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명사 연재 10. 중세 유럽(750-1400)의 역사적 교훈
로마제국이 멸망한 이후 유럽은 새로운 질서를 개편하는데 3세기 가 걸렸다. 서부에서 캐롤린지언과 동부에서 아바스가 대치하는 가운데, 중세 초기는 외세의 침략으로, 영주가 주민의 생활과 안전을 관리하는 봉건제도가 확립되었다. 중세 성기에 사회가 안정되어 농업과 상공업이 발전하고, 화폐유통이 자유로워 봉건제도가 약화하고, 정치 권력이 중앙에 집중하였다. 교회는 세력이 절정에 이르러, 십자군에서 같이, 정신적 세속적 일에 간여하였다. 중세후기는 기근-질병-전쟁으로 그 손실이 심대하였고, 봉건제도가 붕괴하고, 정치 질서가 개편되었다. 다음은 (a) 중세의 유산 (b) 정치-종교-경제의 상호작용 (c) 이론과 실제의 관계 순으로 기술한다.
(a) 중세의 유산 (The Legacy)
종교적 유산은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에서 생각해본다. (1) 유대교는 처음부터 예수가 온다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기독교의 신약성경을 거부하였다. 이슬람은 저음에는 기독교도를 이웃 친구로 대하였으며, 코란-하디스-샤리아의 교리에는 예수를 무하마드와 같은 하나의 사도로 생각하였다. 이슬람 국가들은 기독교도의 영토를 위협하고, 예루살렘과 여타지역을 점령하였다. 이로 인하여 두 종교 사이에는 십자군과 같은 전쟁이 불가피하였다. 제1차 십자군은 1099년에 동방에 4 기독교 국가(안티옥, 에데사, 트리폴리, 예루살렘)를 건설하였다. (2) 이베리아반도에서, 기독교는 모슬렘을 남쪽으로 압박하여, 1250년에 그레나다를 제외하고 스페인 전역을 정복하였다. 유대인은 기독교로 개종을 강요받았고, 결국 1492년 스페인에서, 5년 후 포르투갈에서 모두 축출되었다. 그들 중 약 100,000명은 고난과 위험으로부터 자신을 보존하기 위하여 개종하였으나, 그들 다수는 허위 개종자(Marrano)로 비밀리에 유대교를 예배하였고, 계속하여 기독교도들에 의해 핍박을 받았다. (3) 이슬람은 통치에 복종하여 세금을 내는 유대교나 기독교 공동체에 불이익은 있었으나 자신들의 종교를 허용하였다. (4) 기독교는 라틴 서부(Latin West)와 그리스 동부(Greek East)로 분리되었고, 라틴 서부는 가톨릭과 개신교로 다시 분할되어 현재까지 독자적으로 종교활동을 하며 관리하고 있다.
정치와 정치철학의 유산은 절대 왕국을 향한 교회와 국가 간 관계 발전을 반영한다. (1) 최초 기독교는 교황이나 다른 조직체계가 없이 우상숭배와 함께 공존하여, 교회는 복음을 전파하기 위하여 국가가 보호할 필요가 없었으며, 국가는 교회보다 더 큰 권력을 가지고 있었다. (2) 기독교 체제가 정상적으로 기능하게 되어, 교황 직권은 “하나의 신-하나의 황제- 하나의 교회”로서 통합된 유럽을 추구하였고, 교황은 오거스틴의 권력분산 원칙(교회는 정신적 업무를, 국가는 세속적 업무를)에 기초하여 황제와 권력을 균등하게 나눌 것을 요구하였다. (3) 종교의 세력이 확장되면서, 교황은 정신적 및 세속적 업무에서 최고의 권력을 추구하였다. 그레고리 7세와 헨리 4세의 싸움 (1077) 이나, 그레고리 9세와 프레데릭 2세의 싸움(1229)에서 교회와 국가 간의 권력투쟁을 보게 된다. 국왕은 성직자에게 세금을 부과하며 민사형법을 적용하였고, 교황은 파문이나 성직 정지로 위협하였다. (4) 정치와 종교 간의 세력균형은 토마스 아퀴나스에 의해 이론적으로 회복되었다: 기독교 사회는 정신적 세속적 세력 또는 교회법 민사법으로 통치한다. 이는 신학과 철학 사이에 갈등을 나타내는 것이며, 오거스틴의 권력분산 이론으로 다시 돌아오는 것이다. (5) 국가 권력 우선주의는 통치 권력에서 국가가 교회를 우선하는 것이며, 위의 최초단계 개념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마르실리우스는 교회는 사회의 일부이며 세속 업무를 관리하는 국가 일부로서, 국가 안에서 활동하는 정신적 기능에 국한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오컴은 재산권 분쟁은, 교회 업무가 아닌, 국가의 업무 소관이라고 주장하였다.
경제와 경제사상의 유산은 봉건제도의 출현과 몰락에서 찾아볼 수 있다. (1) 중세 초기에 바이킹-매그야-이슬람의 침략으로 혼란하여, 노동자들은 지주들과 자유계약으로 생계와 안전의 대가로 영주들에게 노동력을 제공하는 봉건제도가 출현하였다. 사회가 안정되어 농업생산이 늘어나고, 상업과 공업이 번창하고 화폐의 통용이 자유로워, 소작농이나 노동자들은 임금과 임대료를 화폐로 지급하게 되어 자연히 봉건제도가 붕괴하였고, 영주들은 봉건적 특권을 상실하였다. (2) 상업혁명은 부유한 중산층을 형성하고, 상인 공동체 (Guilds)가 토지 귀족들에게 도전하였다. 그러나 중세의 길드는, 대부분 소비자나 노동자가 아닌, 기업소유자나 전문직업인들에 의해 구성되고, 부유한 상인들이 시장에서 독점이익을 취하였다. (3) 중세 경제사상에서 가장 중요한 유산은 경제활동에서 기독교 윤리와 도덕이라 할 것이다. 교회는 금전 대출에서 원금 이상을 환수하는 것은 고리대금으로 금지하였고, 절도나 강도로 취급하였다. 점차 산업이 발전하여 투자수요가 증대하였고, 교회도 자산이 증가하여 대출 손실이 발생하여, 교황은 투자에서 오는 위험이나 손실을 기업이윤에 포함하도록 허용하였다. 1400년경 유럽국가들은 금전 대출에서 이자 지급을 합법화하였으나, 기독교 윤리는 이윤추구 동기에 대해 부정적 태도를 유지하였다. (4) 이슬람의 법은 이자, 불확실한 거래, 도박을 금지하였고, 공평한 거래와 계약의 이행 등을 윤리와 규범으로 설정하였다.
사회 문화적 유산은 지적발전과 함께 대학의 출현에 있다. (1) 인구증가와 함께 농업, 상업, 공업의 발전은 과학과 이론교육을 촉진하여, 1088년에 이탈리아 볼로나대학이, 12세기 후반에 파리대학과 옥스퍼드대학이 설립되었고, 1500년경에 유럽 전역에 63개 대학은 고등교육을 담당하였다. 중세교육은 대부분 교회가 독점하였으나, 새로운 대학은 신학을 제외하고는 교회나 국가로부터 독립적 기관이 되었다. (2) 대학의 학생 수가 증가하고 졸업생이 국가, 교회, 대학에 고용되어 대학은 중세사회의 일부로서 인정받는 기관이 되었고, 대학 졸업자는 사회의 지적 정예가 되었다. (3) 대학은 기존지식을 가르쳤으나, 교수-학생-연구원들은 인문학, 의학, 법학, 신학 분야에서 새롭고 창의적인 생각을 발전시켰다. 국가나 교회에서 대학 졸업생을 고위직에 기용하여 주요정책을 입안케 하였다. 이를테면, 이노센트 3세는 파리에서 신학, 볼로냐에서 법학, 로마에서 실무를 하였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나폴리대학을 졸업하고, 쾰른과 파리에서 수학하고 가르쳤다. (4) 졸업생들은 이론과 실제에서 문명의 발전을 위한 체제의 평등과 효율을 향한 가치를 추구하였다. 교황의 권능은 교회에 저항하는 어떤 관념도 억압하는 충분한 힘을 가졌으나, 문학과 과학에서 새롭고 창조적인 저술은 보수적 관념이나 신념을 바꾸어 세상을 변화시켰다. 마르실리우스는 교회는 사회의 일부라고 하였고, 위클리프는 예수가 수장인 만유의 교회는 하나이며 그 밖에서는 구원이 없다고 하였다. 암흑의 시대에서 작품 표현으로 문예 부흥의 여명을 가져왔고 과학과 자연철학은 천동설하에서 운동의 상대성을 자연적 반동력으로 관측하였다.
(b) 정치, 종교, 경제의 상호작용 (Interactions)
경제에서 이슬람과 기독교: 로마제국이 몰락한 이후, 유럽에서는 새로운 왕조가 일어나고, 근동에서 비잔틴과 페르시아의 전쟁이 국력을 약화하여, 슬라브족이 발칸에 정착하고 아랍이 세력을 확장하는 길을 열었다. (1) 제국의 내부갈등에 힘입어, 침략자들은 정치, 경제, 종교적 억압으로부터 해방자 이거나, 최소한 인내할 수 있는 대안으로 보였다. 아랍정복의 성공 요인은 베두인의 빈약한 식생활, 군사 지도자의 높은 자질, 정복한 땅에서 인명과 재산의 보호, 주민과 아랍군대의 격리, 이슬람으로 개종을 강요하지 않는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였다는 점이다. (2) 북아프리카와 스페인: 북 아프리카 모슬렘 군의 일단은 711년 지브롤터 해협을 건너 스페인에 진입하여, 비시고스 왕국을 멸한 후, 코르도바에 정권을 수립하고 우메이야드 칼리프의 일부가 되었다. 아바스 왕조가 들어서자, 왕자 알라만이 망명하여 756년에 우메이 야드 에미레를 세우고 바그다드와 결별하였다. 그는 이베리아반도를 통일하여 이슬람 문명을 건설하였고, 10세기에 최정점에 이르렀다. 기독교인은 모슬렘 왕국에서, 모슬렘은 기독교 왕국에서 비교적 평화롭게 살았고, 유대인은 두 왕국에서 생존하였다. 그 후 모슬렘의 통치는 쇠퇴하고, 1492년 그라나다가 축출되고 이슬람은 스페인에서 사라졌다. 1516년에 카스틸과 아라곤이 결합한 스페인은 단일왕국을 수립하였다. (3) 십자군 전쟁은 셀주크 터키의 진출, 비잔틴제국의 약화, 이탈리아 상업 도시(피자, 제노아, 베네치아, 아말피)의 야심, 예루살렘의 회복에서 오는 교황의 지도력 신장 등에 연유하여 일어났다. 많은 인적자원을 동원하기 위하여 전쟁참가자에게 많은 특전이 부여되었다. 십자군은 참가하는 (동기가 다른) 다수집단을 편성하고 훈련하여, 군사작전을 수행하는 동질의 집합체를 만드는 것은 어려운 임무였다. 전쟁은 인명과 재산의 거대한 손실을 초래하고, 결국은 실패로 끝났다.
봉건제도에서 정치와 경제의 상호작용: 중세의 정치 군사적 요인은 이전보다 더 심대하게 경제체제를 변화시켰다. 서로마제국의 몰락 이후, 전방지역에서의 통제력은 약화하고, 서구 문명은 세 개의 종교에 중심을 두었다. 800-1000년 기간에 바이킹, 매그야, 모슬렘이 유럽 전역에 침입하여 대부분 왕국은 교통과 통신의 방해와 함께 가용자원의 부족으로 토지와 국민을 보호할 수가 없었으며, 지방 영주가 주민들을 생필품을 조달하고, 안전과 경비를 준비하였다. 통화 부족으로 시장기능이 적절하지 못하여, 자유 노동자들은 두 가지 선택이 있었다. 우선 부유한 가정에 노동을 제공하고 숙식을 해결하거나, 또는 농지를 임차하여 경작하고 생존하면서 지주에게 노동을 제공하는 것이었다. 고로 지주(영주)와 노동자(농노) 사이에 새로운 계약이 성립하여 장원제도가 확립되었다. 국가 차원에서 왕과 세력가 들은 외세침략에 대항하여 싸우는 군대가 필요하였고, 누군가 왕으로부터 토지를 받고 군대 봉사를 제공하였다. 고로 지주와 봉신 사이에 사회계약이 이루어져 봉건제도를 형성하여. 영주는 봉신에게 토지를 주고, 봉신은 영주에게 군대 봉사를 약속하였다. 봉건제도에서 기사는 귀족계급에서 오지만, 누구나 기사가 되면 자신의 기존 계층에 상관없이 귀족에 편입되었다. 이처럼 외세침략이 국가의 정치 군사적 안정을 위협하여 봉건제도가 확립되었고, 왕의 정치 권력이 지방에 분산되었다.
유럽은 11~13세기에 인구증가로 의식주의 수요가 증가하여, 농업 공업 상업의 발전과 함께 금융과 보험이 성장하여 상업혁명을 이루었다. 경영인과 상인들이 경제의 주도권을 장악하여 농업기반의 봉건제도가 점차 약화하였다. 교통과 통신이 정상화되고 화폐가 자유롭게 유통되어, 영주는 종전의 정치적 법적 특권이 없이 현금으로 노동자들에게 임금을 지급하고 임대료를 수금하였다. 봉건제도는 토지와 국방을 연결하는 제도였으나, 기술이 발전하고 직업적 전문성을 가진 상비군이 건설되어, 농사일하며 전시에 나가 싸우는 봉건제도는 사라졌다. 또한, 14세기에 기온 한랭화와 흑사병으로 유럽 인구가 급격히 감소하였다. 이로 인하여 질병에 대한 공포로 농부는 땅을 갈지 아니하고, 상인은 가게 문을 닫았고, 교회는 성전의식을 중단하였다. 인구감소로 임금을 인상하고, 농산물의 수요가 감소하여 토지소유자의 임대료와 소득이 감소하였다. 높은 임금과 농산물 가격 하락은 농토를 목장으로 전환하고 특수 작물을 재배하였다. 환경의 변화로 토지 귀족들은 자신이 직접 경작하거나, 다른 방법으로 자신의 소득을 보충하였다. 귀족들은 정치 권력으로 임금인상을 제한하고, 새로운 세금을 부과하여 농부들의 불만이 확산하여 농민들의 폭동이 증가하였다.
(c) 이론과 실제의 관계 (Relations)
정치이론과 실제: 중세 정치사상은 기독교 교리, 그리스와 로마의 정치사상, 로마법의 범주에 있다. 라틴 신부들은 정치사상을 발전시켰고, 로마제국의 전통은 샬라메인 이후 독일에 승계되고, 로마법이 영향을 미쳤으나 새로 일어나는 대학에 의하여 도전을 받았다. 세력균형 이론이 널리 퍼져, 성직의 힘은 정신적 업무에 제한되고, 세속의 힘은 지상의 업무에 체재해야 한다는 관념이 지배하였다. 중세의 법철학은 로마 민사법, 로마의 종교법, 신학과 철학구조에 관심을 둔 학생들이 주동하였다. 그들은 각국의 민사법보다 근거 있는 일반적인 자연법 개념을 발전시켰다. 정치 권력의 기원은 두 원리에 의해 설명되었다. (1) 마니골드는 정치적 권위는 국민의 헌법적 합의에서 온다는 계약이론에 의해 왕은 국민의 선택된 대리인으로, 만일 왕이 계약을 위반하면, 국민은 왕을 폐지할 수 있다고 하였다. 2) 호노리우스에 의하면, 세속적 정부는 교회를 통하여 신이 설립하였다. 왕은 지상의 법을 집행하고, 정의를 관장하며, 평화와 질서를 유지하고, 내부와 외부의 적으로부터 영토를 보존할 것을 기대한다고 하였다. 왕의 도와 사제의 도는 중세 정치사상의 지배적 문제로서, 세속적 정신적 권력 사이에 지속적인 갈등을 초래하였다. 따라서 교회 단일화, 교회 우선주의, 국가 우선주의, 세력 균형이론이 발전하였다.
경제이론과 실제: 중세의 경제사상은 로마법, 게르만의 유산, 기독 교리와 교회, 아리스토텔레스주의 등의 영향을 받았다. 봉건주의는 자본주의 이념의 고리를 가졌으며, 경제개념 (이윤추구)의 성장은 기독교 윤리에 의하여 제약을 받았다. 도시의 지배계급은 토지소득으로 살아가는 유산자였고, 부유한 상인은 상업과 산업 도시에서 영향력이 지대하였다. 그들은 상업이익을 부동산에 투자하여 부를 축적하였다. 부유한 도시 상인과 시민들은 결혼이나 여타방법으로 정치세력을 가진 귀족들과 병합하려고 노력하였다. 교회는 유럽의 최대 지주로서 주교와 수도원장 지배하에 있었고, 그들은 기독교 도덕을 무기로 상인들의 이윤추구 동기를 통제하였다. 상업혁명은 변화하는 환경 속에서 금전 대출과 이자에 관한 적절한 적응을 요청하였다: (1) 무역과 산업의 확장은 사기업을 위하여 유휴 자본을 이용하도록 요청하였다. (2) 국가는 십자군과 같이 전쟁이나 비상시에 세금수입을 초과하는 추가적인 자금이 긴급히 필요하였다. (3) 교회의 자산이 증가함에 따라 부실대출의 채무 불이행, 관리비용의 증가, 지불 지연, 물가상승 등으로 손실이 증가하여 자산관리에 문제가 생겼다. 따라서 교회, 국가, (상인과 기능공을 대표하는) 길드가 함께 고리대금의 억제와 금리 이자의 유용성을 절충하여 수정하려는 공통적 동기를 가지게 되었다. 물론 기독교 윤리(Christian Ethics)와 자본주의 이윤추구 동기 (Profit Motive of Capitalism) 사이에 지속적 갈등이 잔존 하였다. 금전 대출에 대한 이자의 공식적 인정은 3가지 의미가 있다. 1) 교회, 수도원, 가정에 저장된 유휴 자본의 이용으로 자본시장의 활성화를 가져왔다. 2) 대출에 대한 이자 지급 금지로 인해 물건과 서비스에 대한 정당한 가격에 숨겨진 비용을 합리적으로 반영하였다. 3) 기업 비용의 일부로서, 은행이 합리적으로 대출 이자를 부과하여 금융산업을 활성화하였다.
(문명사 연재 10. 중세 유럽의 역사적 교훈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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