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전에 지방 근무할 때 어느 기차역 서점에서 구입했던 「한국사의 천재들(김병기, 신정일, 이덕일 지음 / 생각의 나무)」을 읽었습니다. 우리 역사에서 천재로 이름을 날렸던 13인(지눌, 서희, 장영실, 유득공, 이이, 이가환, 이상설, 최치원, 김시습, 이벽, 이규보, 정철, 황현)을 골라서 그들의 삶에 대해 서술한 책인데, 워낙 술술 읽혀서 남는 시간을 때우기에도 적합할 뿐만 아니라 내용도 퍽 유익했고, 다 아는 인물들이기 때문에 별반 새로운 내용이야 있겠나 싶었는데, 제가 모르고 있던 이야기들도 꽤 많았습니다.
어렸을 땐 '9살짜리 고교생'과 같은 천재들에 관한 기사를 보면서 제가 천재가 아니라는 사실이 너무 슬프고도 가슴 아팠으나, 언젠가부터 천재로 태어나지 않아서 정말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우리 애들도 천재로 태어나지 않은 것에 대하여 감사한 마음으로 살아가게 되었는데, 이 책을 읽고 났더니 그와 같은 다행과 감사의 마음이 배가 된 것 같습니다.
이상하게 어렸을 때부터 제 주변에는 천재 비슷한 애들이 널려 있어서 자존감에 적잖은 상처를 입었고, 심한 경우에는 열등감에 시달린 적도 왕왕 있었는데, 늙어가면서 보니까 나중에는 결국 대충 다들 비슷해지는 것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과거에 천재까지는 아니겠습니다만, '아! 이 친구는 진정 괴물이구나'하고 느꼈던 사적 경험을 재미삼아 두 꼭지만 얘기해볼까 합니다.
- 고3때, 그 시절에는 과외가 금지되어 있어서 학교에서 공부 좀 하는 애들은 방과 후에 남겨서 야간 자율학습을 시켰는데, 어느 날 수학 문제를 풀다가 모르는 문제가 나오길래 옆에서 엎드려 자고 있던 친구를 깨웠습니다. 평소 공부는 별로 안 하는 것 같은데 이상하게도 시험은 잘 보는 친구였습니다. 눈을 비비며 잠에서 깬 이 친구는 제가 물어본 수학 문제를 한 30초 동안 눈으로 들여다 보더니 답이 4번이라고 얘기해 주더군요. 왜 그러느냐고 물어보니까 그때부터 손으로 풀기 시작하는 것이었습니다. 답지의 해설과는 다르게 아주 간단한 자기만의 방법으로. 그걸 보면서 '난 앞으로 10년을 공부해도 절대 얘를 이기지는 못하겠구나'하는 생각에 기분이 몹시 꿀꿀해졌습니다.
- 대학교 3학년 1학기 때, 사법시험 1차 끝나고 놀다 보니 어느덧 행정법 시험이 이틀 뒤로 다가왔습니다. 시험 범위가 교과서 250페이지 정도의 분량이었는데, 법과대학 다녔던 분들은 짐작하시겠지만, 법서 250페이지를 이틀만에 읽고 중요한 부분을 암기해서 답안지를 메꾼다는 건 아무래도 불가능한 일인 것 같아서, 평소 품행이 방정하고 착실했던 한 친구에게 도움을 요청했더니, 자기도 강의에 여러 번 빠져서 노트 필기를 제대로 못 했는데 가능한 한 교과서를 빨리 읽고 나서 서브 노트를 한 번 해 보겠다고 하더군요. 다음 날 이 친구가 단 하루만에 250페이지 분량의 교과서를 노트 40여 페이지로 요약, 정리해 왔는데, 그걸 보는 순간 경악을 금치 못했습니다. 저 같으면 요약은 고사하고 하루만에 250페이지를 끝까지 한 번 다 읽지도 못할 것 같고, 얘가 요약해 놓은 40여 페이지의 노트를 밤 새워 그냥 기계적으로 베낀다고 하더라도 다 못 베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프라이버시의 문제로 인하여 두 친구의 신원은 밝힐 수 없음을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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