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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한도와 정황계를 통해보는 스승과 사제관계

양곡(陽谷) 2024. 5. 11. 17:29

세한도와 정황계를 통해보는 스승과 사제관계 

스승의 날이 가까워 온다. 인터넷 시대라 책읽기보다 유투브를  통해 정리된 정보를 듣는 기회가 더 많은 시대가 되었지만 과거에는 서당에 가서 훈장 밑에서 서책을 통해서 배웠다. 아무리 지체높은 사람도 자기 자녀는 학식이 높은 선비에게 부탁하여 교육을 시켰다. 

학문으로 일가를 이룬 학자들의 경우 지도교수(Doctorfather)가 있어서 방향을 잡아주거나 조언을 통해 홀로 서기를 도와주는 사부의 역할을 한다.조선시대에 많은 학자들이 학맥과 학풍을 이어왔고 학단을 이루었다.율곡학파,퇴계학파 같은 것이다.하지만 실제로 이러한 학파도 직접강의를 듣고 배운 것이라기보다 자기 마음 속에 율곡의 학설을 이어받겠다,또는 퇴계의 학설을 추종하겠다는 것을 품고 연찬하여 후세인들이 그렇게 불러주는 경우도 많다.

조선시대 대표적인 스승과 제자의 빛나는 관계를 든다면 완당 김정희와 제자인 우선 이상적의 세한도에 얽힌 이야기가 유명하다.대개 스승이나 모셨던 분이 유배를 가거나 곤경에 처하면 대부분의 경우 외면하거나 관심을 갖기가 어려웠다.그래서 우리 속담에 ‘정승 말 죽으면 문전성시라도 정작 정승이 죽으면 문상객이 적다’는 말이 유행했다.우선 이상적은 스승이었던 김정희가 청나라 동지부사로 사행준비를 하다가 느닺없이 정치적 옥사에 징치되어 제주도에8년 3개월간 유배를 당했을 때도 전적과 필요 물품을 사서 완당에게 보냈다.

완당 김정희는 이에 감동을 받아 ‘세한연후 지송백지후조야’라하여 논어 자한편에 나오는 구절을 인용하여 그림을 그려 주었다.계절이 추워진 후에야 소나무와 잣나무의 푸름을 알 수 있다고 하여 제자 이상적이 중국을 오가면 어렵게 구한 서적을 스승에게 전해준 고마움을 전했다.그림 자체야 사실 보잘 것 없는 외딴 초가집 양 옆에 소나무 잣나무 몇그루를 그려 넣은 삭막한 시골풍경인데 이상적이 중국 문인들의 감상문을 적은 것을 덧붙여 군자다움과 의리론 때문에 유명해졌고 국보180호가 되었다.

이익을 쫒는 소인배가 아닌 의리를 존중한 제자 우선 이상적의 처세를 높이 칭송한 것은 그만큼 세상에서 드문 일이었기 때문이다.세한도는 후치츠카 치카시가 일본에 갖고 갔다가 소전 손재형이 찾아왔던 과정이 유명하여 그래서 잘 알려졌다. 하지만 다산 정약용과 그의 제자 황상에 얽힌 고사는 널리 알려져 있지 않다.한양대학교 국문과 정민교수가 “삶을 바꾼 만남”에서 다산 정약용과 그의 제자 치원 황상에 관한 사제간의 만남에 대하여 감동적인 이야기를 절절하게 엮어내고 있다. 

이 책은 다산과 황상의 만남과 제자가 되어가는 과정을 중심축에 두고 배경에 다산의 아들들과 정황계를 맺어 우정을 이어가고 있는 모습을 밀도있게 그렸다.불교화엄경에 나오는 모든 것은 연관이 있다는 인드라망처럼 두 집안이 계를 맺어 우정을 나누는 모습은 사제의 정리가 떨어진 요즈음 두텁고 질박한 정의 세계를 찾아준다. 

정다산의 제자는 18명이었는데 헤어질때 다산계를 조직하였지만 말년에는 전부 떨어져 나갔다.그 이유는 글공부를 배웠던 제자들은 다산이 관직에 복직하면 제자들을 끌어 줄 것으로 기대했지만 다산은 벼슬을 등지고 자연 속에서 책이나 보니 실망하여 떠난 것이었다.오직 다산초당 시절 스승에게 삼근계를 받고 평생을 되새기며 학문에 힘쓴 황상은 스승의 가르침을 저버리지 않고 농사를 지으면서 학문에 정진하였고 다산이 해배 후 18년 만인 회혼식 직전에 두물머리에서 재회를 했지만 마지막 생전 이별이 되고 말았다. 

황상은 강진으로 내려가다가 스승의 별세 기별을 받고 되돌아 장례를 치른 다음 상복을 입은 채 강진으로 돌아왔는데 다산의 큰 아들 정학연은 황상에게 편지를 썼다.다산이 세상을 하직하고 10년째 되는 해인 1845년 봄에 황상은 두 번째로 상경을 하여 마재를 찾았다.황상이 쉰여덟,정학연이 예순셋이었다.이 때 정학연은 황상에게 정씨와 황씨 두 집안끼리 정황계를 맺기를 제안하였다.두 집안의 자손의 이름과 자호를 쓰고 정황계를 맺은 사연을 기록하고 각각 한 벌씩 나눠 갖게되었다.정학연이 적은 친필 계안이 한국학중앙연구원에 소장되어 전해온다. 

스승과 제자의 관계에서 이보다 더 질박하고 큰 울림을 주는  사연은 없다.치원 황상은 정학연의 소개로 인해 장안의 명류들과 깊이 교유하게 되었다.이러한 황상은 다산의 제자였던 초의선사를 통해 완당 김정희와도 이어졌다.다산의 큰아들 정학연은 1853년 세상을 떴고 농가월령가를 쓴 정학유는 1859년 세상을 떴다.그리고 치원 황상은 1870년 여든셋의 나이로 별세했다.두 집안의 후손들은 지금도 선대의 뜻을 이어 교유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