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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명사연재 6/ 재미 Hugo w. Kim 교수

양곡(陽谷) 2023. 6. 6. 10:32

문명사 연재 6. 중세 유럽(750-1400)의 정치와 종교 (계속 2)

(c) 중세후기 유럽(1300-1400)의 정치와 종교

중세 초기에 바이킹-매그야-모슬렘의 침략으로 정치 권력이 약해져 중앙정부가 외적으로부터 국민을 보호하지 못하고, 지방의 봉건영주가 국가의 공권력을 행사하였다. 중세 성기에는, 기후의 온난화, 농토확장, 기술개선 등으로, 농업생산이 증가하여 소읍과 도시가 급증하였다. 기독교의 개혁으로 교황이 지도력을 신장하여, 성직자 충성서약 문제로 교황과 왕의 역할에서 갈등이 있었다. 귀족들이 교회를 보호하는 세력으로 사회를 지배하였고, 기독교 신자와 교회가 급증하여 교황의 권위가 정치 권력을 추월하였으며, 종교가 일으킨 십자군 전쟁은 실패로 끝났다. 중세후기는 기후의 한랭화로 농업생산이 급락하고, 흉년과 기근, 흑사병, 백년전쟁, 농촌과 도시의 반란과 정치적 불안정, 교회의 쇠퇴 등으로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모든 분야에서 문명이 급속히 추락하였다.

흑사병 (Black Death): 유럽제국은 1300년 이후에 기후 변화와 토양고갈로 인해 농업생산이 감소하고 인구가 계속 증가하여, 1305-14 및 1315-22 기간에 흉작으로 대량의 기근이 발생하였다. 설상가상으로 가축들이 전염병으로 횡사하니 육류나 낙농 식품 등을 섭취하지 못하였고, 기아로 인해 영양실조로 질병에 대한 면역성이 더욱 약해졌다. 최소한 열에 한 명은 기아와 질병으로 죽어갔으나, 아직도 식량은 부족하였다. 불행하게도, 1347년에 흑사병이 유럽을 강타하여 심대한 변화를 가져왔다. 사학자들의 견해에 의하면, 1300년대 초에 몽골에서 발원한 흑사병은 쥐와 벼룩을 통하여 몽골 병사들의 이동을 따라 중국-북인도-러시아 등을 통하여 흑해 지역으로 옮겨왔으며, 흑해 지역에서 러시아 도시와 무역하는 이탈리아의 배가 쥐와 벼룩을 싣고 제노아에 돌아와, 무역 경로를 따라 유럽 전역에 전염되고, 지역에 따라 인구의 25~50%가 감염되어 집단으로 병사하였다.

이로 인하여 유럽의 전 지역에서 큰 충격을 주었다. (1) 사회심리: 인구의 급격한 감소와 질병에 대한 공포로, 농부는 땅을 갈지 아니하고, 상인은 가게를 닫고, 교회는 성전의식을 중단하였다. 보카치오의 데카메론(1353)에 의하면 부유하고 권력이 있는 사람들은 대농장이나 교외별장으로 도피하여 자신들만을 돌보았다; 흑사병은 신이나 악마가 인간의 죄를 벌하기 위해 보내진 것으로 믿었고, 사람들은 자신을 채찍질하며 읍내와 읍내를 배회하였다; 혹자는 유대인들이 우물에 독을 타서 발병하였다고 하여 반유대 감정을 일으켰다; 폭력과 폭력에 의한 죽음은 다반사가 되었다; 신부는 교구민에게 매일 저녁의 잠이 인생의 최후가 될지도 모른다고 상기시켰다. (2) 종교: 교회는 흑사병에서 다음 두 가지에 실패하였다. 첫째, 교회는 교육을 감독하고 의사를 면허해 왔는데, 전염병을 다스리는 이론이나 논문이 없었고, 그들의 의학적 조언은 소용이 없었다. 둘째, 교회는 흑사병 기간에 적절한 정신적 위안을 준비해 주지 못하였다. 신부들이 많이 도망치고 예배나 최후 의식과 환자 위로가 없었다. 흑사병 이후 자선이 증가하였으며, 프랑스에서는 1300-90 사이에 기존단체에 기부가 50% 증가하였으나, 흑사병 이후 많은 종교 기관들이 적자운영을 하고, 신비주의(Mysticism)와 평신도의 신앙심이 널리 퍼졌다.

(3) 경제: 인구감소로 임금을 인상하였고, 농산물 수요를 감소시켜, 토지소유자의 임대료와 소득이 감소하였다. 영국에서는 1347-53 기간에 귀족들의 소득이 20% 이상 감소하였다. 농촌 지역의 인구감소로 농토와 목장이 산림으로 변하였다. 토지의 소작은 노동력 제공에서 임대계약으로 바뀌었다. 인구의 격감은 봉건제도의 종말을 가져와, 노동자들이 한 장원에서 조건이 더 좋은 다른 장원으로 이동하였다. 15세기부터는 대부분 농장은 임금과 장기임대로 전환되었다. 높은 임금과 농산물의 가격 하락으로 농토를 목장으로 전환하거나, 특수 작물을 재배하였다. (4) 사회: 환경의 변화로 토지 귀족들은 직접 경작하거나, 군대나 사무직 봉사자와 부자 상인과의 결혼으로 자신의 소득을 보충하였다. 노동자들의 소득이 증가하여 입지가 향상되었으나, 귀족들은 임금인상을 제한하려고 시도하였다. 정부가 새로운 세금을 부과하여 농부들의 불만이 확산하고 폭동이 증가하였으나 무자비하게 진압되었다. 흑사병 이후 수요감소로 인해 농-공-상업의 매출이 감소하고, 따라서 고용이 감소하였다. 유럽에 불황이 닥쳐, 부유한 상인, 제조업자, 귀족 모두 임금인상을 제한하려 하였다.

백년전쟁 (1337-1453): (1) 영국이 소유한 가스코니(Gascony) 공국의 업무에 프랑스 왕실이 지나치게 간섭해 왔다. (2) 영국은 플랑드르에 양털을 수출하여 거액의 관세를 받아왔는데, 플랑드르 부자 상인들에 저항하는 노동자들의 폭동으로, 수출이 위협받았다. 프랑스가 플랑드르 상인 편에서 폭동을 진압하자, 영국은 수출에 위협을 느껴 노동자들을 지원하였다. (3) 1328년 프랑스 찰스 4세가 후계자 없이 사망하여. 그의 조카인 영국 왕 에드워드 3세(그의 모친 이사벨라가 작고한 찰스의 누이)가 프랑스 왕위계승을 주장하였으나, 프랑스는 상속권이 없다고 거절하였다. (4) 프랑스 필립 6세가 영국과 스코틀랜드 문제에서, 영국을 파괴하기 위하여 스코틀랜드를 지원하기 때문에, 분노가 남아 있었다. 1333년에 영국이 스코틀랜드와의 전투에서 승리하자, 필립이 스코틀랜드 데이비드 2세를 초청하여, 그는 프랑스로 망명하였다. (5) 프랑스 필립은 영국 소유의 귀에네(Guyenne) 공국이 프랑스에 반항 불복해왔다고 공격하였고, 영국 에드워드는 프랑스 왕위계승을 요구하면서 선전포고를 하였다.

이 전쟁은 에드워드 전쟁(1337-60), 캐롤라인 전쟁(1369-1389), 랭커스터 전쟁(1415-1453)의 3단계로 구분하며, 다음 영향을 가져왔다. (1) 군사기술의 발전: 무기, 전술, 군대의 구조가 변하고, 전쟁의 사회적 의미가 전쟁비용, 기술발전, 전쟁의 교훈으로 인해 많이 변모하였다. 전장에서 영국의 경무장 보병이 프랑스의 중무장 기병 보다 효과적인 것을 인지하여, 전쟁 이후에 중무장 기사단이 폐지되었다. (2) 국가 정체성의 출현: 백년전쟁은 프랑스인의 애국심을 고취하였고, 프랑스는 봉건 왕국에서 중앙집권의 국가로 변화하였다. 전후에 용병은 정규군에 편입하거나 해산시켰으며 새로운 상비군(총 6,000명)은 규율이 있는 직업군인이 되었으며 백년전쟁은 애국심과 국가 정체성을 널리 각인시켰다. (3) 경제적 충격: 영국과 프랑스 양국은 전쟁으로 자원이 고갈되고, 전쟁 부담이 증가하여 국민복지의 수준이 지극히 저하 되었으며, 전통적인 중세 봉건제도가 붕괴하였다. (4) 납세자의 힘이 증대: 프랑스 국민은 자신들의 영토를 점유하고 있는 영국을 축출하는 전쟁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식하였다. 그러나 전쟁은 많은 세금을 부과하여 정치에서 납세자의 힘을 각인하였다.

정치적 불안 (1300-1400): 흉년과 기근, 질병, 전쟁으로 자원이 고갈되고 민생이 어려워 납세 능력이 없는데, 세금을 올리고 전쟁을 계속하였다. 인구감소-수요감소-생산감소–고용감소-소득감소로 이어지는 불황 속에서, 프랑스는 1358년에, 영국은 1381년에 농민반란이 일어났다. 부르주아지 상인이나 제조업자들은 귀족 영주들처럼 임금을 억제하고, 노동 단체조직을 방해하여, 산업노동자들이 유럽 여러 지역에서 폭동을 일으켰다. 유럽의 정치 불안은 흑사병 후에 봉건제도가 붕괴하여 영주와 봉신 관계가 무너지고, 새로운 귀족의 당파는 정치 권력을 형성하는 과정에서 왔다. 후계자 없는 왕위계승과 재정 부족이 정치적 불안을 증가시켰다.

영국 정치 내분: 에드워드3 세가 귀족원과 평민원으로 의회를 구성하고 청원을 입안하여 귀족원과 왕이 수용하면, 법으로 발효하였다. 이 새로운 절차가 영국 하원이 입법을 위해 발의하는 시작이었다. 1381년 농민반란에서 리처드 2세는 양보하였다. 그의 통치는 1387년에 다른 귀족세력에 넘어갔으나, 1389년에 권력을 다시 장악하여 반대자들과 화합을 이루었다. 그러나 1397년에 보복으로 정적을 처형하고 유배를 보냈다. 1399년 헨리 4세는 소수 병력으로 리처드를 폐위하고 왕이 되었다.

프랑스 정쟁: 1357년 프랑스 의회가 전쟁을 위한 세금을 승인할 때, 황태자 찰스는 의회 동의 없이 세금을 부과할 수 없다고 말하고, 의회는 정기적으로 회합하여, 자신이 중요 결정에 참석한다고 약속하였다. 그는 찰스 5세로 왕이 된 후 약속을 무시하였다. 1392에 찰스 6세가 정신이상이 되었을 때, 귀족은 양 정파(Burgundians & Armagnacs)로 갈라져, 그들의 정쟁은 정치적 혼돈을 가져 왔다. 1415년 영국이 백년전쟁을 재개할 때 부르군디는 프랑스의 적인 영국과 동맹하였다.

독일제국 문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는, 1356년에 찰스 4세(1346-78)에 의해 제정된 황금소(Golden Bull)에 의해, 7명의 선제후 (4명의 왕과 3명의 성직 통치자)가 선출하였다. 제국 정부는 기능을 수행할 행정조직이 있었으나, 황제는 신성로마제국 내의 수백 개 독립 국가를 통제할 수 없었다. 황금소는 2가지 역할을 하였다. 첫째는 황제선거에서 교황의 영향력을 배제하는 것이며, 둘째는 황제의 권한을 분산시키는 것이었다.

이탈리아: 신성로마제국은 11세기에 이탈리아의 도시는 주교나 백작에 의해 통치되었다. 경제가 번성해 지면서 그들은 의회와 행정부로 집정공동체(Consular Communes)를 구성하였다. 독일 프레데릭 1세가 이탈리아를 통합하려고 침략했을 때, 롬바르드 동맹을 결성하여 격퇴하였고, 1183년에 평화협정으로 독립을 쟁취하였다. 귀족과 평민의 권력투쟁으로 이탈리아 사회는 서민공동체(Popular Communes)로 발전하였다. 서민공동체는 많은 납세자를 제외하여 시민권을 제한하기 때문에, 내부불화를 조장하고, 부유 상인과 공예인을 분리하여, 결과적으로 효율을 감소시켰다. 이로 인해 평등의 이상을 구현하는 데 실패하고, 폭력 무질서 불안정을 초래하여, 북이탈리아 도시국가들은 독재나 과두정치를 하게 되었다.

오토만 제국(Ottoman Empire, 1299-1453): 오스만 1세(1258-1326)는 아나톨리아의 한 독립된 터키계 토후국 지도자로서, 그의 추종자들은 터키 부족과 비잔티움 제국의 배신자들이었다. 오토만은 그의 이름에서 기원한다. 그들 대부분은 이슬람으로 개종하고, 오스만은 사카야강 유역의 비잔틴 소도시를 통합하고, (셀주크가 쇠퇴하는 가운데) 아나톨리아와 발칸지역에서 세력을 확장하기 시작하였다. 그의 아들 오르한은 1326년에 아나톨리아의 부르사를 함락하고, 이를 오토만의 수도로 하였다. 그는 1387년에 발칸의 테살로니카를 베네치아로부터 탈취하고, 1389년에 코소보에서 승리하여 세르비아를 제압하고 유럽 진출의 길을 열었다. 1396년 유럽기독교 연합세력과 니코폴리스 전투에서 승리하고 발칸으로 세력을 확장하여, 콘스탄티노플이 눈앞에 다가왔다. 1402년 티무르 제국이 동쪽으로부터 오토만을 공격하여 군주 바예지트 1세가 포로가 되어, 제국이 무질서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왕위계승 내전이 10년 넘게 지속하고, 메메드 1세가 왕위를 계승하였고, 메흐메트 2세가 1430s~1450s 사이에 잃어버린 발칸의 영토를 회복하고, 1453년에 마침내 콘스탄티노플을 정복하였다. 메흐메트는 그리스 정교를 유지하고, 터키의 지배를 받아들이게 하였다.

중세교회의 쇠퇴: 외부환경의 변화: 로마제국 몰락 이후 서구 문명은 정신적 피해를 복구하고 정치와 종교에서 새로운 체제를 창출하는 데 3세기가 걸렸다. 중세 초기에 라틴 서부는 그리스 동부보다 열등하고, 바이킹-매그야-모슬렘의 침략은 토지와 인간을 빈곤으로 황폐화하였다. 이 시기에 라틴교회의 일차적 목표는 천국의 문을 독점하는 베네딕트 교단의 종교적 이상에 기초하여, 교회의 생존과 독립에 있었다. 세속적 통치자들은 그들의 자원을 교회와 나누었고, 교황은 800년에 로마에서 찰스대제의 머리 위에 신성로마제국의 왕관을 올려 주었다. 그러나 후속하는 2세기 동안 지상의 통치자들은 천국의 지배자보다 우위에 있었다.

중세 성기에는, 기후 온난화로 농업이 번창하여 인구가 증가하고, 공업과 상업이 확대되어 경제가 발전하였다. 따라서 다른 분야가 점차 번성하였고, 사회는 신설대학에서 교육을 받은 법률가, 의사, 이론가 등을 포함하는 특수화된 전문가들을 요청하였다. 교회와 수도원의 수가 증가하면서, 성직자는 조직을 강화하였다. 성직자들의 응집력과 세속통치자의 적나라한 노출은 그들에 대한 성직 우위를 요구케 하였고, 13세기에는 교황의 힘이 절정에 이르렀다. 그러나 교회의 힘은 전쟁과 세금에 한계가 있었다. 첫째, 교회법에 따르면 전쟁은 지상의 이득을 위해 전투에서 사람을 죽이는 것은 중대한 범죄이다. 그러나 십자군 전쟁은 교황의 이득이나 보호를 위하는 것이 아니므로 정당화되었다. 둘째, 교회법은 자신들의 동의 없이 성직 소득에 세금을 내지 않는다. 그러나 이 법은 세속통치자들의 관심 범위 내에 있을 때 잘 적용되었다. 베네딕트 교단은 1150년에 도전을 받아 1300년에 문을 닫고 새로운 교단이 일어났다.

중세후기에는 환경의 변화, 정치적 중앙집권, 그리고 성직 관료들의 자기적응이 부족하여 교황 체제는 쇠퇴하기 시작하였다. 첫째, 경제적 후퇴와 흑사병의 확산은 사회의 균형을 파괴하였고 환경의 변화는 기존의 안정된 질서를 파괴하였다. 흑사병으로 인한 인구감소는 임금을 올리고 임대료를 하락시켜 장원(봉건)제도를 파괴하였다. 수도사와 수녀들은 자신이 살기 위하여 도주하였고, 흑사병 희생자는 장례의식도 없이 매장되었다. 인구감소로 교회와 학교는 빈자리를 채우지 못하였다. 둘째, 성장하는 세속적 왕국 들은 장원제도의 붕괴와 함께 정치 권력을 중앙에 집중하였다. 강력한 군주는 교황의 선거절차에 영향을 주거나, 전쟁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성직 소득에 세금을 부과하였다. 셋째, 가톨릭교회는 교황권을 중앙에 집중하여 그 힘이 절정에 달하였고, 교황 체제는 자기적응의 기능을 상실하였다. 교황 체제는 공공의 비판이 통하지 아니하고, 개혁 없이 부패가 만연하였다. 중대한 죄를 범한 사람이 면죄부를 구매함으로 참회 없이 사함을 받는다는 것은 돈으로 신의 자비를 사는 것이다.

동서교회의 분리: (1) 로마제국이 동서로 분할통치하면서 수도를 분리하여 제 분야에서 독자적 행보를 하였다. 서방 교회는 라틴문화의 중심인 로마의 교황청이 라틴교회를 관장 하였고, 동방교회는 희랍문화의 중심인 콘스탄티노플에서 서방과 다른 배경으로 발전하였다. (2) 동방과 서방의 교회 사이에 대립의 발단은, 신학적 해석이나 관점에서 많은 차이가 있겠으나, 성상 파기가 원인을 제공하였다. 콘스탄티노플은 로마교회가 사용하는 성상을 반대하였으며, 이를 찬성하면 이단으로 간주하였다. (3) 로마교회는 로마제국의 정치체제에 유사하게 가톨릭교회의 행정 체제를 발전시켜 왔으며, 로마 교황은 행정적 우위를 주장하고 인정을 받아왔다. 그러나 동방교회 특히 콘스탄티노플은 정치적 이유에서 이를 용납하지 못하였다. (4) 제4차 십자군 전쟁에서 이집트를 공략하기로 기획하고, 수송하는 배가 베네치아 주동으로 자국 이익을 위하여 방향을 바꾸어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고, 도시를 약탈하고 파괴하였으며, 정권을 축출하고 라틴제국을 수립하여, 그리스의 성직자는 모두 로마교회의 신부로 대치하였다. (5) 오토만 터키가 1453년에 콘스탄티노플을 정복한 이후 발칸과 근동 지역은 서방세계와 고립되어 종교적 교류가 정지되었다.

보니페이스 8세(1294-1303)는 자신이 교회나 국가에 대해 최고의 권위(Final Authority)라고 주장하였다. 그는 파문이나 성직정지를 통해 시칠리아와 나폴리의 왕위계승에 간여하였다. 프랑스의 필립 4세(1285-1315)는 영국과의 전쟁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성직자에게 세금을 부과하였다. 교황은 성직자의 권한을 침해한다고 반대하고 필립 왕을 파문하였다. 필립이 교황을 체포하자 (이탈리아 귀족이 구출하여) 충격으로 사망하였다.

아비뇽의 교황: 필립 4세의 압력으로 추기경단은 프랑스 출신 클레멘트 5세(1305-14)를 교황으로 선출하였다. 그는 숙소를 프랑스 국경 부근 아비뇽으로 옮겨, 향후 67년간 교황들이 상주하였다. 마르실리우스(Marsilius of Padua, 1270-1342)에 의하면, 신성로마제국 황제 루이 4세는 1323년 나폴리 왕에 대항하여 밀라노를 보호하기 위하여 군대를 파병하였다. 이에 교황 존 22세 는 황제를 파문하고 철군을 요청하였으나, 황제는 1328년 로마로 진입하여 자신 스스로 왕관을 올린 후, 교황을 이단으로 폐위하였다. 윌리엄(William of Ockham, 1287-1347)은 영국의 프란시스칸으로 철학 및 신학자이다. 1328년에 그의 저술이 문제가 되자 아비뇽에서 뮌헨으로 도주하여 독일 황제의 보호를 받았다. 교황 존 22세는 그를 파문하였고, 윌리엄은 그의 신념을 굽히지 않고 망명으로 여생을 보냈다.

교회의 대분열(The Great Schism): 백년전쟁의 군비를 충당하기 위하여 프랑스는 교황의 자금을 많이 유용하였고, 영국은 자금이 교회로 유입되는 것을 강력히 억제하였다. 교황의 신망 추락을 인지한 그레고리 11세는 1376년 교황청을 로마로 옮겼다. 로마에서는 교황선출 선거인단을 위협하여 이탈리아 출신 우르바노 6세를 새 교황으로 선출하였다. 프랑스 출신 추기경들은 선거에 불복하여 클레멘트 7세를 교황으로 선출하여 그는 아비뇽으로 돌아왔다. 1409년 피자 위원회에서 두 교황을 폐위하고, 제3의 교황으로 알렉산더 5세를 선출하였다. 그러나 두 교황은 퇴위를 거부하여 로마-아비뇽-피자가 공존하는 3명의 교황 시대가 열렸다. 콘스탄스 위원회가 세 교황을 폐위하고, 마틴 5세(1417-31)를 새 교황에 선출하였다.

신비주의(Mysticism)는 “어떤 이념, 윤리, 의식, 신화, 전설, 마술 등에 의해 변성 의식상태의 일종인 종교적 황홀경에 드는 것이다.” 중세의 신비주의는 즉각적, 직접적, 직관적으로 획득한 신의 지식으로, 마이스터(Meister Eckhart, 1260-1327), 요하네스(Johannes Tauler, 1300-61), 제라르드(Gerard Groote, 1340-84) 등이 이론적으로 주도하였다. 제라르드는 그리스도의 삶을 따르는 단순한 경건함과 도덕성을 강조하였으며, 마음의 평화를 찾기 위하여, 자기 자신을 부정하고 열성(기도)과 침묵으로 나아가면 성취된다고 하였다.

종교개혁의 서곡: 위클리프(John Wycliffe, 1328-84): 옥스퍼드 대학의 신학 교수로, 그리스도는 제자들이 재산을 소유하지 않도록 하였으므로 교회나 성직자들의 재산 소유는 신의 율법을 위반하는 것이라 주장하였다. 후스(John Hus, 1374-1415): 프라하 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신부가 되었다. 그는 위클리프의 영향을 받아, 연옥의 존재에 관해 의문을 제기하였고, 교황이 면죄부를 파는 모금에 항의하였으며, 교황을 수전노이며 반기독교적이라고 비판하여 처형되었다.

(문명사 연재 6 중세 유럽의 정치와 종교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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