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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사11_2 계속/재미학자 Hugo KimW.

양곡(陽谷) 2023. 6. 28. 18:36

문명사 연재 11. 근세초기 유럽(1400-1715)의 정치와 종교 (Continued 2)

(c) 지리상의 발견과 확장

지리상 발견의 조건: 심리적 태도와 동기: (1) 원거리 항해를 통해 새로운 대지를 발견하려는 근본적인 목적은 물질적 이득을 취하려는 욕망에 있었다. 오토만 터키가 동방에 이르는 육로를 차단하여 아랍 중개상이 아시아와 양념 무역을 독점하여, 가격이 터무니없이 높았다. 동방의 양념과 고가상품의 근원에 직접 접근하기 위하여, 유럽인들은 해상으로 아시아에 이르는 가능성을 탐지하는데 열심이었다. (2) 통치자나 탐험가들은 새로운 대지의 토착민들에게 기독교 신앙을 전도하는 종교적 정열을 가지고 있었다. 기독교와 이슬람 왕국은 수 세기 동안 인접하여 공존하며 살았다. 그러나 1453년 콘스탄티노플 함락 이후, 십자군의 종교적 열병이 유럽 특히 스페인에 재생하였다. (3) 사회적 인정이 지리상 발견의 다른 동기가 된다. 지리상의 발견은 제독이나 장군 등의 직함을 주고, 최초 발견자들은 콜럼버스와 같이 통치자가 된다. 또한, 새로운 발견은 영웅으로 사회적 명성을 얻고 자신의 이름이 유럽 사회에 널리 회자하였다. (4) 미지의 새로운 대지에 관하여 신기하고 모험적이며 알고 싶어 하는 욕망이 어떤 특정한 사람들에게는 지리상 발견을 위한 중요한 동기가 되었다.

상품거래와 은행업: 유럽은 사치품으로 중국과 페르시아 비단, 인도의 면화 피복, 중국산 약재-대황, 인도의 고가 보석, 약품-염료-향료-연고-화장품-고가상품, 후추-시나몬-육두구-정향-생강 등의 양념류를 수입하였다. 콘스탄티노플에서 무역은 1543년까지 베네치아가 지배하였고, 흑해에서는 터키와 타타르가 참가하였다. 유럽의 동방무역 적자는 금은괴로 지불하였다. 무역적자를 해소하기 위하여 삼각무역을 발전시켰다. 이탈리아 선적이 감소하여 지중해 목재수송 비용이 올랐다. 포르투갈이 인도항로를 발견했으나, 그들은 발견을 상업적으로 이용하는 자본, 상업적 경험, 금융조직이 부족하였다. 카탈로니아는 신용 제도나 사업 방법이 비교적 발전하였으나 자본이 제한되었다. 이탈리아는 상인조합, 기능공조합, 기업 방법, 회사의 규칙이 발전하였다. 남부 독일 도시에 퍼거나 웰서 같은 가족 무역소가 발전하였고, 포르투갈과 카스틸에서 신용거래와 외국투자가 허용되었다. 인도의 양념류와 아메리카의 은이 포르투갈과 스페인으로 유입되어 이탈리아와 독일의 은행으로 자금이 회수되었다.

선박: 노를 젓는 배는 지중해의 전통적 전함으로 120 x 15ft 크기이며 1290-1540 기간에 운용되었다. 양편에 25-30 벤치로 양 벤치에 각각 3명이 노를 젓는다. 3개의 돛대에 삼각돛을 달았으며, 약 250t을 선적할 수 있었다. 캐러벨(Caravel)은 1451년 포르투갈 헨리 왕자의 지원으로 어선을 개조하여 탐험선이 되었다. 15-20 x 6m 크기에 50~160t으로 1~3개의 돛대에 삼각돛을 달고 얕은 해안항해를 하였다. 카락(Carrack)은 15세기에 제노아 함선으로 포르투갈과 스페인에서 대양 항해에 사용하면서 모형을 변형하였다. 포르투갈은 1,000t을 상회하여 인도 중국 일본에까지 운항하였다. 갤리온(Galleon)은 16세기 베네치아가 건조하여 해적 소탕에 사용한 것을 포르투갈이 대부분 화물선으로 사용하였다. 1534년에 1,000t 적재의 갤리온을 건조하여 366문의 대포를 탑재하였고, 3-4 기둥에 삼각돛을 달고 풍력으로만 운항하였다. 플뤼트(Fluyt)는 16세기에 네덜란드가 최소 건조비용, 최대 선적, 최소 인력으로 운항하는 화물선으로 건조하였다. 약 80피트 길이에 좁은 폭으로 2-3 높은 돛대에 200~300t을 선적하고, 화포로 무장한다. 운송비용이 저렴하여 최고의 경쟁력을 가졌다.

선원과 항해: 콜럼버스는 40명은 산타 마리아호에, 나머지 50명은 캐러벨 2척에 분산 승선시켰다. 그들은 원래 선원 중의 일부거나, 탐험이나 장거리 항해경험이 있는 사람 가운데서 선발하였다. 15세기에 선수는 보호시설이 없어 선원은 갑판 위에서 잠자고, 일기가 불순하면 배 밑 짐칸에서 잤다. 배의 장교는 선장과 항해사뿐이었다. 고가의 품목을 싣고 장거리 항해를 하는 큰 배의 경우, 전투를 위한 무장을 하고, 상인과 함께 특수 근무 요원을 고용하였다. 선원임금은 같았고, 일부 능력자는 배를 받았다. 요리사는 중요하고 음료수는 항상 부족하였다. 장거리 항해는 사기 저하와 영양 결핍이 문제였다. 콜럼버스 항해는 다행히도 선원의 건강이 좋았지만, 바스코 다 가마의 항해는 무척 나빴다. 마젤란은 부상이나 익사보다 괴혈병으로 손실이 컸고, 3년간 항해에서 270명 중 18명이 살아 돌아왔다. 항해 중 질병은 모기가 전염하는 황열병과 말라리아와 비위생적 여건에서 오는 질병이 많았다. 항해 세트는 돛의 위치, 돛, 돛을 팽팽하게 하는 밧줄로서, 르네상스 시대의 배는 조종이 문제였다. 해결방법은 방향타의 손잡이를 항로에 맞추는 것인데, 현재는 조종핸들을 돌리지만, 18세기까지는 배의 조종핸들이 발명되지 아니하였다.

수로안내와 항해: 중세 후기에 항해사의 자격은 경험, 해안선에 관한 자세한 지식, 예리한 관찰력을 중시하였고, 방향과 수심을 측정하기 위하여 나침판과 리드를 사용하였다. 지중해 지역의 해양지도는 13세기부터 사용되었으나, 원양 항해를 위한 항해서가 16세기에 출간되어, 항해의 방향, 항로, 그리고 항구 진입로와 전 해안을 따라 수심과 해저를 표시하였다.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선원들은 해상항로를 찾는데, 지중해는 나침판 사용하고, 대서양은 어림짐작 법칙의 제한된 기술이었다. 포르트갈 존 2세는 수학전문가 위원회가 태양 관측으로 위도를 찾는 방법을 연구케 하여, 1484년 항해자의 안내서를 출간하였다. 이를 이용하여 바스코 다 가마가 인도까지 항해하여 돌아오는 실용적 지식이었다. 16세기 초 포르투갈과 스페인은 항해학교를 설립하고 훈련하여, 동인도와 서인도 무역을 위한 항해사 자격을 부여하였다. 그간 많은 경험을 통하여 항해기술이 발전하였으나, 문제는 천체관측을 나침판에 어떻게 이용할 것인가, 그리고 배의 위치나 새로운 발견 지점을 위도와 경도로 어떻게 표시할 것인가이었다.

도표와 지도: 지도는 기본적으로 항해를 위하여 제작하였고, 항해 도표는 항해사가 사용하는 대부분 정보로서, 위도와 경도, 지형의 모양, 항해 조력 물(등대, 비율표지, 자력 정보, 암초와 얕은 물, 수심, 경고)을 포함한다. 15세기 중엽부터 포르투갈은 아프리카의 서해안과 대서양의 도서들에 관한 지식을 확대하였고, 상선이 발견한 도서의 상업적 이익을 찾는 데 도움을 주는 도표에 대한 요구가 증가하였다. 도표제작 산업은 제노아가 시작하여 리스본에 성행하였다. 가장 중요하고 영향력 있는 세계 도표는 1508년 왕실 명령으로 제작된 스페인의 파드론(Padron Real)이다. 포르투갈의 지도제작자들은 이탈리아 숙련자들의 전통을 계속하였다. 1500 년경 스페인 탐험가이며 지도제작자인 라 코사는 수 개의 지도를 만들었고, 다른 사람들이 많은 지도를 제작하였다. 1578년 이론과 실제의 보편적 결합으로 머케이토(Mercator) 지도가 완성되었다. 머케이토는 플랑드르 태생으로 네덜란드 지도 학교에서 잘 알려 졌으며, 그의 도법은 원통도법의 하나로, 원통을 적도에 접하게 하여 그 측면에서 지표의 상태를 투영하는 방법이다. 이 지도는 작도가 쉽고, 극 지역을 제외한 지구의 대부분을 장방형으로 전개할 수 있어, 세계지도로 널리 이용되었다.

아프리카 서해안: 포르투갈의 알폰소 4세 (1325-57) 는 해운 상업으로 탐험을 장려하였다. 카나리아 제도는 이미 알려져 있었으나 포르투갈이 그 소유를 주장하여, 1344년 카스틸에서 이의를 제기하였다. 헨리 항해사(1394-1460)는 아프리카 서해안, 대서양의 도서, 새로운 항로의 발견을 통하여 포르투갈의 탐험과 해상무역을 발전시켰다. 그는 부왕에게 1415년 세우타(지브롤터를 대안)를 정복하여 아프리카 항해를 통제하도록 조언하여 수행하였다. 그는 사하라 무역로를 알게 되었고, 아프리카에 매혹되어 포르투갈 무역을 확대하였다. 그의 탐험대는 항해를 지원하여 이윤의 20%를 징수하였다. 그는 1418년 마데이라 제도, 1427년 아조레스 제도를 발견하였다. 헨리의 탐험대는 아프리카 서안의 무역로를 계속 탐험하였다. 1478년 엘미나 해안에서 카스틸의 35척과 포르투갈의 함대가 기니 무역 주도권을 위하여 싸웠고, 포르투갈이 승리하여 1479년 평화조약을 체결하였다. 헨리는 1555-56 기간에, 케이프 베르데 섬들을 발견하였다.

대서양과 아메리카: 스페인의 탐험: 카스틸은 1402년 카나리아 제도의 영유권을 확보하고 아프리카의 서해안을 탐험하였으나, 국내정치가 이슬람 퇴치(Reconquista)로 전환하였다. 카스틸과 아라곤이 결합으로 스페인의 통일을 이루고, 아라곤은 지중해에서 스페인 동부, 프랑스의 남서부, 지중해의 주요도서(시칠리아, 몰타, 나폴리, 사르디니아)와 그리스 도서까지 통제하며, 1492년 스페인은 그라나다를 정복하였다. 아프리카 서안 탐사에 열중인 포르투갈의 독점을 우회하여, 크리스토퍼 콜럼버스(1451- 1506)는 대양의 섬과 대륙을 발견하여 그곳의 제독과 총독이 된다는 약속을 받고, 90명의 선원을 3척의 배에 분승하여 대서양을 횡단하여, 1492년 10월에 산살바도르에 도착하였다. 바하마, 쿠바, 아이티, 도미니카 등의 해안을 탐험하고 1493년 4월 바르셀로나에 복귀하였다. 콜럼버스는 그곳이 중국 일부라고 착각하였으며, 탐험은 포르투갈보다 성공적이었고, 탐험 소식은 인쇄되어 유럽을 뒤흔들었다. 그의 2차 항해는 같은 해 9월, 17척의 배로 1,200명의 선원과 보급을 싣고 식민지를 건설하기 위해 다시 출항하였다. 그러나 1496년 그가 스페인으로 귀환할 때까지 별 성취가 없었고, 그 후 1498년과 1502년의 두 항해도 성과 없이 끝났다.

토르데실라스 조약: 콜럼버스가 서인도제도로부터 복귀한 이후,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분쟁을 피하려고, 양국의 지배를 분할 하는 것이 필요하였다. 교황 알렉산더 4세는 각국에 교서를 보내 경도 100 리그 서쪽과 케이프 베르데 군도 남쪽의 모든 육지는 카스틸에 속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포르투갈의 존 2세는 스페인과 협상하여, 케이프 베르데 군도 서쪽 370리그 경도선의 동부는 포르투갈이 지배하도록 조정하고, 1494년 토르데실라스 조약에 양국이 서명하였다. 이로 인하여 포르투갈은 아프리카, 아시아, 동부 남아메리카(브라질)를 지배하고, 스페인(카스틸)은 이 선의 서쪽을 취하여, 대부분 아메리카와 태평양이 포함되었다. 그러나 네덜란드, 영국, 프랑스가 식민지를 개척하여, 북아메리카에서 효력이 없게 되고,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국력이 약화하여 이 조약은 무시되었다. 네덜란드가 말라카를 함락하고, 화란 동인도회사가 인도네시아에 있는 포르투갈의 자산을 인수하여, 서뉴기니어, 서부 오스트레일리아가 네덜란드 영이 되었다. 동부 오스트레일리아는 1770년 제임스 쿡이 탐험하여 영국이 영토권을 주장할 때까지 스페인의 지배 아래에 있었다.

북아메리카: 이탈리아의 항해사이며 탐험가인 존 캐보트(1450-1500)는 1497년 영국 황실의 일부 지원으로 18명의 선원과 함께 소형 배 한 척으로 북아메리카 캐보트 해협의 케이프 노스, 세인트 폴, 케이프 레이 해안을 탐험하였다. 그는 그곳을 아시아의 동북 해안으로 착각하고, 8월 브리스틀로 돌아왔다. 캐보트는 1498년 200명의 선원을 5척의 배에 분승하여 출항하였으나 심한 태풍으로 손상을 입고 아일랜드에 닻을 내렸다. 1499년 래브라도는 포르트갈 왕실의 허락을 받아 데 바르셀루스와 함께 그린란드에 도착하고, 영국의 이름으로 탐험하려고 브리스틀로 돌아왔다. 1499~1502년에 개스파 형제와 코르테 리얼은 그린란드 해안을 탐험하고, 래브라도는 뉴파운드랜드를 탐험하여 이 두 해안의 이름이 명명하였다.

남아메리카: 아메리고 베스푸치(1454-1512)는 피렌체 출생의 상인, 탐험가, 항해사로서, 알론소 데 오제다의 지휘하에 스페인에서 출항하는 4척 탐험선의 항해사로 원정에 참여하였다. 그의 함선은 1499-1500 항해에서 귀아나에 도착한 후 아마존강 입구를 발견하고, 케이프 오거스틴까지 남하하여 다시 오리노코강까지 북상하고, 아이티에 도착하였다. 그는 자신의 탐험지역이 아시아라고 착각하였다. 베스푸치는 포르투갈의 후원으로 제2 탐험에 들어갔다. 탐험대는 1501년 봄 리스본을 출항하여 케이프 버드 군도에 정박하고, 브라질의 케이프 오거스틴 해안에 도착하였다. 계속 남하하여 리우데자네이루만과 라 플라타 만까지 항해하고, 1502년 초 리스본으로 돌아왔다. 탐험지역이 아시아가 아니라는 것을 인지하였다.

인도양과 아시아: 다 가마의 인도항로: 포르투갈 마누엘 1세의 지원으로, 바스코 다 가마 (1460-1524) 는 1497년 6월 170명의 무장병력으로 4척의 탐험선에 분승하여 리스본을 출항 인도양을 항해 하여 다음 해 5월 인도의 칼카타에 도착하였다. 출항 후 2년 만에 가마와 55명의 선원이 생존해 포르투갈로 귀환하였다. 포르투갈 제2 탐험대는 1500년에 페드로 카브랄의 지휘하에 약 1500명을 13척의 함선에 분승하여 출항하였다. 임무는 인도의 칼카타 왕국과 통상조약을 체결하고 그 시내에 포르투갈 공장을 세우는 것이었다. 카브랄은 아랍 상인조합과 분쟁이 생겨, 폭동으로 공장이 전복되고 70명의 포르투갈 인원이 살해되었다. 카브랄은 보복으로 도시에 포격을 가하였다. 1502년 2월 함선 15척에 800명이 중무장하여 다 가마의 지휘로 리스본을 출항하여 칼리컷에 도착하였다. 다 가마는 협상 이전에 캘리컷에서 모슬렘을 축출할 것을 요구하였으나 거절하여, 포르투갈 함대는 이틀 동안 시내로 함포사격을 하면서, 쌀 수송선을 잡아 신체적으로 가해하여 왕에게 보내어, 말라바르해안의 무역이 이루어졌으나, 요구가 모두 관철된 것은 아니었다. 다 가마는 코친, 카나노어, 인근 왕국으로부터 양념류를 수집하고, 해안 순찰을 위한 소 함선 분견대를 남기며, 1503년 초 인도를 출항하여 동년 9월에 포르투갈에 도착하였다.

알폰소 드 알부케르크(1453-1515)는 포르투갈 존 2세의 친구로서 북아프리카에서 모슬렘과 오토만 터키에 대항하여 10년간 전투를 해온 군사적 천재이다. 존왕은 기독교의 전파, 양념류 무역로 확보, 포르투갈의 아시아 제국을 건설할 목적하에 [제1차 탐험]으로 1503년 알부케르크 사촌 프란시스코에게 각각 함선 3척을 주어 인도 탐험을 위해 출항시켰다. 포르투갈이 코치 항을 건설하도록 허락을 받아 무역 관계를 수립하고, 그는 1504년 귀국하였다. [제2차 탐험]에서 마누엘 왕은 알부케르크를 신임하여 1506년 함선 5척으로 출항하여, 소코트라를 공략하고 요새화하여 아덴만을 통제하고, 1507년 호르무즈를 정복하여 페르시아만을 통제하였다.

포르투갈의 인도총독 (1509-15): 1509년 알부케르크는 인도의 총독으로 모슬렘 세계를 지배하고 양념류 무역을 통제하였다. (1) 고아 정복(1510): 알부케르크는 함선 23척과 병력 1200명으로 포르투갈 함대를 편성하여 고아를 공략하여 모슬렘 6,000명을 사살하고 요새화하며, 힌두 인구의 지원을 다시 얻었다. 따라서 고아에서 포르투갈의 양념 거래가 보장되었다. 상인들의 불편을 해소하기 위해 포르투갈의 주화를 발행하여 영토적 정복을 알리는 기회가 되었다. (2) 말라카 정복(1511): 알부케르크는 900명의 포르투갈 병력과 200명의 힌두 용병을 18척 함대로 편성하여 말라카를 정복하였다. 말라카는 카이로나 메카에 이르는 전략적 요충지이다. 포르투갈의 상선은 1513년에 처음으로 중국 광저우에 도착하였고, 1556년에 마카오에 창고를 짓고 정착을 하였다. (3) 몰루카(1513): 양념 산지인 몰루카 섬들에 포르투갈 상선이 도착하였다. 포르투갈 상인들은 터네이트 왕과 계약하여, 정향나무 수집을 위하여 안전한 보관 창고를 지었다. (4) 알부케르크는 양념류를 산지로부터 수집하여 선적하고, 일부는 창고에 보관하며, 배들이 안전하게 운항하여 리스본에 도착하는 과정에서, 포르투갈 무역 독점을 보장하도록 공급망의 체제를 발전시켰다.

태평양과 아시아 (1513-29): 태평양의 발견: 1513년 스페인의 바스코 데 발보아는 오늘날 콜롬비아의 아칸디 남쪽에서 반대편 해변에 금이 많이 있다고 우연히 들었다. 그는 추장들에게서 들은 정보로, 190명의 스페인 인력, 소수 원주민 안내자, 사냥개 무리와 함께 파나마의 이투무스를 건넜다. 몇 척의 범선과 10개의 원주민 카누로 해안을 항해하고 육지에 접근하였다. 탐험대는 1,000명이 증원되어 추쿠마쿠 강을 따라 전투하며 밀림을 지나 산을 오르곤 하여 다른 바다를 볼 수 있었다. 동년 9월 25일 발보아는 선두에서 수평선 위에 있는 큰 바다를 처음 발견하였다. 110 km을 더 전진하여 그는 새로운 바다를 보고 “마 델 수르”라고 명명하였다. 한편 포르투갈은 아시아에서 루손섬을 발견하였다.

페르디난드 마젤란 (1480-1521): 마젤란은 포르투갈의 해군 장교로서 마누엘 1세에게 인도에 도착하는 세계 일주 계획을 지원해 달라고 요청하였으나 거절당했다. 스페인의 찰스는, 인도네시아 양념 섬 몰루카에 이르는 서부 항로를 발견하는 데 관심을 가지고, 이를 승인 지원하였다. 마젤란 탐험대는 5척의 선박에 270명의 선원으로 보급을 싣고 1519년 9월 스페인을 출항하여, 대서양을 건너 남아메리카 리우데자네이루에 도착하였다. 겨울을 지내기 위해 세인트 줄리언에 정박하자 세 선장이 반란을 일으켜 한 사람은 살해되었고, 마젤란은 두 선장을 참수하였다. 겨울 동안 산티아고호는 폭풍으로 손실되고 1520년 10월 항해를 계속하여 지금의 마젤란 해협을 탐험하는 동안, 산 안토니오호는 스페인으로 돌려보냈다. 나머지 함대는 11월 말 태평양에 진입하여 1521년 3월에 (3개월 20일 항해) 괌섬에 도착하였다. 긴 항해로 인해 식품과 물이 소진되었고, 약 30명이 대부분 괴혈병으로 사망하였다. 마젤란 함대는 곧 필리핀에 도착하여, 한 달 반 동안 체재하면서 최초로 미사를 드렸다. 마젤란과 탐험대원은 4월 27일 막탄섬에서 원주민을 힘으로 누르려고 하자, 싸움이 벌어져 제압하였으나 마젤란은 살해되었다. 그의 사후 공동 지휘관 2명이 지휘하여 함대는 필리핀을 출항하여 1521년 11월 몰루카 양념 섬에 도착하였다. 선박 2척 중에 항해 가능한 빅토리아호에 수집한 양념을 싣고 출항하여 1522년 9월에 스페인에 도착하였다. 탐험대 270명이 출발하여 2년의 항해에서 18명이 생존해 돌아왔고, 그 후 17명이 추가로 생존하여 스페인에 도착하였다. 마젤란은 항해기술과 강한 인내심에 대해 명성을 얻었고, 최초의 세계 일주는 지리적 발견의 시대에 가장 위대한 항해로 간주하였다. 마젤란은 항해하면서 태평양을 명명하였고, 마젤란 해협은 18세기에 그의 정신과 명예를 기리기 위하여 명명되었다.

동서 탐험의 충돌: 포르투갈은 1525-28년 사이에 몰루카 군도에 여러 개의 원정대를 보내어 여러 섬을 탐험하였다. 어떤 탐험대들은 파푸아뉴기니 북서쪽까지 도착하였다. 다른 한편으로, 마젤란의 탐험 이후, 스페인의 찰스는 데 로아이사의 지휘로 제2 탐험대를 보내 몰루카 군도에 도착 요새를 구축하자, 테르나테에서 기존의 포르투갈 원정대와 대치하였다. 1년간 전투로 스페인이 패퇴하였으나, 분쟁은 10년간 지속하였다. 양국은 3명의 천체학자, 3명의 지도제작자, 3명의 항해사, 3명의 수학자로 각각 위원회를 구성하여 협의하였고, 1529년 존 3세와 찰스 5세는 자라고자 조약으로 몰루카 군도는 포르투갈에, 필리핀은 스페인에 귀속시켰다.

스페인 정복자들 (1519-32):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군인, 탐험가, 정복자들은 아메리카, 대양주, 아프리카, 아시아로 항해하여 영토를 정복하고 통상을 개방하였다. 그들은 16, 17, 18세기에 스페인과 포르투갈에 많은 식민지를 가졌다. 1492년 콜럼버스가 서인도제도에 도착한 이래, 스페인 서부와 남부 귀족들은 캐리비안 군도에서 점차 아메리카 제국을 건설하였다. (1) 디에고 벨라스케스는 1511년 쿠바를 정복하여 바라코아에 스페인 정착촌을 형성하고 1514년 총독이 되고 다음 해 하바나를 건설하였다. 페르디난드 2세는 에코미엔다 정착체제를 선포하고 봉건제도의 노동자 개념을 적용하였다. (2) 허만 코르테스는 1519년 600명의 병력으로 멕시코 베라크루스에 상륙하여 아스테카 제국을 정복하고 총독이 되고, 1541년 스페인으로 복귀하였다. (3) 페드로 다 빌라는 1519년 아리엔을, 1524년 파나마시를 건설하여 수도로 정하고, 페루 정복과 남미 서부해안 탐험의 전초기지로 삼았다. (4) 프란시스코 피자로는 파나마 남부를 탐험하여 1526년에 페루를 발견하고, 본국의 승인을 받아 1529년 이를 정복하였고, 1542년 총독부가 설치되어 총독이 되었다. (5) 스페인은 페루에서 은광을 발견하였고, 페루와 멕시코는 1561-1630 기간 매년 평균 200t의 금은을 스페인으로 선적하였다. 스페인은 새로운 농산물, 즉 설탕, 염료, 바닐라, 나무껍질, 감자, 커피, 옥수수, 담배를 아메리카로부터 수입하였다.

포르투갈 무역: 다 가마는 1498년 인도의 칼카타에 도착한 이후 포르투갈은 양념 무역을 독점하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인도의 고아에 무역기지를 건설하여, 유럽상품을 고아로부터 마카오로 운송하여 비단, 비단제품, 관동자기를 선적하고, 일본 나가사키에 가서 팔면서 은을 매입하여, 되돌아오면서 마카오에서 매도하였다. 포르투갈 상인은 양념류, 보석, 비단, 양탄자, 상아색, 가죽, 향수를 아시아에서 수입하여 큰 이윤을 남기고 유럽에서 팔았다. 스페인은 라틴 아메리카 무역을 독점하고, 포르투갈은 극동과의 무역에 지배적이었으나, 그들 무역의 독점은 동인도에서 화란의, 서인도에서 영국과 프랑스의 도전을 받았다.

TO BE CONTINUED

(d) 종교전쟁과 30년 전쟁
(e) 국가의 건설: 절대왕정과 공화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