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문명사 연재 21. 19세기 유럽의 정치와 종교 (Continued 4)
(c) 국가 권력의 성장과 제국주의 (1871-1914) (계속)
제국주의의 국가별 분석
제국주의는 정치 경제적 접근으로 군사력과 외교력을 병행 사용하여 다른 지역의 주민이나 국가의 영토에 통치력을 연장하는 정책이나 이념이다. 영국,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러시아 등은 강대국이 되기 위하여 제국주의 정책을 취하였다. 근대 역사에서 보면, 16세기에는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17 및 18세기에는 네덜란드, 영국, 프랑스가 국제무역을 지배하며 식민지주의 정책을 취하였고, 19세기에는 후발주자인 독일 이탈리아 러시아가 가세하여 제국주의 정책으로 경쟁하였다. 식민지주의는 이민하여 정착하고 식민지에 정치체제를 만들어 법과 질서를 유지하며, 본국의 공산품을 수출하고 원자재를 수입하는 단순한 상업적 관계이다. 그러나 제국주의는 특정 지역을 정복하여 정치 군사 경제적 지배를 하는 것이다. 식민지주의는 상업적 이해관계에 기초하지만, 제국주의는 군사적 정복을 전제로 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지리상 발견의 동기는 물질적 이득, 종교적 열정, 사회적 인정, 경이감-모험심-탐구심 등에 있었다. 레닌은 마르크스주의자로 제국주의를 자본주의의 최고의 형태로 보았다.
아메리카에서의 제국주의: 1821년 스페인에서 반란이 일어나 왕이 연금되고 라틴아메리카의 식민지가 거의 모두 독립을 쟁취하자, 미국의 먼로 대통령은 1823년 먼로주의를 선언하여 유럽국가들이 아메리카를 식민지로 하려는 야심을 경계하였다. 미국이 강대국이 되는 시점에서 먼로주의는 유럽의 영토적 야심에 대해 하나의 효과적인 장벽이 되었다.
멕시코-미국 전쟁(1846-48): 멕시코는 1821년 스페인 지배에서 독립하여 1824년 공화국이 되었다. 텍사스는 독립된 공화국으로 주민들이 원하여 1845년 미국이 병합하였다. 멕시코가 병합된 일부 지역에 대해 불복하여 전쟁이 발발하고, 미국인 13,283 멕시코인 25,000 (민간인과 군인 포함)이 사망하였다. 과달루페 조약(1848)으로 멕시코는 텍사스를 미국 영토로 인정하고, 미국은 멕시코 재산피해 $1500만을 보상하고 멕시코 정부 부채 $325만을 탕감해 주었다. 텍사스 병합으로 멕시코와 국경선이 리오그란데로 변하여, 지금의 캘리포니아, 네바다, 유타, 아리조나, 뉴멕시코주가 미국 영토에 포함되어, 미국은 영토가 대서양 연안에서부터 태평양 연안까지 확장되고, 대서양 횡단철도 건설과 인디언 전쟁으로 인하여 미국인들이 서부로 집단이주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유럽의 멕시코 개입: 1861년 런던회의에서 영국, 프랑스, 스페인은 멕시코 부채납부에 공동노력을 하기로 합의하고, 3국의 해군이 멕시코만의 베라크루즈 항에 상륙하였다. 영국과 스페인은 프랑스가 멕시코를 정복하려는 야심이 있음을 간파하고, 양국은 멕시코와 부채납부에 대한 합의를 끝내고 본국으로 귀환하여 런던회의에서 합의한 군사동맹을 철회하였다. 프랑스는 멕시코를 침공하여 제2 멕시코 제국을 수립하고, 베니토 후아레스 대통령의 자유주의 개혁정책에 반하는 반동적 정책을 취하였다. 나폴레옹 3세는 오스트리아와 화해하기 위하여 맥시밀리언 페르디난드(오스트리아 황제의 동생)를 멕시코 황제로 영입하였다. 미국은 독립전쟁이 끝나자 후아레스 정권을 지원하고, 프랑스군이 1866년 본국으로 철수하자, 페르디난드 정권이 붕괴하여 그는 처형되고 멕시코 공화국이 재건되었다.
파나마 운하는 프랑스가 1880년 건설을 시작하여 실패하고, 미국이 재시도하여 1914년 완공하고, 1999년 소유권이 미국 정부에서 파나마 정부로 이전되었으며, 건설공사 중에 27,500명의 노동자가 사망하였다. 대서양과 태평양을 연결하는 운하의 전략적 중요성은 제2차 대전에서 증명되었다.
스페인-미국 전쟁(1898): 1895년 쿠바의 독립운동이 스페인의 강압적 진압과 주민의 집단수용으로 10만 이상 사망하여, 미국민의 동정을 받았다. 1898년 아바나에 정박 중인 미국의 메인호가 폭발하여 미 해군 266명이 사망하자, 이를 문제 삼아 미국이 스페인에 최후통첩을 보내 양국은 쿠바와 필리핀에서 10주간 전쟁을 하였다. 1898년 파리조약으로 스페인은 쿠바를 포기하고, 필리핀, 괌, 푸에르토리코를 미국에 양도하며, 미국은 스페인이 투자한 사회 간접자본에 대해 $2천만을 보상하였다. 이로 인해 미국은 태평양에서 전략적 거점을 확보하였다.
루스벨트 추론: 1902년 시프리아노 카스트로 대통령이 베네수엘라의 외채와 내전으로 입힌 유럽인의 피해 보상을 거부하자 영국, 독일, 이탈리아는 수개월 간 베네수엘라 해상을 봉쇄하였다. 분쟁이 국제재판에 부쳐져, 해상 봉쇄는 부채나 변상을 위해 자격이 있다고 판정하였다. 이에 대해 미국은 동의하지 않았으며, 시어도어 루스벨트(1901-09)는 유럽국가와 라틴아메리카의 분쟁에서, 유럽국가들이 직접 압박을 하는 것보다 미국이 개입하여 그들의 합법적 요구를 시행해야 한다고 1904년 의회에서 연설하였다. 루스벨트는 자신의 정책을 먼로주의와 연계하여, 서반구에서 만성적인 불안과 불법을 종식하고 카리브해와 중앙아메리카 군소국의 경제 문제를 안정시키기 위하여, 미국이 국제적 경찰권 행사하는 것이 정당하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1904년 도미니카공화국에 전함 2척을 보내 세관을 장악하여 세입의 일정 부분을 외채 탕감에 전용하였다. 이는 라틴 채권국들을 일시적으로 보호하는 것으로 달러 외교로 알려졌다. 그러나 1934년 프랭클린 루스벨트는 유럽의 부채에 미국이 개입할 권리가 없다고 하여, 개입정책을 버리고 좋은 이웃의 친선정책을 추구하였다.
하와이 제도: 영국의 제임스 쿡이 1778년 처음 도착하여 원주민과 마찰로 살해당한 이후, 카메하메하는 하와이섬들을 정복하여 1795년 하와이 왕국을 수립하고, 1810년 영국형 정치체제를 확립하였다. 주로 개신교 전도자들로 미국인의 이주가 시작하여 일본, 중국, 필리핀으로부터 이민이 몰려와 사탕수수 농장에 노동력을 제공하였다. 1893년 여왕은 폐위되고 샌포드 돌이 대통령으로 공화국을 선포하고 미합중국에 가입하였다. 1897년 일본이 이에 저항하여 하와이에 전함을 보내자, 1998년 미국은 하와이를 병합하여 미국의 영토로 만들고, 1959년 주에 편입하였다.
오토만 제국의 분해: 흑해와 발칸반도는 러시아의 남진정책과 터키의 북진정책이 교차하여 영국, 프랑스, 오스트리아가 자국의 이익을 고려하여 어느 편에 개입하거나 중립을 취하였다. 크리미아 전쟁(1853-56)과 러시아-터키 전쟁(1877-78)에도 불구하고, 국민주의(민족주의)가 급속히 성장하여 이해충돌로 발칸전쟁(1912-13)이 일어났다. 그 결과 터키는 발칸에서 모든 영토를 잃고 유럽에서 밀려나고, 다수의 모슬렘은 아나톨리아의 중심부로 이주하였다. 압둘 하미드 2세(재위 1876-1909)는 행정의 개혁, 철도의 건설, 인구 등록체계 수립, 대학 전문학교 설립 등 업적을 남겼으나, 반대자를 침묵시키기 위하여 비밀경찰로 터키제국을 잔인하게 통치하여 청년 터키혁명으로 왕좌에서 제거되었다.
아프리카의 분할: 1871-1900 기간에 아프리카는 유럽 제국주의의 침략, 외교적 압박, 군사적 공격 등으로 정복되어 식민지로 변하였다. 정치적으로 유럽 제국은 정치 군사적 지배를 확장하여 강대국이 되기 위하여 영국, 프랑스, 독일, 벨기에, 이탈리아, 포르투갈, 스페인 등이 경쟁적으로 아프리카 식민지를 건설하였다. 경제적으로 1873-96 기간에 유럽은 장기불황으로 보호무역 정책을 취하여, 아프리카 국가들은 유럽국가에 시장을 개방하여 무역흑자로 비축한 자본을 이윤이 많은 해외에 투자하도록 유도하였다. 그러나 아프리카에 대한 투자금액과 투자를 원하는 유럽회사가 적어, 유럽 시장의 축소로 발생하는 초과 생산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다. 사회적으로 산업화로 인하여 유럽국가들은 실업, 빈곤, 무주택, 도시로의 인구집중 등 문제가 속출하여 식민지에 수출을 증대하고, 초과인구를 식민지로 방출하는 정책을 추진하였다.
베를린 회의(1884-85)는 비스마르크 중재로 유럽 열강의 대표들이 참가하여 아프리카 분할에 관하여 합의하였다. 주최국인 독일제국은 카메룬, 탄자니아, 나미비아를 얻었다. 총회는 동아프리카를 포함한 콩고분지를 중립지대로 선정하여 콩고자유국이 되었다. 자유무역과 선박운송의 자유를 보장하며 노예무역을 금지하였다. 콩고 식민지: 벨기에 국왕 레오폴드 2세는 콩고자유국을 개인 식민지로 하여 상아를 채굴하고 고무를 생산하였으며, 강제노동과 잔학행위가 자행되고, 1885-1908 기간에 무차별한 전쟁, 기아, 출산율 감소, 질병으로 1,600만 토착민이 사망하였다.
모로코 위기: 1998년 영국은 나일강 상류 파쇼다 지역을 탐험하면서 수적으로 아주 열세한 프랑스의 탐험대와 만나 강경한 태도를 보여 프랑스 병력은 철수하고, 영국은 이집트에서 그리고 프랑스는 모로코에서 지배적 세력임을 양국은 인정하였다. 후발주자인 독일은 모로코에서 프랑스 지배력 확장에 도전하여 영국과 프랑스를 자극하였다. 대부분 유럽 제국이 참가하는 알헤시라스 회의(1906)는 프랑스의 알제리아 지배권을 확인하여 삼국동맹(1882)과 삼국협상(1894)의 관계를 더욱 악화시켰다. 1911년 프랑스가 상당한 병력을 모로코 내부로 전개하자, 독일은 프랑스의 확장에 영토적 보상을 요구하며 전쟁으로 위협하였다. 독일은 프랑스가 모로코를 보호령으로 지배하는 것을 인정하고, 프랑스는 프랑스령 콩고의 일부를 독일에 양도하는 것으로 위기를 해결하였다.
소말리아의 저항: 모하메드 하산(1856-1920)은 소말리아의 종교 군사적 지도자로 영국, 이탈리아, 에티오피아에 대항하여 20년간 저항을 지속하였다 (데브리쉬 운동). 그는 오토만 제국, 수단, 여타 이슬람 국가로부터 무기를 획득하고, 장관과 고문을 임명하였다. 그는 지역에 주둔한 영국군을 공격하고, 4회에 걸쳐 영국 탐험대를 격퇴하였으며, 독일-오스트리아-오토만-불가리아와 관계를 유지하였다. 그러나 1920년 영국의 폭격으로 데브리쉬 운동은 정지되고, 소말리아는 영국의 보호국이 되었다.
헤레로 전쟁(1904-08): 독일은 1884-90 기간에 남서 아프리카(현 나미비아)에 식민지를 건설하여 1903년 약 3,000의 독일인이 정착하였다. 1903년 코이와 헤레로 부족이 반란을 일으켜 1904년 전투에서 제압되고, 저항하는 아프리카인 65,000~70,000명 정도가 살해된 것으로 추정한다.
마지마지 반란(1905-07): 독일은 현대의 부룬디, 카메룬, 나미비아, 르완다, 탄자니아, 토고 등을 식민지로 통치하였다. 그러나 통치력이 약하여 가혹한 군사통치를 하였고, 1898년부터 인두세를 부과하고, 도로 건설이나 여타 과업을 위하여 강제노동에 동원되고, 각 마을에 면화 생산량을 할당하여 주민의 분노가 극에 달하였다. 1905년 가뭄과 기근이 생계를 위협하자 반란이 일어나고 일시적으로 반란군이 독일인들을 축출하였으나, 반란은 진압되고 저항하는 수십만 탄자니아의 토착민이 살해되었다.
아시아에서의 제국주의: 네덜란드령 [동인도]는 현재의 인도네시아로서 네덜란드 동인도회사가 1800년 국유화되어 식민지가 되고, 정부의 행정적 지배를 받게 되었다. 19세기에 네덜란드의 주도권이 영토적 최대확장을 가져왔으며, 양념류와 환금작물의 무역에 기여하였다. 식민지의 사회질서는 네덜란드 엘리트가 토착 주민과 격리된 경직된 인종적 사회적 구조에 기초하였다. 1815년 네덜란드는 자바섬과 일부 인근 섬을 점유하였으며, 다음 10년에 영국이 싱가포르, 말레이반도, 북보르네오를 장악하고 수마트라를 요구하였다. 프랑스는 1860년대에 이 지역에 나타났으며, 독일은 동뉴기니어, 마살 군도, 솔로몬 군도를 병합하였다.
영국령 [인도]: 인도의 무굴제국(1526-1858)은 1700년 전성기에서 기울기 시작하고, 인도의 용병은 영국에 저항하는 세포이 항쟁(1857-58)을 일으켜 무굴제국의 멸망을 가져왔다. 1858년 영국 정부는 동인도회사를 흡수하고, 1876년 인도제국을 수립하여, 인도는 영국의 직할령이 되었다. 세포이 반란 이후 영국은 인도 내에서 영국군 대 인도병력의 비율을 높이고, 1861년부터 소수 산악부대를 제외하고, 인도군 포병을 영국군 포병부대로 대치하였다. 서구화된 인도인의 계층이 성장하면서 인도인들은 국가업무에 많은 역할을 요구하였다. 1885년 힌두 인도 국가의회가 조직되고, 1906년 전 인도 모슬렘 동맹이 결성되었다. 급진적 반영국 민족주의가 제국주의에 대항하여 일어나 사회주의 색채를 나타냈다.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1862년 베트남은 프랑스의 식민지가 된 이후에 유럽의 선진 문물을 배워 근대화를 추구하였으며, 이러한 운동은 급진적 민족운동으로 발전하여 저항세력을 형성하였으나 진압되었고, 함응이 황제는 깊은 산골에서 저항 중에 1888년 프랑스군에 체포되어 알제리에 유배되고 프랑스의 통치시대가 되었다. 1925년 바오다이 황제가 즉위하면서 황제의 사법 및 행정권이 프랑스에 귀속되었다. 영국과 프랑스가 태국을 사이에 두고 완충 국가를 만들기로 합의하여, 동남아에서 유일하게 식민지가 되지 않고 독립 국가로 남았다. 타이는 일차세계대전에서 연합국에 참전하여 관세의 자유와 치외법권 폐지 등을 얻어냈다.
[중국] 아편전쟁: 16세기부터 예수회 선교사들이 유럽 문명을 중국에 전파하고, 18세기에 중국은 유럽 상인들의 거래를 광저우와 마카오에 국한하고 높은 관세를 부과하였다. 1830년대 영국은 모직물과 인도 면화를 수출하고 중국산 차를 수입하여 무역적자로 결재할 은화가 부족하였다. 이를 해소하기 위하여 영국은 인도산 아편을 중국에 밀수출하자 청나라는 임칙서를 파견하여 강력히 단속하고 마약상들을 홍콩에서 축출하였다. 이로 인해 제1차 아편전쟁(1840-42)을 하였고, 난징조약으로 영국은 홍콩을 할양받고 중국은 5개 항을 개항하였다. 제2차 아편전쟁(1856-60)은 청나라의 개방이 미진하고 광둥을 중심으로 대영 항쟁이 전개되자, 청나라의 애로호가 영국 국기를 바다에 던진 사건을 구실로 영국-프랑스 연합군은 광저우를 공격하고, 러시아군도 중국을 공격하여 톈진을 점령하여, 평화조약으로 청나라는 배상금 지불, 주룽반도 할양, 개항 확대를 허용하였다. 후속 조치가 미진해지자, 연합군은 베이징을 함락하여 베이징조약(치외법권, 관세 혜택, 외국 전함의 기항권 허용)으로 전쟁을 끝냈다.
의화단 운동(1899-1901): 중국은 근대화를 거부하여 유럽국가들과 여러 전쟁에 패배하여, 19세기 말부터 서방 무기를 구입하고 국내에서 무기를 제조하였다. 의화단 운동은 산둥 화베이 지역에서 일어난 외세 배척 운동이다. 1888년 산둥성에 가뭄과 흉년으로 유민이 발생하여 이들이 대거 의화단에 가입하고, 열강의 요구에 따라 의화단을 탄압하자 이들은 철도나 교회 등 외래적인 것을 파괴하고 기독교도를 살해하였다. 의화단을 부추겨 베이징의 외국공관을 포위 공격하여 서태후는 열강에 선전포고하였다. 열강 8개국은 베이징과 양쯔강 이북지역을 대부분 점령하였으며, 중국은 신축조약으로 열강과 화해하고, 전쟁배상금을 내며 중국 내 외국군대 주둔을 인정하였다. 이로 인해 중국의 반외세 저항이 더욱 거세졌다. 한편 태평천국의 난은 1850-64 기간 홍수전이 기독교 신앙으로 신자를 모아 태평천국을 건설하는 정치혁명을 유도하여 내란을 일으켰으며, 주요 지방에 군대조직을 편성하고 정부군과 대치하여 수천만의 희생을 내고 평정되었다. 이는 명청 전쟁 이래 중국 역사상 가장 큰 전쟁으로 인류 역사를 통틀어 가장 비극적인 내전 중의 하나이다.
[일본] 메이지 시대(1868-1912): 서구의 아시아 진출이 거세지는 가운데 미일 친화 조약(1854)과 안세이 5개국 조약(1858)이 체결되고, 도쿠가와 막부(1603-1868)의 종말로 천황이 직접 통치하며 개방하고 현대화하여, 일본을 부국강병의 국가로 만드는 제국주의 물결에 합승하였다. 1871년 봉건제도를 폐지하고 현대의 행정구역을 편성하며, 육군을 창설하고 2년 후에 일반 징집제도를 도입하였다. 새 행정부는 금융 및 세금 제도를 단일화하고, 서방과 같은 교육제도를 도입하였다. 1880년대에 전 사무라이와 정권에 불신하는 농부들의 반란이 있었으나 제압되었다. 서구 자유주의 사상의 영향으로 1889년 메이지 헌법이 선포되어 양원제의 입헌군주 국가로 의회는 다음 해에 개원하였다. 경제가 아직 농업 위주였으나 산업화에 목표를 세우고 전략적 제조업, 교통, 통신의 발전을 추구하였다. 철도는 1890년 2,250Km를 개통하였고, 전신은 1880년에 주요 도시에 연결되었으며, 1900년 일본은 서방과 같은 현대 공업 국가가 되었다.
청일전쟁(1895): 1894년 동학란을 진압하기 위하여 조선은 청나라에 진압을 요청하여 2,460명의 청나라 군대가 도착하자 4,500명의 일본군이 제물포에 상륙하였다. 동학교도와의 화해로 조선은 청나라와 일본에 철군을 요청하였으나 일본은 추가병력을 보내 조선에 내정개혁을 요구하였다. 주중 영국대사의 중재에도 불구하고 일본군이 한양에 진입하여 친일내각을 구성하고 청나라 군대를 축출하도록 허가하였다. 청일전쟁으로 일본은 청국세력을 축출하고 랴오둥반도와 타이완을 얻었다. 러시아-청국 밀약(1897)으로 러시아는 여순항과 대련만을 조차하고 만주에 철도부설권을 얻었다. 일본은 영일동맹(1902)으로 러시아의 팽창에 대비하면서, 러일전쟁(1905)에서 승리하고, 미국의 중재로 포츠머스 강화조약을 체결하여 일본은 사할린을 양도받고, 여순과 대련의 이권을 인수하며, 조선반도와 만주에서 전략적 우위를 확보하였다. 러일전쟁 직후 가쓰라-태프트 밀약(1905)은 미국의 필리핀 지배권과 일본의 조선 지배권을 서로 인정하고 보장하였다. 한일병합조약(1910): 일본이 조선을 경유 만주와 중국에 진출하기 때문에, 한일병합은 일본 제국주의의 중요한 출발점이 되었다. 조선의 친일파 대신 8명은 조약체결의 공로로 귀족 작위를 받았다.
발칸반도의 위기: 오토만이 1453년 콘스탄티노플을 장악하고 그 세력이 서진하여 발칸은 물론 1529년 비엔나를 포위하였으며, 오토만 함대는 지중해에서 페르시아만까지 지배하였다. 발칸반도는 오토만 제국이 거의 전부를 지배하였으나 1829년 그리스가 독립하고, 여타 국가들도 자치령이나 독립을 쟁취하였다. 20세기 초까지 불가리아, 그리스, 몬테네그로, 세르비아가 터키로부터 독립하였으나, 그들 민족의 많은 부분이 오토만의 지배하에 남았다. 이들은 발칸동맹을 결성하고 1912년 10월에 오토만을 공격하여 제1차 발칸전쟁(1912-13)을 일으켜 8개월 만에 종결하고 런던 조약(1913)으로 터키는 발칸에서 많은 영토를 상실하였다. 그러나 영토 배분을 둘러싸고 불가리아는 마케도니아 지방 전부를 차지하려고 세르비아와 그리스에 선전포고하여 1913년 6월 제2차 발칸전쟁이 일어나 40 여일 만에 불가리아는 항복하였다. 부쿠레슈티 조약으로 불가리아는 제1차 전쟁에서 잃은 영토를 대부분 상실하였다. 이로 인하여 불가리아가 제1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제국과 오스트리아-헝가리 편에 서게 되었다.
TO BE CONTINUED
(d) 유럽 제국의 군대와 전쟁 (1815-1914)
(e) 유럽국가의 종교와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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