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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문명사 연재 8/ Hugo W. Kim 재미 학자

양곡(陽谷) 2023. 6. 10. 14:50

세계문명사 연재 8. 중세 유럽(750-1400)의 정치철학

중세철학의 고전적 자료는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등의 그리스어 원문이다. 그러나 언어의 장벽으로 인해 기독교 사상가들이 그리스 고전에 접근하기 어려웠다. 9~10세기에 모슬렘 학자들이 그리스 고전을 아랍어로 번역하였고, 아랍과 유대 철학자들이 이를 라틴어로 번역한 것이 12세기에 서방에 전파되었다. 아랍 저술의 유입으로 서방 지식인들은 고대 그리스 철학을 재발견하였고, 이로 인해 철학과 종교 또는 이성과 믿음 사이에서 새로운 갈등이 시작되었다. 중세 정치사상은 종교가 중심에 있어 철학은 각 종교의 성서를 따르도록 제약하였다. 본 연재는 (a) 중세 정치사상의 배경, (b) 기독교 정치사상과 정치철학의 형성, (c) 중세 이슬람과 유대교의 정치철학, (d) 13세기 기독교 정치철학, (e) 14세기 기독교 정치철학 (f) 개념 요약 순으로 기술한다.

(a) 중세 정치사상의 배경

기독교 교리: (1) 평등사상: 고대 로마 사회에서, 모든 종족과 다른 계층이 섞인 기독교 공동체는 남녀가 형제와 자매로서 하나가 되어 평등하게 되고 무엇보다도 신에 반하는 황제를 거부할 수 있다는 것은 큰 충격이었다. (2) 이원주의: 기독교도는 하느님의 세계와 인간의 세계를 구분하는 급진적 이원주의에서 출발하였고, 인간의 본성은 육체적 욕망과 정신적 영감이 선천적으로 갈등한다고 보았다. 이는 어거스틴의 신의 도시에서 잘 기술되어있고, 중세 성기부터 정치와 종교의 갈등으로 발전하였다. (3) 합법 정부에 대한 복종: 각자는 통치하는 정부에 복종하라: 하느님 외에 다른 권위가 없다; 현존하는 정부는 신이 내정하여 불복하는 것은 신에게 불복하는 것으로, 심판을 받을 것이다고 기술하고 있다.

그리스와 로마의 정치이론: (1) 플라톤은 그의 저술 공화국에서 철학자 왕이 통치하면 최선이다, 그러나 그의 저술 법에서 우수 인재가 없으므로 법의 통치를 제안하였다. (2) 아리스토텔레스는 참된 정부는 정의에 일치한 공동이익을 추구하는 정부로서 왕권통치, 귀족정치, 명예정치의 형태가 있으며 개인의 이익을 추구하는 정부 형태는 독재정치, 과두정치, 민주주의라고 하였다 (3) 역사학자 폴리비오스는 로마 공화국 헌법이 군주제, 과두정치, 민주주의가 혼합되어 귀족과 평민 사이에 세력균형이 이루어져 이상적이라고 하였다. (4) 스토아주의는 변경할 수 없는 자연법이 입법의 기초가 되어, 바른 이성은 해야 하는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명시한다고 보았다. 시세로는 권리, 책임, 기능 사이에 적절한 균형이 없으면 국가는 혁명으로부터 안전할 수가 없으며, 법이 무시되어 버릴 수 있으므로, 통치자의 도덕적 권위가 중요하다고 보았다. 로마를 절대 군주제로 전환하면서, 아우구스투스는 자신을 제1의 시민이다는 단어를 사용하여 공화정 형태로 위장하였다.

로마법(Roman Law): (1) 12 법전(Twelve Tables): 로마는 509 BC에 왕을 폐위하고 매년 교체되는 2명의 집정관을 선출하여 공화정을 시작하였다. 평민들은 법원의 판결이 소수 귀족 지식인들에 의하여 보존된 관습법으로 진행되어, 그들의 법적 권리가 방해받았다는 사실을 통감하였다. 12 법전은 평민들의 요청으로 구성된 10명의 위원이 451-50 BC에 제정하여 로마광장에 청동으로 새겨 법으로 공시되었다. 이 법은 평민 계급의 특권, 부채 불이행에 대한 노예화, 민사소송에서 종교적 관습의 개입을 인정하였다. (2) 법률가(Jurists): BC 3세기부터 법률전문가인 변호사 계급이 존재하였고, BC 2세기 후반에 로마시민과 외국인에 적용되는 법적 조직과 절차가 준비되어 주로 집정관이 이를 집행하였다. 하드리아누스(117 -38)는 영구 칙령을 공포하여 집정관이 개인적 법률해석으로 법을 집행하지 못하게 하였다. 법적 발전의 가장 큰 힘은 변호사들의 민법과 평민 칙령에 관한 저술이었다. (3) 유스티아누스 법전(Code of Justinian)은 그의 입법위원회가 과거의 법을 수집하고, 로마 법률가들의 견해를 발췌한 것으로, (i) 529년에 헌법 개요를 공포하였고, 그중 모순된 견해를 조정하여 534년에 수정 법률(Codex of Constitutionum) 12권으로 발간하였다. (ii) 법률 해석(Digesta)은 530-33년 16명의 법률가를 임명하고, 고대 로마 법률가의 주요 저술을 포함한 법학 이론을 정리하여 50권으로 구성하였다. (iii) 법학 개요(Institutionnes)는 위의 법전에서 내용을 발췌하여 로마제국의 법학 교재로 사용하였다. (iv) 신 헌법(Novellae)은 유스티아누스 자신이 공포한 새 법령을 모아서 534년에 발간하였다.

비잔티움 정치사상: 에우세비우스(Eusebius of Caesarea, 260-340)는 그의 저술 콘스탄틴의 생애(339)에서 그가 기독교 제국을 수립한 것은 인류 역사의 결정적 전환점으로, 신이 아브라함에게 그의 약속을 이행하는 것보다 못하지 않다고 하였고; 그리스도가 탄생한 아우구스투스 통치하에서 로마제국이 설립되어 기독교 전파를 촉진하였으며; 통치자는 신의 영상으로 천국을 다스리는 지상의 대리인이라고 하였다. 로마의 정치사상은, 로마 황제는 신이며 하나의 신, 하나의 황제, 하나의 교회로서 한 세기 동안 불변하였다. 유스티아누스는 그의 법전해설집(Digest) 서두에서 황제의 권한은 신이 준 것이며, 자신은 신의 명령으로 제국을 다스린다고 하였다. 그러나 전설적 군왕의 법(lex regia)에 의하면 로마 국민이 그들의 권력과 권위를 황제에게 이전한 것이다. 로마가 공화국에서 제국으로 변화하면서, 사실상 황제가 된 아우구스투스는 자신을 제1의 시민이라고 하여 국가의 권력이 국민에서 나온다는 것을 시사하였다.

라틴 신부들: 암브로우스는 테살로니카의 무차별학살에 대하여 황제 테오도시우스를 파문하여(390) 국가로부터 교회의 독립을 선언하였다. 어거스틴은 신의 도시(426)에서 교회와 국가가 공존하면서 자신의 역할을 하며, 정치와 종교는 분리하고, 국가는 신의 도시의 일부라 하였다.

바바리안 왕과 교황: 바바리안 왕국들은 기독교 국가로 로마 출신 관리나 고문의 조력으로 통치하였고, 신약성서에 따라 왕의 권력은 신이 준 것이며, 신의 지상 대리인인 왕의 통치에 대한 불복은 신에 대한 불복으로 심판을 받는다고 하였다. 이들의 통치 이념은 공통의 선(Common Good)을 성취하는 것이다. 5세기부터 교황 직권이 정부 기구 역할을 하여, 세속적(Secular) 권력과 정신적(Spiritual) 권력 사이에 관계설정이 문제가 되었다. 교황 레오 1세(440-61)는 모든 교회 관련 사건은 로마교회가 재판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젤라시오 1세(492-6)는 교황과 제왕 사이에 세속적-정신적 지배영역을 구분하고, 제왕의 권력이 성직자에게 못 미치게 하여, 교회의 독립성을 보장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레고리 1세 (590- 604)는 황제와 대결을 피하여 협력관계를 유지하고, 그의 주된 관심 사항은 목회자로서 기독교를 유럽 전역에 널리 전파하는 데 집중하였다.

(b) 기독교 정치사상과 정치철학의 형성 (750-1150)

캐롤린지언 정치개념: (1) 신정 군주국(Theocratic Monarchy): 캐롤린지언 이론가들은 교회는 질서 있는 사회의 모형으로, 왕의 직무는 교회 안에 포함된다고 주장하였다. 현실정치에서 교회는 국가 일부로 국가가 교회와 성직자들을 보호하였다. 캐롤린지언은 영토를 개인 재산으로 생각하였다. 바이킹-매그야-모슬렘의 침입으로 왕권의 약해지고 귀족들이 세력을 강화하여, 카페트는 프랑스에서, 오토 1세는 독일에서 새로운 왕조를 세웠다. (2) 동의와 충성(Consent and Fidelity): 찰스대제는 왕국의 모든 자유인의 충성서약을 요구하였고, 성직 및 비 성직 고위직의 충성맹세는 그들의 협력이 필요한 왕국에 긴요하였다. 봉건제도는 영주와 봉신 간에 합의한 계약으로 권리와 의무 관계를 분명히 하고, 신의 축복과 대중의 동의로, 세력을 가진 귀족들이 신이 부여한 왕권을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3) 대관식의 의미: 찰스대제는 800년에 로마에서 가진 대관식은 로마제국을 재생시켜 정통성을 상속하는 것이었다. 교황에 의한 대관식은 제왕의 통치를 인정하고, 비잔티움 황제의 합헌성을 부인하며, 교회를 합법적으로 지배하는 교황의 체제를 인정하고 보호하는 행사였다. (4) 프랑스에서 독일로 로마제국 이전: 독일의 오토 1세(936-73)는 작센 공국을 상속받아 세력을 규합하여 매그야를 퇴치하고, 이탈리아를 정복하여, 962년에 신성로마제국 황제로 로마에서 대관식을 가졌다. 제국은 4개 왕국 즉 독일, 이탈리아, 보헤미아, 부르군디 왕국으로 구성되었다. (5) 궁전학교: 찰스대제는 770년대 중반부터 유럽의 학자들을 그의 궁전학교에 초대하여 교육을 진흥시켰다. 알퀸(Alcuin)은 영국 요크의 학자로 초대에 응하여 아첸 궁전학교 교장으로 782부터 10여 년간 왕의 친구로서 두 왕자를 가르치고, 선진 영국의 교육을 전파하였다. 그는 새로운 교육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교양 7과목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기독교 교육 발전에 관해 저술하였다. (6) 수도원학교: 라바누스(Rabanus Maurus)는 프랑스 수도사로서 822-42 기간에 풀다 수도원장으로, 847-56 기간에 메인츠 추기경으로 봉직하고, 성직자들의 지식 형성에 관한 저술을 남겼다. 이는 성직자의 계급, 기도서, 설교자의 훈련과, 교양과목(문법, 웅변술, 변증법; 수학, 기하학, 천문학, 음악) 등에 관하여 언급하였다.

존 스코터스(John Scotus Eriugena, 815-77)는 아일랜드 수도원에서 그리스어와 라틴어를 공부한 유능한 학자로 찰스대제 손자인 찰스 왕의 초청으로 궁전학교 책임자가 되어 30년 동안 프랑스에 봉사하였다. 그의 지도력으로 궁전학교는 크게 성장하여 유명하게 되었다. 알퀸은 학교장의 역할을 하였다면, 그는 철학자였다. 존은 저술(On Divine Predestination)에서 신의 예정설을 받아들였다. 그에게는 철학과 신학의 권위가 대등하였고, 이성(Reason)과 계시(Revelation) 모두 진리의 근원이었다. 만일 이들이 서로 대립하면, 존은 이성을 선호하였다. 찰스 왕의 요청으로 858년에 모조 디오니시우스(Pseudo-Dionysius)를 그리스어에서 라틴어로 번역하였다. 이 책은 익명의 저자였으나, 신은 선이며, 선은 최고의 아름다움이다고 하여 신플라톤주의와 일치하고, 중세사상에 큰 영향을 주었다.

존 스코터스는 자연의 분할(On the Division of Nature)을 867년에 출간하여, 자연을 4종류로 구분하였다. (1) 자연은 창조하지만, 창조되지 않는 자연은 신 자신이다. 모든 사물은 원인이 있지만 신 자신은 원인이 없다. 이는 신의 초월성과 자존을 천명하는 것이다. (2) 창조하고 창조되는 자연은 본원적인 원인을 포용한다. 본원적인 원인은 창조된 종류의 모범적인 원인이며 신의 세계에 존재한다: 그들은 실제로 신의 개념이며 모든 창조된 실체의 원형이다. (3) 창조되지만 창조하지 않는 자연은 시간과 공간에 존재하는 사물이고 피조물이며 신의 외상으로, 좁은 의미에서, 자연의 세계를 형성하고 신에 의하여 무에서 만들어진다. 이들 피조물은 본원적인 원인에 참가하는 것이다. (4) 창조하지도 창조되지도 않는 자연은 신의 다른 의미이다. 이 단계는 신에 돌아가는 것으로서, 신으로부터 소유한 것에 대한 상응한 움직임이다, 피조물의 세계는 본원적 원인으로부터 진행되어 이들 원인으로 회귀하는 것처럼, 자연의 생명에는 리듬이 있다. 그것은 그 자체의 원칙에 의해 종결되기 때문에, 전체 움직임의 종말은 항상 회기를 원하는 그것의 새로운 시작이다.

일반개념의 문제 (Universals): 보이티우스(Boethius, 480-524)는 포피리의 입문 논평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범주(Categories)에 대해, 종류(Genera)와 종(Species)이 존재하는 실물인가 혹은 개념으로만 있는 것인가 말하기를 포피리가 거부하였다고 인용하였다. 인간의 형상이 개개인으로부터 유추되는 것처럼, 종류는 유사한 여러 가지 종으로 형성된다. 종류와 종은 개체(Individuals)이며 관념적으로는 일반개념(Universals)이다. 마음 밖에 있는 물체는 개체이며, 개념은 일반적이며 공통적이다. 만일 실재하는 물체가 개체이며 일반적 개념이 실재하는 토대가 없다면, 그리고 만일 공통개념이 단순한 개념으로 생각과 물체 사이에 단층이 생기면, 공통개념과 판단에서 근거가 의심스럽다. 실재적 근거가 없는 과학은 실재와 상관없는 임의의 건축이다. 만일 이 문제의 해답이 부정적이라면, 인간의 일반적 지식에 대해 인식론적 의심(Skepticism)을 초래한다.

(1) 레밍기우스(Remingius, 841-908): 종(Species)은 많은 개체의 본질적 단일체이며, 개체들의 다수는 숫자로 하나가 되는 공통적 본질을 가지며, 각 개체는 뜻하지 않게 다를 뿐이다. (2) 오도(Odo, 1060-1113)의 초현실주의(Ultra-Realism)에 의하면 모든 존재는 한 존재의 변형이다(Modifications of one Being). 인간의 본성과 아담의 본질은 원죄에 감염되어 다음 세대에 넘겨지고, 신은 이미 존재하는 본질의 새로운 자산을 창조할 뿐이다. (3) 에리(Erie, 841-76)의 반 초현실주의에 의하면, 일반적 이름은 그에 상응한 일반적이며 공통적 사물을 갖지 못하며, 그들 사물은 개별적이다. 공통개념이 일어나면, 이해나 기억이 모든 개체를 붙잡을 수 없다. (4) 아벨라르(Peter Abelard, 1079-1142)는 일반개념에서 공통의 이유와 공통의 개념에 동의하는가를 의문시하였다.

스콜라주의 (Scholasticism): 스콜라철학은 기독교 신학에 바탕을 두고, 인식론 존재론 윤리학 등 철학과 결부시켜 생각하였고, 인간의 이성을 신앙에 종속시켜 이해하였다. 이들은 철학적 고찰은 신의 전능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며, 철학에 대해 신학의 우위를 주장하였다. 안셀름(St. Anselm of Canterbury)은 부르군디에서 출생하여 27세에 노르망디 수도사가 되어 1078년에 수도원장, 1093년에 캔터베리 대주교가 되었다. 헨리 1세는 안셀름이 충성을 맹세하고 추기경 임명을 받으라 하였으나, 교황은 이를 금지하였다. 그레고리 7세와 헨리 4세의 관계처럼, 헨리는 안셀름과 자신의 대사를 로마에 보냈으나, 1103년에 교황은 교황의 법을 어기는 영국 관리들을 파문하였다. 1107년에 헨리와 교황 간에 정교 협약이 이루어져, 헨리는 주교와 수도원장의 임명권을 포기하고, 그들이 왕에게 개인적으로 충성맹세를 하게 하였다. 안셀름의 철학은, 플라톤주의에 뿌리를 둔 어거스틴의 사상을 따라, 신학과 철학의 영역을 구별하지 못했디. 안셀름에 의하면, 신은 생각할 수 있는 가장 큰 대상이며, 만일 다른 큰 대상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생각하는 모든 대상 가운데 가장 큰 것이며, 이것이 곧 신이 존재하는 이유라고 하였다. 믿음이 없이는 사물을 바로 이해할 수 없으므로, 그는 이성이 신앙에 종속된다고 보았다.

휴(Hugh of St. Victor)는 파리의 성 빅토르 수도원에 1115년에 들어가 수학하여 1125년부터 가르쳤고, 1133-41 기간에 학교장으로 봉직하였다. 그의 저술(On the Study of Reading)은 교양과목(3권), 신학(3권), 종교적 명상(1권)으로 구성되었다. 그의 자연신학은 신의 존재를 내부적 체험(Self-Consciousness)과 외부적 체험(Cause)으로 증명하였다. 롬바르드(Peter Lombard)는 1136-50 기간에 노트르담에서 신학을 가르쳤고, 1159년 파리 주교가 되어 다음 해에 사망하였다. 그의 저술(Four Books of Sentences)은 신학 교재로 16세기까지 사용되었고, 제1권은 신, 삼위일체, 신의 안내, 악행, 예정설; 제2권은 천사, 악마, 인간의 추락, 축복, 죄악; 제3권은 그리스도의 부활, 속죄, 덕행, 십계명; 제4권은 세례와 성찬 (7개 성례), 사망, 심판, 지옥, 천국으로 구성되었다. 그는 윤리적으로, 인간은 자신의 행위에 대해 원인과 의도에 따라 선악의 심판을 받는다고 하였다. 아벨라르(Peter Abelard)는 1115년경 노트르담 학교의 학장으로 20년 아래의 엘로이스(Heloise)와 사랑에 빠져 비밀리에 아들을 낳았다. 그녀의 보호자인 삼촌이 크게 노하여 그를 강제로 거세하였다. 이로 인해 그는 수도사가 되었고, 엘로이스는 사랑을 이루지 못하고 수녀가 되어, 중세의 낭만적인 화제가 되었다. 아벨라르 저술(Yes and No)은 1121-22 기간에 쓴 것으로, 변증법(논리학)이 진리에 이르는 유일한 길이라고 주장하였다. 존(John of Salisbury)은 1154년부터 캔터베리 추기경의 비서로 재직하고, 그의 저술(Metalogicon)은 논리학, 문법, 웅변술에 관하여 기술하였다. 그는 정치학 저술에서, 군주와 독재자의 다른 점은 군주는 독재자와 달리 법과 정의를 존중한다고 보았다.

TO BE CONTINUED
(c) 중세 이슬람과 유대교의 정치철학
(d) 13세기 기독교 정치철학
(e) 14세기 기독교 정치철학
(f) 중세 정치철학: 원칙에 의한 개념 요약

REFERENCES

Copleston, Frederick. A History of Philosophy: Volume II: Medieval Philosophy. New York, NY: Bantam Doubleday, 1993.

Kim, Hugo W. The Middle Ages From 750 To 1400: Feudalism and Commercial Revolution (History of Politics and Economy, Book II). North Charleston, NC: CreateSpace, 2020, 357-530.

김휘국. 정치철학*경제사상과 함께 읽는 세계문명사. 서울: 한국전자도서출판, 2022, 159-18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