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요십조와 지역차별설, 역사는 누구의 편에 서 있는가
권오득
요즘도 고려 태조 왕건의 훈요십조를 두고 “지역차별의 원조”라는 말이 심심찮게 등장한다. 특히 특정 지역을 배척하라는 내용이 있었다는 주장까지 덧붙여지며, 오늘날의 지역 갈등을 역사적 숙명처럼 설명하려는 시도도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과연 이것이 역사에 충실한 해석일까.
먼저 분명히 해야 할 사실이 있다. 훈요십조의 원문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가 알고 있는 내용은 《고려사》에 후대 사관이 요약·정리해 기록한 것이다. 즉 태조의 육성이 그대로 전해진 문서가 아니라, 정치적 환경과 사관의 인식이 반영된 후대 기록이라는 점에서 이미 해석의 여지가 크다.
논란이 되는 대목은 이른바 ‘금강 이남 인물 등용 배제’와 같은 문장이다. 이를 근거로 태조가 특정 지역을 차별했다는 주장이 나온다. 그러나 다수의 역사학자들은 이 부분을 후대 가필(加筆) 혹은 정치적 재해석의 산물로 본다. 고려 중·후기 서경 세력과 개경 중심 권력 간의 치열한 정치 투쟁 속에서, 특정 지역 세력을 견제하기 위한 논리가 태조의 유훈이라는 권위에 기대어 덧붙여졌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이러한 지역차별설은 태조 왕건의 실제 통치 행태와 정면으로 충돌한다. 태조는 후삼국을 통합하는 과정에서 지역을 가리지 않고 인재를 등용했고, 전국 유력 호족과의 혼인 정책을 통해 철저히 통합을 추구했다. 만약 그가 특정 지역을 배척할 의도를 가졌다면, 이러한 포용 정책은 설명이 되지 않는다.
훈요십조의 본래 취지는 지역 차별이 아니라 국가 운영에 대한 경계와 절제의 원칙에 가까웠다. 불교를 국정의 정신적 기반으로 삼되 정치가 종교에 예속되지 말 것, 외세를 경계할 것, 수도와 제도를 쉽게 바꾸지 말 것 등은 모두 국가의 안정과 지속성을 위한 당부였다. 여기에는 분열이 아니라 통합의 철학이 깔려 있다.
그렇다면 왜 오늘날까지도 지역차별설이 반복되는가. 이유는 단순하다. 현재의 갈등을 과거의 탓으로 돌리는 것이 가장 쉽기 때문이다. “원래부터 그랬다”는 말은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되는 가장 편리한 논리다. 그러나 역사는 갈등을 정당화하라고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를 성찰하고 미래를 바로 세우기 위해 존재한다.
훈요십조를 지역차별의 근거로 읽는 순간, 우리는 태조 왕건의 정신이 아니라 후대 권력과 오늘의 정치가 만들어낸 왜곡된 그림자를 붙잡게 된다. 그것은 역사를 공부하는 태도가 아니라, 역사를 이용하는 태도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또 하나의 분열 서사가 아니다. 태조가 진정으로 남기고자 했던 메시지, 곧 통합·절제·국가의 자주성을 오늘의 현실 속에서 어떻게 되살릴 것인가에 대한 성찰이다. 훈요십조는 갈라놓으라고 있는 것이 아니라, 나라를 바로 세우기 위해 경계하라고 남긴 유훈임을 다시 새겨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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