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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사17-계속 3/재미원로학자 Hugo W. Kim

양곡(陽谷) 2023. 8. 1. 22:24

문명사 연재 17. 18세기 유럽의 경제와 사회 (Continued 3)

(d) 재정과 은행업

웨스트팔리아조약(1648)은 새로운 세계질서로 유럽 국가의 주권과 영토를 인정하였고 새로운 국가들은 국가를 국민적 통합수단으로 이용하였다. 18세기에 유럽의 5대 강국은 여러 전쟁에서 동맹을 형성하여 세력균형을 유지하면서 자원획득을 위해 영토를 확장하려 하였다. 이로 인하여 유럽 국가 간의 전쟁은 오스트리아계승전쟁, 7년 전쟁, 나폴레옹 전쟁 같이 규모가 크고 기간이 긴 전쟁을 하여 전쟁비용이 늘어나 국가부채가 급격히 증가하였다. 이를 충당하기 위하여 국가가 사유재산을 강제로 징수할 수 없으므로 납세자가 의사결정권을 위임한 의회(영국 하원, 프랑스 삼부회의) 승인이 필요하였다. 일반적으로 세금에는 직접세(소득, 생산, 재산, 인두세)와 간접세(소비세와 관세)가 있다. 세금의 비율은 경제여건, 국민적 합의, 세금 평가와 징수방법 등에 따라 국가마다 상이하다. 세금 면제는 봉건시대부터 잔존해 왔으나 군대의 직업주의가 일어나면서 전쟁에 참여하던 귀족들은 역할이 없어 과거의 면세 특권이 정당화되지 못하였다.

구제도가 파괴되면서 세금은 특권 없이 국민 모두에게 일반화되었다. 국가들은 세금징수를 중앙통제하였고 신세계 식민지들은 특정 세금을 지방관리가 징수하도록 분권화하였다. 국가가 전쟁을 위하여 거대한 자금이 필요할 때 재정기관은 세금을 징수하고 금융기관은 증가 하는 국가부채를 관리하였다. 화폐가치 저하는 주조화폐에 포함된 귀금속의 양을 감소하여 화폐가치를 저하하는 것으로, 국가는 부채를 줄이기 위하여 이 방법을 이용하였다. 국가의 재정기관은 파산을 피하고자 네덜란드, 영국, 프랑스의 금융시장에 장기채권을 팔았다. 한편 아메리카의 식민지는 자신들의 자원과 환경에 대해 재정과 금융기관을 적용 하였다. 이를테면 영국 식민지 정부는 해외 무역에 대해 관세와 소비세를 징수하였고, 지방정부는 재산(동산과 부동산)에 대해 직접세를 징수하였다. 식민지 정부는 비용을 충당하기 위하여 신용장과 토지은행 청구서에 기초하여 금융제도를 발전시켰다. 미국독립 이후에 신생 미합중국은 영국으로부터 선진한 재정 및 금융 제도를 바로 도입하였다. 라틴아메리카 식민지들은 금과 은을 화폐로 사용하였고 독립 후에는 지폐를 사용하였다.

영국의 재정과 금융기관: 헨리 8세가 종교개혁으로 수도원을 폐쇄 하고 거대한 재산을 대중에 경매할 때에 농촌 부자들이 저가로 토지를 매입하였고, 귀족 토지를 매수하여 새로운 부유한 평민(Gentry) 계층을 형성하였다. 이들은 자녀들을 옥스퍼드나 케임브리지 대학에 보내 최고 수준의 교육을 받아 사회 전문분야의 지도자가 되었고 청교도로서 정치 참여를 하였다. 1625년 찰스 1세가 즉위할 시기에 영국 하원의 약 3/4 의석이 젠트리 계층의 청교도가 차지하였고, 이들은 왕권신수설에 도전하고 납세자 동의 없는 세금부과에 반대하였다. 명예혁명(1688)으로 입헌군주제의 의회가 재정과 금융 업무를 맡고, 세금부과의 합헌성과 자본시장에서 자유경쟁을 보장하여 경제를 활성화하였다. 영국은 1690-1815 기간에 총 8회의 전쟁을, 프랑스와는 65년간 전쟁을 하였다. 전쟁으로 인해 국가 총생산의 부채비율은 1690년 6%에서 1730년 100% 1790년 185% 1815년 220%로 증가하였고, 그 후 오랜 평화와 번영으로 20세기 초 35%로 감소하였다.

영국은 17세기에 런던에서 금세공은행가들(Goldsmith Bankers)이 개업하여 저축, 융자, 자금회전, 환어음 발행으로 업무를 확대하였다. 의회는 1694년 프랑스와 전쟁비용을 마련하기 위하여 유한책임의 주식회사로 영국은행(Bank of England)을 창립을 허용하였다. 영국은행은 은행권과 주조화폐 발행을 독점하고 예금업무를 허용하며, 국채를 발행하고 연부금이 허용되며, 정부 거래은행으로 은행들의 은행이 되었다. 재무혁명의 결정적 요소는 거래비용을 절감하고 은행 간 거래규율을 인지하는 부채의 상호결산 체제에 있었다. 1797년 영국은행이 은행권과 코인 부족으로 현금 지불을 중지할 때 의회는 시골 은행(Country Banks)을 창립하여 저가 은행권 발행을 허가하였다. 영국은 1553년 최초 주식회사를 허용 하고 1600년 동인도회사를 창립하였으며, 1720년 남해회사 거품은 재정적 파멸을 가져왔다. 의회는 1826년 주식은행(Joint-Stock Banks) 설립을 허가하여 수출을 지원하는 은행지점을 지방에 개설하였다. 산업화는 집중적 투자를 요구하지만, 기업성공에 확신이 생길 때까지 점진적이다. 자금의 원천은 국내 저축과 차관이었다. 영국의 투자는 18세기 후반부터 서서히 증가하였으나 아직은 소규모였다. 고리대금 법은 1714-1832 기간에 상업 융자에 이자를 5% 미만으로 제한하여 국제 무역과 투자를 촉진하였다.

도표(생략): 인구, 국민총생산, 개인소득, 세금률 - 프랑스와 영국(1715 & 1788)

프랑스의 세입과 부채금융: 세금은 직접세와 간접세로 직접세는 주로 토지와 토지소득에 대한 세금으로 성직자와 귀족은 면제되고 평민만이 납세하며 정부의 세리가 징수하였다. 간접세는 정부 계약 회사(Tax Farming)가 세금을 평가하고 징수하여 집행에 공평성이 문제시되었다. 위 표에서 프랑스는 국가 총생산에 대한 세금비율은 1715년 9.4% 1788년 6.8%이며 영국은 12.5%를 유지하였다. 프랑스는 영국보다 세금비율이 낮아, 북방과 동쪽 영토를 확장하여 각기 다른 세금비율을 적용하였다. 성직자와 귀족 들은 면세 되었고 특수 이해집단이 재정정책의 개혁을 방해하였다. 프랑스는 납세자의 대표기관이 없고 재산권 보장이 불안하고 세금 적법성이 부족하여, 새로운 세금에 대해 조세저항이 있었다. 위의 표에서 국가 총생산에 대한 세금비율은, 프랑스에 면세받는 특혜층이 많아 실제 납세자의 개인소득 대 세금비율은 더욱 높아진다.

프랑스 주조화폐는 금과 은을 사용하였고 금 1온스당 은 14.5 온스였다. 왕실은 주조화폐의 금은 함량을 감소하여 평가절하해 왔으며 주조화폐의 수요가 증가하자 1704년 대출 재무(Loan Treasury)를 신설하여 화폐 증명서를 국채형식으로 발행하여 년 6-10% 이자를 요구하였다. 재무상에 임명된 존 로는 프랑스은행(Banque Generalle)을 창설하였다. 그는 미시시피회사 설립과 운영에 개입하여 주가 급락으로 많은 피해자가 발생하고 사회문제가 되어 퇴출당하였다. 프랑스는 계속되는 전쟁으로 부채가 증가하여 국가파산에 직면하였고, 새로운 세금을 승인하는 삼부회의를 소집하여 진행하는 과정에서 불만 세력에 의해 프랑스혁명으로 발전하였다.

네덜란드와 무역금융: 1648년 웨스트팔리아조약으로 7개 주의 네덜란드가 연합 공화국으로 독립하였다. 증가하는 해양세력과 자유시장의 출현으로 네덜란드 공화국은 번성하였고 17세기에 암스테르담은 북유럽에서 상업의 중심지가 되었다. 7개 주 가운데 예산의 58%를 내는 홀란드가 국가를 주도하고, 중앙정부는 세금을 부과할 권리가 없고 수출입 상품에 관세(수출액의 3~4%)를 징수하였다. 네덜란드는 부동산세와 잡세로 상속세, 인지세, 부자세, 소비세를 부과하였다. 1630년대 네덜란드 세수의 60%가 소비세에서 왔다. 1713년 네덜란드의 국가부채가 연간 총생산의 200%였으며 부채 이자가 연간 세수와 비슷하였다. 차용인들은 단기채권, 장기채권, 연부금으로 상환할 수 있었고, 부담을 줄이기 위하여 정부는 채권을 저리 연부 상환으로 전환하였다. 18세기에 네덜란드는 금융 분야가 크게 발전하였고, 암스테르담 외환은행은 자금의 적립과 송금을 할 수 있었다. 암스테르담은행이 1790년 지급불능이 되어 시 정부가 은행을 인수하였다.

네덜란드의 무역과 재정을 4단계로 설명하면, 제1단계: 네덜란드 서인도회사(WIC) 피에트 헤인 제독은 1618년 쿠바 해안에서 스페인의 보물선을 나포하였다. 네덜란드는 1628년 뉴욕에 270명이 정착하고, 1630년 브라질의 퍼남부코를 정복하여 식민지에 설탕과 면화를 재배하고 유럽에 수출하였다. 1654년까지 아프리카 노예 3만을 매년 브라질로 수송하였다. 제2단계: 브라질과 뉴욕을 상실하고 쿠라카우, 세인트 유스타티우스, 뉴욕을 식민지가 아닌 무역 중심으로 바꾸고 바베이도스와 마르티니크의 담배농장을 설탕으로 바꾸었다. 네덜란드는 식민지에 공산품을 팔고 아프리카 노예를 공급하였다. 제3단계: 1680년 이후 수리남과 기니를 정복하고 농장에 노예를 공급하여 식민지를 건설하였다. 암스테르담 상인은행들은 농장에 연리 6% 이자로 신용대출을 해주었다. 제4단계: 네덜란드는 17세기에 세계 무역과 수송을 지배하여 풍부한 자본을 축적하고 안전하며 이윤이 많은 외국 국채에 투자하였다. 나폴레옹 전쟁을 전후하여 부도가 유럽을 휩쓸 때 암스테르담은 미국 연방정부와 철도회사에 투자 하였고 동인도 지역에 많은 투자가 이루어졌다. 1895 년 네덜란드의 외국투자는 GNP의 1.75 배였으며 1914년 총 해외투자의 40%를 미국에 투자하였다. 카리브해의 총생산에서 네덜란드가 생산하는 지분은 1775년에 5% 정도였다.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재정과 금융: 스페인 인구는 흑사병과 이민의 영향으로 1600년경 약 800만에서 1650년 750만으로 감소하였다. 18세기 스페인의 세입은 5개 범주에서 왔다. (1) 각 주로부터 영토별 할당으로 대부분 소비세로 징수되어 전체 세수의 20%였다. (2) 해외 무역으로부터 오는 세입은 전체의 15%였다. (3) 담배, 소금, 후추, 소다, 술 등의 독점 판매 세입은 전체의 15%였다. (4) 아메리카의 식민지 (멕시코시, 리마,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오는 송금액은 전체 세입의 15~25%였다. (5) 십일조와 여타 수입은 약 10%였다. 프랑스를 모방하여 감독관 제도를 식민지에 적용하여 개혁에 성과를 거두었다. 필립 5세는 지방 금화를 평가절하하면서 국제거래는 구 통화를 사용하였다.

포르투갈은 16세기에 동인도 무역을 지배하였으나 스페인이 합병한 기간 (1580-1640) 은 국부가 감소하였다. 독립한 후에 상비군 보병 25,000과 기병 5,000을 유지하는 비용이 증가하여 스페인 통치 시의 총세입보다 65%가 많아 리스본은 임대, 노동 소득, 투자와 상업활동에서 오는 소득에 1641년부터 직접세를 부과하였으며, 1654년부터는 토지와 가옥에 직접세를 징수하였고 교회와 자선기관은 면세하였다. 직접세로 징수한 금액은 1660-81 기간에 전체 세입의 20% 정도였다. 무역적자로 은화가 유출되었으나 평가절하가 있었고 곧 무역의 균형을 찾았다.

1690년대부터 브라질 골드바와 함께 브라질 금화가 리스본에 유입되었으나 1714년부터는 본국 금화만 사용하게 하였다. 1699-1788 기간에 브라질에서 유입된 골드바의 약 1/3은 리스본에서 금화를 제조하였다. 카스틸 은화가 포르투갈에 통용되어 1785년까지 포르투갈은 금은 복본위제를 사용하였다. 브라질로부터 금의 유입은 1689-1759 기간의 국내총생산의 6배가 되었으나 물가에 크게 영향을 미치지 아니하였다. 리스본은 1755년 대지진, 대서양 무역의 감소, 브라질 금광의 쇠퇴, 7년 전쟁의 참전으로 전비가 증가하여 어려움에 직면하였다. 나폴레옹 전쟁 기간에 리스본은 전비를 충당하기 위하여 성직과 귀족에게 주어진 면세 특권을 폐지하고 그들도 소비세를 내도록 하였다. 교회도 세금을 냈다. 정부재정을 충당하기 위하여 국채를 발행하고 소액 채권은 금은화와 함께 통용되었다. 프랑스의 침공 시 지폐는 60%까지 할인 거래되어 국고의 손실을 가져왔고, 국가의 부채가 증가하여 왕실의 재산을 팔거나 차관으로 충당하였다.

신세계의 재정과 금융: 미국혁명 후 지방정부는 재산세와 인두세, 연방정부는 관세, 토지 매각세, 소비세로 운영하였다. 1790년대에 연방정부는 총 세수의 60%, 주 정부는 10%, 지방정부는 30%를 사용하였다. 전시에 발생하는 재정 적자는 국채를 발행하여 충당하였으나 평시의 흑자운영으로 1830년대에 부채는 탕감하였다. 한편 누적되는 무역적자로 금본위 유지가 어려워 신용장을 시장에 도입하여 지폐로 발전하였으나 과다 발행으로 1730년대와 1740년대에 인플레이션을 가져왔다. 화폐 조례(1751)로 뉴잉글랜드 지역에서 지폐를 사용하였고, 대륙 의회는 1775년 대륙지폐 발행을 허용하였다. 알렉산더 해밀톤(1757-1804)은 1789년 미연방 초대 재무장관으로 부채가 자본시장에 접근하는 금융 제도를 확립하여 정부와 사기업이 주식(자산)과 채권(부채)을 발행하여 자금을 융통할 수 있게 하였다. 그는 1791년 미연방은행을 설립 하여 관세와 주류소비세로 자금을 조달하였다. 독립과 함께 연방정부는 금은 복본위제를 채택하여 1달러 가치를 금은으로 정하고, 은행권과 예금은 경화로 환전되게 하였다.

캐나다는 프랑스가 통치하였으나 1763 파리조약으로 영국이 전 인구를 통치하였다. 미국혁명 후 영국 지지자 32,000-40,000은 영국령 노바스코샤와 퀘벡으로 이주하였다. 캐나다 조례(1791)는 식민지를 온타리오(Upper)와 퀘벡(Upper)으로 분리하였다. 식민지 정부는 무역 관세, 토지소득, 잡부금을 징수하여 비용으로 충당하였다. 캐나다도 금은 복본위제를 사용하였고 1812년 전쟁을 지원하기 위하여 최초로 지폐를 발행하고, 정부는 2가지 어음을 통용하게 하였다. 고가 어음은 액면 $25 이상으로 연 이자율 6%이며 저가 어음은 $1-$20 이하의 액면으로 이자가 없었다.

멕시코는 18세기 말 세계에서 가장 큰 은생산 수출국으로 페소 은화는 카리브해를 포함하여 유럽, 중국, 인도에까지 전 세계에 통용되었다. 주요 세금수입의 분포비율은 채광세(생산의 10%) 22.06%, 사업세(소비세) 20.41%, 담뱃세(국가독점) 43.28%, 조공세(가구당 부과) 6.10%였으며, 나머지는 교회의 헌납이나 부채로 충당하였다. 세입의 지출은 식민지의 24개 지방정부에 비용지출, 뉴스페인에서 카리브해로 자금 이전, 멕시코에서 스페인 본국 정부로 자금 이전(년 500만 페소) 등 이었다.

TO BE CONTINUED
(e) 유럽 국가의 사회적 변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