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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가 가출하는 시대/김용원

양곡(陽谷) 2024. 5. 12. 15:59

#935,토요漫筆/ 이제는 남자가 가출하는 시대/김용원
  유튜브에서 가출한 한 젊은이의 경험담을 들었다. 그는 트렁크 하나 딱 들고 집을 나서는 순간 곧바로 천국이 다가왔다는 말로 당시의 심정을 고백했다. 5백만 원이 넘는 돈을 벌어다 줘도 항상 아내로부터 모자라다는 투정을 들어줘야 했다. 직장에서 하루종일 시달리고 집에 오면 곧바로 음식을 만들어야 하고 청소를 해야 했다. 그런 생활이 반복되던 어느 날 갑자기 집이 싫어졌다. 그래서 트렁크 하나 딱 들고 집을 나섰단다.
  지금은 2백만 원으로 살아가지만 모자람이 없다는 말이다. 딸까지 제 엄마가 싫다며 왔으므로 두 식구가 사는데도 그렇단다. 그런데다 재혼은 하지 않고 친구로 애인으로 역시 혼자인 어느 여인과 오랫동안 사귀어 오는데 우선 부담이 없고 성격이 맞아 행복한 나날이 곁들여지고 있단다.
  그런 투의 말을 전에도 몇 차례 들은 바 있다. 옛날에는 그런 말을 들을 때면 고개를 가로저었다. 우선 남자는 가정을 꾸려야 했다. 그래야 핏줄을, 가문을 이을 수 있고, 그것은 어길 수 없는 대한민국 남자로서의 의무였다. 그런데다 조상의 제사를 모셔야 비로소 남자 구실을 한다고 여겼다. 그렇게 배웠다. 또 친인척을 만나기라도 한다면 가정을 꾸리고 자식들을 길러내며 늙어가는 모양을 보여야 비로소 제 구실을, 남자 구실을, 사내 구실을 하는 것으로 여겼다. 한마디로 한 가정의 기둥 역할을 사회질서에서 강요받았다.
  그러나 이제는 아니다. 제사를 안 지내도 된다. 거의 다 그러기 때문에 누구도 나무라지 않는다. 가문을 이을 이유도 없어졌다. 본관이 어디고 선조 누구의 몇 대 자손이고 어쩌고 족보를 몰라도 된다. 묻는 것 자체가 실례가 되는 세상이다. 성씨도 국가에서 법으로 허락만 한다면 얼마든지 바꾸고 싶다는 젊은이들도 많이 만났다. 그런데다 친인척도 만날 이유가 없어졌다. 부모가 죽으면 장례예식장에서 돈만 주면 만사 오케이, 척척 해결해 준다. 화장터에 끌고가 화장해 뿌리는 것만도 다행이다.
  혼사도 마찬가지다. 이제는 오지랖이 넓어도, 고위직에 있어도 축의금을 바랄 수 없다. 또 자식 결혼을 시키면 그길로 각자 알아서 살아야 한다. 효도를 바라면 그건 상식에 어긋난다. 되레 자식들이 결혼하고서도 재산을 탐내고 연금에 눈독들이며 진드기처럼 달라붙어 빨아먹지 않으면 다행이다. 또 제가 낳은 자식들을 늙은이들에게 맡기지 않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다 여겨야 한다.
  그러저러한 사회환경에서 이제는 남자라고 해서 돈은 돈대로 벌어대면서 대우도 받지 못하고 지천을 먹으며 창살없는 감옥에 갇혀 살 이유가 없다는 생각이 팽배해지고 있다. 단칸방에서 정부미 밥에 콩나물국으로 끼니를 때우던 부모 세대는 이제 유물이 되어 버렸다. 유모차도 없고 일회용 기저귀도 없이 날마다 똥걸레를 빨며 등에 아이를 업고 시장을 보고 농사를 짓고 장사를 하던 부모들의 고단한 삶 또한 이제는 박물관에서 흑백사진으로나 볼 수 있다.
   그러니 굳이 아등바등 사는 것보다 다 자란 숫사자처럼 무리를 떠나 혼자 초원과 숲을 누비거나 떠난 것들끼리 몰려다니며 자유롭게 사는 게 정형화되어가고 있지 싶다. 그 한 예로 서울에 직장을 가진 세 총각이 1호선 의정부 쪽에 방 세 칸짜리 아파트를 얻었단다. 그러고는 그 아파트에서 같이 사는데 가능하면 각자가 알아서 음식을 해먹고 모든 부대비용은 철저히 엔분지 일로 공평하게 부담한다. 그들은 모두 만족하고 있으며 굳이 결혼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고 있다 한다. 이런 게 현실이고, 이제는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혹시 인구가 감소하여 나라의 운명이 바뀔 지경이 된다 한들 이제와 도도한 흐름을 우리가 어떻게 막아내겠는가. 또한 그즈음이 될 때는 우리(늙은이)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것이므로 다행으로 생각하자. 더구나 난 부활을 믿지 못하니까 더욱 안심이다.
  /어슬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