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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교의 사회복지 역사와 인물 칼럼] 감리교의 사회복지와 주요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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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교의 사회복지 역사와 인물 칼럼] 감리교의 사회복지와 주요 인물- 서울특별시사회복지사협회 누리집
https://www.sasw.or.kr/hotissue/957455
이용교 / 복지평론가, 광주대학교 명예교수
조선시대 말 민중들은 극심한 정치적 혼란과 전통적인 신분 질서의 해체 속에서 생존의 위기에 직면해 있었다. 국가 차원의 근대적 사회안전망은 미약했으며, 빈곤과 질병, 가부장적 인습은 민중의 삶을 짓누르는 고통이었다. 역사적 전환기에 미국 감리교(북·남감리회) 선교사들이 조선에 입국하여 전개한 활동은 종교적 차원을 넘어, 조선 사회의 근대화, 여성 인권 향상, 사회복지의 기틀을 다지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이 글은 미국 감리교 선교사들과 한국인 개척자들이 지난 140여 년간 수행한 사회복지 활동과 주요 인물을 살펴보고, 발전 방안을 제안하고자 한다.
1) 조선 말기에 미국 감리교 선교사들은 의료·교육을 중심으로 선교하였다.
기독교대한감리회가 홈페이지에서 밝힌 역사에 따르면, 1744년 영국에서 존 웨슬리(John Wesley, 1703~1791) 목사에 의해 첫 감리교회 연회가 시작된 이후 미국으로 선교사를 파송하였는데 미국 감리교회는 1784년 연회에서 공식적으로 독립하였다. 1883년 9월 미감리회(Methodist Episcopal Church) 볼티모어 연회 소속인 가우처(John F. Goucher) 목사는 신사유람단을 이끌고 미국을 방문 중이던 민영익을 만난 후 한국 선교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는 미감리회 국외선교부에 한국 선교 착수를 촉구하였고 일본 주재 미감리회 선교사 매클레이(Robert S. Maclay)로 하여금 한국 선교 가능성을 모색하도록 하였다. 중국과 일본에서 감리회선교를 개척했던 매클레이는 1884년 6월 24일 내한해서 “학교와 병원 사업을 해도 좋다”는 고종의 윤허를 받았다. 이에 미감리회 국외선교부는 아펜젤러(Henry G. Appenzeller) 부부와 스크랜턴(William B. Scranton) 부부, 국외여선교부는 스크랜턴 대부인(Mary F. Scranton)을 초대하여 한국 선교사로 임명하였고, 이들 중 아펜젤러 부부가 제일 먼저 1885년 4월 5일 부활주일에 내한하였다. 이들은 ‘교사’나 ‘의사’의 신분으로 입국하여 외래종교에 대해 부정적인 선입견을 제거하고 사랑과 봉사의 사역을 통해 선교하였다.
당시 조선은 갑신정변(1884년) 직후의 혼란스러운 정치적 상황과 쇄국정책의 여파가 남아 있었으나, 감리교 선교사들은 교육, 의료, 여성 해방, 언론, 성경 번역 등 다방면에서 조선의 근대화를 이끄는 중추적 역할을 담당했다. 존 웨슬리는 여성들의 탁월한 설교 능력과 치유, 돌봄의 은사를 보며 성별보다 하나님의 부르심이 더 중요하다고 판단했는데, 이는 조선 선교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헨리 아펜젤러(1858~1902)는 1885년 4월 장로교 호러스 언더우드(Horace G. Underwood, 1859~1916)와 함께 제물포로 최초 입국하여 교육과 교회 설립의 선구자 역할을 하였다. 그는 1886년에 조선 최초의 근대식 사립학교인 배재학당을 세워 서구의 신학문과 과학, 영어 등을 가르쳤다. 이는 고종으로부터 ‘유능한 인재를 기르는 학교’라는 뜻의 편액(배재학당, 培材學堂)을 하사받으며 공식적인 인정을 받았다. 이곳에서 배출된 인재들은 독립협회 활동 등 개화기 사회 각 분야의 지도자로 성장했다. 그는 자신의 집에서 시작된 예배 모임을 발전시켜 1887년 10월 9일에 서울에서 조선 최초의 감리교회인 정동제일교회의 모체인 ‘벧엘예배당’을 설립했다. 1897년 서울과 인천, 평양에서 엡웟(Epworth, 존 웨슬리 목사의 고향)청년회가 창설되었는데 이는 오늘의 감리교 청년회와 청장년선교회 및 남·여 선교회의 모체다. 그는 언더우드, 게일 등과 함께 협력하여 성경을 우리말(한글)로 번역하는 일에 참여하여 대중들이 쉽게 복음을 접하고 한글 보급에 기여할 수 있도록 도왔다.
메리 스크랜턴(1832~1909)은 1885년 5월 아들 윌리엄 스크랜턴과 함께 입국한 여성교육의 개척자이다. 1886년에 당시 남성들에 비해 교육의 기회조차 얻지 못하고 사회적으로 소외되던 여성들을 위해 조선 최초의 여성 교육기관인 이화학당을 설립했다. 초기에는 가난하고 버림받은 아이들을 거두어 가르치기 시작하면서 여성 교육의 요람으로 성장시켰다. 이화학당은 훗날 이화여자고등학교와 이화여자대학교의 모태가 되었다. 그녀는 교육뿐만 아니라 가부장적 제도 아래 고통받던 조선 여성들의 인권을 신장하고, 전인적인 복음을 전파하는 데 평생을 바쳤다.
윌리엄 스크랜턴(1856~1922)은 의사로서 의료 선교의 기틀을 마련했다. 그는 조선의 여성들이 남성 의사에게 진료받는 것을 유교적 관습상 꺼린다는 점을 파악하고, 1887년 10월 여의사 메타 하워드에 의해 한국 최초의 여성 전용 병원인 ‘보구여관(保救女館, 여성을 보호하고 구한다, 현 이화여자대학교 부속병원)’을 설립하도록 지원했다. 이는 수많은 여성 환자들의 생명을 구하고 현대 의학을 전파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또한, 그는 정동에 ‘시병원(무료진료소, 후에 정동병원)’을 설립하고 의료 혜택에서 소외된 계층을 돌보면서 선교의 문을 넓혔다. 또한, 천민과 상인들이 살던 서대문, 동대문, 남대문에도 진료소를 열었다. 동대문 진료소는 이대 의대 동대문 부속병원과 동대문교회로 이어졌고, 남대문 진료소는 많은 독립운동가를 배출한 상동교회로, 서대문 진료소는 아현교회로 남아 있다. 그는 서울 시내뿐만 아니라 지방을 순회하며 진료와 전도를 병행하여 감리교 선교 영역을 전국적으로 확장하는 데 기여했다.
한편, 미국 남감리회 선교의 시작은 개화파 지도자 윤치호가 망명중인 1887년 4월 중국 상해에서 세례받고 한국 최초의 남감리교인이 되면서부터이다. 그는 미국에 유학할 때부터 남감리회 국외선교부에 한국 선교를 촉구하였다. 이에 1895년 10월 18일 중국에 있던 헨드릭스(E. R. Hendrix) 감독과 리드(C. F. Reid) 선교사가 내한하였고 이듬해 8월 리드 부부가 서울에 정착하여 선교활동을 시작했다. 그 결과 1897년 5월 2일 경기도 고양에 첫 남감리교회가 설립되었다. 남감리회에서도 배화여학교, 한영서원, 호수돈여학교, 구세병원 등 학교와 병원을 설립하였고, 태화여자관을 비롯하여 개성, 원산, 춘천 등지에 여자사회관을 설립하여 한국 근대 사회복지사업의 문을 열었다. 남감리회는 선교 초기부터 신학교육에 있어서 미감리회와 협력하였고, 1907년에 두 교회 연합으로 협성신학교(현 감리교신학대학교)를 설립하였다.
2) 감리교 선교사들과 개척자들은 근대적 복지의 기틀을 마련했다.
조선 말기부터 해방 이후에 이르기까지 미국 감리교 선교사들과 이들에게 영향을 받은 한국인 개척자들은 근대적 사회사업(사회복지)의 기틀을 마련했다. 이들은 전통적인 구휼제도가 한계를 드러낸 시기 한국 사회의 생존권 보장과 근대적 복지의 기틀을 다지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이들의 활동을 세 시기로 나누어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조선시대 말기(1885년~1910년)에는 근대적 의료와 교육 복지에 집중했다. 이 시기 감리교 선교사들의 활동은 국가 차원의 사회안전망이 전무했던 시절, 질병과 가부장적 인습, 빈곤에 시달리던 민중들을 향한 구제 사업에서 출발했다. 1887년에 세워진 보구여관은 유교적 관습으로 인해 남성 의사에게 진료를 받지 못해 죽어 가던 조선 여성들을 치료함으로써 여성의 건강권과 생명권을 구제하는 현대적 보건 복지의 효시를 열었다. 이 과정에서 조선 여성들을 대상으로 한 의학 교육을 실시하여 최초 여성 의사(예: 김점동)를 배출했다. 배재학당과 이화학당은 신분과 성별의 벽을 넘어 교육 기회를 박탈당했던 이들에게 배움의 길을 열어주었다. 이는 단순한 지식 전달을 넘어, 불평등한 신분 제도의 모순 속에서 소외된 이들이 자립할 수 있는 정신적·사회적 기반을 제공했다.
일제강점기(1910년~1945년)에는 현대적 사회사업과 인보관 운동을 전개했다. 이 시기에는 단순한 구호를 넘어 지역사회 중심의 인보관 운동 형태의 체계적인 사회복지 사업이 전개되었다. 1921년 미국 남감리회 여선교부에 의해 서울 인사동에 설립된 태화여자관은 우리나라 최초 근대적 사회사업 기관으로 평가받는다. 이곳은 빈민 구제, 아동 보건, 공중위생 지도, 문맹 퇴치 야학, 여성 직업 교육 등 다각적인 프로그램을 운영했다. 태화여자관 등을 거쳐간 한국인 여성 지도자들과 개척자들은 훗날 조선여자기독교청년회(YWCA) 결성과 여성·사회 계몽 운동을 주도하며 민족의식 고취와 사회적 약자 보호를 동시에 수행했다. 이들은 일제의 압박 속에서도 민중의 생활 실태를 개선하고 자립심을 심어주는 데 주력했다.
해방 이후와 한국전쟁기(1945년~1960년대)에는 긴급 구호와 사회복지 재건에 힘썼다. 해방과 이어진 한국전쟁의 참화 속에서 미국 감리교 선교사들과 한국인 교회 지도자들은 수많은 난민과 고아를 돌보는 긴급 구호와 재건 복지에 총력을 기울였다. 이들은 전쟁 고아들을 위한 보육원을 운영하고, 월남한 실향민과 가정주부들을 위해 인형 제작이나 편물 사업 등 경제적 자립 프로그램을 도입했다. 이는 단순한 물품 배급을 넘어 빈곤 가정이 스스로 생계를 유지할 수 있도록 돕는 생산적 복지의 형태를 띠었다. 해방 이후 태화사회관을 비롯한 감리교 계열 복지 시설들은 활동을 재개·확대하였고, 서구의 선진적인 사회사업 이론과 행정 체계를 한국 사회에 이식하였다. 이는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현대적인 공공·민간 사회복지 제도가 정착하는 데 밑거름이 되었다.
3) 태화여자관은 우리나라 지역복지의 본보기를 제시했다.
1921년에 설립된 태화여자관(1921~1933)은 태화사회관(1933~1953), 태화기독교사회관(1953~1980), 태화기독교사회복지관(1980~현재)으로 바뀌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사회복지관이자, 미국 남감리회 여선교부의 지원과 한국인 개척자들의 헌신 속에서 발전해 온 한국 사회복지관의 큰언니와 같다. 이 기관은 일제강점기 여성 계몽과 인보관 운동으로 시작해, 전쟁의 참화를 거치며 긴급 구호의 중심축을 담당했고, 오늘날 전문적이고 체계적인 종합사회복지관으로 자리 잡았다. 각 시기별 특징과 사업 그리고 활동가 등은 다음과 같다.
태동기와 인보관 운동 전개기(1921년~1945년)에는 여성 계몽과 지역사회 복지를 시작하였다. 이 시기에는 3·1운동의 민족적 아픔이 가시지 않은 일제강점기 조선, 전통적 신분 질서가 무너지고 도시 빈민과 소외계층이 급증했다. 태화의 터는 조선 중종이 순화공주를 위해 지어 주었던 순화궁이자, 3·1운동 당시 민족대표들이 독립선언식을 했던 요릿집인 ‘태화관’ 부지였다. 이완용은 1907년 집을 화재로 잃고 일제로부터 순화궁을 받았으며, 1918년에 명월관이 소실되자 명월관 주인은 이 집을 전세로 얻어 분점격인 태화관을 차렸다.
주요 활동가는 마이더스(M. D. Myers), 빌링슬리(M. Billingsley) 등이다. 마이더스는 이완용 소유였던 태화관 부지를 확보하기 위해 기도로 농성하며 터전을 일구어 낸 초대 관장이다. 제4대 관장 빌링슬리는 ‘태화사회관’으로 바꾸고, 서구의 인보관(Settlement) 제도를 본격 도입했으며 낡은 건물을 대규모로 신축했다. 점차 선교사 중심 체제에서 벗어나 한국인 실무자들이 사업 전면에 나서기 시작했다. 건축가 강윤은 3·1운동의 역사적 장소인 태화관의 흔적을 담아 근대적 복지관 건물을 완공했다.
이 시기의 핵심사업은 여성과 아동교육, 보건과 위생사업, 빈민구제와 구락부 사업이었다. 여성과 아동교육을 위해 가부장제 하에서 소외된 여성들을 위한 재봉과, 성경학원, 야학, 그리고 미래의 주역들을 키운 태화유치원을 운영했다. 보건과 위생사업은 아동 보건 진료와 공중위생 지도에 집중했다. 빈민 구제와 구락부 사업은 거리의 무산 아동(빈민 아동) 교육과 근로 여성을 위한 구락부(클럽) 활동에 집중했다.
해방 공간과 전쟁 복구기(1945년~1960년대)에는 긴급 구호와 사회사업 재건에 힘썼다. 이 시기에는 해방의 기쁨과 잠시의 혼란, 동족상잔의 비극인 한국전쟁으로 인해 극심한 황폐화와 난민·고아 문제가 폭발했다. 페기 빌링스(Peggy Billings)는 선교사이자 제6대 관장으로 활동하며, 일제강점기와 해방 후 격변기에 태화의 사회사업 기능을 재건하고 현대적 인보관 운동의 기틀을 공고히 했다. 역대 관장들과 현장 실무자들은 미군정과 해외 원조 단체와 연계하여 구호 물품을 들여오고 복지관 기능을 재개했다. 핵심사업은 긴급 구호와 난민 구제, 자립 지원 프로그램, 사회사업 전문화 기초 다지기라고 볼 수 있다. 즉, 전쟁 고아와 월남 피난민들을 위한 식량·의류 긴급 배급과 보호 시설 연계이었다. 전쟁으로 가장을 잃은 여성 주부들을 대상으로 한 수공예, 편물, 직업 재활 교육을 통해 스스로 생계를 꾸리도록 지원하였다. 미국식 선진 사회사업 이론과 행정 체계를 현장에 접목하여 공공과 민간 복지의 교두보 역할을 수행했다.
현대화와 종합사회복지관 도약기(1970년~1990년대)에는 체계적 전문 복지 서비스를 확산시켰다. 이 시기에는 고도 경제성장기를 거치는 동안 급격한 도시화와 빈부격차, 소외계층 양산 등 새로운 사회문제가 대두되었다. 정부 차원의 복지 정책이 태동하던 시기이다. 주요 활동가는 문인숙, 김선심 등 전문 사회복지 교육을 이수한 전문 경영인과 사회복지사들이었다. 한국인 전문가들은 1960년대 이후 선교사 중심에서 벗어나 복지관 운영의 토착화와 전문 사회복지 행정의 도입을 주도했다. 핵심사업은 종합복지관 체제 확립, 지역사회 중심 복지, 사회복지 전문인력 양성 등이었다. 즉, 단순 구호를 넘어 아동, 청소년, 여성, 노인 등을 아우르는 종합적이고 체계적인 프로그램(상담, 방과 후 교실, 직업훈련)을 전개했다. 시설 중심의 보호에서 벗어나 지역주민의 욕구를 기반으로 한 주민 조직화 사업과 재가복지 서비스를 도입했다. 대학의 사회복지 실습기관으로서 수많은 사회복지사를 배출했다.
법인화와 글로벌·미래 지향적 복지기(2000년대~현재)에는 섬김과 나눔의 공동체 확장을 시도했다. 이 시기에는 복지 수요가 다변화하고 고령화, 다문화, 저출산 등 거시적 사회 변화에 직면했다. 태화는 2004년 ‘사회복지법인 감리회 태화복지재단’으로 거듭나며 전국과 해외로 네트워크를 넓혔다. 주요 활동가는 재단 이사, 각 지부 및 산하 기관의 전문 사회복지사들과 후원자들이다. 핵심사업은 국내외 네트워크 확장, 글로벌 나눔사업, 맞춤형 특화 프로그램이다. 즉, 서울 본원을 비롯해 전국 각지(서울, 인천, 대전, 공주, 부산 등)에 산하 종합사회복지관 등을 운영하며 전문 복지서비스를 표준화·전파했다. 캄보디아(바탐방 지부) 등 개발도상국을 대상으로 한 국제개발협력 및 지역사회 자립지원사업을 전개했다. 노인요양과 치매예방, 다문화가정 지원, 청소년 진로멘토링 등 급변하는 복지 트렌드에 발맞춘 전문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4) 해방 공간과 정부 수립시기에 감리교는 중요한 인맥이었다.
해방 직후와 한국전쟁의 비극 속에서 감리교의 토양은 정치 지도자들과 사회운동의 중요한 인맥적·사상적 기반으로 작용했다. 초대 대통령 이승만과 국회의장 이기붕 등은 배재학당 교육과 감리교 신앙적 배경을 공유하며, 반공주의와 서구식 민주주의 수용을 바탕으로 정권의 기틀을 다졌다. 또한, 황성YMCA와 태화의 유산을 이은 YWCA는 해방 정국과 전쟁 참화 속에서 청년 계몽, 난민 구호, 여성 직업훈련 등을 담당하며 민간 사회사업의 중추적 역할을 수행했다. 감리교와 이승만 등 정치지도자들과의 관계는 4・16 이후 감추어진 측면이 있다.
감리교와 이승만 대통령은 신앙적 뿌리와 반공주의적 결합이 있었다. 그는 미국 감리교 선교사들이 세운 배재학당에서 신학문을 배우고 서구 민주주의와 기독교적 세계관을 접했다. 청년 시절 감리교에 입교한 이후 평생 기독교 신앙을 정체성의 중요한 축으로 삼았으며, 일제강점기 미니아폴리스 감리교 국제총회에 한국 평신도 대표로 참석하기도 했다. 해방 직후 하와이에서 귀국한 이승만은 절대다수의 기독교 세력으로부터 강력한 지지를 받았다. 이승만 정권은 반공주의를 국시로 삼았는데, 이는 당시 북한의 공산 정권 아래서 박해를 피해 월남한 기독교인들의 성향과 일치했다. 이승만 정권의 권력 중심부에는 배재학당 등 감리교 미션스쿨 출신이거나 기독교 배경을 가진 인물들이 대거 포진하여 정권의 초기 기틀을 다지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맡았다.
이기붕 국회의장과 감리교는 종교적 유대를 형성했다. 이승만 대통령의 최측근이자 자유당 정권의 2인자로 군림했던 이기붕은 조선 말기 이후 개신교에 귀의하여 감리교 권사 직분을 가졌다. 그의 아내인 박마리아 역시 이화여자대학교 교수이자 강력한 여성 지도자로서 감리교와 YWCA에 깊은 연관을 가졌다. 그녀는 1934년 이기붕과 결혼하고 1935년 11월부터 YWCA 총무로 활동하였으며 1952년에 회장이 되었다. 프란체스카의 각별한 신임을 받아 이화여대 부총장, 동문회 회장, 이대 출신 친목단체인 이수회 회장으로 네트워크의 중심에 있었다. 이기붕 부부는 기독교계와 정치권력을 긴밀하게 연결하는 매개체 역할을 했다. 이 시기 기독교 방송국(CBS) 설립이나 종교(특히 기독교) 사학 운영 등에서 정권의 보이지 않는 지원이 작용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이러한 종교적·정치적 인맥 네트워크가 깊게 작용했다.
YMCA와 YWCA는 사회 계몽, 복지 재건, 정치적 지형에 영향력을 미쳤다. 해방 직후와 정부 수립기, 한국전쟁을 거치는 동안 YMCA와 YWCA는 종교 단체를 넘어 국가재건과 사회복지의 실질적 주체로 활동했다. 1903년 창립할 때부터 1915년까지 중앙감리교회(1890년 아펠젤러에 의해 설립되어 종로교회로 불리다, 1930년 중앙교회로 개칭)에 속한 황성YMCA 등을 통해 민족 지도자를 배출해 온 YMCA는 해방 정국에서 청년 학생들을 계몽하고 건국 사업에 참여하는 산실 역할을 했다. 이승만은 황성YMCA에서 1910년 10월부터 1912년 3월까지 간사(총무 겸 학감)로 활동한 경력이 있었기에, YMCA는 초기 정권에 우호적인 청년·사회 세력의 기반이 되었다. 다만 정권이 장기화 되고 독재 색채가 짙어지면서 YMCA 내부 일부 지식인 청년층을 중심으로 민주화와 독재 비판의 목소리가 싹트기도 했다. 1922년 4월 20일에 창립된 YWCA는 그해 제1회 하령회를 감리교 협성여자신학교에서 개최했다. 태화여자관 등 감리교 여선교부의 유산을 이어받아 YWCA는 해방 후 여성들의 문해교육, 직업훈련, 그리고 한국전쟁 이후 난민 여성과 아동을 위한 구호 사업에 매진했다. YWCA는 정부의 행정력이 미치지 못하는 사각지대에서 구호 물품 배급, 모자보건사업 등을 전개하며 민간 사회사업의 주역으로 활약했다. 이 과정에서 이화여대 출신 인재들과 감리교 여성 지도자들이 핵심적인 실무를 주도했다.
5) 이화여자대학교 사회사업학과와 산학협력을 도모하였다.
이화여자대학교 사회사업학과와 태화기독교사회복지관은 오랫동안 ‘이론(학계)과 실천(현장)’의 굳건한 동반자 관계를 맺으며 함께 성장했다. 이 두 기관의 역사적 유대 속에서 문인숙 교수는 가교 역할을 하며 임상사회사업을 확산시키고 사회복지 교육의 기틀을 다진 핵심 인물이었다. 그녀는 미국 스칼릿대학에서 사회사업학 석사학위를 취득하고 태화복지관에서 총무, 관장 등으로 일하다 이화여대 교수가 되어, 미국 감리교 선교사(목사)의 배우자(사모)라는 복합적인 지위로 다양한 역할을 수행했다.
두 기관은 미국 감리교의 뿌리를 공유하고 있다. 태화기독교사회복지관은 미국 남감리회 여선교부에 의해 설립되었고, 이화여대는 미국 북감리회 선교사 스크랜턴에 의해 세워진 이화학당에 뿌리를 두고 있다. 두 기관은 미국 감리교 선교 정신(기독교적 사랑과 여성 교육·사회 공헌)이라는 공통의 모태를 가지고 있다. 이화여대가 1947년 한국 최초로 기독교사회사업과(사회사업학과를 거쳐 사회복지학과로 바뀜)를 창설했을 때, 학생들의 실습을 받거나 현장 경험을 제공할 수 있는 마땅한 기관이 부족했다. 이때 태화복지관은 한국 최초의 근대적 복지관으로서 학생들에게 최고의 현장실습 장소이자 인턴십 기관이었다. 태화복지관의 선진 복지 프로그램과 운영 노하우는 이화여대 사회사업학과를 통해 학문화되었고, 이화여대에서 배출된 전문 인력들은 태화복지관의 실무자로 진출하여 사회사업의 전문성을 선도했다.
문인숙 교수는 이화여대 사회사업학과와 태화기독교사회복지관을 관통하며 한국 사회복지 실천의 전문성과 임상 사회사업의 기틀을 다진 선구적인 학자이자 실천가이었다. 그녀는 이화여대 영어영문학과를 전공하고 1949년 올리버 관장 시절에 태화사회관에서 전쟁이 일어나기 전까지 구락부 활동에 참여하였다. 한국전쟁 기간에 미국 감리교 십자군장학금을 받아 스칼릿대학교 대학원에서 집단사회사업학 석사학위를 취득하였다. 1954년부터 태화기독교사회관에서 총무로 일하고 1957~58년 빌링스가 휴가일 때에는 관장 대리를 하였으며, 한국인 최초 관장(1963.6~1964.6)으로 사회사업을 실천하였다. 그녀는 태화에서 실습생을 지도하면서 1956년과 1958년에 이화여대 사회사업학과에서 시간 강의를 하였으며, 1970년 3월부터 1994년 2월까지 교수로 재직했다. 이 시기와 퇴임 이후에도 태화의 각종 사업 위원장과 태화복지재단 이사, 이사장 등을 역임하며 태화의 정책과 운영에 깊이 관여했다.
그녀는 현장 경험을 바탕으로 교수로 재직하면서, 한국 사회사업학이 전문적인 임상 사회사업으로 도약하도록 이끌었다. 그녀는 사회사업학이 이론에만 치우치거나 현장 경험에만 머무르는 것을 경계하고, 현장의 사례를 교육과 연구에 접목시키는 통합적 접근을 시도한 최초의 학자 중 한 명이었다. 교재 개발과 체계적인 수퍼비전 시스템을 도입하여 사회복지사들이 전문적인 임상 역량을 갖추도록 교육의 토대를 다졌다.
6) 감리교 사회관들은 사회복지법인 감리회 태화복지재단으로 발전했다.
미국 감리교(초기에는 남감리회 점차 남·북감리회)가 뿌리가 되어 설립된 한국 최초의 근대적 복지관인 태화여자관은 1980년에 유린, 인천, 대전, 공주, 부산 등 6개 감리교 사회관과 함께 ‘사회복지법인 기독교대한감리회 사회사업유지재단’을 세웠다. 이는 2004년에 ‘사회복지법인 감리회 태화복지재단’으로 변경되었다.
현재 서울에 있는 태화기독교사회복지관은 본원으로 종합복지 서비스를 총괄한다. 은평종합사회복지관은 서울 은평구를 중심으로 한 주민복지를 실천한다. 태화샘솟는집은 정신장애인의 사회 복귀와 자립을 돕는 전문 정신재활시설이다. 지역에는 인천기독교종합사회복지관, 대전기독교종합사회복지관, 공주기독교종합사회복지관, 부산기독교종합사회복지관 등이 있다. 해외 파트너십과 네트워크는 캄보디아(바탐방 지부)와 라오스 등 개발도상국 현지 NGO 및 교육·복지 시설과의 연대 협력 사업을 전개한다. 태화복지재단은 개별 시설 운영을 넘어, 체계적이고 표준화된 복지 모델을 공유하며 4대 핵심 영역별(가족·지역사회, 아동·청소년, 노인, 장애인) 전문 복지 서비스, 재단 산하 사회복지연구실을 통한 공동 연구와 표준화 프로그램 보급, 글로벌 사회공헌 연대 등을 펼치고 있다.
7) 감리교 사회복지의 역사에 기반하여 발전 방안을 모색한다.
미국 장로교가 제중원·세브란스 중심의 거시적 의료 기관과 평안도, 황해도 등 서북 지역을 중심으로 한 폭발적인 교세 확장을 이루며 교회 공동체 자립에 강점을 보였다면, 미국 감리교는 독립된 여성 선교사 파견을 통한 보구여관과 이화학당 설립으로 조선 여성의 생존권과 교육권을 선제적으로 옹호했다. 개별 교회나 병원 중심을 넘어, 지역사회 전체의 삶의 질을 개선하기 위한 종합적 인보관 운동을 우리나라 최초로 전개했다. 감리교 사회복지는 도시 빈민, 여성, 아동 등 구체적인 사회적 약자의 일상 속으로 파고드는 현장 중심의 실천력을 보여주었다. 태화복지재단은 서울 본원을 비롯해 서울(은평), 인천, 대전, 공주, 부산 등 전국 주요 도시에 거점 복지관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있으며, 캄보디아 등 해외로도 그 영역을 넓히고 있다. 감리교 선교사들과 개척자들이 남긴 ‘섬김과 나눔, 현장 중심성’의 유산을 바탕으로, 감리교 사회복지의 발전 방안을 다음과 같이 제안한다.
‘돌봄 사각지대’를 선제적으로 발굴하는 고도화된 지역사회 통합돌봄을 실천한다. 초기 감리교 선교사들이 보구여관과 태화여자관을 통해 소외받던 여성과 빈민들의 일상 속으로 직접 파고들었듯, 오늘날 사회복지 울타리 밖의 사각지대를 찾아내야 한다. 1인가구 증가에 따른 고독사 위험군, 가족 돌봄 청년, 은둔형 외톨이 등 사각지대를 조기에 발견하기 위해 AI 안부 확인과 IoT 기술을 접목한 스마트 통합돌봄 체계를 구축한다.
세대 간 단절을 극복하고 사회적 고립 해소를 위한 ‘통합형 플랫폼’을 발전시킨다. 태화여자관이 아동, 청소년, 여성 등 전 계층을 아우르는 종합복지 서비스를 제공했듯, 사회복지관은 파편화된 세대를 하나로 묶는 공간이 되어야 한다. 청년층의 취업·고립 문제와 노인층의 빈곤·소외 문제를 분리해 지원하기보다, 세대 간 멘토링과 상호 돌봄 프로그램을 활성화해야 한다. 복지관은 단순한 서비스 이용 시설을 넘어, 주민들이 스스로 모여 지역의 문제를 논의하고 해결하는 개방형 주민 소통 플랫폼을 지향한다.
기독교적 가치와 ESG 경영을 결합한 지속 가능한 사회공헌 모델을 구축한다. 감리교의 이웃 사랑과 섬김의 정신은 기후 위기와 불평등이라는 글로벌 과제 속에서 ‘지속 가능성’으로 확장되어야 한다. 민간 기업과 종교계 자원을 연계하여 환경, 사회, 지배구조 가치를 복지 현장에 녹여낸다. 예컨대, 저소득층 아동·청소년을 위한 교육 격차 해소 사업과 친환경 자원 순환 캠페인을 결합하는 등 미래세대를 위한 지속 가능한 발전목표(SDGs) 연계형 복지 프로그램을 다변화한다.
전문성과 공공성을 갖춘 글로벌 휴먼 네트워크(국제개발협력)를 확장시킨다. 과거 미국 선교사들이 서구의 선진 사회복지를 조선에 전파했듯, 이제는 한국 감리교 복지 네트워크가 그간 축적한 사회복지실천 이론과 기술을 제3세계와 나누는 주체로 도약한다. 태화복지재단의 캄보디아 등 해외 지부 사례처럼, 개발도상국의 지역사회 복지 모델 구축, 현지 여성 자립 지원, 아동 교육 인프라 지원 등 글로벌 사회공헌 네트워크를 더욱 체계화한다. 현지 문화와 주체성을 존중하는 파트너십 중심의 국제개발협력을 통해, 한국 감리교 복지 역사의 ‘나눔과 섬김’ 유산을 세계적으로 계승·발전시킨다.
참고문헌
김범수, ‘태화기독교사회복지관의 100년 역사 연구’, 사회복지역사연구 제5권, 한국사회복지역사학회, 2022.
이방현, 문인숙, 사람을 품은 사회복지 실천의 발자취, 코람데오, 2025.
임상사회복지실천연구회 엮음, ‘클라이언트 자기결정을 존중한 사회복지사- 문인숙 선생님’, 사회복지 역사를 세운 실천현장의 인물들, 학지사, 2014.
기독교대한감리회 https://kmc.or.kr
나무위키- 이승만 https://namu.wiki/w/%EC%9D%B4%EC%8A%B9%EB%A7%8C
박마리아 https://japan114.tistory.com/25073
제미나이 https://gemini.google.com
태화복지재단 https://taiwhafound.org
글쓴이/ 이용교(복지평론가, 광주대학교 명예교수) lyg29@hanmail.net
시민과 함께 꿈꾸는 복지공동체 http://cafe.daum.net/ewelfa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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