1558년 프랑스의 프란시스 2세와 결혼하였으나 1560년 그가 사망하여 스코틀랜드로 돌아왔다. 메리는 1565년 사촌인 단리와 재혼하여 1566년 제임스 1세를 출산하고, 단리는 곧 살해되었다. 그녀는 사촌 엘리자베스에게 보호를 받으려고 1568년 영국으로 왔다. 그러나 메리가 이전에 영국의 왕위계승을 요구하였고, 그녀의 가톨릭 종교를 우려하여 주거를 여러 성곽에 제한하였고, 여왕을 암살하려는 음모가 적발되어 1587년 처형되었다. 모친인 메리를 계승하여 1567년부터 스코틀랜드 왕이 된 제임스 4세는 엘리자베스 사후에 제임스 1세(1603-25)로 왕위를 계승하였다. 그는 엘리자베스 문학과 연극의 황금시대를 열었고, 성경을 완역하여 킹 제임스 판 영어 성경을 출간하였다.
스페인 필립 2세는 신성로마제국의 찰스 5세와 포르투갈의 이사벨라(카스틸의 이사벨라와 아라곤의 페르디난드의 손녀) 사이에 태어나 스페인 왕위를 계승하고 4회 혼인하였다. 그가 제국의 황제가 되자, 합스부르크 가는 그의 숙부 페르디난드 1세가 계승하였다. 필립은 부왕이 남겨준 거액의 부채와 자신의 원정으로 전비가 증가하여 부채가 누적되었고, 자신의 재임 중 6회 이상 국가파산에 직면하였다. 정치와 군사: 필립은 스페인, 네덜란드, 이탈리아, 아메리카 신세계를 가톨릭 종교와 종교 재판을 통하여 통치하였다. 1559년 프랑스는 영국과 평화조약을 체결하여 이탈리아반도 대부분을 지배하였다. 터키가 지중해에서 스페인을 위협하여, 필립은 함선 28척과 병력 10,000명을 희생하여 1560년 트리폴리를 정복하였다. 그라나다의 무어인들은 기독교의 억압으로 폭동을 일으켜, 1568년에 오스트리아의 돈 후안이 25,000의 병력으로 출동하여 제압하였고, 필립은 카스틸에 산재한 무어인 50,000명을 축출하였다. 사이프러스에 터키의 위협이 증가하여, 스페인은 1571년 베네치아-로마와 신성동맹으로, 레판토해전에서 터키 전함 230척을 침몰시켰으나, 터키는 1년 이내에 대등한 해군을 재건하였다. 또한, 필립은 포르투갈을 병합하여 1580-1640 기간 통치하였다. 그는 페루와 멕시코로부터 채굴한 금은괴의 안전한 수송을 위하여 아메리카 해상 수송로 확보에 중점을 두었다.
저지대 국가: 필립 2세가 저지대 국가의 개신교도들을 탄압하여, 1566년 칼뱅주의자들의 반스페인 폭동이 일어났다. 그는 알바 휘하에 10,000명의 병력을 네덜란드에 보내, 가톨릭 종교를 보호하고. 무역을 증진하며, 전략적 목적을 달성하려 하였다. 1572년 신교도 군대는 북부지방에서 세력을 형성하고 윌리엄을 지도자로 선출하여 제2폭동을 일으켰다. 알바는 오스트리아의 돈 후안으로 대치되었다. 1575년의 스페인 국가 부도는 사회 무질서를 촉진 시켰고 군대는 앤트워프를 포위하여 살인 약탈하였다. 1577년 북부 주의 지도자들은 돈 후안과 협상하여, 영구 칙령을 공표하고 군대는 철수하였다. 1579년 남부 주는 가톨릭 동맹을 결성하여 스페인의 지배를 받아들였다. 1585년 스페인 군대는 브뤼셀과 앤트워프에서 질서를 회복하고, 주요 도시에서도 스페인의 지배를 회복하였다. 영국의 해적 행위에 대한 스페인의 보복으로 1588년 전쟁이 발발하여 스페인 함대는 패퇴하였다. 1595 년 플랑드르 군대와 여타 스페인군이 프랑스를 침공하여, 헨리 4세는 스페인과 전쟁을 선포하고, 영국과 네덜란드는 프랑스와 동맹하였으며, 1596년 스페인의 파산으로 인하여 평화조약이 체결되었다.
프랑스와 스페인: 스페인은 이탈리아 전쟁에 승리하여 이탈리아반도와 프랑슈콩테를 지배하였다. 스페인 해군은 포르투갈 계승전쟁의 폰타 델가다 해전에서 1582년 영불 연합함대에 승리하여 아조레스 군도를 취득하였다. 필립은 프랑스 종교전쟁에서 신교 국에 대항하여 가톨릭 동맹을 재정지원 하였다. 1593년 헨리 4세는 가톨릭으로 개종하였고, 1995년 스페인에 전쟁을 선포하여, 다음 해 봄에 칼라이스를 함락하였다. 1597년 스페인이 아미엔스를 탈취하자, 프랑스는 이를 탈환하여 협상을 시작하고, 1598년 평화협정을 체결하였다. 헨리는 낭트칙령을 선포하였다.
프랑스의 종교전쟁(1562-1629): 갈리카니즘은 프랑스 교회를 통치하는 왕과 교황과의 관계를 정의한다. 갈리카니즘과 앙그리칸니즘은 프랑스와 영국에서 왕실의 권력 성장과 같은 선상에 있었다. 17세기에 “프랑스에는 전제 군주국가 체제가 확립되었고 지방교회가 정돈되면서 정치적으로 교황의 간섭을 배제하려는 정치적 국수주의가 발생하고, 지방교회의 일은 지방 주교와 지방교회에 맡기라는 주장이 대두하였다.” 프랜시스와 그의 아들 헨리 2세는 그들의 클라이언트, 일가친척, 정치적 동지들을 교구 직위에 다수를 임명하였다. 이를테면 프랜시스는 129명의 주교 중 102명을 포함하였고, 헨리의 임명 가운데 1/4은 부재자로 종교적이라기보다 정치적 임명이었다. 생제르맹 칙령(1562): 1560-70년에 프랑스는 1,200 개신교회에 신도 1.8백만으로 인구의 10%였다. 그들의 칼뱅주의는 교리부패와 성직 남용에 반대할 뿐만 아니라, 비참함과 불평등에 저항하는 하층계급의 반란이었다. 중산층은 칼뱅주의가 매력적이었으며, 1560년 휴그노의 85% 가 상공인과 교육받은 전문가였으며, 농부나 노동자는 5% 이하였다. 발루아 왕들은 신교도를 처형하고 신교주의를 금지하였다. 1562년 찰스 9세의 섭정 캐서린은 생제르맹 칙령을 선포하여, 내전을 피하고 휴그노 정착을 제한적으로 인정하여, 공개적으로 평화롭게 만날 수가 있었다.
초기 종교전쟁(1562-70): 파리의 의회는 상기 칙령의 등록을 거부하였으나, 1562년 3월 법으로 등록이 되었다. 기즈 공작의 병력이 바시에서 예배하는 비무장 신교도를 만나 발포로 시작하여 대량학살이 발생하여, 프랑스 신교는 올린스에서 전국 회의를 열고, 콘데 왕자가 자신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군사를 일으킬 것을 요청하였다. 콘데는 기즈와 그 지원자에 대항하여 신교도들이 군사를 일으킬 것을 선언하였다. 올린스 시를 신교도 작전기지로 점령하고, 콘데와 다른 귀족들은 왕국의 수로, 교량, 육로를 점령하는 전략을 수립하였다. 캐서린은 다른 선택이 없이 휴그노 반란을 진압하는 전쟁을 지원하였다. 3/4의 가톨릭 지도자들은 전사하였으나, 남부 신교 공동체는 피해가 없었다. 캐서린은 1563년 캠브로이스 칙령으로 내전을 종식하였으나, 유사한 작전은 지속하였다.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의 학살은 캐서린 데 메디시가 음모하고 귀족들과 시민들이 수행한 비극이다. 1572년 캐서린 딸 마가렛이 휴그노인 나바레의 헨리와 혼인하는 날, 다수 휴그노 귀족들이 파리의 결혼식에 참가하였다. 8월 24일 새벽, 콜리니 제독 암살로 시작하여 파리 지역에서 휴그노 5,000-30,000명을 학살하였고, 지방에서도 학살이 10월 초까지 지속하였다. 이 학살이 프랑스 종교전쟁의 전환점이 되었다. 동맹의 위기와 헨리 3세: 찰스 9세가 병사하고 동생인 헨리 3세(1574-89)가 계승하였다. 휴그노는 세력을 강화하였고, 가톨릭은 1576년 신성동맹을 결성하였다. 프랑스 의회는 왕이 휴그노에 대해 전쟁을 수행하도록 압박하였고, 1585년 가톨릭 동맹과 헨리 3세간에 레모우어스 동맹을 체결하여 구 종교전쟁을 새롭게 하였다. 헨리 3세 상속은 신교도로서 사촌인 나바레의 헨리와 가톨릭 동맹의 기즈 공작인 헨리가 유력하였다. 1588년 12월 헨리 3세는 기즈 공작을 왕실로 초대하여 경호 인력이 그를 살해케 하고, 동맹지도자들을 투옥하였다. 1589년 8월 한 도미니칸 수도사가 헨리 3세를 암살하여, 나발에의 헨리 왕이 헨리 4세로서 프랑스 왕이 되었다.
헨리 4세와 낭트칙령: 헨리 4세(1589-1610)는 신교의 신앙으로 양육되어 1572년에 나바레 왕을 계승하였고, 루이 9세의 직계로 부르봉 가의 수장이며 최초 프랑스 왕이 되었다. 그는 4년 후에 실용적 정치인으로 가톨릭교로 개종하였고, 1598년 낭트칙령을 선포하여 신교도에게 종교적 자유를 허용하여 프랑스 종교전쟁을 종식하였다. 그는 가톨릭의 한 광신자에 의하여 암살되었고, 그의 아들 루이 8세가 계승하였다. 왕위계승 과정에서 스페인은 가톨릭 동맹으로 그를 방해하였다. 그는 오토만 제국과 동맹의 정책을 견지하여, 1604년 헨리 4세와 오토만의 아메트 1세는 평화조약과 협정에 서명하여, 프랑스는 오토만 제국 내에서 경제적 이득을 가져왔다. 1604-09 기간에 아시아와 무역에서 영국 모형을 따라 프랑스 동인도 회사를 수립 시도하고, 1610년 독일과 전쟁을 준비하던 중에 사망하였다.
30년 전쟁 (1618-48) 은 유럽에서 로마 가톨릭교회의 국가들과 개신교를 지지하는 국가 간에 벌어진 종교전쟁으로, 전쟁은 독일에서 일어났지만, 주로 프랑스와 스페인 및 신성로마제국 사이에 유럽 패권을 위해 싸운 전쟁이다. 독일에 가톨릭 세력이 상승하자, 신교제후들은 1608년 신교연합을 결성하고, 가톨릭 통치자들은 1609년 가톨릭 동맹을 결성하였다. 아우크스부르크 평화조약에도 불구하고, 루터란 과 가톨릭이 제후국을 통제하려고 하므로, 독일에서 종교는 불화가 되었다. 이 조약은 칼뱅 신도의 권리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팔레티네이트 선제후 프레데릭 4세는 1608년 화란-영국-프랑스가 지원하는 신교연합의 지도자가 되었고, 바바리아의 막시밀리안 공작은 1609년 스페인과 신성로마제국에 의해 지원되는 가톨릭 동맹을 결성하여, 독일은 가톨릭과 개신교의 2 캠프로 나누어졌다.
보헤미아 단계 (1618-25): 1617년 보헤미아 의회는 페르디난드 2세를 왕으로 받았으나, 칼뱅주의 귀족들은 팔레티네이트 신교 통치자인 프레데릭 5세로 대치하였다. 한편 페르디난드 2세는 바바리아왕 맥시밀리안의 지원으로 신성로마제국 황제로 선출되었다. 페르디난드는 1620년 프라하 교외의 한 전투에서 프레데릭을 이겼고, 스페인은 1622년 팔레티네이트를 정복하였다. 프레데릭은 보헤미아와 팔레티네이트 두 왕관을 잃고 네덜란드로 망명하였다. 스페인은 팔레티네이트의 서부를 취하고, 바바리아는 나머지를 취하였다. 페르디난드 2세는 보헤미아를 합스부르크에 병합하고, 신교도 토지를 몰수하고 가톨릭국가를 세워, 약 30,000명이 작센과 헝가리로 이주하였다. 덴마크 단계: (1625-29): 크리스천 4세 (1588-1648) 는 덴마크 왕으로 루터 신교를 신봉하였다. 그는 신교지원과 영토확장의 야심으로, 20,000 용병과 15,000 자국 및 영국의 병력으로 독일 북부로 진격하였다. 페르디난드 2세는 보헤미아의 왈렌스타인이 30,000-100,000 병력으로 북진하여 함부르크, 루벡, 브레멘 등 주요 도시를 점령하였고, 덴마크군은 완전히 패퇴하여 전쟁 개입을 종료하였고, 발트해에서 덴마크의 우위도 상실하였다. 프레데릭 2세는 전승으로 위상이 높아지고 1629년 배상 칙령을 공포하여, 칼뱅주의 예배를 금지하고, 지난 75년간 신교제후에 의해 빼앗긴 모든 재산을 가톨릭교회로 환원시켰다. 동년 루벡 조약에서, 덴마크는 독일의 신교를 지원하지 않는 조건으로 영토를 회복하였다.
스웨덴 단계 (1630-35): 스웨덴 왕 구스타부스 아돌푸스(1611-32)는 국가를 부흥시켜 발트해에서 경제적 영향력을 갖게 되었다. 프랑스는 세력이 강화된 합스부르크 독일에 불안하여, 스웨덴을 재정 지원하여, 군사적 천재인 구스타부스는 북부 독일에 훈련되고 무장된 군대를 출현시켰다. 그는 발트해가 스웨덴 바다가 되기를 원하여, 북부 독일에서 합스부르크를 보고 싶지 않았다. 또한, 그는 독실한 루터교 신자로서 독일의 신교를 돕고 싶었다. 구스타부스 군대는 북부 독일에서 제국군대를 쓸어버리고 독일의 심장부로 진격하였다. 페르디난드 2세는 왈렌스타인에게 제국의 지휘권을 주어 라이프치히 부근에서 스웨덴군과 전투하였으나(1632), 대패하였다. 왈렌스타인이 부하에게 암살되고, 제국군대는 1634년 말 스웨덴군을 남부 독일로부터 격퇴하여, 가톨릭교회를 유지하였다. 제국 황제는 이 기회에 평화를 유지하기 위하여 1629 배상 칙령을 철회하였다. 프랑스-스웨덴 단계 (1635-48): 전쟁에서 정치 권력이 역동적으로 되면서 종교적 이슈는 의미를 상실하였다. 프랑스 루이 13세는 리슐리외 추기경의 지도력으로 전쟁에 진입하였다. 가톨릭 프랑스가 가톨릭 합스부르크 (독일과 스페인)에 대항하여 개신교 스웨덴을 지원하고; 스웨덴은 북부 독일에서, 프랑스는 네덜란드와 라인강을 따라 독일 서부에서 전쟁하였다. 1643년 로크로이 전투에서 프랑스는 스페인에 결정적 승리를 하였고, 남부 독일로 기동하여 제국의 바바리아군에 대승하였다. 모두가 전쟁에 지쳐서, 5년간의 협상 끝에 웨스트팔리아 평화조약(1848)에 서명하고, 스페인과 프랑스는 전쟁을 계속하여 1659년 피레니 평화에 서명하였다. 스페인은 2등 국가로 추락하고, 프랑스는 지배세력이 되었다.
웨스트팔리아 조약: (1) 종교의 자유: 모든 독일 제후국들이 가톨릭교, 루터교, 칼뱅교에 대등한 종교의 자유를 허용하고, 최소한 개별적 예배, 양심의 자유, 이주의 자유를 포함하였다. (2) 영토의 변동: 프랑스는 서부 독일, 알사스 일부와 3개 도시를 얻어 불독 국경 지역을 통제하고, 미래 군사작전에 유리한 기지를 획득하였다. 스웨덴은 서 포메라니아, 브레넨, 베르덴을 취득하였다. 오스트리아는 영토를 상실하지 않았으나, 300이 넘는 제후국들은 사실상 독립국으로 인정되어, 제국의 지배력은 많이 감소하였다. (3) 정치와 종교는 완전히 분리되었다. 교황은 조약의 모든 결정에서 완전히 배제되었고, 종교가 기본적으로 개인의 신념과 선택이 됨으로서, 정치적 동기가 외교정책을 좌우하였다. (4) 경제 사회적 영향: 전쟁으로 독일 경제가 파멸되고 인구가 1600-50 기간에 2,100만에서 1300만으로 감소하였다는 이론에 동의하지 않는 견해도 있다. 어떤 지역은 완전히 파괴되었고, 다른 지역은 무사하여 경제가 성장하였으나, 전쟁은 대부분 파괴적이었다. (5) 세력 균형: 본 조약에서 국가는 유럽질서의 건설 블록이 되어 국가 주권의 개념이 수립되었다. 웨스트팔리아는 국가 간 합의된 규칙과 제한에 기초하여, 국제질서를 제도화하는 최초 시도로 세력균형과 국가이익의 개념이 국제관계에서 희미하게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군사과학은 1560~1650년 기간에 혁명적인 발전을 하였다. 근세 초기 유럽의 전쟁은 5분야(화력의 새로운 사용, 요새화의 새로운 형태, 군대 규모의 증가, 직업주의의 발전, 새로운 전술)로 발전하였다. 소총은 1550년대 이탈리아 전쟁에서 스페인군에 소개되었다. 그 후 전투력을 극대화하기 위하여 네덜란드에서 정확성과 연발 사격 기술을 발전시켰다. 네덜란드의 모리스는 1616년 최초의 육군사관학교를 설립하여 청년들에게 전쟁기술을 교육하고, 화란의 실제에 기초하여 전쟁 교범을 발행하였다. 스웨덴의 아돌푸스는 징병제도에 의해 상비군을 발전시켰고, 그의 보병여단은 동수의 소총수와 창병으로 편성하였다. 그는 공격 전술의 발전과 함께 소총수의 재장전 속도를 증진하였고, 기병 운용의 유연성과 함께 야전 포병의 화력을 향상하였다. 화포는 3개의 구경으로 분류하여 탄약은 즉각 장전하도록 준비하였다. 포병 화력의 향상은 진지설계를 변형하였고, 군대 규모를 증가시켰다. 1630년대 유럽 주요국가는 상비군 150,000명을 유지하였다. 군대의 규모가 커지고 전쟁 기간이 장기화하여 비용증가로 인해 세금부담이 증가하였다. 무기와 장비의 개선, 전략 전술의 발전과 함께, 융통성과 기동성을 가진 잘 훈련되고 규율된 군대를 준비하는 것이 전승 비결이었다.
위기와 내전: 경제 사회적 위기: 15~16세기에 유럽은 르네상스, 종교개혁, 그리고 지리상의 발견을 통하여 많은 변화를 체험하였다. 인구의 증가로 의식주 수요가 증대하면서 농업, 공업, 상업이 급속히 발전하였다. 특히 신대륙의 발견과 동서 무역의 증가는 경제발전과 성장을 촉진하였다. 그러나 17세기에 기후의 변화로 비정상적인 습한 여름과 추운 겨울로, 흉년, 기근, 질병이 만연하였고, 정치 혼란과 종교전쟁은 인명과 물자의 손실을 가져왔고, 인구감소와 경제불황은 사회문제를 일으켰다. 아메리카로부터 유입되는 고가의 금속은, 1500~1600년 사이에 유럽에 들어온 동일 양의 은은 평균 구매력이 1/5로 감소하여, 물가인상으로 노동자들의 실질소득이 감소하고 생활 수준이 크게 저하되었다. 반면 토지 귀족은 임대료를 인상하여, 자본가와 노동자 사이에 빈부격차가 심화하여 계층 간에 사회적 갈등을 증가시켰다. 증폭된 불만과 분노는 일상에서 법을 위반하는 사람이 늘어나, 유럽 각국에서 반란과 내전으로 확산하였다.
반란과 내전: 30년 전쟁 이후 일련의 반란과 내전이 유럽 국가의 내부 질서를 파괴하였다. 귀족은 군왕의 중앙집권에 저항하였고, 평민은 고율의 세금과 토지 귀족이 주는 고난으로 분개하였다. 농부나 하층계급 반란은 1590~1650년 사이에 유럽 여러 나라에서 일어났다. [휴그노 반란, 1620-28] 헨리 4세의 암살 이후 루이 8세 섭정 캐서린의 신교탄압에 저항하여, 휴그노 들이 자신 들을 방어하고, 독립적 정치 군사 조직을 편성하고 외교 관계를 수립할 목적으로, 주로 남서부 프랑스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반란은 1620-22, 1625, 1627-28 등 3 기간에 일어나 모두 진압되어 휴그노는 정치세력을 잃고, 루이 14세는 1685년 낭트 칙령을 폐기하여 종교의 자유를 박탈하고, 절대왕정의 권력을 강화하였다.
마녀재판과 문화적 변화: “마녀는 본래 사악하지 않았다. 그들은 공동체 내에서 출산이나 질병 치료 같은 의료 기능을 담당하거나 점을 치고 묘약을 만드는 주술적 기능을 수행한 집단이었다. 인간 한계를 초월하는 능력을 지닌 신비로운 존재”로 여겨졌다. 그러나 1487년 도미니크 교단의 두 수도승은 “타락하고 부패한 교회를 질타 하기 위해 예수와 대립한 존재로 마녀를 만들어냈다.” 마녀사냥은 16~17세기에 영국, 스위스, 독일, 프랑스, 네덜랜드, 뉴 잉글랜드에서 나타났으며, 이 기간에 7500명의 마녀가 재판을 받았고 대부분이 가난한 무산 하층계급의 50세가 넘는 독신이나 미망인이었다. 자선의 수혜자는 사회의 짐이 되었고, 재산을 가진 사람은 빈자의 수가 증가하는 것이 두려워, 마녀를 처형하여 위험이 되는 사회의 오염을 청소하려 하였으며, 이는 정치적 수단이 되기도 하였다. 이들의 처형은 1700년부터 감소하여 점차 사라졌다.
TO BE CONTINUED
(e) 국가의 건설: 절대왕정과 공화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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