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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문명사여재 7/ 재미 Hugo Kim 교수

양곡(陽谷) 2023. 6. 6. 10:29

세계문명사 연재 7. 중세 유럽(750-1400)의 경제와 사회

중세 초기에 외적의 침입으로 혼란하여 교통과 통신이 어려워지고, 무역로가 파괴되거나 차단되어 상거래가 화폐에 의존할 수 없게 되었다. 토지소유자와 노동자 사이에 또는 영주와 봉신 사이에 상호 필요하여 사회계약이 성립되어, 영주는 봉신에게 토지를 대여하고 봉신은 영주에게 필요한 노동과 군 복무를 제공하는 봉건제도가 확립되어 정치 경제 사회적 환경이 변하여 상호필요성이 사라지는 시기에 붕괴하였다. 중세 성기에 인구증가로 농업이 발전하여 농산물의 잉여 생기면서, 공산품 수요가 증가하고, 저축 증가로 산업투자가 확대되어, 공업과 상업이 병행 발전하여 상업화가 이루어졌다. 경제적 주도권이 토지 귀족(Landlords)에서 경제변화의 주축인 상인(Merchants)으로 이전되고, 도시는 점점 상업혁명의 중심이 되었다. 본 연재는 (a) 인구와 농업 (b) 영주와 공동체 (c) 공업과 기술 (d) 무역과 금융 (e) 경제조직과 정책 등 5분야로 기술한다.

(a) 인구 변동과 농업 발전

봉건제도로 장원에 농노의 수가 증가하고 종전의 노예는 결혼이 가능한 농노가 되어 인구가 증가하였다. 1000년부터 기후 온난화로 농업생산이 증가하고 영양 상태의 개선으로 인구가 증가하였다. (1) 정착 모형: 켈트나 슬라브족은 5-50명으로 촌락을 이루고, 영국은 50~150명의, 게르만은 150~300명의 마을을 형성하였다. 콘스탄티노플 인구는 800년경 300,000이며 1453년에는 35,000에 불과하였다. 흑사병 발발 직전 1348년에 파리, 베네치아, 플로렌스, 제노아 등 인구는 근 100,000이었고, 다음에 코르도바나 밀라노 등의 인구는 50,000을 상회하였다. (2) 인구증가 추세: 유럽의 총인구는 500년에 2,750만 명, 1000년에 3,850만 명, 1340년에 7,350만 명으로 증가하였으며, 가장 급속한 증가는 중앙 및 북부 유럽이었다. 이 기간에 정치 상업의 중심지인 파리, 런던, 콜론, 프라하는 급속히 도시화 되었다. 동부 유럽과 러시아는 (몽골 지배로) 인구 성장이 지연되었으나 이집트와 모슬렘은 인구가 급속히 증가하였다. 기온 한랭화로 발트해의 동결, 흑사병의 전염, 전쟁과 반란이 인구이동에 영향을 주었다.

(3) 수명과 기대수명: 출생 이후 기대수명은 중세에 30~35세이고. 21세까지 생존한 영국 귀족 남성의 기대수명은 1200-1400 기간에 64세이며 1300~1400 기간에는 흑사병으로 인해 45세이고, 1400~1500 기간에는 69세이었다. (4) 질병과 인구: 결핵, 이질, 천연두, 흑사병, 말라리아 등이 인구 변동에 영향을 주는 치명적인 질병이었다. (5) 결혼과 출산: 중세는 종교적으로 금욕과 독신주의를 찬미하는 사회였고, 미망인은 재혼하지 않았다. 중세의 농노 28~34%가 결혼하였다. 흑사병 시기에 티롤(독일)은 높은 비율로 42.9%가 결혼인구였으며, 영국은 1377년에 45~55%가 결혼인구였다. 평균하여 30세에 결혼한 여성은 4자녀, 25세는 5자녀, 20세는 6자녀를 출산하였다. (5) 이주: 12~13세기에 게르만이 동북부 슬라브와 발트 지역으로 이주하여 정착하였다. (6) 정치적 군사적 정복: 노르만 영국정복은 새 지배계급의 이동으로 정복한 땅을 정복자들에게 분배하였다.

농업과 기술발전: 중세는 농업이 지배적이고, 1000년부터 기후 온난화와 산림지역 개간으로 농토를 확장하여 농업생산이 증가하고 영양 상태가 개선되어 인구가 증가하였다. 산림지역 개간은 천연림을 잘라서 연료와 목탄, 주택, 제분소, 교량, 성곽, 선박 등을 위해 광범위하게 사용되었다. 농토를 얻기 위하여, 특히 기독교인들은 종교적 이상으로 무장하여 새로운 기도원을 열어 산림을 개척하고 습지를 배수 개간하여 새로운 농토를 만들어 경작하였다. 독일은 엘베강, 오데르강, 비스툴라강을 건너 동부를 식민지로 하여 정착하고, 네덜란드는 해안에 제방을 막아 농토를 만들어 경작하였다. 농기구는 철기를 사용하고 바퀴 달린 철제 보습을 부착한 쟁기를 2~4마리의 말이나 소에 목걸이와 어깨띠를 매어 끌고 논밭을 갈았다. 11~12세기에 말발굽에 징을 박아 발을 보호하였다. 중세 성기에 철제 사용이 확대되어 수력 제분소가 널리 퍼져, 1086년 영국은 6,000개의 제분소가 성업하였다. 댐을 건설하여 수력 이용이 증가하고, 특히 캠(Cam)을 발명하여 회전 동을 전후 동으로 전환하여 물방아 동력을 산업에 적용하였다. 수력이 없는 지역은 풍력 제분소를 설치하여 1200년경에 일반화하였다. 수력과 풍력 제분소는 18세기 증기기관 엔진이 발명되기 전까지 가장 중요한 동력의 원천으로 산업 전반에 이용되었다.

농사 도구와 장비로 쟁기, 밭갈이 써레, 갈퀴, 낫, 탈곡기 등을 사용하였다. 3부 경작제도는 장원이나 마을의 농토를 3개의 큰 농지로 나누어, 첫째는 가을과 겨울에 밀과 보리를 심고, 둘째는 콩과 작물을 심고, 셋째는 휴경하였다. 열린 들판 제도(Open Field System)에서 영주가 소유하는 산림이나 목축지를 일반 대중이 공통으로 무료로 사용하였으나, 점차 일반에게 열어주지 않거나 농지나 목축지로 개발하였다. 주요 곡물은 1차로 기장, 밀, 보리; 2차로 가축 밀, 호밀, 귀리, 메밀; 그 밖에 과일, 채소, 약초들을 재배하였다. 중세에는 가축이 사유재산의 중요한 부분으로 가축 사육은 산림, 늪지, 황야, 개방된 초원 등의 자연자원을 이용하였다. 어떤 지역에서는 습지를 개선하여 목장을 확장하였다.

농업경제의 변동은 인구의 증감, 기술의 발전, 경작구조의 변동에 추가하여 토지소유권의 분배, 교환경제의 압력, 일반적 경제여건에 영향을 받는다. 중세 농업경제를 3단계로 살펴본다. [1단계] 약 1000년부터 교인들이 토지를 교회에 계속 기증하고, 토지가 상속으로 분할되어 귀족들의 상속 재산이 감소하였다. 산림지역의 개척과 마을형성은 새로운 공동체를 구성하며, 토지를 소유하는 귀족들이 공동체를 흡수하였다. [2단계] 도시에서 대개 농산물을 자신의 농지에서 직접 생산조달 하였지만, 인구증가로 농산물 수요가 증가하여, 농촌경제가 번창하고 농업에 이윤이 생기게 되었다, 이윤추구 동기가 농업투자를 촉진하고, 생산-소비-교환의 경제활동이 기업화되어, 농업경영자와 토지 귀족 사이에서 상인들이 이윤을 극대화하였다. 영주는 토지이용자에게 임대료를 징수하고, 노동자에게 임금을 지급하는 단순 경영자가 되었다. 경제의 주도권이 영주나 토지 귀족에서 제조업의 경영자나 상인집단으로 이전되었다. [3단계] 장원은 1300년경에 번창하였으나 수익률이 매우 낮았다. 기온 한랭화, 흉년과 영양실조, 질병, 전쟁으로 인구가 감소하고 임금이 상승하여 기존의 봉건제도가 붕괴하여, 노동자들은 농노의 틀을 벗어나 임금을 받는 자유 노동자로 변모하였다. 1440년경부터 서서히 경기회복이 시작되어 새로운 성장의 물결이 일어났다. 인구 증가로 식품 수요가 증가하고 농지 수요가 증가하여, 방치한 땅을 다시 경작하고 목축지가 농토로 전환되었다.

(b) 영주와 공동체 (봉건사회, Feudalism)

장원제도(Seignorialism or Manorialism): 중세 초기 유럽은 인구감소, 도로와 교량의 파괴, 전쟁과 기근으로 강도와 피난민, 해적, 정상적인 우편의 결핍으로 교통과 통신이 붕괴하였다. 무역 통로는 아드리아해의 베네치아에서 흑해의 콘스탄티노플, 그리고 발트해에서 드네프르강을 통하여 흑해와 카스피해까지 왕래하는 것이었다. 화폐주조의 난맥상은 화폐를 부족하게 하였고, 통화 매개체를 신뢰할 수 없어 상거래가 방해되었다. 농부들은 임금을 화폐로 정기 수령이 불가하여, 생필품을 시장에서 구매할 수 없었다. 이 문제를 해소하기 위하여 지주나 농부들은 두 가지 선택이 있었다. 입주하여 식구가 되어 의식을 해결하면서 노동을 제공하거나, 노동자에게 땅을 떼주어 스스로 생필품을 마련하고 지주에게 노동을 제공하는 것이었다. 자유인이 필요에 따라 자의적으로 지주의 농노(Serf)가 되어, 보호를 받고 농지를 받아 경작하면서, 약속한 노동력을 제공하였다. 지주-농노 관계는 중세 장원제도의 근간이 되었고, 군사적 봉사를 추가하여 봉건제도로 발전하여 영주(Lords)와 봉신(Vassals)이 되었다.

봉건제도(Feudalism)는 중세 성기에 서부 유럽의 귀족들이 정치 군사적 관계를 수립하는 계약으로, 영주는 영지를 수여하고 봉신은 노동력과 정치 군사적 서비스를 제공하며 존경과 충성맹세의 서약으로 보증하였다. 이는 토지와 군 복무를 교환하는 것으로, 정복자 윌리엄이 노르만 추종자들에게 정복한 영국의 토지를 분배한 경우에서 볼 수 있다. 봉건제도는 장원제도에 기초한다. 외세침략 시기에 왕이 신민을 보호해 줄 수 없어, 지방 영주가 토목사업을 하며 성곽을 짓고, 훈련된 군사력을 준비하였다. 무기를 사용하는 능력은 군대 봉사를 위해 기본적이며, 한 농부가 능력을 인정받아 기사(Knight)가 되면 귀족계층으로 진입한다. 그가 자유계약으로 충성맹세를 하고 하급 기사가 되면, 영주로부터 땅을 받고 자신의 봉신을 거느린다. 그러나 기존 장원제도에서 영주가 농노를 병사로 훈련하여 자체방어와 함께 유사시 왕을 위하여 전장에 나가 싸웠다. 따라서 초기의 비군사적 장원제도가 점차 군사적 봉건제도로 발전하게 되었다.

한 마을이 장원이 되고, 2개 이상의 마을이 장원이 되기도 한다. 봉건제도의 경제에서, 영주는 농토를 주고 봉신은 노동을 제공한다. 봉건사회는 자유인, 농노, 노예로 구성된다. 자유인은 귀족, 성직자, 군인과 정부 관료, 전문직업인, 상인, 공예인, 자유 농부를 포함한다. 자유 농부는 소작농으로 봉건영주와 계약으로 토지를 임차 경작하고, 임대료를 지불하며, 영주에게 다른 의무가 없고, 소작권은 보장되며 독립적이다. 영국의 자유 농부는 11세기에 인구의 10% 정도였고, 북부 프랑스는 소수였다. 농노는 노예보다 생산적이기 때문에, 노예는 감소하고 농노는 증가하였다. 12세기에 영국의 노예는 집안 서비스에 한정되었다.

농노는 주택을 임차하고, 영주에게 일정 시간의 노동을 제공하며. 나머지 시간은 영주가 주는 땅을 경작하였다. 농노는 세금 (개인당 세금, 대지 세금, 직접토지세), 곡물 수확과 가축 소득에 따른 할당, (산림개간, 늪지 배수, 운하 굴토, 제방 설치 등에) 노동력을 제공하고, 요금과 수수료를 지불하였다. 농노는 전쟁 시 군 복무에 나가며, 영주의 제분소-화덕-용기 사용료를 지불하고, 아들을 고등교육에 보내면 벌금을 부과하고, 장원 밖의 사람과 결혼하면 세금이 부과되었다. 자유 농부나 농노는 영주의 신민이며 고용인으로, 영주의 법정에 출두하여 재판을 받았다. 영주는 농사철에 농노의 노동 시간을 추가하는 권리가 있었다. 그는 농노 사망 시 상속세를 부과하고, 상속자가 부재하면 토지를 환수하였다. 농노는 공공목장에서 목초를 먹이고, 산림과 불모지에서 연료와 건축자재를 취할 권리가 있으며, 사냥과 고기잡이는 허용되지 아니하였다.

독일과 슬라브지역은 12~13세기에 자유 농부들로 광대한 지역의 산림이나 황무지를 개간하면서 봉건제도가 후퇴하였다. 그러나 15~16세기에 러시아, 폴란드, 프러시아, 리투아니아 사이에 많은 전쟁으로 정치와 사회가 불안하여, 동부 유럽에서 장원제도가 다시 시작되었다. 발트 지역에서 서부 유럽 곡물의 수요가 증가하고 농업을 위해 노동력이 계속 필요하여, 봉건제도가 유지되었다. 프랑스혁명과 나폴레옹 전쟁으로 서부 유럽의 봉건제도는 폐지되었다. 러시아는 크리미아 전쟁에 패하여, 농노들의 폭동 가능성, 정부의 재정적 필요성, 문화적 민감성, 군사적 징병 소요 등을 고려하여 1861년 농노제도를 폐지하였다. 한편 유럽국가들이 중앙정부를 강화하기 위하여 봉건제도의 이점을 이용하였다.

기사제도(Chivalry): 대영주는 왕을 위해 기사단을 준비할 책임이 있다. 영주는 주민을 위하여 군사적 보호를 준비하기 때문에, 봉신은 영주를 위하여 전투준비를 한다. 캐롤린지언 왕조의 군대는 10세기에 기병대가 기간이 되었고, 외세 침공에 대비하여 성곽의 축성이 증가하였다. 중세후기의 기사도 정신은 무사의 기풍, 기사의 경건함, 고상한 예법을 결합하여 명예와 고결함을 갖추는 것이었다. 기독교 신앙은 영웅주의와 덕성의 고전적 개념에 영향을 가미하였다. 교회는 기독교 신앙을 방어하기 위하여 십자군 전쟁을 정당화하였다. 봉건제도의 영향은 정치적으로, 공작들의 지방 세력을 강화하고, 왕의 중앙권력을 약화하였다. 봉건제도의 정치적 기능은 절대군주와 의회주의가 부상하면서 소멸하였다. 봉건제도의 경제적 기능은 화폐의 정상적 사용으로 쇠퇴하여 자본주의경제가 등장할 때까지 존속하였다. 사회적으로, 봉건주의는 새로운 직업군인 계층을 창출하였으며, 봉건 군대는 국가 상비군이 등장할 때까지 존속하였다.

봉건제도의 쇠퇴: (1) 영국의 정치발전은 봉건제도를 약화시켰다. 헨리 2세(1154-89)의 사법개혁은 봉건영주의 권한을 약화하고, 영국의 관습법과 판사와 배심원의 역할을 강화하였다. 마그나 카르타(Magna Carta)는 권리와 자유의 이상을 확립하였고, 평민으로 구성된 의회에 많은 권한을 부여하였다. (2) 흑사병으로 인구의 약 1/3이 사망하여, 유럽은 경제 사회가 변화하고, 인구감소로 노동자의 상대적 수요가 증가하여, 정치 권력이 귀족이나 봉건영주에서 평민에게로 이동하였다. (3) 백년전쟁 중에 영국과 프랑스에서 대결한 일련의 전투는 양국에서 국가의 자부심과 정체성을 불러일으켰다. 따라서 왕이 중앙 정치 권력을 강화하여 귀족이나 기사들의 중요성이 감소하였다. (4) 유럽의 경제는 토지를 소유한 귀족이 장원을 형성하여 농업 위주의 경제구조를 유지하였으나, 공업과 상업의 발전으로, 경영인과 상인들이 경제 주도권을 장악하여, 농업기반의 봉건제도가 점차 약화 되었다. (5) 교통과 통신이 정상화 되고, 화폐가 자유롭게 유통되어, 영주는 종전의 특권이 없이, 노동자들에게 임금을 현금으로 지불하고 임대료를 수금하였다. (6) 봉건제도는 토지와 국방을 연결하는 제도였으나, 점차 군사기술이 발전하고 직업적 전문성을 가진 상비군이 건설되어, 농부가 전시에 나가 싸우는 아마추어 농부군인은 사라졌다.

마을 공동체와 중세 도시: 마을 공동체: 중세 초기에 농촌은 대부분 작은마을이었다. 농토의 경작방법이 발전하여, 비경작 토지를 집단으로 이용하였다. 산림과 목초지를 일반이 사용하는 권리는 엄격히 통제되지 않았고, 그것이 공공-개인의 토지인가, 자유-비자유인에 허용되는 것인가 불분명하였다. 점차 토지사용이 규제되고, 산림과 목장의 이용에 관하여 인접 공동체와 분규가 자주 발생하였다. 개발지역에 입주자를 유치하기 위하여 영주가 매력적인 조건을 제시하였다. 임대료와 십일조는 고정하고, 그 1/10은 지역교회에 허용하며, 소교구에 신부를 위한 관사를 허용하고, 법정수입의 2/3는 정착자들에게, 1/3은 추기경에게 할당하였다. 정착자들에게 자유를 허용하고, 상속권이 명시되며, 어느 마을은 의회를 주재하는 지방 관리를 선출하였다. 마을 공동체는 평민으로 구성되었고, 주민들은 자기농토에서 자가 노동으로 자급자족을 하였다. 마을의 의사결정이 합의를 이루지 못하면, 영주의 견해가 지배적이고, 불발하면 최연장자가 결정하였다. 공동체는 토지 공동소유를 응집력으로 집단행동을 하였다.

중세 도시의 성장: 도시나 소읍은 1000년경에 하천과 도로망이 연결되어 교통이 편리하고, 외적을 방호하는 거점의 인근 지역에서 발전하였다. 주민의 정착이 번창하면, 영주는 새로운 성벽을 세워 보호하였다. 대부분의 소읍은 인근 시골에서 식품을 조달하였다. 그들은 원래 농촌 태생이지만, 농부나 농노와는 다른 상인이며 제조업에 종사하는 공예인으로 무역을 위해 기동력이 필요하고, 상공인들에게 적합한 법이 필요하였다. 영주나 왕은 그들이 혁명적인 집단이라는 것을 감지하고, 상공업이 창출하는 세입의 잠재력에 매혹되어 1100년경에 그들에게 자유의 특권 즉 유언의 권리, 상속과 재산 매각의 권리, 군대 복무 의무 해제, 읍민들의 자유를 보장하는 법, 1년 1일 거주 후에 자유인이 되는 권리(농노가 도망하여 체포되지 아니하고 자유인이 되는 경우)를 헌장이 허용하였다. 어떤 공동체는 부분적으로 자치정부를 구성하였다. 영주나 왕의 요원들이 세금을 징수하고, 재판을 관리하였다. 1130년에 헨리 1세는 런던 시민들에게 자치권을 부여하고 자기들의 관리를 선출하고 법정을 관리토록 허용하였다. 통치권 약화를 우려하여, 영주가 자치정부 구성을 거부하는 경우, 주민(상공인)연합은 이에 대항하여 공동체를 구성하고 자치권 확보를 위해 저항하였다.

TO BE CONTINUED
(c) 중세 산업과 기술의 발전
(d) 중세 무역과 화폐와 금융
(e) 중세의 경제조직과 경제정책

REFERENCES

Kim, Hugo W. The Middle Ages From 750 To 1400: Feudalism and Commercial Revolution (History of Politics and Economy, Book II). North Charleston, NC: CreateSpace, 2020, 145-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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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휘국. 정치철학*경제사상과 함께 읽는 세계문명사. 서울: 한국전자도서출판, 2022, 130-15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