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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문명사 연재 21. ~(Continued 6)

양곡(陽谷) 2023. 9. 5. 14:43

세계문명사 연재 21. 19세기 유럽의 정치와 종교 (Continued 6)PhD. Hugo W. Kim

(e) 유럽국가의 종교와 정치

정치 경제적 발전과 함께 19세기에 종교가 어떻게 변화해 왔으며, 종교와 정치가 서로 어떤 관계로 발전해 왔는가? 다음에서 유럽 개신교, 아메리카 개신교, 로마가톨릭교회, 러시아 희랍정교, 이슬람 현대주의, 유대주의와 반유대주의 등의 변화를 분석한다. 종교의 정치적 주요 이슈는 종교의 자유, 종교법의 적용, 종교적 교육에 대한 권리 등이며, 종교에 대한 국가의 태도는 신권정치, 국가종교, 세속주의 (정경분리) 등이다.

유럽의 개신교는 북서 유럽과 미국(이민정착지)에 근거를 둔 지역적 종교였으며, 스칸디나비아, 네덜란드, 프러시아, 영국에서처럼 정부와 밀접히 연대하였다. 교회는 독립성을 양보하면서, 정부는 목회자의 보수나 새로운 교회의 위치와 같은 기본정책을 만들었다. 계몽시대를 지배하던 지식의 물결은 합리주의를 촉진하였고, 대부분 개신교 지도자들은 이신론(Deism)을 설파하였다. 이지적으로, 역사적 인류학적 연구의 새로운 방법이나 지리학 생물학 등의 과학은 성경 이야기의 자동적 수용을 위태롭게 하였다. 산업화는 도시로 전입하는 노동자들이 교회에 가입하지 않아 강한 부정적 요소가 되었다. 교회와 비 교회의 간격이 급속히 커지고, 사회주의와 자유주의에 뿌리를 둔 세속적 세력이 종교의 신망을 훼손하였다. 이들 부정적 세력에도 불구하고, 1900년경 개신교는 놀라운 생명력을 보여주었다. 계몽시대의 합리주의를 떨쳐버리고, 개신교도들은 개인적이며 보이지 않는 내심에 강점을 두고 낭만주의를 포용하여, 전혀 참신한 개념으로 신학의 지적 힘을 회복하였다. 유럽대륙에 경건주의(Pietism)와 영국의 복음주의(Evangelicalism)가 거대하게 확장되어, 형식이나 성례의 강조에서 벗어나 그리스도와 개인적 관계를 통해 내적 감성을 향한 경건함을 불러일으켰다. 사회적 활동은, 교육에서 그리고 (노예 음주 빈곤과 같은) 사회악의 반대편에서 사회봉사를 위한 새로운 기회를 준비하였다. 그러나 한편으로, 유럽에서 기독교의 종교의식과 믿음으로부터 멀어져 세속주의(Secularism)의 일반적 경향이 나타났다. 이를테면, 유럽인의 여섯 사람 가운데 한 사람만이 일요예배에 참석하였다.

영국교회는 성공회(Anglican Communion)가 국교이다. 성공회는 역사적으로 전통적 가톨릭 요소를 강조하였다. 옥스퍼드 운동은 가톨릭 신앙과 실천을 성공회에 복원하는 운동으로, 1840년대 다수의 참가자는 성공회는 은혜가 부족하다고 결정하고, 로마 가톨릭으로 개종하였다. 이로부터 성공회 안에서 수도사와 수녀들의 공동체가 설립되었다. 1848년 수녀 리디아 셀론은 “자선의 성공회 수녀들”을 창립하여 극빈자, 세탁공, 인쇄공, 조리사 등 일선 기능공을 위한 수 개의 학교를 세웠다.

독일 교회는 사회복지와 구제 프로그램을 지원하고 강조하면서, 큰 루터 교회와 작은 개신교회가 결합하는 운동이 일어나, 프레데릭 윌리엄 3세는 독단적으로 개신교를 통합하여 의전이나 조직을 단일화하고, 장기적으로 중앙에서 교회를 통제하였다. 프러시아 정부는 교회를 완전히 장악하여, 왕 자신이 선두 주교가 되었다. 한편 통합에 반대하는 집단을 정부가 탄압하여 음지로 숨고 수만 명이 국외로 이주하였다. 윌리엄 4세는 반대자들을 사면하고 별도의 교회 단체를 허용하였다. 19세기 말 합리주의가 퇴조하고, 개인의 심리와 감정을 중요시하여 경건주의가 다시 회생하였다.

아메리카의 개신교: 미국의 개신교는 뉴잉글랜드의 순례자들과 청교도들의 정착촌에서 시작하였으며, 개신교의 주류는 급격히 성장하는 감리교와 침례교, 점진적으로 성장하는 장로교, 회중교회, 성공회가 있었다. 종교적 대각성 운동은, 개신교의 메마른 합리주의와 예배의식에 집착한 형식주의에서 탈피하여, 경건주의와 복음주의를 바탕으로 이성보다 감성에 호소하여 신앙의 부흥을 가져왔다. 제1차 대각성(1730-55)은 영국의 존 웨슬리가 실천중심의 감리교 운동으로 영국 사회에 큰 충격을 가져왔다. 제2차 대각성(1790-1840)은 감성적 호소로 종교적 열광이 부흥 운동의 열기를 뜨겁게 하여, 켄터키와 테네시에서 장로교, 감리교, 침례교로 수백 명이 개종하였다. 제3차 대각성(1855-1930)은 이를테면 감리교의 영적 순결운동에서 1867년 뉴저지에 1만여 명이 캠프에 참가하여 부흥운동의 열기를 보여주었다. 모르몬교는 1920년에 조셉 스미스가 시작한 회복주의 신앙으로 유타주의 솔트레이크시티 계곡에 정착하여 계승되고 확장되었다.

로마 가톨릭교: 프랑스혁명 정부는 십일조를 철폐하고, 교회의 토지를 몰수하며, 성직자 수를 감축하고, 정부가 성직자에게 보수를 지급하도록 제도를 바꾸었다. 정부는 성직자에게 헌법 준수를 선서하도록 요구하여, 7명의 주교와 약 절반 정도의 신부들이 선서하였다. 1801년의 협약에서, 나폴레옹은 주교의 임명권을 가지며, 주교구와 소교구를 조정하고, 신학교의 설립을 허용하였다. 교회재산 몰수에 대해 정부가 성직자들에게 봉급을 지급하여 보상하였다. 교회와 국가의 분리에 관한 법률(1905)은 정경분리를 선언하여 교회재산을 몰수하고, 교회의 활동은 사적 영역이 되어, 공립학교와 대학에서 종교교육을 의무적으로 강요하지 않았다. 가톨릭 신부는 정부에서 급여를 받으므로 지방정부의 공무원이 되었다.

독일: 1837-38 기간 라인랜드 지역에서 모친이 가톨릭이고 부친이 개신교도이면, 자녀는 개신교에 의하여 양육되어야 한다는 법을 통과시켰다. 이로 인하여 문제가 생기자 윌리엄 4세는 종전의 나폴레옹 법과 같이 부모가 결정하도록 하였다. 1873년 비스마르크는 교황세력과 가톨릭교회를 최대의 적으로 하여 문화전쟁을 시작하자, 새로운 법의 합헌성이 문제가 되었다. 1878년 가톨릭이 3/8의 교구를 장악한 상태에서 저항이 심각하였고, 선거에서 중앙당이 1/4 의석을 차지하여, 자유주의자들은 비스마르크와 협상으로 평화를 회복하고, 주교와 신부들은 석방되었다.

(1) 제1차 바티칸 공의회(1869-70)는 증가하는 현대의 문제, 즉 이성론, 무정부주의, 공산주의, 사회주의, 자유, 물질주의를 다루기 위해 소집되어, 교황의 무오류와 교황의 최고성을 재확인하였다. (2) 사회 교육: 교황 레오 8세는 사회주의 반대, 노동조건 규정, 무역조합 결성으로 기본임금과 노동자 권리를 보장할 것을 지지하였다. (3) 반가톨릭주의와 사회주의: 자유주의자들은 가톨릭교회를 적으로 간주하고, 사회주의는 종교를 아편이라고 하여 적대시하였다. (4) 예수회는 포르투갈과 스페인의 식민지에서 반독립 정착촌을 형성하여 정부의 비인도적 만행에 대해 토착민을 보호하였다. (5) 아프리카에서 가톨릭 선교사들은 유럽 제국의 식민지 정부를 따라서 현지에 학교, 수도원, 교회를 세워 토착민들을 개화시켰다.

러시아 정교회: 1054년 교회 대분열로 그리스도교는 로마(로마가톨릭교회)와 콘스탄티노플(동방정교회)로 분리되어 후자는 유럽의 동부와 동남지역, 조지아와 코카서스 지역, 러시아 전역에 전도되었다. 17세기에 고대교회 5대 총대주교들은 콘스탄티노플, 알렉산드리아, 안티오케이아, 예루살렘, 모스크바를 포함하였다. 피터대제는 모스크바 총대주교를 폐지하고 신성 종교회의를 만들어 추기경 야보르스키가 교회를 통치하게 하였으나, 후에 10인 성직자 회의를 구성하여 러시아의 교회를 경영하게 하였다. 러시아는 황제가 주교를 임명하고, 소교구 신부는 대부분 신부의 아들로서 교육이 빈약하고 보수가 적었다. 수도원의 수도사는 약간 상위 수준이고 결혼이 금지되었다. 교회는 정치적으로 무력하였다. 캐서린 여제는 교회의 토지를 몰수하고 신부들에게 적은 급여를 주었다. 러시아 정교회는 여러 가지 재정적 정치적 유인책으로 인해 지리적으로 크게 확장되었다. 1918년 러시아 혁명정부는 국가-교회 그리고 학교-교회의 분리를 선언하고, 교회 지도력은 반혁명 세력으로 억압의 대상이 되었다.

이슬람 현대주의는 서구 문명의 도전에 대한 모슬렘의 이념적 반응으로, 이슬람의 신앙이 현대적 가치와 조화를 시도하는 이념이다. 이슬람의 순수한 형태로 돌아오는 것이 이슬람 사회와 현대사회 전체 문제에 대한 해결이 될 것인가? 아브 알-와하브(1791)는 종교의 생존에 관하여 관심을 가지고, 이슬람에 소개된 위험한 혁신을 교정하려고 하였다. 통합과 신의 단일성을 강조하면서, 그는 알라와 신자 사이에 모든 형태의 명상을 거부하였다. 이슬람 현대주의 운동은 중동에서 범 아랍주의와 이슬람 세계에서 세속적 국민주의 실패의 결과로 일어났다고 볼 수 있다. 이를테면, 발칸전쟁으로 오토만 제국이 유럽에서 모든 영토를 잃고 아나톨리아로 퇴각한 이후 기독교 사회와 격차는 더욱 심화 되었고, 2차대전 이후 석유자원을 향한 국제적 분규가 이슬람 사회의 혼란을 초래하여 이슬람 원리주의가 발원하였다. 그들은 이슬람 사이에 대립을 초래하는 모든 외세의 이념은 악이며, 이를 해결하기 위하여 이슬람은 지하드(성전)를 전개해야 한다고 주장해 왔다. 국가를 통치하는 지도자들이 이슬람교도가 아닐 경우 집권자들을 축출하려는 노력으로 성전(聖戰)이 시작되었다.

유대인과 반유대주의: 캐서린 여제는 1791년 유대인 거주지역을 폴란드, 리투아니아, 우크라이나, 크리미아로 제한하여, 1917년까지 유대인이 러시아의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려면 특별허가를 요구하였다. 유대인은 지방선거에 투표할 수 있었으나 그 수는 총투표의 1/3로 제한하였다. 1827년 12세에 군대에 징집되면 6년간 유대인 지역 학교에서 군사교육을 받고 러시아 제국 군대에서 25년간 근무하였다. 모든 유대 공동체에 할당 인원이 주어졌다. 상인 조합원, 농업 개척자, 공장 기능공, 성직자, 고등학교 교육을 받은 모든 유대인은 징집에 면제되었고, 부유하면 뇌물로 징집을 피하여 징집 가용자원이 제한되었다. 러시아 정부는 유대교인을 러시아 정교로 개종시키고 유대 소년들에게 세례를 강요하였으며, 유대인들은 점차 러시아 언어와 관습에 적응하였다. 러시아 교육이 확산하여 유대-러시아인의 잡지가 출현하였다. 알렉산더 2세는 1861년 러시아 농노제도를 철폐하면서, 유대인에게 기독교도하인 고용불가, 토지 소유불가, 여행 금지 등의 제약을 주었다. 알렉산더 3세의 반유대 정책은 대중적 반유대주의(Antisemitism)로 발전하여 “그리스도를 죽인 사람”과 “슬라브족의 억압자”로 묘사하였다. 러시아는 1821-1906 기간에 수많은 유대인을 학살하였다. 1881년 대규모 반유대 학살이 우크라이나를 휩쓸어 수천의 유대 가정이 파괴되었다. 프랑스는 1894-1906 기간에 유대인 드레퓌스 대위를 간첩죄로 (허위 조작으로 기소하여) 유죄판결을 받았다. 세계대전 중 나치가 6백만의 유대인을 학살한 반인륜적 범죄행위는 역사적 비극이었다.

(세계문명사 연재 21. 19세기 유럽의 정치와 종교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