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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문명사 강의 / Hugo Kim 교수 / 재미원로

양곡(陽谷) 2023. 5. 16. 00:05

세계문명사 연재 1 고대 그리스와 로마제국의 정치와 종교

인류문명의 발원은 메소포타미아의 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강, 이집트의 나일강, 인도의 인더스강, 그리고 중국의 황하이며, 여기서는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 문명을 연구한다. 각 시대의 문명사 이야기는 정치와 종교, 경제와 사회, 정치철학, 경제사상, 역사적 교훈으로 5회 나누어 연재한다. 연재 1은 고대 그리스와 로마제국의 정치와 종교로서 (a) 고대 중-근동 (b) 고대 그리스와 헬레니즘 (c) 고대 로마제국 (d) 게르만 왕국과 중-근동 (e) 고대 종교의 발전 순으로 계재한다.

(a) 고대 중-근동의 정치

메소포타미아는 티그리스강과 유프라테스강 지역에 위치하며 오늘날 이라크를 말한다. 이 두 강이 자연적으로 가져다주는 비옥한 토지로 인하여 약 6000 BC 후기 중석기 시대부터 인간이 정착하기 시작하였다. 메소포타미아 지역은 강의 범람이 불규칙하고 잦아서 치수 및 관개 사업이 대규모로 필요한 여건에서, 사제나 무인 등 지배계층이 배수와 관개시설을 건설하고, 규율이 잘 잡힌 노동력을 준비하여, 신석기 시대를 지나 3000-2000 BC 기간에 최초로 큰 농업혁명을 이루었으며, 이집트-지중해-중 근동 지역에 영향을 미쳤다. 메소포타미아는 개방적인 지리적 요건 때문에, 이민족의 침입이 자주 있었고, 국가의 흥망과 함께 민족의 교체가 빈번하였다. 함무라비(1792-1750 BC)는 메소포타미아를 통일하여 대제국을 이루었고, 함무라비 법전은 그들의 생활을 규제했던 법을 집대성한 것으로서, 당시 사회적 풍습과 여건을 잘 설명해주고 있다.

고대 이집트 문명은 나일강의 기적이었다. 나일강은 범람으로 비옥한 토양을 마련해 주면서, 남북으로 빠른 수송을 제공하고, 양안 마을에 양호한 통신을 허용하며, 농작물의 분배에 편리하였다. 이집트는 지리적인 자연장벽(동서는 사막, 남은 큰 폭포, 북은 지중해)으로 인하여 외적으로부터 방호되었고, 이들 장벽은 무역에 방해가 되지 않았다. 이집트는 약 5500 BC부터, 조그마한 부족들이 나일강 변에 정착하여, 농업과 축산으로 문명을 건설하고, 가장 큰 문명은 남부 이집트의 바다리 문화이고, 그 후 약 1000 BC 경에 소수의 농업공동체가 발전하여 강력한 나카다 문명을 건설하였으며, 통치자들은 나일강 계곡의 사람과 물자를 완전히 통제하였다. 고대 중-근동은 개략적으로 바빌로니아(2000-1600 BC), 히타이트 왕국(1600-1200 BC), 아시리아 제국(1200-600 BC), 페르시아 제국 (600 BC- AD 561) 등의 연대순으로 지배하였다.

히타이트(Hittites)는 1600-1178 BC 동안에 아나톨리아의 대부분, 시리아 북서부, 레바논까지 장악하여 지배하였던 왕국으로, 도시국가로 분해되어 아시리아에 흡수되었다. 약 1200-900 BC 사이에 중-근동 지역에 지배적인 강대국이 부재한 가운데, 바다 민족, 페니키아, 유대인 등 소수민족이 주로 해상 활동으로 세력을 형성하였다. 바다 민족은 에게해에서 출발하여 동지중해를 거쳐 아나톨리아, 시리아, 가나안, 키프로스, 이집트를 해상으로 침략하였다. 페니키아는 가나안 북쪽에 근거를 두고 지금의 레바논-시리아-이스라엘 북부로 이어지는 해안에 문명을 건설하였고, 최초로 알파벳을 사용했던 도시국가였다. 유대인은 1800 BC 경에 메소포타미아에서 팔레스타인 땅으로 이주한 셈족으로, 1550 BC 경에 기근으로 이집트에 이주하였으나, 1300-1200 BC 노예화를 피하여 모세의 인도로 이집트를 탈출하고, 다윗왕(1000-971 BC) 때에 예루살렘에서 유대 왕국을 수립하였다.

아시리아(Assyria) 제국은 고대-중기-신 아시리아 제국으로 오랜 역사를 가졌다. 신 아시리아 제국은 911-605 BC 기간에 유럽과 중-근동 지역에서 가장 강력한 국가로, 그 지역, 북아프리카, 지중해 동부 지역에서 패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이들은 철제 무기로 장비되고 새로운 군사 전술로 훈련된 최강의 군대를 가지고 있었다. 어서바니팔은 강력한 통치자였으나, 제국이 과도 팽창되어, 세력 있는 귀족들이 광대한 영토를 통제하면서 독자적 군사작전을 수행하여 내부갈등을 증폭시켰다. 또한, 군사작전에서 야만적 행동은 증오심을 유발하였고, 그의 사후에 아시리아 제국은 급속히 분해-붕괴하였다. 아시리아는 방대한 병력을 전개할 수 있는 강력한 군사력으로, 신속한 기동을 지원하는 마차와 도강을 지원하는 공병 특수 부대가 있었고, 철제 무기로 장비했던 최초 군대로, 테러 전술을 사용하여 댐을 파괴하고, 불을 지르며, 과수를 잘라서 적을 약화하였다.

페르시아의 키루스(559-530 BC) 대제는 메디아, 리디아, 바빌로니아를 정복하여 550 BC에 아케메네스 제국(559-330 BC, 제1 페르시아 제국)을 건설하였다. 다리우스(522-486 BC)는 그리스와 마라톤 전쟁에서 패하였으나 이집트, 터키, 그리스, 인도 등을 점령하여 아시아, 아프리카, 유럽에 걸친 대제국을 건설하였다. 그는 조로아스터교를 국교로 삼고, 제국을 여러 개의 주로 나누어 태수를 임명하고, 아케메네스 동전을 새로운 화폐단위로 사용하고, 아라매익 언어를 제국의 공식어로 하였으며, 기간도로를 정비하고, 도량형을 표준화하였다. 그의 아들 크세르크세스 1세(486-465 BC)는 480 BC에 그리스와의 제2차 전쟁에서 패퇴하였으나, 이집트와 바빌로니아의 반란을 성공적으로 제압하였다. 페르시아 제국은 330 BC에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대제의 침공을 받아 멸망하였고, 알렉산더는 페르시아가 점령한 영토를 정복하여 대제국을 건설하였다.

(b) 고대 그리스와 헬레니즘 세계의 정치

고대 그리스는, 그리스 암흑기(1100-750 BC)로부터 로마에 정복당한 146 BC까지의 문명이다. 그리스는 4개 부족(Achaeans, Aeolians, Dorians, Ionians)으로 구성되었으나, 수 세기가 지나는 동안 피가 섞여, 같은 언어를 말하고, 같은 신들을 믿는 그리스인이 되었다. 그들은 독립성이 강하여 통일국가를 형성하려는 뜻이 없었고, 필요하면 도시국가 간에 동맹을 맺는 형식을 취하였다. 이러한 특징은 헬레니즘 시대의 그리스(323- 146 BC)에서도 유지되었다. 그리스 문명은 로마제국에 영향을 미쳤으며, 로마인들은 유럽을 정복하던 초기에 선진 그리스 문명을 배우려고 자녀들을 아테네로 유학을 보내고, 지중해 지역과 유럽에 그리스 문화를 전파하였다. 그러나 6세기경에는 기독교의 핍박으로 아테네 학자들이 학문을 계속할 수가 없어 이슬람 세계로 망명을 하였다.

스파르타 (Sparta): 그리스는 750~500 BC 사이에 도시국가로 발전하면서 식민지를 건설하였다. 스파르타는 도리아인이 남하하여 라코니아 주변 농촌 지역과 소 도회지를 장악하여 건설한 도시국가로, 3계층의 계급 사회를 구성하였다. 스파르타인은 토지를 소유한 시민으로서 노예계급이 생산품을 조달하였다. 페리오이코이는 시민권 없는 자유인으로 상공업에 봉사하면서 세금을 바치고 군 복무를 하였다. 헬로트는 사회의 하층 계급으로 스파르타인이 소유한 토지에 종속된 노예로서, 농업생산의 절반을 주인에게 바치고, 비밀경찰은 반란이나 폭동을 우려하여 항상 그들을 감시하였다. 스파르타의 성인 남성은 군인으로 교육 훈련을 받으며 늘 전쟁에 대비하였다. 500 BC 경 스파르타의 인구는 스파르타인은 20,000-35,000, 페리오이코이 및 헬로트는 40,000-50,000명이었다.

600 BC 경 스파르타는 리쿠르고스에 의해 3개 덕목(시민의 평등, 군사적 단련, 내핍생활)에 기초하여 일련의 정치 경제적 개혁을 추진하였다. 그는 라코니아의 모든 토지를 30,000개로 균등히 나누어 시민에게 분배하고, 혈족 관계를 철폐하고 지역 구분으로 대치하여 광범위한 귀족사회를 형성하였다. 스파르타 시민들이 산업과 무역에 종사하는 것을 금지하고, 금과 은의 사용을 금지하며, 철을 화폐로 대치하여 상인계급의 토지독점을 예방하였다. 그의 헌법은 3가지 형태를 취하였다. (1) 군주제: 스파르타는 2가족에 의해 상속된 왕이 통치하고, 5명으로 구성된 감독관은 공공의 일을 관장한다. (2) 귀족제: 상원은 60세 이상 28명으로 구성하고 왕은 상원의 결정을 따른다. (3) 민주주의: 의회는 30세 이상의 남성으로 구성하며, 상원에서 제기한 안건에 대하여 토의 없이 투표하고, 이들은 또한 상원위원과 감독관을 선출하였다. 스파르타는 외세의 자유 사상에 오염되는 것을 경계하여 여행을 제한하고, 외국인을 경계하였다.

스파르타의 군대와 경찰은 긍지를 가지고 정부의 법령을 집행하였다. 감독관은 지혜롭고 용맹한 스파르타 청년을 선발하고 특수 비밀경찰로 훈련하여 대민사찰을 하게 하였으며, 그들의 판단으로 사살하는 것을 허용하였다. 스파르타인은 태어나면 포도주에 목욕을 시키고 상태를 점검한 후 부친이 아이를 정부 관리에게 데리고 가서 생존에 적절한가 판정을 받는다. 부적절하다고 판정하면 타이게토스산의 협곡으로 던져서 죽게 하였다. 남자아이는 7세가 되면 국가에서 데리고 가, 병영에 합숙하면서 강한 훈련으로 신체를 단련하고 전술 전략을 익히며, 국가에 충성하고 명령에 복종하는 정신교육을 받고 독서, 작문, 음악, 무용 등을 수련한다. 스파르타 청년은 20세가 되면 군에 입대하며, 30세가 되면 투표권을 가지고 사저에 기숙하고, 60세가 될 때까지 군 복무를 한다. 여성은 운동경기를 통하여 심신을 단련하여 건강하고 튼튼한 모성이 되게 하였다. 최적 결혼 연령은 남성은 30세, 여성은 20세로 정하고, 금욕은 범죄로 간주하였으며 독신이나 무자녀이면 불이익을 받았다.

아테네 (Athens): 아테네 인들은 신석기 시대부터 아티카 지역에 정착해온 이오니아 인으로 스파르타와는 다른 부족이었다. 이들은 약 700 BC 경에 아테네 최상의 토지를 소유하고 있는 귀족들에 의하여 통치되었고, 9인 집정관의 도움을 받는 귀족회의가 정치경제의 생활을 통제하였다. 집정관은 1년 재직 후에 귀족회의의 일원이 되기 때문에 귀족회의는 강력한 실권을 가졌다. 물론 시민 전체로 구성된 의회가 있었으나 거의 힘을 갖지 못하였다. BC 7세기 말경, 귀족 중에 반대세력이 형성되고, 심각한 경제문제가 발생하여, 정치 사회적 불만이 표출되었다. 621 BC에 귀족회의는 법을 제정하였으나 불안을 해소하지 못하였다. 아테네에서 농부가 귀족들에게 진 빚을 갚지 못하여 노예로 팔려나가는 숫자가 증가하게 되고, 부채탕감과 토지재분배를 요구하는 혁명의 기운이 일어나, 이로 인하여 여타 도시국가에 독재자들이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독재를 피하려고 아테네 귀족들은 594 BC에 자유주의적 귀족인 솔론(630-560 BC)에게 위기를 극복하도록 개혁의 전권을 주었다. 솔론은 사람을 담보로 한 모든 과거의 빚을 탕감하고, 빚으로 인해 노예가 된 모든 사람을 해방하였다. 그는 토지재분배를 반대하여, 경제위기의 근본 원인은 해소하지 못하였으나, 아테네의 번영을 위하여 새로운 도량형의 고안, 완만한 법규의 집행, 올리브 나무의 배양과 그 기름의 수출, 시민권의 허용과 외국인 유입으로 상업과 공업의 번영을 추구하였다. 정치에서는 귀족들의 권한을 약화하지 못했으나, 부유한 평민이 정치에 참여하는 문을 열어놓았다. 솔론은 모든 아테네 시민을 재산의 정도에 따라 4개 계급으로 구분하고, 상위 2개 계급 남성은 집정관이나 귀족회의 회원이 가능하며, 제3 계급은 위원회 임원(400명)이 가능하고, 제4 계급 빈곤층은 의회 투표권을 가졌다.

페르시아의 동진으로 그리스는 충돌이 불가피하였다. 페르시아는 다리우스 1세가 490 BC에, 그의 아들 크세르크세스는 480 BC에 대병력으로 두 번이나 그리스를 침공하였으나 패퇴하였다. 이로 인해 이오니아 도시국가들은 페르시아 지배로부터 해방되었고, 그리스의 선박은 흑해와 지중해에서 자유로운 무역을 하게 되었다. 페르시아 전쟁 이후, 스파르타는 지도적 위치에서 물러나고, 아테네가 델리안 동맹을 결성하여 페르시아에 대항하며 지도적 역할을 하게 되었다. 이 동맹은 회원 도시국가로부터 세금을 강제로 징수하여 아테네 제국주의를 집행하는 도구가 되었다. 아테네는 민주발전과 제국확장에 직면하여, 페리클레스(496-429 BC)는 아테네 의회를 통한 직접 민주주의 제도를 확립하였다. 아테네는 440s BC 경에 18세 이상 남자 43,000명 중, 약 6,000이 실제 참가자로, 법을 제정하고 정책을 통과시키기 위해 1년 4회 집회를 소집하였다.

아테네는 델리안 동맹을 통하여 그리스에 육상제국을, 에게해에 해양제국을 만들었다. 466 BC에 보에티아에 폭동이 일어나자, 스파르타군이 아티카를 공략하여 아테네의 육상제국을 분해하였다. 이들은 30년 휴전하여 아테네는 자신의 육상제국을 포기하고, 스파르타는 아테네 해상제국을 인정하였다. 그러나 그리스 전역에서 아테네 주도의 델리안 동맹과 스파르타 주도의 펠로폰네소스 동맹 사이에 충돌이 불가피하였다. 펠로폰네소스 전쟁(431-404 BC)은 육상 우위의 스파르타가 아티카로 침공을 반복하는 동안, 해상 우위의 아테네는 펠로폰네소스 해변을 침공하여 스파르타를 압박하였다. 415 BC에 아테네는 대선단으로 시러큐스를 침공하였으나 전멸하였다. 스파르타는 413 BC에 페르시아의 지원을 받아 에게해의 아테네 동맹국 반란을 지원하고 아테네의 함대를 파괴하여 아테네는 항복하였다. 그리스 도시국가들은 인명과 재산의 손실로 피폐하고 빈곤이 만연하였다.

알렉산더 (Alexander the Great): 마케도니아의 필립 2세는 338 BC에 아테네 도시국가들을 패퇴시키고 콜린스 동맹을 결성하여 페르시아 공략계획을 세웠다. 그가 암살된 직후 336 BC에 그의 아들 알렉산더가 20세로 왕위를 계승하였다. 그는 당대의 석학 아리스토텔레스의 교육과 심신단련-무술연마-실전 참여로 부왕 생전에 훈련을 받았다. 알렉산더는 334 BC에 30,000의 보병과 5,000의 기마병으로 페르시아를 공략하기 위해 소아시아로 들어갔다. 그는 시리아-이집트-메소포타미아로 전진하여, 다리우스를 패퇴시키고 바빌론에 입성하였다. 알렉산더는 페르시아 수도인 수사에 들어가 국고를 탈취한 후, 페르세폴리스를 경유 페르시아-인더스강까지 정복하였다. 그는 진격을 멈추고 퇴각하였고, 부상-열병-음주로 인하여 323 BC에 32세로 바빌로니아에서 사망하였다. 그의 사후에 제국은 마케도니아, 시리아, 페르가몬, 이집트로 분할되어 휘하 장수들이 통치하였다.

(c) 고대 로마제국의 흥망: TO BE CONTINUED
(d) 게르만 왕국, 비잔티움, 페르시아 제국: TO BE CONTINUED
(e) 고대 종교의 발전 ( - AD 750): TO BE CONTINUED

REFERENCES
Kim, Hugo W. From the Beginning to the Rise of Islam: The Greco-Roman Civilization. North Charleston, SC: CreateSpace, 2020, 1-164.
김휘국. 정치철학*경제사상과 함께 읽는 세계문명사. 서울: 한국전자도서출판, 2022, 15-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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