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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사 연재 17-계속2/재미원로학자 Hugo W.Kim

양곡(陽谷) 2023. 7. 31. 09:45

문명사 연재 17. 18세기 유럽의 경제와 사회 (Continued 2)

(c) 상업과 수송

유럽의 식민지 무역(1500-1700): 토르데실라스 조약(1494)으로 케이프 버드 군도의 서쪽은 스페인이 동쪽은 포르투갈이 탐험하기로 약속하였다. 새로운 세계에 대한 지리적 무지에도 불구하고 두 나라는 조약을 존중하여 전자는 아메리카로 후자는 아시아에 진출하여 식민지나 무역기지를 건설하였다. 16세기의 무역 독점은 17세기에 후발 국가들에 의해 많은 도전을 받았다. 이 기간의 자세한 논의는 연재 12를 참조하기 바란다.

스페인은 뮌스터 조약(1648)으로 카리브해의 사바와 세인트마틴섬 등을 네덜란드에, 마드리드 조약 (1670)으로 자메이카 섬을 영국에, 리스위크 조약(1697)으로 성 도밍고 섬을 프랑스에 양도하였다. 스페인은 필리핀과 스페인령 동인도 제도를 1565-1821 기간에 멕시코에서 통치하였다. 파리조약(1763)으로 플로리다의 세인트 어거스틴을 영국에 양도하고, 뉴멕시코의 산타페는 멕시코에 흡수되었다. 스페인은 세 가지 세금(판매세, 은 생산세, 인두세)을 부과하여 은화로 바꾸어 본국으로 보냈다. 1500-1800 기간에 멕시코와 페루에서 생산한 은은 세계 생산량의 85%로 모두 유럽으로 보냈고 그중 약 30%가 향신료 무역적자로 인해 중국으로 유입되었다.

포르투갈은 아프리카 서안과 항구들을 탐험하여 상업적 이익을 추구하였고 1580-1640 기간에 스페인에 병합되었으나 후에 독립하였다. 기니에 설치한 무역공장, 앙골라에 건설한 노예무역항, 인도의 세일론과 말라카 무역기지를 네덜란드에 빼앗겼다. 인도 고아에서 지배력이 약해지자, 포르투갈은 브라질에 중점을 두고 방어하였다. 그들의 설탕 무역은 아메리카에서 리스본까지 전함이 호송하였다. 브라질은 리스본으로부터 포도주, 올리브 기름, 밀가루, 절인 대구를 수입하고 담배, 염료, 목재를 수출하였다. 채광한 금은 상파울루 지역에서 녹여 리스본으로 선적 경호하였고, 생산량은 1699년 725kg에서 1712년 14,500kg으로 증가하였다.

서인도 제도의 영토 분할은 1700년경 균형점을 찾아 해적 행위의 감소와 함께 유럽 외교 관계의 일반적 추세에 적응하였다. 영국과 프랑스 해군은 식민지에서 설탕, 담배, 면화, 돈벌이 작물(코코아, 커피, 생강, 염료)의 생산과 선적을 보장하였다. 북미 식민지는 서인도 보다 투자이익이 낮아 매력이 적었다. 스페인이 쇠퇴하는 시점에서 포르투갈은 브라질에 집중하였고, 네덜란드는 유럽의 권력투쟁에서 밀려났으며, 영국과 프랑스가 북미지역에서 영토 확장과 상업 독점을 위하여 (미국의 혁명 시기에) 식민지 대결에 진입하고 트라팔가르 해전 이후 영국해군력이 강화되었다.

인도양과 동인도 제도에서 포르투갈은 1510년에 고아에 최초 무역기지를 설치하고 리스본-아프리카-중동-인도-인도네시아-중국-일본을 연결하는 무역 전초기지를 1571년까지 확보하였다. 그들은 말라바르해안 및 세일론과 양념류 무역을 독점하여 1600년경까지 큰 이익을 남겼다. 포르투갈은 인도와의 양념류 무역과 아프리카 서안의 황금 유입으로 국가 세입의 절반 이상을 확보하였다. 그러나 양념류 재배자의 공급문제, 베네치아 무역로와 경쟁, 해상수송의 손실로 방해를 받았다. 포르투갈은 무역 망이 과도하게 길어 해군력이 방어할 수가 없었고, 네덜란드와 영국의 동인도회사가 경쟁에 들어와 전초기지를 확보하고 무역 망을 확대 함으로써, 포르투갈은 1661년 인도의 뭄바이를 영국에 양도하였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인도네시아의 반텐(1603)과 바타비아(1610)에 무역기지를 설치하고 후자를 수도로 정하였다. 네덜란드는 총독에게 준정부 권력을 부여하여 전쟁 선포, 범법자 투옥과 처형, 조약의 협상, 화폐 제조, 식민지 개설 권한을 허용하였다. 총독 잔 코엔은 반다섬의 모든 토착민을 축출하여 자국 이민자로 대치하고 정향나무와 육두구를 재배하여 수출하도록 하였으나, 이민을 원하는 사람이 극소수였다. 코엔은 유럽과 아시아 사이의 무역적자를 해소하기 위하여 아시아 지역 내 삼각무역을 활용하였다. 일본에서 은과 구리를 매입하여 인도와 중국에 팔고 비단, 면화, 팔찌, 섬유제품을 구매하여 아시아 지역에서 팔아 양념류를 구매하고 암스테르담으로 선적하였다. 삼각무역 이윤은 본국과의 무역적자 해소에 충당하였다. 네덜란드는 기독교 선교사들을 지원하고 유럽의 선진 상품을 팔아 새로운 기술을 아시아에 전파하였다. 또한, 네덜란드는 해상 봉쇄로 1640년 코친이나 세일론 등 포르투갈의 무역거점과 공장을 인수하고, 아시아 전역에서 그들의 무역기지를 일본까지 확장하여 17세기에 양념류 무역을 독점하고 큰 이윤을 얻었으나, 영국과의 경쟁에서 밀려났다.

영국은 네덜란드와 세 번의 전쟁(Anglo-Dutch Wars, 1652-74)을 하였고 항해법(Navigation Acts, 1651)으로 북미 식민지 수출을 영국이 독점하였다. 영국 동인도회사가 인도의 수랏-마드라스-뭄바이-칼카타에 무역의 전초기지와 공장을 건설하였다. 영국의 무역은 1634년 무굴제국으로 확대되고, 무굴 황제의 호의로 면화, 비단, 염료, 초석, 차 등의 거래에 1717년부터 관세가 면제되었다. 말라카 해협의 양념류 무역은 포르투갈이 독점해 왔으나 1640-41년에 그들을 축출하여 네덜란드가 지배하고, 1650-56년 이후부터 영국 동인도회사가 양념류 무역을 독점하게 되었다. 동인도회사는 무역적자를 해소하기 위하여 벵갈에서 생산하는 아편을 불법으로 중국에 팔았다. 중국 정부의 금수에도 불구하고 거대한 양의 아편이 중국에 유입되어 아편전쟁(1839-42, 1856-60)을 유발하였다. 프랑스 동인도회사는 인도 태평양 무역에서 독점을 허용하였으나 회사 부실로 파산하였다. 1723년 재편성하여 인도의 수랏과 퐁디셰리에 무역거점을 설치하여 재기를 시도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하고 결국 1769년 국유화되었다.

영국의 무역정책: 영국의회는 모직산업을 보호하기 위하여 모직 조례(1699)를 제정하였다. 모직산업은 농업 다음의 큰 직업군으로 그 고용은 수출에 크게 의존해 왔다. 이 법은 세금을 올리고 식민지무역과 생산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는 시도로서, 아일랜드의 털 생산을 제한하고 아메리카 식민지의 털과 모직제품 수출을 금지하였다. 한편 곡물법(1689)은 곡물의 수출을 장려하고 곡물이 특정가격 이하가 되면 수입을 제한하여 곡물값을 유지하고 지주의 이익과 농업을 보호하였다. 1816년 흉년으로 곡물값이 인상되자 노동자들은 가족 연명을 위하여 임금인상을 요구하며 전국적으로 파업과 폭동을 일으켜 의회는 1846년 법을 폐기하였다. 영국은 국내산업을 보호하기 위하여 식민지 경제를 통제하는 정책을 사용하였으며, 식민지로부터 원자재를 수입하고 그들에게 공산품을 수출하였다. 전략적으로 스웨덴과 러시아의 철에 의존을 끝내려고 영국은 선철의 생산을 장려하였고, 선박은 목재가 가용한 북미에서 1/3을 건조하였다. 전략적 물자로 초석과 해군 비축으로 대마, 피치, 테레빈, 타르, 목재 등을 확보하였다. 군사적 잠재력을 유지하기 위하여 선박의 선적능력을 키우고 잘 훈련된 수병을 확보하려고 노력하였다. 한편 발트해 지역의 곡물 수송과 북해의 청어잡이는 네덜란드가 주도하였다.

해양법(1651)은 영국의 선적을 보호하고 식민지로부터 본국으로 운송하는 이익을 확보하기 위함이었다. 이 법은 네덜란드, 프랑스, 여타 유럽 국가들과 영국 식민지의 직접적인 무역을 중지시킬 수 있었다. 이 법으로 영국은 네덜란드와 전쟁(1652-1674)을 세 번이나 하여 양측이 큰 피해를 보았다. 영국의회는 몰라시스 법(1733)을 제정하여 프랑스 서인도 식민지로부터 미국 식민지로 수출하는 설탕에 관세를 부과하여, 북미 식민지가 비싼 값으로 설탕을 수입하였다. 북미 식민지에 대한 본국의 여러 가지 경제적 제재나 과세로 인해 미국의 혁명을 촉발하였다.

노예무역은 16세기부터 19세기 중엽까지 대서양을 횡단하여 이루어졌으며 그들은 커피, 담배, 면화, 설탕 제조, 금 은광의 노역, 벼농사, 건축 노동, 조선용 목재, 가정의 하인 등에 노동력을 제공하였다. 3세기 동안에 약 1,250만 아프리카인들이 아메리카에 노예로 실려 왔으며 그중 64.5만 명이 미국에 왔다. 노예무역은 이윤이 많았고 값싼 노예노동은 영국의 자본형성과 초기 산업혁명에 이바지하였다. 버지니아는 1778년에 노예 수입을 중단하였고 1862년 링컨 대통령은 노예를 해방하였다.

영국의 무역과 수송: 애덤 스미스는 정부의 개입이 없으면, 보이지 않는 손으로 자유롭게 자원이 배분되고 분업이 이루어져 경제의 효율을 극대화할 수 있다는 자유주의 경제이론을 그의 국부론(1776)에 기술하였다. 데이비드 리카도는 무역에서 비교우위의 상품을 교환하여 수출이나 수입에서 모두가 이득이 된다고 그의 정치경제의 원칙과 세금(1817)에서 설명하였다. 스미스와 리카도의 이론이 나오기 전까지 중상주의가 부를 가져온다고 믿고 정책을 집행해 오던 영국과 유럽 국가들이 새로운 경제이론을 학습하여 경제정책을 중상주의로부터 자유무역으로 전환하였다. 따라서 18세기는 아직도 중상주의적 영향권에 있었다.

영국이 명예혁명으로부터 나폴레옹의 몰락까지 한 세기 넘게 국제 무역에서 지배적 지위를 확립하였고 유럽의 대제국이 되어 상선을 북아메리카, 서인도 제도, 동인도 제도, 아프리카로 보냈다. (1) 영국은 공산품 특히 섬유제품과 철제품을 미국 식민지에 수출하고 설탕, 담배, 면화, 염료, 염료나무, 여러 아열대 식품을 수입하였다. (2) 대서양 횡단무역에서 16세기 후반부터 유럽-아프리카-아메리카의 유럽식민지를 연결하는 삼각 노예무역이 크게 이윤을 만들었다. 유럽에서 구리, 피복, 장신구, 목걸이, 총, 탄약을 싣고 아프리카에 도착하여 노예와 교환하고 대서양을 횡단 카리브해와 아메리카 식민지에 노예를 팔고 서인도에서 설탕, 럼주, 당밀과 버지니아에서 담배와 대마를 싣고 유럽으로 돌아왔다. (3) 면화산업은 철광산업이나 증기기관과 함께 산업혁명의 엔진으로 면직 생산과 소비가 무역에 밀접히 연관되었다. 면직 피복은 여름에 가볍고 세척이 쉽고 색깔과 무늬로 유럽에서 수요가 급증하였다. 면화의 제사와 방직이 새로운 기계의 발명과 개선으로 기계화되어 면직 천과 피복의 가격이 급격히 하락하여 세계적으로 수요가 증가하였다. 면직 생산의 문제는 면화의 공급에 있었다. 1790년경 서인도 제도에서 약 70%를 공급하였으나 프랑스 전쟁 이후에는 미국에서 50% 인도와 동인도에서 25% 서인도에서 7%를 수입하였다. 수출은 1700-1800 기간에 6.3배로 수입은 4.75배로 증가하였고 국제 무역의 증가는 영국의 산업혁명을 촉진하였다.

영국은 사회 간접자본의 투자와 기술개발로 교통체제를 발전시켜 수송능력을 개선하고 수송비용을 절감하여 지방의 독점을 약화하고 생산자와 상인 간에 경쟁으로 자원을 효율적으로 배분하여 경제성장을 촉진하였다. 또한, 통신의 발전과 편리한 수송은 과학 기술의 전파를 촉진하였다. 도로 건설, 마차 개조, 제도 발전으로 육로수송을 크게 개선하였다. 지방정부는 도로의 건설과 유지에 책임이 있었다. 의회는 유료도로법을 제정하여 고속도로 유지를 위해 통행세를 징수하였다. 1830년대 1,000개의 신탁 기업이 30,000마일의 고속도로를 관리하고 8,000개의 요금소에서 통행세를 징수하였다. 고속도로가 더 빠르고 신뢰할 수 있어 면화 수송에 많이 이용되었다. 1840년대 역마차는 4마리 말이 끌어 속도를 증가하였고, 개인 서신은 1784년부터 우체국이 설립되어 우편 마차로 승객과 같이 운송하고, 1840년부터 1페니 영국 우편체제가 되었다. 운하는 크고 서행하는 화물수송을 위해 설계되었고 대부분 지방 수송의 수요를 맞추었다. 운하 건설은 초기에 지주가 40%를 투자하였고 1780 –1815 기간에 그 지분이 22%로 감소하였다. 운하의 길이는 1760-1830 기간에 거의 3배로 증가하여 총연장 3,900마일이 되었다. 한편 해안 선적은 매우 인기가 있어 1910년경에 총 화물수송의 59% 톤-마일(무게-거리)을 해상으로 운송하였다.

태평양 항해와 제2 신세계: 17세기 말부터 18세기에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내륙에 관하여 유럽인들은 무지하였고, 스페인 선박이 태평양을 횡단하여 아카풀코와 마닐라 사이를 왕래하였다. 제2의 신세계 탐험은 영국, 프랑스, 스페인이 태평양 지역에 많은 관심을 가졌으며, 그중에서 제임스 쿡(1728-79)은 영국의 탐험가, 항해사, 지도제작가로 뉴파운드랜드 지도를 제작하였고 해군 대령이 되었다. 그는 세 번의 태평양 항해에서 오스트레일리아의 동해안, 하와이 제도, 뉴질란드 해안을 일주하였고, 1779년 그의 세 번째 항해에서 하와이 원주민에게 살해되었다. 스페인은 1789년 누트카 사운드(현재 시애틀 북쪽)에서 영국과 분쟁이 있었고 어업권 공유로 해결되었다. 스페인은 태평양에서 영국의 고래잡이를 인정하였고 캘리포니아 스페인령 해안에 영국 국적의 선박이 접근하는 것을 인정하였다. 영국은 식민지 개척을 위하여 아서 필립(1738-1814) 제독 휘하에 함대 11척(300명 장교와 211명 해병으로 운항)에 1,530명의 이민자와 736명의 죄수를 싣고 1787년 시드니에 도착하여 뉴사우스웨일스 식민지를 건설하였다. 필립은 그의 통치력을 뉴질랜드까지 확장하였고, 식민지에서 필요한 물품들은 주로 인도 칼카타에서 수입하였다.

유럽의 식민지들은 부패와 비효율로 고통을 받았다. 스페인의 찰스 3세(1759-88)는 스페인령 식민지 관리를 매수, 임대, 상속, 개인적 후원 등으로 임명하여 식민지 사무실이 이윤추구의 장소가 되었다. 이들 식민지 정부에 분명한 지휘계통이나 견제와 균형이 없었고, 수많은 관리가 정부와 사업 관계가 있는 사람들로부터 징수한 요금으로 생계를 유지하였다. 행정인력은 인디언의 조공에 기대어 봉급의 표시로 받았고, 그들의 소득 대부분은 무역의 본국 환송 부수입으로부터 왔으며, 그들은 인디언에게 수입품을 사도록 강요하였다. 호세 데 갈베즈(1720-87)는 뉴 스페인의 감찰관으로 복무하고 서인도 위원회의 임원이 되어 식민지 행정을 개혁하였다. 식민지의 사무실을 감독관 제도로 바꾸어 뉴 스페인에 12, 페루에 6, 리오에 8 감독관을 임명하여, 해당 지역 재정을 감독하게 하였다. 영국은 최소한 식민지의 관직을 판매하지는 않았으나, 특허권은 정치적 지원자들에게 융통성 있게 허가되었다. 유럽의 식민지 정부는 일반적으로 토착민의 정치 경제 사회를 무자비하게 통제하여 그들의 협력을 얻지 못하였고, 분노와 반감을 증가시켜 식민지 통치에 대한 저항을 일으켰다.

프랑스의 대륙봉쇄와 그 영향: 영국과 프랑스는 애덤 스미스의 자유무역 이론의 영향으로 영불무역조약(1786)을 체결하였다. 이 조약은 영국 상품에 경쟁력이 있어 영국에는 득이 되었으나 프랑스 경제에는 해가 되었다. 프랑스혁명으로 영국과 적대관계가 되자 프랑스 국민공회는 1793년 이 조약을 폐기하였다. 그 후 트라팔가르 해전에서 패한 나폴레옹은 오스트리아와 프러시아를 정복하고 베를린 법령(1806)으로 대륙봉쇄 체제를 확립하여 영국 상품의 유럽대륙 유입을 전면 금지하고, 영국 선박의 대륙 접근을 봉쇄하였다. 또한, 밀란 법령(1807)으로 프랑스의 전함이나 민간 무장선이 (영국 항이나 영국이 점령한 항구로부터 출항하는) 중립국 선박을 나포하였다. 이 법령은 모두 해가 되었으나 영국에 더 큰 해가 되었다.

영국은 프랑스의 수입에 장애가 되는 방책을 세우고, 나폴레옹이 영국에 주는 같은 피해를 프랑스와 그 동맹에 주며, 프랑스의 수출을 감소하는 정책을 취하였다. 러시아는 틸지트 조약(1807)으로 대륙봉쇄에 가입하였다. 영불에 중립인 미국 선박이 영국과 프랑스에 의해 방해를 받게 되어 미국은 금수 조례(1807)를 선포하고 1807-12 기간에 미국의 원자재 수출을 금지하였다. 미국은 불통상 조례(1809)로 영국과 프랑스를 제외하고 해외 무역을 재개하였다. 1810년 러시아는 대륙봉쇄 체제에서 탈퇴하고 중립국 선박의 입항을 허용하였다. 1812년 프랑스는 베를린과 밀란 법령을 폐기하고 영국도 모든 봉쇄 명령을 철회하였다. 영국이 1793-1812 기간에 해상에서 실종된 미국 선원 15,000명을 영국해군에 강제로 편입하고 싸우게 하여, 영국과 미국은 전쟁(1812-15)하였다.

영국 경제체제의 파괴를 시도한 프랑스의 대륙봉쇄는 다음 이유로 실패하였다. (1) 유럽 각국 경제는 통제적이며 자급자족에 의존해 왔기 때문에 대륙봉쇄가 부분적으로 방해는 되었으나 경제의 기본을 변화시키지 못하였다. (2) 대륙봉쇄는 러시아의 조기 탈퇴로 실질적 기간이 짧아 (밀수와 부패로 봉쇄가 어려운 가운데) 경제적 자율조정 능력을 변화시키지 못하였다. (3) 국제관계는 정치적 조약으로 경제적 이해에 따라 쉽게 폐기된다. 러시아는 자유무역을 요구하는 정치적 압력으로 조약을 탈퇴하였다. (4) 중립국인 미국 선박을 공격하는 것은 원자재 수출을 방해하여 전략적 상품을 생산할 수 없게 되어 쌍방에게 피해가 되었다.

TO BE CONTINUED

(d) 재정과 은행업
(e) 유럽 국가의 사회적 변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