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명사 연재 26. 20세기의 정치와 종교 (Continued 3)
(d) 냉전과 국지전 (1945-85) 계속
아시아의 냉전과 중국의 부상
중국 내전과 공산주의 승리: 1931년 중국이 만주를 침략할 때 중화민국(ROC)은 일본의 침략 위협, 공산주의자들의 봉기, 군벌들의 반란으로 삼중 위협에 직면하였다. 국민당의 장제스가 일본의 외부침략 대신에 공산당의 내부위협에 중점을 두는 전략에 좌절하여, 1937년 서안에서 군벌 장쉐량이 장제스를 가두고, 공산군과 협력을 강요하였다. 그러나 국민당과 공산당이 협력하는 국공합작 연합전선은 오래가지 못하였다. 국민당은 일본군과 싸우는 것보다 공산주의자들을 억제하는 데 집중하는 동안, 공산당은 농촌 사회에 파고들어 세력을 확장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중 국민당은 전쟁을 수행하기 위하여 독재적 억압을 하였고, 부패가 만연하여 공산당의 침투에 취약하였다. 공산당은 농촌 지역에서 토지개혁을 하고 농민들은 공산당의 깃발 없는 항일 전쟁의 노력을 칭송하였다. 일본의 항복으로 중국에서 내전이 부활하였다. 장제스 정부는, 세계대전의 동맹국으로서 그리고 공산당이 지배하는 중국을 방지하는 유일한 선택으로, 미국이 계속 지원하였다. 미국은 수만 명의 중국군을 일본군 점령 지역으로 수송하여 일본의 항복을 접수하고, 소련군이 점령한 만주는 중국군에 인계하였다. 장제스와 마오쩌둥은 중국의 새로운 정부 구성에 관한 일련의 회합을 하여 민주주의 정체, 통합된 군대, 모든 정당의 평등을 합의하였다. 1946년 마셜 장군이 연합정부 구성을 위하여 노력하였으나 실패하고, 쌍방은 총력으로 내전을 계속하여 결국 마오쩌둥이 승리하고, 1949년 10월 중화인민공화국(PRC)을 수립하였고, 장제스는 타이완으로 이동하였다.
한국전쟁 (1950-53): (1) 1910년 일본이 조선을 합병하여 35년간 식민지로 통치하고,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에서 연합국의 승리로 38도선 이북은 소련군이, 이남은 미국군이 점령하였다. 남한은 미국의 지원으로 1948년 의회 민주주의 헌법을 제정하여 대한민국(ROK)을 수립하고,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선출하였다. 북한은 소련군의 지원으로 김일성이 정권을 장악하여 공산주의 독재정권인 민주 인민공화국(DPRK)을 세웠다. (2) 1950년 6월 북한군은 38도선을 넘어 남하하여 전면적 기습 공격을 개시하여 한국전쟁이 발발하였다. UN 안전보장이사회는 북한의 침공을 규탄하고 16개국으로 UN군을 구성하여 한국전에 참전하였다. 북한군은 한반도의 남단 깊숙이 진격하였으나, 1950년 9월 UN군의 인천 상륙작전으로 전세를 만회하고 북진하여 압록강까지 진격하였다. 그러나 10월 중공군의 개입으로 퇴각하여, UN군은 이들을 다시 38도선 부근까지 밀어 올리고 전선이 안정되면서 향후 2년 동안 남북이 소모전을 계속하였다. UN군이 제공권을 장악하여 북한에 대한 대규모 폭격을 하였고, 소련군도 북한에 대해 항공지원을 하였다. (3) 1953년 7월 휴전협정에 서명하여 남북을 분리하는 군사분계선을 설치하고, 포로 교환에 합의하였다. 그러나 평화협정이 따로 존재하지 않아 남북은 아직 전쟁상태에 있어 대소 분쟁이 계속되고 있다. 현재 북한이 핵무기를 개발하여 UN의 제재를 받고 있으며, 그 해결이 주목된다. (4) 한국전쟁으로 남한은 군인과 민간인 총 사상자가 189.8만, 북한은 332.0만이다. 미군 전사자는 36,574명이며, 중공군 전사자는 18.3만이다. 한국전쟁으로 한반도에 휴전선이 형성되어 남북 분단이 고착되고 갈등이 깊어져, 정치에서 남북이 각각 중앙 집권을 강화하였다.
인도차이나 전쟁: 인도차이나는 1858년부터 프랑스 식민지의 억압 속에서 민족주의가 성장하여 1941년 호찌민은 베트남 독립동맹(베트민)을 결성하여 외세에 저항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이 베트남을 점령하자 저항을 계속하였고, 1945년 9월 호찌민은 베트남 민주공화국(DRV)을 수립하여 하노이에 수도를 정하였다. 일본군 무장해제를 위하여 중국군 병력 20만이 북부 베트남을 점령하고, 프랑스는 남베트남의 질서를 회복하고 북부 베트남을 군사화하려고 중국군 및 베트민 간부들과 협상하여, 1946년 2월 상하이 등을 중국에 반환하고 프랑스는 북베트남을 인수하였다. 이로 인하여 베트콩(남부 저항조직)이 약화하여, 베트민은 수천의 베트콩을 학살하였다. 1946년 11월 프랑스 함대가 하이퐁을 포격하자 베트민은 하이퐁을 떠났으며, 보구엔지압 장군이 병력 3만으로 반격하여 실패하자, 호찌민은 하노이에서 산간지역으로 밀려났다.
1949년 중국 내전의 승리에 고무되어 베트남 공산주의자들은 중국의 지원으로 5개의 보병사단을 창설하여 군사력을 확장하였다. 미국은 프랑스에 군사원조를 하였다. 1950년 1월 중국과 소련은 하노이 정부를 인정하고, 미국과 영국은 사이공 정부를 인정하였다. 프랑스군과 보구엔지압 군대는 치열한 전투를 계속하였으며, 결국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프랑스군이 패하여 철수하고, 1954년 7월 제네바협정으로 17도 선을 경계로 남북으로 분할되었다. 한편 응오딘지엠은 미국의 지원으로 1955년 새로운 베트남 공화국(사이공) 대통령이 되었다. 그는 불교를 탄압하여 민심을 잃었고 군부 쿠데타로 1963년 제거되었다. 1964년 8월 북베트남 어뢰정이 통킹만에서 미국 구축함을 공격(불분명)하여 보복으로 존슨 대통령은 북베트남에 폭격을 시작으로 월남전이 확대되었다. 1968년 1월 구정 대공세로 미국의 베트남 개입은 전환점이 되었고 닉슨 대통령은 철군 계획을 발표하고 1973년 1월 파리 평화협정에 합의하여 미군이 철수하였다. 베트남전쟁으로 베트남의 군인과 민간인 99.6만이 사망하였고, 미군은 58,220명이 사망하고 1,626명이 실종하였다. 한국군은 2개 전투사단과 1개 군수지원단이 참전하여 4,951명이 사망하였다. 이 전쟁은 식민주의와 민족주의 전쟁에서 민주주의와 공산주의 세력이 대결하는 전쟁이 되었다.
중동, 라틴 아메리카, 아프리카, 극동의 분쟁 (1875-85)
남아시아와 중동: 다자주의와 상호의존: [헬싱키 협정]은 1975년 7월부터 8월 사이에 헬싱키에서 개최된 유럽 안보 협력 회의에서 소련을 포함한 유럽 33개국, 미국, 캐나다의 정상이 합의하여 서명한 협정이다. 미국은 동부 유럽에서 소련의 지배와 중국과 베트남에서 민족주의적 공산주의 운동의 승리를 인정하였다. 이 조약은 동등한 주권 인정, 무력 사용과 위협 중단, 영토 불가침과 영토 보존, 분쟁의 평화적 해결, 내정 불간섭, 국가 간 협력 등을 포함하였다. 베트남전쟁의 종전으로 이념이 다른 두 블록 간에 정치 군사적 화해가 이루어져 경제 사회적 교류가 확대되고 무역과 투자가 늘어나 경제적으로 상호 의존도가 증가하였다.
핵무기 경쟁의 재개(SALT II): 제1 전략무기 제한협정 (SALT I)은 1972년 모스크바에서 닉슨과 브레즈네프가 서명하여 미소 양국이 ABM 기지를 각각 한 곳에 축소하고, 수량도 100기로 제한하며, ICBM과 SLBM 보유를 제한하였다. 제2 전략무기 제한협정(SALT II)은 1979년 6월 비엔나에서 카터와 브레즈네프가 서명하여, 새로운 미사일 프로그램을 금지하였다. 1979년 6월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자, 미국 상원은 비준을 거부하였다. 그해 12월 미국은 1962년 소련이 설치한 미사일 기지를 철수하지 않은 것을 발견하고, 1980년 1월 카터는 SALT II에서 탈퇴하였다.
이란혁명: 1953년 이란의 쿠데타로 팔레비 정권이 수립되어 서방국가들과 협력관계를 유지하면서, 특히 미국의 지원에 의존하여 26년 동안 독재 왕정을 견고히 유지하였다. 1963년 서구화 정책으로 전통적 체제를 지원하는 보수계급이 약화하였다. 서방의 지원을 받는 팔레비 왕조에 반대하는 이슬람 종교 세력이 증가하는 가운데, 시민들은 저항운동을 전개하고 파업과 시위가 전국으로 확산하여, 1979년 1월 페르시아 마지막 군주인 팔레비가 망명하였다. 4월에 이슬람 공화국이 수립되고 12월 아야톨라 호메이니가 최고 지도자로 추대되었다. 이란혁명으로 반제국주의 정서가 확대되고, 대규모의 실업과 사회적 불평등이 심화하였다.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 아프가니스탄에서 1978년 모하마드 타라키가 쿠데타로 친소정권을 세우고, 근대화 개혁을 시도하였다. 정부가 이에 저항하는 모슬렘 세력을 탄압하자, 아프가니스탄 전역에서 반란이 일어나 친소정권은 통제력을 상실하였다. 정부의 요청을 받은 소련은 1979년 12월 전면적 침공을 개시하여 카불을 점령하고 바브락 카르말을 새 대통령으로 세웠다. 아프가니스탄 반군은 중국과 미국으로부터 지원을 받았다. 소련군은 도시지역과 도로망을 장악하였으나 국토의 80%는 통제 불능이었다. 소련군은 1988년 5월부터 1989년 2월까지 철수하였디.
이집트-이스라엘 평화조약(1979): 카터 대통령의 주선으로 안와르 사다트 대통령과 메나헴 베긴 총리가 1979년 3월 워싱턴 백악관에서 평화협정에 서명하였다. 조약은 이스라엘은 (이집트와 팔레스타인 신탁통치 밖의) 시나이반도에서 병력을 철수하고, 이집트는 이 지역에서 주권을 회복하며, 양국은 정상적이며 우호적 관계를 확립한다는 것이다.
팔레스타인과 레바논: 6일 전쟁(1967)으로 피난민이 요르단으로부터 레바논으로 유입되어 팔레스타인 인구가 30만을 초과하여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는 레바논 속의 국가가 되었다. 이스라엘과 PLO 사이에 폭동이 증가하면서 미국은 레바논에서 이스라엘-시리아 간의 충돌 발생을 우려하였다. PLO의 암살시도로 이스라엘이 1982년 PLO 지역을 폭격하자, 미국은 다국적 평화유지군을 레바논에 파견하여 팔레스타인 민병대가 캠프로 돌아가게 하였다. 1984년 이스라엘군이 레바논 남부에서 철수하였다.
아랍의 불균형과 이란-이라크 전쟁: 1980년 9월 이라크는 이란의 서부국경을 침공하여 양국은 1988년 8월까지 전쟁을 계속하였다. 사담 후세인은 유프라테스강과 티그리스강의 합류점에 형성된 샤트알아랍 양안의 주권을 주장하였다. 후세인은 이란 혁명정부가 이라크 모슬렘에게 혁명을 선동할 가 우려하였다. 이라크는 사우디와 쿠웨이트 등 수니파 국가들이 재정지원을, 미국과 소련이 전술적으로 지원하였고, 이란은 시아파의 시리아와 리비아가 지원하였다. 양국은 원유 감산으로 경제 발전이 멈추었다.
라틴 아메리카: 미국의 라틴 억제전략: 레이건 대통령은 1981년 취임하여 외교정책을 새롭게 하였고, 고르바초프는 1985년 서기장에 취임하여 개혁 개방정책을 추진하였다. 미국은 마약과의 전쟁으로 1989년 파나마를 침공하여 노리에가를 체포하였다. 레이건은 포클랜드 전쟁(1982)에서 아르헨티나 독재에 반대하여 영국을 지원하였고, 니카라과에서 산디니스타 사회주의 정권을 무너뜨리려고 콘트라 반군(1987)을 지원하였다.
라틴 아메리카의 경제성장 전망: 라틴 아메리카는 1960년대부터 지속적 경제성장을 하였고, 동서 화해의 출현으로 각국이 자유로운 외교정책을 추구하였다. 미국의 라틴 아메리카 투자는 1960년 해외 투자의 25%에서 1980년 12%로 감소하여 유럽과 일본의 투자가 미국의 자리를 채웠다. 미국으로부터 경제적 독립으로 라틴 국가들이 미국의 주도권에 도전하여 새로운 정치적 주장을 하게 되었다. 1980년대 라틴 아메리카 경제는 대부분 감소성장(잃어버린 10년)을 하였으나 1990년대는 성장률이 증가하였다.
라틴 아메리카의 부채 위기: 1960년대 1970년대 브라질, 아르헨티나, 멕시코 등 라틴 아메리카 국가들은 부유한 서방국가들로부터 빚을 내어 인프라 건설 등에 투자하였다. 1980년대 초 이들은 부채가 소득을 초과하여 지불 능력을 상실하였고, 1973년과 1979년 오일쇼크로 부채상환이 더 어렵게 되었다. 1982년 8월 멕시코는 90일간 지불유예를 선언하였다. IMF가 개입하여 지불 구조를 조정하고, 부채 국가의 소비를 감소하도록 조언하였다. 미국은 은행규정을 강화하여 방만한 대출을 제한하였다.
미국의 그레나다 침공: 카리브해 그레나다 섬에서 소련과 쿠바의 지원을 받은 군부에 의해 쿠데타가 일어나 총리와 각료들이 처형되었다. 쿠바는 재정적 지원과 무장된 건설노동자를 보냈다. 미국은 그레나다의 공산화를 막기 위하여 1983년 10월 미 해병대 2천 명을 투입하여 섬을 기습 공격하여 12월 전 섬을 제압하고, 섬 안의 쿠바, 북한, 리비아, 서독, 볼리비아 등 외국 공산주의 국적자들은 추방하였다. 미국은 군사 목표를 달성한 후 1984년 선거로 새 지도자를 뽑고, 1985년 6월까지 미군을 주둔시켰다.
아프리카: 독립에서 의존으로: 아프리카는 식민지를 탈피하여 1963년 5월 32개 아프리카국가가 아프리카 단일기구(OAU)를 창립하여 주권과 영토의 보존 및 국가 간의 협력을 합의하였다. 2002년 7월 OAU는 아프리카 연합(AU)으로 개명하였다. 신제국주의의 지속: [영국]은 영국-나이제리아 조약(1960)으로 나이제리아에서 영국 군사개입의 특권, 군사기지의 보존, 공중 공간의 사용을 합의하였다. [프랑스]는 과거 식민지와 깊은 경제적, 군사적, 행정적 결속을 유지하였다. 아이보리 해안은 프랑스 지배에서 해방되었으나 경제적 인프라 구조의 운영이 영국회사에 달려있어, 아이보리 해안 지도자의 결정은 조심스럽게 이루어졌다. 아프리카의 경제쇠퇴: 아프리카의 경제성장은 1974-1995 기간에 감소성장을 하였고, 아프리카 인구의 절반은 빈곤 수준 이하에서 살았으며, 저축과 투자가 저조하고 교육과 건강의 인적자본이 빈약하였다. 1960년대 아프리카 적령 인구의 42%가 초등교육을 받았고, 에이즈나 말라리아를 예방하는 자원도 백신을 개발하는 경험도 없었으며, 개인소득의 격차가 계속 증가하였다.
아프리카에 냉전 도래: 1974년 에티오피아는 군사혁명으로 셀라시에 황제를 축출하고 공산주의 정부를 수립하였다. 소말리아는 독립 후 30년 동안 내전이 계속되어 저격과 폭파 등 테러가 일상이 되는 가운데 1969년 시아드 바레가 소련이 지원하는 쿠데타로 사회주의 정권을 수립하였다. 1974년 7월 소련은 소말리아 육군을 훈련하며 장비해주는 조건으로, 아덴만 베르베라 항구의 해군시설에 접근하고 2개의 비행장을 건설 사용하는 권리를 취득하였다. 한편 러시아 해군은 1967년 대안의 남예멘 아덴항구 해군 기지에 접근하는 권리를 취득하였다. 1977년 11월 소말리아의 시아드 바레는 외교 관계를 모스크바에서 워싱턴으로 전환하여, 에티오피아의 오가덴 지역을 병합할 목적으로, 소련과의 우호조약(1974)을 폐기하고 소말리아의 해군 공군 시설에 소련군 접근을 금지하였다. 소련은 전차, 항공기, 군사고문, 15,000의 쿠바 병력과 장비를 에티오피아에 공급하였다. 1978년 에티오피아는 소말리아 공격을 퇴치하고 그 보상으로 (상실한 베르베라 대신) 마사와 항구의 해군시설을 소련에 제공하였다. 미소 냉전은 정치 경제적 지배를 위하여 아프리카 전역에서 계속되었다.
남아프리카와 건설적 참여: 남아프리카는 1961년 백인만의 국민투표로 공화국을 수립하여 영국 지배로부터 분리하였다. 분노한 반인종차별 조직들이 비정규전을 전개하여 도시지역을 파괴하였고, 인종차별 정책은 국제적 제재로 발전하여 외국 투자가 격감하였다. 1994년 남아프리카는 건설적 참여로, 인종차별 정책을 버리고 평등 보통선거를 통해 다수가 지배하는 정권으로 교체되어, 넬슨 만델라가 대통령이 되었다. 많은 흑인이 중상층으로 격상되면서, 1994-2003 기간에 비공식적으로 집계한 흑인 실업은 상당히 감소하였으나, 백인의 빈곤층이 증가하였다.
새로운 번영의 극동: 일본 경제의 기적: 일본의 패전은 많은 경제적 문제(군수산업 폐쇄로 오는 실업, 저소득, 에너지와 식품 부족, 인플레이션 등)를 가져왔다. 일본 정부는 재벌 해체로 전문 경영인이 기업관리, 토지 재분배, 노동조합 허용과 종신고용제를 확립하는 3대 개혁을 단행하였다. 1948년 [도즈 계획]은 인플레이션을 감소하는 균형예산, 효율적인 세금 징수, 재건융자 은행의 해체, 정부의 시장개입 감소, 환율 고정(360 Yen /US$)을 포함하였다. 한국전쟁은 일본의 산업생산을 크게 확장하였다. [요시다 독트린] 일본은 국방을 미국에 맡겨 군사비를 저축하고, 경제재건과 발전에 집중하였다. [무역산업부]는 철강 조선 화학 기계산업에 중점을 두고 무역과 투자를 확대하였다. 1973년 석유파동으로 인플레이션과 불황에서 자동차나 전자제품 등을 수출하여 이를 극복하였으며, 경제가 계속 성장하여 1990년대에 세계 제2 경제 대국이 되었다. 일본은 노동 생산성을 고도로 유지해 왔으나, 인구 증가가 정체되고 노령화되어 노동 인력이 증가하지 못하였다. 따라서 1991년 일본의 자산가격 거품이 터져서, 경제는 잃어버린 10년(1991-2000)으로 고통을 경험하였다.
아시아의 네 호랑이: 한국, 타이완, 홍콩, 싱가포르는 아시아의 네 호랑이로 급속한 경제성장의 상징이 되었다. 한국은 북한과 정전 상태로 대치하면서, 비약적인 경제 발전을 가져온 대표적인 국가이다. 한국의 연평균 개인소득은 명목가격으로 $103.88(1962), $20,000(2006), $31,637 (2020)으로 증가하여, 달러화의 물가상승을 9.06 배로 보면, 1962-2020 (58년) 기간에 개인소득은 33.6배로 성장하였다. 급속한 경제 발전은 박정희 대통령이 1962년부터 수출주도형 경제 발전 전략을 추진하여, 빈약한 자연자원, 낮은 저축률, 좁은 국내시장의 약점을 극복하고, 노동집약적 제조업에서 시작하여 국제무역에서 비교우위의 이점을 최대로 이용하였다. 한국 정부는 기업이 새로운 기술을 개발하고 생산의 효율성을 증진하여 국제시장에서 경쟁력을 확보하도록 여러 방책을 강구 하였다. 한국은 1997년 경기 침체로 달러화의 보유가 감소하여 외채를 상환하지 못하는 위기에 직면하였고, IMF의 도움으로 국가 부도의 위기를 면하였다.
중국의 개방정책: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할 때에 트루먼 행정부는 타이완에 경제 및 군사원조를 하였고, 공산주의의 타이완 침략을 멈추기 위하여 제7함대가 타이완 해협을 지키고 있었다. 1979년 미국은 중화인민공화국을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외교 관계를 중화민국으로부터 중화인민공화국으로 전환하였다. 미국의 하나의 중국 정책은 [타이완]의 주권에 대한 베이징의 요구를 승인하는 것이 아니며, 타이완에 무기판매를 중국과 논의하지 않는다. 미국-홍콩 조약(1992)은 미국은 [홍콩]을 무역과 투자에서 중국과 분리하여 대우한다고 명시하였다. 한편 마오쩌둥 사후에 [덩샤오핑]은 1978년 외국기업에 문호를 개방하는 새로운 정책을 공표하고, 1980년 4개의 경제특구를 열어 감세와 저임금으로 외국기업의 투자와 무역을 확대하였다. 그는 정치적으로 공산주의 체제를 유지하면서 경제적으로 자본주의의 이득을 극대화하는 일거양득의 현대화 정책을 추진하였다. 중국은 개방 초기에 정부의 감세와 보조금 지급으로 노동집약적 상품을 수출하여 자본과 기술을 축적하고 철강 기계 전자 통신 분야 등 자본 및 기술 집약 산업에 진출을 시도하고 있다. 중국의 연평균 무역 성장률은 1978-1990 기간에 15%였으며 다음 10년에도 고도성장을 계속하였다. 중국의 무역량은 세계무역의 2.0% 미만(1998)에서 10.4% (2010), 12.8% (2020)로 계속 증가하였다. 중국이 해안지역에 수 개의 경제특구를 열어 서방세계와 교류를 증가하여 경제가 발전하는 동안, 미국과 유럽의 자유주의적 사상이 유입되어, 1989년 베이징에서 대규모의 학생들을 주축으로 민주화 시위가 발생하였으나, 정부는 군대를 투입하여 이를 진압하였다.
TO BE CONTINUED
(e) 세계화와 새로운 도전 (1985-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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