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명사 연재 11. 근세초기 유럽(1400-1715)의 정치와 종교
근세초기 문예부흥은, 이탈리아 도시들에서 엘리트 운동이 유럽 전역에 전파되어, 인간 내면을 탐구하는 인본주의의 발현이다. 국가 권력이 강화되고 교황권위가 약해지며, 교회가 타락하고 교황이 면죄부를 판매하면서 종교개혁이 진행되었다. 스페인은 대서양을 횡단하여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하고, 포르투갈은 남아프리카 희망봉을 돌아 인도양을 건너 칼카타에 도착하였다. 이로 인하여 유럽은 이들과 무역하고, 영국과 프랑스는 아메리카와 아시아에서 주요 경쟁국이 되었다. 한편 유럽은 봉건제도가 몰락하고 경제적 국가주의가 지배하는 중상주의로 무역흑자를 추구하였다. 또한, 16세기부터 과학의 발전과 함께 정치철학과 경제사상은 전통적 서구 문명의 질서를 뒤흔들어 놓았다. 본 연재는 (a) 문예부흥 (b) 종교개혁 (c) 지리상의 발견 (d) 종교전쟁 (e) 국가의 건설 순으로 논의한다.
(a) 문예부흥의 시대: 회복과 재생
14세기 유럽은 흑사병, 정치적 무질서, 종교적 분파, 경제적 불황으로 비참하였다. 인간들은 신의 이름으로 쓰인 성경을 위한 도구였고, 자아에 관해 생각하는 시간과 공간이 없이 1,000년 동안 살아왔다. 그들은 신과 함께 또는 신이 없이 자신에 관해 생각하는 여가가 필요하였다. 성장하는 자아의식은 인간사회에서 자신의 역할과 책임을 이해하고, 지적 활동을 통하여 인간의 존엄과 자기실현의 이념을 추구하였다. 문예부흥은 중세에 잃어버린 자아발견과 자기실현의 정신이며, 예술과 문학 활동을 통하여 인간의 존엄성을 표현하는 인문주의와 개인주의 정신에 있었다. 그들은 고대 문학, 예술, 이념의 재생을 통하여 고대 그리스와 로마 문명을 회복하고, 고대와 현재 그리고 철학 (이성)과 신학(신앙)이 화합하기를 원하였다. 문예 부흥은 이탈리아의 부유한 도시국가에서 엘리트 운동으로 시작하여 1350-1550 기간에 유럽 전역에 널리 퍼졌다. 문예 부흥의 원동력은 자아의식의 발현에 있었으나, 이탈리아 도시들이 모직산업으로 번창하고, 메디치가 금융산업에 성공하여, 크게 후원을 하였기에 가능하였다.
이탈리아반도: 피렌체(Florence): 양털산업이 발전하여 상인 계급이 토지 귀족을 누르고 1293년에 공화국을 수립하였다. 1343년에 인구 91,500명으로 200여 공장에서 30,000명이 일하였고 토스카나, 피사, 리보르노를 정복하여 상품은 제노아 상인이 피사를 경유 수출하였다. 1378년 노동자계급의 반란으로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하였고, 1382년 상공업자가 세력을 잡아 과두정치체제를 확립하고 도시위원회들을 구성하여 통치하였다. 코시모 데 메디치(1389-1464)가 금융업, 제조업, 무역업으로 성공하여, 민주주의 체제의 도시에 재력으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그는 교회를 짓고, 전쟁위원회의 위원으로 정부에 전쟁비용을 대출하고, 문학 철학 예술 등에 많은 관심을 가졌다. 그의 손자 로렌초 데 메디치 (1469-92)는 공화국의 통치자로, 피사 대학과 플라톤학원을 복원 확장하고, 학문과 예술을 후원하여 피렌체 르네상스의 절정기를 이루었다.
인문주의자들(Humanists)은 종교로부터 철학을 지향하여 고대 그리스-로마의 문학과 예술을 탐구하였다. 부유한 이탈리아 도시는 귀족의 기사도나 성직자의 스콜라 문화와 달리, 인간의 존엄과 자기실현의 이상을 구현하는 지적 예술적 영역에서 개인주의와 세속주의가 성숙하였다. 인문주의자들은 기독교 교리와 그리스 철학을 조화시키려 하였고, 플라톤의 대화편이 신약성경과 대등하였다. 새로운 인문주의 문화는 교육에서 문법, 수사학, 시문학, 역사, 도덕철학을 포함하였다. 피렌체가 새로운 문화의 중심이 되면서, 상층계급의 가정은 자녀들이 공화국 지배계급에 합류하기 위하여, 상업적 도제보다 인문주의 교육을 선호하였다. 페트라르카의 서정시와 보카치오의 데카메론은 문예 부흥을 선도하는 작품이었고, 그들 사후에 살루타티, 니콜리, 브루니, 발라 등이 문예 부흥에 이바지하였다. 지롤라모 사보나롤라(1452-98)는 도미니칸 교단의 설교자로서 통치자인 로렌초 데 메디치를 공격하고, 교회와 교황의 타락을 비판하였다. 프랑스의 찰스 8세가 1494년에 이탈리아를 침공하여 메디치를 축출하자, 사보나롤라는 공화정을 수립하여 민주정치를 도입하고 종교개혁을 실현하는 법을 제정하였다. 그는 교황의 설교 금지에 불응하여, 교회 법정에서 유죄판결을 받고 1498년에 화형을 당하였다. 마키아벨리는 1498-52 사이에 외교 군사를 담당하였으나, 스페인 침공으로 인해 공화정이 무너지고, 메디치가 통치권을 회복한 후에 사보나롤라를 축출하였다.
밀라노(Dutch of Milan): 비스콘티 가문이 공국을 건국하여 1395-1447 기간에 통치하였고, 용병대장의 아들 프란체스코 스포르차는 20여 년간 군에 봉사하고 지휘관이 되어 공작의 딸과 혼인하고, 장인을 계승하여 1450-66 기간에 밀라노를 통치하였다. 차남인 루도비코는 1481년부터 조카를 섭정하고, 조카의 사후 1494년 공작이 되어 농업 공업 상업을 발전시키고 운하와 항만을 건설하였다. 밀라노는 부유하여 레오나르도 다빈치 같은 예술가들을 지원하였다. 루도비코의 승인 아래 찰스 8세가 밀라노를 경유 나폴리를 침공하였으나 실패하였다. 그 후 루이 12세가 밀라노공국의 후손으로 상속권을 요구하여, 루도비코와 적대관계였던 베네치아와 세금으로 핍박받는 밀라노주민의 지원으로, 루이는 1500년 밀라노를 정복하여 루도비코를 축출하였다.
베네치아(Republic of Venice) : 베네치아는 프랑크와 비잔티움 사이에서 중계무역으로 생존하였고, 아드리아해의 해상접근을 방호하는 대가로 비잔티움으로부터 관세면제 특혜를 받았다. 베네치아는 제4 십자군 원정에서 수송을 전담하여 세력을 확장하고, 동지중해에 무역거점을 건설하였다. 제노아 공화국과 해상 경쟁국으로 120여 년에 걸쳐 4회의 전쟁을 하여 승리하고, 동지중해 무역 독점으로 부를 축적하였다. 15세기에 키프로스와 에게해의 여러 섬을 정복하고, 달마티아와 알바니아 연안에 식민지를 건설하였다. 1453년 오토만 제국이 비잔티움을 정복한 후, 베네치아는 1499-1503 기간에 전쟁에 패하여 동지중해의 지배권을 상실하였다.
나폴리(Kingdom of Naples): 페르디난드 1세가 1494년에 사망하자, 프랑스의 찰스 8세가 안개빈 혈통으로 나폴리 왕위계승을 주장하며 이탈리아를 침공하여 전쟁이 시작되었다. 찰스 8세가 나폴리왕국 알폰소 2세를 축출하자, 아라곤의 페르디난드 2세가 개입하여 프랑스군을 축출하고, 그의 사촌 알폰소 2세의 아들 페란티노를 복위시켰다. 그가 1496년에 사망하여 그의 숙부인 프레데릭 4세가 왕위를 계승하였다. 찰스의 사촌 루이 12세가 1501년에 나폴리를 침공하여 아라곤의 페르디난드와 왕국을 나누었다. 그러나 1504년에 아라곤(스페인)이 전쟁을 계속하여 프랑스군을 축출하고 페르디난드 2세가 나폴리를 통치하였으며, 그의 손자인 스페인 왕 찰스 5세(1516-56)가 그의 통치를 계승하였다.
유럽의 국가와 정치: 프랑스는 1453년 백년전쟁에 승리하여 영국군을 축출하고, 왕은 의회의 승인 없이 세금을 부과하여 상비군을 유지하고 귀족을 통제하였다. 루이 12세(1498-1515)는 사촌인 찰스 8세 미망인과 재혼하여 브리타니를 병합하고, 제2 이탈리아 전쟁을 시작하여 밀라노와 나폴리를 정복하였으나, 페르디난드 2세에게 나폴리를 양도하고 철수하였다. 프란시스 1세(1515-47)는 이탈리아 예술가들을 후원하여 다빈치의 모나리자와 같이 프랑스에 문예 부흥을 가져 왔다. 그는 이탈리아를 침공하여 포로가 되어 배상금을 내고 석방되어 재차 도전하였으나 실패하였다. 헨리 2세(1547-59)는 신교를 탄압하고, 합스부르크와 전쟁을 계속하였다.
영국은 백년전쟁으로 전비 증가와 인명 손실로 경제가 위축되고, 패전으로 사기가 저하하여, 부패와 혼돈으로 대격변에 직면하였다. 잭 케이드 반란(1450)은 부패, 행정실패, 권력 남용에서 오는 불만, 패전과 부채에서 오는 분노에 연유하였고, 이는 15세기 영국에서 가장 큰 반란으로 잭은 체포되어 부상으로 사망하였다. 장미전쟁(1455-85)은 붉은 장미의 랭커스터 왕가와 흰 장미의 요크 왕가 사이의 왕위 쟁탈전으로, 랭커스터의 헨리4 세로부터 시작하여 30년 동안 왕이 6회나 바뀌어, 랭커스터 가의 헨리 7세(1485-1509)가 전쟁을 끝내고 튜더왕조를 열었다. 이 과정에서 봉건 제후와 기사계급이 몰락하고 절대왕정이 수립되었으며, 헨리는 요크 가의 에드워드 4세 딸인 엘리자베스와 혼인하여 장미전쟁을 종식하고, 왕조의 안정을 도모하였다. 그는 요크 가의 귀족 영지를 몰수하여 왕실의 영지를 확장하고, 성실재판소를 설립하여 사회질서를 회복하고 왕권을 강화하였다. 상공업을 장려하고, 합법적이며 공평한 거래로 번영을 추구하였다. 그는 평화를 위하여 1502년 자신의 딸 마거릿을 스코틀랜드 제임스 4세와 혼인을 시켰으나, 영국의 신성동맹에 반해 제임스는 프랑스의 편에 가담하였다. 헨리 8세(1509-47)는 6회의 결혼에서 교황과 갈등하여, 영국교회를 로마에서 분리하고, 수도원과 수녀원을 해체하며 재산을 몰수하였다. 왕권신수설에 의존하여 영국 헌법에 급진적 변화를 가져와 권력을 확대하였다. 그는 토마스 울시, 토머스 모어, 토머스 크롬웰 등 수석장관을 통하여 정무를 수행하였다. 웨일스와 아일랜드를 통합하였고 프랑스, 신성로마제국, 스코틀랜드와 적대하며 소득 없는 전쟁을 하였다.
스페인: 15세기에 카스틸과 아라곤은 이베리아반도에서 가장 강한 왕국으로, 서쪽에 포르투갈, 북쪽에 나발에, 남쪽에 그라나다가 있었다. 1469년 카스틸의 이사벨라(1474-1504)와 아라곤의 페르디난드 2세(1479-1516)가 혼인하여 스페인 왕국이 되고, 대등한 동반자로 각각 통치하였다. 카스틸은 1479년 포르투갈의 카나리섬을 병합하고, 1492년 그라나다를 정복하여 영토는 반도의 65.2% 인구는 830만이 되었다. 아라곤과 포르투갈의 영토는 반도의 17.2%와 15.5%였으며, 인구는 각각 15% 내외였다. 스페인은 초기에 경찰력을 유지하였으나 왕권을 강화하면서 경찰을 폐지하였다. 1492년 이사벨라는 콜럼버스가 대서양을 항해토록 지원하여 아이티에 도착하고, 후속 탐험대는 남미대륙을 정복하였다. 스페인은 1478년에 종교 재판을 도입하여 개종하지 않은 모슬렘과 유대인을 추방하면서, 인력과 자본의 유출로 경제가 약화 되었다. 페르디난드는 1515년 나발에를 침공 병합하였고. 그의 외손자 찰스 5세가 1516년 스페인 왕위를 계승하였다.
오스트리아와 신성로마제국: 신성로마제국은 독일어를 사용하는 중앙 유럽의 모든 국가와 네덜란드, 로렌, 프랑슈콩테, 사보이, 북부 이탈리아, 보헤미아, 모라비아, 실레시아 등 300여 독립 반독립 국가를 포함하는 인구 1500-2000 만의 국가이다. 제국의회는 1356년 황금소(Golden Bull)를 제정하여 7명의 영주[4 영주는 플라티네, 작센, 브란덴부르크, 보헤미아; 3 성직 영주는 마인츠, 트리에르, 콜론]가 황제를 선출하였다. 합스부르크 왕국은 1273년 루돌프 공작이 세우고 1282년에 오스트리아 공국을 병합하였으며, 합스부르크 최초의 황제는 프레데릭 3세(1452-93)이고, 그의 아들 막시밀리안(1508-19)은 결혼으로 부르군디와 네덜란드를 취득하였다. 막시밀리안의 아들 필립과 스페인 공주 조애너와 정략결혼으로 출생한 찰스 5세(1519-56)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 스페인, 남부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부르군디, 남아메리카를 통치하여, 합스부르크 가의 전성기를 이루었다. (1) 스페인은 이탈리아 전쟁에서 프랑스에 승리하여 1525년 마드리드 평화조약을 체결하였다. (2) 1526년 오토만 터키가 헝가리를 패퇴시킬 때, 헝가리와 보헤미아 의회는 찰스 5세의 형을 왕으로 추대하였다. (3) 찰스는 독일에서부터 시작된 종교개혁에 반대하였으나, 확장하는 신교의 종교적 정치적 세력을 막을 수가 없었다.
북부 및 동부 유럽: (1) 스칸디나비아는 토지 귀족이 세력을 장악하여 농민은 반노예 상태였으며, 덴마크는 발데마르 4세(1340-75)가 왕권을 확립하여 북해지역에서 영향력을 회복하였다. 그의 딸 마거릿은 남편 사후 덴마크-노르웨이-스웨덴을 통합하여 1412년까지 통치하였다. 그러나 귀족, 한자 상공인, 농민반란, 성직자 간섭 등으로 반란이 일어나 3국으로 다시 분할되었다. (2) 폴란드 여왕과 리투아니아 왕자가 혼인하여 1386년 단일국가를 형성하였다. 1500년경 인접국과 분쟁으로 폴란드 왕권이 약화하고, 귀족이 의회를 장악하여 봉건제도를 강화하며, 왕을 선출하는 권한을 확보하였다. 보헤미아는 1212년에 왕국으로 독립하여 1335년에 실레시아를 흡수하였으나, 15세기에는 폴란드가 통치하고, 1526년 합스부르크 지배하에 들어갔다. 헝가리는 13세기에 몽골 침략으로 왕권이 약화 되고, 1301년 찰스 로버트가 왕으로 선출되어 1342년 루이스 1세가 계승하였다. 16세기에 오토만의 위협으로 신성로마제국은 통제를 강화하였다. (3) 러시아는 몽골의 침략(1223-1480)으로 남부지역은 고통을 받았다. 이반 3세(1462- 1505)는 리투아니아-폴란드를 침공하여 영토를 확장하고, 반란을 벌하는 수단으로 노브고로드의 재력과 세력 있는 가문을 모스크바로 이주시켰으며, 여타 공국들도 정복, 매입, 결혼 등으로 흡수하였다. 이반은 부패를 유발하는 교회의 토지는 몰수하였으나, 그의 아들은 교회의 편이 되었다. 러시아의 왕들은 드네프르강과 볼가강을 통제하여, 모스크바에서 발트해와 카스피해를 연결하려고 노력하였다.
오토만 터키: 비잔틴 제국이 서부 라틴국가와 모슬렘 중동국가 간에 완충 역할을 할 때, 오토만 제국이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몽골의 침략과 셀주크의 붕괴, 비잔틴 제국의 약화, 발칸 국가들의 분해, 라틴 영향에 저항하는 그리스, 기독교 세계의 균형을 유지하는 세력의 부재 등은 오토만의 영토확장에 도움이 되었다. 오토만은 정복지에서 봉건주의 원칙을 존중하였으나, 행정을 중앙 통제하면서 아시아와 발칸에서 영토를 확장하였다. 무라드 1세(1362-89)는 발칸과 아나톨리아에서 봉신 국가를 수립하였다. 메메트 2세(1451-81)는 1453년에 콘스탄티노플을 정복하여 오토만 함대가 흑해를 항해하고, 해안 국가는 종주국에 조공을 바치게 하였다. 그는 유럽과 아시아, 지중해와 흑해에서, 오토만 제국의 전선을 확정하고, 오토만 함대가 공해상에서 베네치아에 도전하여 유럽 일부로 역할을 하였다.
유럽과 이탈리아 전쟁: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은 세력균형을 유지하기 위하여 외국군대를 이용하였다. 밀라노는 인접 국가들이 국력을 강화하는 동안 고립을 느껴 프랑스군이 개입하도록 유도하였다. 제1차 전쟁: 찰스 8세가 나폴리 상속권을 주장하여 침공에 성공하였으나 주민의 저항과 페르디난드의 지원으로 프랑스군은 철수하였다. 제2차 전쟁: 루이 12세가 밀라노와 나폴리의 상속권을 주장하여, 베네치아와 연합으로 침공하여 밀라노를 나누었다. 프랑스군은 나폴리를 정복하고 스페인과 분할 통치하였으나, 리욘 조약으로 프랑스는 밀라노를 계속 지배하고, 나폴리를 스페인에 양도하였다. 캉브레 동맹: 베네치아가 부강해지자, 교황 주도로 인접 국가들이 동맹을 결성하고, 프랑스가 베네토를 점령하였다, 교황은 베네치아 붕괴가 이탈리아에 위험을 초래할 것으로 판단하여, 스페인과 함께 프랑스와의 연합을 해지하고, 베네치아는 프랑스에 잃은 영토를 회복하면서 세력확장을 멈추었다. 제3차 전쟁: 찰스 5세의 왕위계승으로 프랑스는 신성로마제국과 스페인에 포위되었고, 영국의 헨리 8세는 교황과 함께 스페인에 연대하였다. 프랜시스 1세는 프랑스군을 롬바르디로 진격시켰으나 패배하여 포로가 되었고, 마드리드 조약으로 석방되면서 요구했던 상속권을 포기하였다. 코냑 동맹: 교황은 찰스 5세의 세력이 확대되자 프랑스. 영국. 베네치아, 피렌체, 밀라노와 동맹을 결성하였다. 프랑스군이 롬바르디에 진입하자, 교황은 위협을 느껴 군대를 철수하고, 베네치아도 동맹을 탈퇴하자, 프랑스군도 철수하였다. 찰스 5세는 피렌체와 로마를 접수하고 자치권을 부여하였다. (6) 여타 전쟁은 프랑스와 스페인 간의 이탈리아 분쟁에서 외세가 개입한 전쟁이었다.
이탈리아 전쟁은 프랑스와 스페인이 이탈리아반도를 지배하기 위한 전쟁으로, 교황이 종교적 지배권을 유지하기 위하여 동맹을 결성하거나 해체하면서 국제관계를 조종하여, 터키나 영국까지 참전하였다. 전쟁이 75년간이나 지속하여 인명과 재산의 막대한 손실로 경제가 파괴되고, 대중은 과중한 세금으로 간신히 연명하였다. 선박 손실과 해군 약화로 해안방어가 취약하여, 모슬렘 해적이 선박과 해안 도시를 습격하고 인질을 잡아 노예로 팔았다. 이탈리아 전쟁은 반도를 향후 2세기 동안 스페인이 지배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탈리아에 불운이 다가왔다. (1) 포르투갈의 인도항로 발견은 이탈리아의 지중해 상권에 타격을 가져왔다. (2) 루터의 종교개혁은 교황의 세입을 감소하고 지중해 상권의 약화는 이탈리아 경제를 약화하였다. (3) 아메리카 대륙의 발견은 장기적으로 대서양 국가의 번영으로 지중해 국가의 쇠퇴를 가져왔다. (4) 가톨릭교회의 반개혁 운동은 이탈리아의 정치적 무질서와 도덕적 붕괴에 해로움을 더하였다.
르네상스 시대의 교회: 종교적 혼란의 시기에 가톨릭교회는 많은 사회문제를 제기하였다. (1) 부의 과다 집중: 16세기 초 프랑스나 이탈리아의 가톨릭교회는 국가 전체 토지의 1/3을 소유하였다. 그 이유는 1) 신도가 사망 시 유산의 일부를 교회에 헌납하였다; 2) 교회가 참화로부터 안전하여 재산 소유권을 교회에 보관하여 사망 시에 자동 귀속되었다; 3) 십자군 참전 시 교회에 자산을 저가 매도하였다; 4) 수도원의 새로운 개척지는 교회의 자산에 편입되었다; 5) 교회가 자산을 소유하면, 매도하지 못하였다; 6) 교회 자산은 통상 면세되었다. (2) 성직매매: 많은 주교는 지역의 성직자이며 통치자로서 왕과 교황에 의해 임명되었다. 그들은 세금을 징수하고 군대를 유지하며 정부의 기능을 수행하므로 세속적이다. 어떤 교황은 성직을 팔아서 비용을 충당하였다. 주교나 추기경의 임명과 교황 선출에도 금전거래가 많았다. 로마에서는 모든 것이 매매이고 돈 없이 되는 일이 없었다. (3) 성직자의 금욕: 성직자의 개인적 도덕성이 타락하여 규율을 상실하였다. 수천의 수도사들이 종교적 봉사에 태만하고, 성 밖에서 배회하며, 여인숙에서 음주하고 정사하였다. 그들은 신을 두려워하지도 사랑하지도 않았으며, 녹슨 정신으로 육욕에 심취되어 다가올 인생에 아무런 생각이 없었다. 독일에서 수천의 신부들이 내연의 처를 가지고 있어, 시기스문드 황제는 성직자 결혼이 공공 도덕성을 개선할 것이라고 하였다. (4) 면죄부 판매: 죄에 대한 고해성사를 면제하는 대신, 반복적인 기도, 자선 품 기증, 성지 순례, 십자군 참전, 금전 기증, 노동 봉사 등 선행으로 회개하여 죄를 사하였다. 이처럼 면죄부는 죄에 대한 벌의 일부를 사하는 것이었으나 십자군 전쟁이나 대성당의 건축을 위해 남용되었다. 현실적으로 면죄부는 뉘우치거나, 고백하거나, 용서되는 것과 상관없이, 구매자는 단순히 신의 구원을 매입하는 것이다. 신학자들은 기부로 면죄를 받는 것과 연옥의 개념에 대해 부정적이었다. (5) 성직자의 법적 특권: 성직자들이 민사법으로부터 면제되어 교회 법정에서 관대한 판결을 받았다. 또한, 도덕으로부터 종교의 분리, 선행보다 정통적 믿음, 과도한 의식, 수도사들의 무위도식, 기적으로 인기 영합, 교황의 파문과 성직 정지의 남용, 교황의 과도한 출판검열, 종교 재판의 잔학성 등이 비판을 받았다. (6) 신부들이 교육 부족으로 무식하여 성경을 읽지도 설교할 줄도 몰랐으며, 고위 성직자가 교구나 주교구에 거주하지 않아 결석하고, 하나 이상의 직위를 가져 성직을 겸임하였으며, 그들의 일가친척이 연고자 등용으로 교회 직위에 기용되었다.
르네상스 교황 직권: (1) 조정주의(Conciliarism)는 교황권위에 도전하여 보편적 위원회를 구성하고, 그들의 합의가 가톨릭교회의 최고권위를 갖는 종교 개혁 운동이었다. 콘스탄스 위원회(1414-18)는 위클리프와 후스의 문제를 검토하고 교회개혁을 위하여 추기경29 명, 학자 100명, 수도원장 1334명, 주교-대주교 183명으로 구성하여, 교황의 독재를 조정하고 견제하였다. (2) 르네상스 교황체제는 마틴 5세부터 레오 10세까지 다음 세 가지 경향을 보였다. 1) 교회분파와 조정주의 이후에 교회에 대한 교황의 우월성을 회복하려는 노력; 2) 이탈리아 정치에서 교황이 제후 및 용병대장과 경쟁을 하면서 교회의 세속화; 3) 문화적 르네상스의 전성기에 예술과 문학에 대한 교황의 후원 등이다. (3) 교황의 행적: 프랑스의 찰스 8세가 1494년 이탈리아를 침공하여 교황 알렉산더 6세를 위협하고 나폴리 침공을 지원해 달라고 요구하였으나 거부하고, 이탈리아의 동맹을 결성하여 프랑스군 철수를 강요하였다. 교황 율리우스 2세는 제2 이탈리아 전쟁에서 캉브레 동맹을 결성하여 교황국의 영토를 회복하고 프랑스군을 축출하였다. 교황 레오 10세는 스페인과 프랑스 사이에서 동맹을 결성하여 스페인 편에서 군사력을 강화하면서 교황국을 방어하였다.
TO BE CONTINUED
(b) 종교개혁
(c) 지리상의 발견
(d) 종교전쟁
(e) 국가의 건설
REFERENCES
Durant, Will. The Renaissance, A History of Civilization in Italy from 1304 to 1576 A.D. Norwalk, CT: The Easton Press, 1992.
________. The Reformation: A History of European Civilization from Wyclif to Calvin, 1300-1564. Norwalk, CT: The Easton Press, 1992.
________. The Age of Reason Begins: A History of European Civilization in the Period of Shakespeare, Bacon, Montaigne, Rembrandt, Galileo, and Descartes, 558-1648. Norwalk, CT: The Easton Press, 1992.
________. The Age of Louis XIV: A History of European Civilization in the Period of Pascal, Moliere, Cromwell, Milton, Peter the Great, Newton, and Spinoza, 1648-1715. Norwalk, CT: The Easton P., 1992.
Kim, Hugo W. The Renaissance, Reformation, Discovery and Scientific Revolution From 1400 To 1715: Humanism and Mercantilism. N. Charleston, NC: Create Space, 2020, 9-234.
김휘국. 정치철학*경제사상과 함께 읽는 세계문명사. 서울: 한국전자도서출판, 2022, 211-266.
'유익한 정보' 카테고리의 다른 글
문명사11_2 계속/재미학자 Hugo KimW. (0) | 2023.06.28 |
---|---|
소시오패스 그별법 (0) | 2023.06.27 |
문명사 지식은 현대인의교양 (0) | 2023.06.26 |
문명사 연재 10 / 재미학자Hugo G. Kim (0) | 2023.06.26 |
누구 없오 (0) | 2023.06.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