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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문명사 연재 21. ~(Continued 5)/PhD. Hugo W. Kim

양곡(陽谷) 2023. 8. 24. 10:29

세계문명사 연재 21. 19세기 유럽의 정치와 종교 (Continued 5)

(d) 유럽 제국의 군대와 전쟁 (1815-1914)

전쟁은 적과 아군 사이의 군사작전으로, 적을 약화하거나 파괴하기 위하여 국가나 동맹과 같은 정치적 단위가 취하는 행동이다. 따라서 국가는 분명한 전쟁목표를 설정하고 달성하기 위하여 합당한 전략을 세우고 최상의 전술을 적용해야 한다. 현대전쟁을 수행하는 군은 육군 해군 공군 해병대 우주군 사이버군 등이 있으며, 육군의 경우 집단군에서부터 말단 중대에 이르기까지 고유의 전투편성과 장비를 규정하고 있다. 각 부대는 인사 정보 작전(교육) 군수 민사의 일반 참모부와 공병 통신 수송 병기 병참 등 특별 참모부를 구성하여 전투를 위해 필요한 사항을 준비하고 지휘관에게 결심을 건의한다. 과학 기술의 발전과 함께 항공기와 유도무기의 능력이 발전하여 부대편성 및 전략 전술에 많은 변화를 주고 있다. 여기서는 나폴레옹 전쟁 이후부터 세계 제1차대전 이전까지의 여러 전쟁에서 국가별 군대의 발전과 위대한 전략가들—카르 본 클라우제비츠, 헨리 조미니, 알프레드 마한—의 전쟁이론을 간략히 살펴본다.

프러시아 육군(1815-1914): 프레데릭 윌리엄(1640-88)은 프러시아가 왕국으로 승격하자, 브란덴부르크 용병을 뽑아 상비군으로 훈련하여 군대를 창설하였다. 프레데릭 2세(1740-86)는 군을 재편성하여 오스트리아왕위계승전쟁에서 슐레지엔을 장악하고, 7년 전쟁에서는 어렵게 생존하였다. 프랑스혁명 전쟁에서 프러시아는 1806년(제4차 연합) 나폴레옹에 패하였으나, 1812년(제6차 연합) 동맹국으로 승전국이 되었다. 1830년대와 1840년대 보수주의 정부는 자유주의 운동을 탄압하는 수단으로 군대를 이용하였다. 1848년 민족주의 혁명세력이 프랑크푸르트 국민의회를 구성하였으나 황제의 거부로 해산하였다. 1856년경 프러시아 군은 보병 86,436명, 기병 152대대, 포병 9개 연대가 주력이었다.

크리미아 전쟁(1853-56)은 흑해에서 제해권을 확보하고 남진하여 지중해로 진출하려는 러시아의 야심이 영국과 프랑스가 터키를 지원하여 무산되었다. 이 전쟁은 유럽의 국제관계를 흔들어 놓았다. 프러시아는 1857년 헬무트 본 몰트케를 참모총장에, 1859년 알베르트 본 룬을 국방장관에 임명하여 군대를 개편하고 전략을 재수립하였다. 빌헬름 1세(1861-88)가 왕위를 계승하고, 오토 본 비스마르크를 수상 겸 외무장관에 임명하여 군비를 확장하고 군사력을 배경으로 외교를 강행하였다. 프러시아는 덴마크 전쟁(1864), 오스트리아 전쟁(1866), 프랑스 전쟁(1870)으로 독일을 통일하여 빌헬름 1세는 1871년 독일제국을 선포하였다.

프러시아는 작전(전술)에서 주도권, 기동성, 공격적 지휘로 지구전-소모전을 피하고 짧고 신속하게 측방이나 후방을 타격하는 결정적 전투를 강조하였으며, 포위 작전에는 경험이 없었다. 독일제국의 군대는 정보, 대정보, 군수에 취약하였고, 일차대전에서 초기 공격에 성공하지만, 전선이 참호전으로 교착생태가 되었다. 독일군은 긴급한 작전 상황에서 전투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하급 장교가 작전의 주도권을 인수하는 지휘의 융통성을 강조하였다. 전차와 항공기의 개발로 작전에서 기동성이 증가하여 속도전으로 병력을 집중하고, 종심 깊이 침투하며, 적의 강점을 우회하고, 적군을 포위하여 파괴하는 새로운 전술을 개발하였다.

***카를 폰 클라우제비츠(1780-1831)는 프러시아 중산층 가정에 태어나 1803년 베를린 사관학교를 졸업하고, 1806년 나폴레옹 전쟁에 참여하여 전투에서 포로가 되었고 다음 해 석방되었다. 1812년 나폴레옹의 러시아 원정에 동원되었다가 탈영하여, 러시아군에 입대하고 나폴레옹 군대와 대적하였다. 1815년 프러시아로 복귀하여 워털루 전투에서 군단 참모장을 역임하였다. 그는 베를린 육군사관학교 교장(1818-30)으로 봉직하면서, 전기를 집필하고 군사학 논문들을 발표하였으며, 전쟁론(On War)을 집필하던 중에 1831년 유행한 콜레라로 병사하였다. 그가 사망한 후 전쟁론은 잘 알려지지 않았으나, 독일통일 이후 그의 제자임을 자처한 몰트케 참모총장이 그의 전쟁론에 전략적 의미를 부각하여 알려졌다. 전쟁론은 전쟁의 본질, 전쟁이론, 전략 일반론, 전투, 군사력, 방어, 공격, 전쟁계획 등의 내용을 포함한다. 클라우제비츠는 전쟁은 자신의 의지를 실현하고자 적에게 굴복을 강요하는 폭력행위로서, 공격의 성과는 물리력과 정신력이 우세한 결과라고 하였다. 그는 전쟁에서 군의 사기, 병력집중, 결정적 전투, 완전한 정복을 강조하여, 당대 지식사회의 화제가 되었다.

프랑스 육군(1789-1914): 나폴레옹 전쟁: 나폴레옹은 위대한 지휘관으로 지혜롭고, 카리스마적이며, 군사적으로 천재적 역량을 가졌다. 최신 군사이론을 습득하여 전장에서 효과적으로 적용하고, 징집으로 신병을 보충하여 교육-훈련-실전으로 강군을 만들었다. 부대 이동과 전술적 기동에서 최상의 속도를 유지하였고, 병참 지원은 호송 시스템을 사용하여 수일 분량을 비축하고, 식품은 현지조달로 부대 이동 시간을 단축하였다. 대전략과 작전전략을 세우고, 전투에 접근하는 기본적인 전략으로, 첫째 병력을 후방으로 이동하여 적의 병참선과 통신을 차단하고, 수 개의 접근로를 선정하여 적을 타격하였다. 직접 접근법으로 적의 전선을 방해하고 기회를 보아 적의 측방을 공격하였다. 둘째 2개 이상 적의 대군과 대치할 때, 중앙 지점을 이용하여 적을 분리하였다. 이는 결정적 전투를 증원하는 적의 능력이 제한적일 때 주 전투에 병력을 집중해야 성공할 수 있는 전략이다. 보병은 기본적으로 찰레빌 M1777 소총을 장비하였고, 포병은 개선된 그리비유벌 12파운드 야포를 7년 전쟁 때부터 사용하였다.

프랑스의 군사개입: (1) 1823년 스페인의 페르디난드 7세의 왕정을 복원하기 위하여 프랑스는 약 60,000 병력을 5개 군단으로 편성하여 스페인으로 진격해서 자유주의 반란을 평정하고 1828년까지 점진적으로 철군을 완료하였다. (2) 알제리 정복(1830): 프랑스는 전함 600척 병력 34,000으로 알제리를 정복하고 서아프리카와 중앙아프리카에 식민지를 건설하였다. (3) 오스트리아와 전쟁(1859): 보병 170,000 기병 2,000 (말) 화포 312문을 동원하여 피드몬트-사르디니아 왕국과 동맹으로 오스트리아군을 롬바르디에서 축출하였고, 보병 8,000이 로마에 주둔하여 교황을 보호하였다. (4) 베트남 정복(1859): 전함 14척 병력 3,400으로 사이공을 함락하고 베트남을 보호국으로 만들었다. (5) 멕시코를 점령하여 프랑스령 왕국을 수립하였으나 거센 저항으로 1866년 퇴각하였다. (6) 보불전쟁(1870- 71): 프러시아 정규군 30만 명과 프랑스 정규군 49.3만 명이 전투하여, 승전한 프러시아군 4.5만 명과 패전한 프랑스군 13.9만 명이 사망하였다. (7) 프랑스 해군은 아시아에서 식민지 전쟁에 전함을 파견하였다.

***앙투안-헨리 조미니(1779-1869)는 스위스 태생으로 파리의 주식 중개인으로 잠시 일하였고, 1798년 스위스군에 입대하여 대위로서 전쟁장관의 부관이 되었고, 1801년 파리로 돌아와 군 장비제조업체에서 일하면서, 주요 군사작전에 관한 논문(1803)을 출간하였다. 그는 1805-07 기간에 네이 장군의 참모로 복무하였다. 그가 프랑스군을 떠나 러시아군으로 옮기겠다는 의사를 밝힌 후 준장으로 진급하였고, 프랑스-러시아 전쟁이 시작하자 통신 분야에 보직되었다. 조미니는 1812년 러시아 침공에 참여할 것을 거부하고, 1814년 러시아군으로 적을 옮겨 임무를 수행하고, 1815년 러시아 황제와 함께 파리에 입성하였다. 그는 1823년 대장으로 진급하고 1829년 퇴역 시까지 차기 황제 니콜라스의 군사교육을 담당하였다. 은퇴 후 브뤼셀에 정착하고, 크리미아 전쟁에서 니콜라스 황제의 군사고문으로 봉사하며 종전으로 브뤼셀로 돌아왔다. 그의 저술 전쟁의 예술(1838)은 기본적으로 프레데릭 대제의 전역, 1890년대의 프랑스 혁명전쟁, 나폴레옹 전쟁을 소재로 하여 전략, 대 전술, 군수, 공병지원, 전술 등에 추가하여 전쟁과 관련한 외교를 포함하여 총 6개 분야를 다루고 있다.

영국 해군(1789—1914): 트라팔가르 해전(1805): 나폴레옹은 영국을 침공하기 위하여 스페인과 연합함대를 구성하고 빌레누브제독이 33척을 지휘하여 1805년 10월 스페인 서남 트라팔가르 해안에서 넬슨 제독의 영국함대 27척과 해전으로, 영국해군은 손실 없이 프랑스 전함 22척을 침몰시켰다. 빌레누브는 포로가 되었고, 넬슨은 소총에 맞아 전사하였다. 나폴레옹의 영국 침공계획이 좌절되었고, 영국은 기동성 좋은 소수 육군을 훈련하여 긴요한 지역에 투입하였다. 미국과의 전쟁(1812-15)은 앞에서 기술하여 생략한다. 영국에 의한 평화 (Pax Britannica): 1815-1914 기간은 영국이 강력한 해상권을 장악하고 세계 해상 무역로를 안전하게 관리하여 유럽이 상대적으로 평화로운 시기가 되었다. 러시아가 흑해를 장악하려고 크리미아를 침공하자, 영국이 프랑스와 함께 이를 저지하였다. 그러나 독일제국의 등장과 러시아-터키 전쟁 이후 영국의 절대적 우위는 쇠퇴하였다. 전술한 바와 같이 영국은 해군 방위법(1889)으로 프랑스와 러시아의 해군력을 합한 수준의 강력한 해군력을 건설하였다.

전함 건조 시대(1895-1919): 1890년대 중반, 러시아-프랑스의 동맹, 독일해군의 야심적 건설계획, 미국과 일본의 해군력 신장 등으로 영국은 고립되는 불안감을 느껴 해군의 건설과 해군 전략화는 증기기관 동력화와 어뢰나 잠수함의 개발로 가속되었고, 전통적 전함 위력의 개념을 바꿔 놓았다. 영국해군의 전함 드레드노트(거함 거포)의 등장으로, 12인치 함포로 장거리 사격과 일제사격으로 화포의 정확성과 위력이 증가하였고 21.5 노트의 능력을 보유하는 군함 건조가 세계적 지침이 되었다. 러일전쟁(1904)에서 일본은 12인치 함포로 러시아 함대를 결정적으로 타격하였다. 주력함과 연락하며 군수품을 적재하고 빠르게 운항하는 순양함이 건조되었다. 영국은 1901년 잠수함을 건조하고, 1904-1909 사이에 154 전함을 퇴역시켜 증기터빈을 사용하는 전함으로 대치하였다. 영국은 미국과의 친교, 일본과의 동맹, 프랑스와의 협상으로 독일해군의 도전에 대비하였다. 오스트레일리아, 캐나다, 뉴질랜드의 해군도 개선하였다. 1900-1913 기간에 해군 예산은 거의 배로 증가하여 총 4,400만 파운드로 국방예산 7,400만 파운드(2016년 기준 65.7억 파운드)의 절반을 초과하였다.

러시아 육군(1800-1917): 1812년 나폴레옹이 러시아를 침공하여 모스크바에 도착하자, 러시아군은 초토작전으로 도시를 불태우고 퇴각하였다. 프랑스군이 철수하자 러시아군이 추격하여 파리에 도착하였다. 나폴레옹이 패퇴하자, 알렉산더 1세는 유럽의 구원자로서 신성동맹(1814)과 4국 동맹(1815)을 결성하였고, 비엔나 회의는 유럽의 구질서를 회복하였다. 러시아가 크리미아 전쟁에서 패한 후, 전쟁 장관 드미트리 밀루틴(1861-81)은 군대개혁을 시작하여, 1874년부터 20세 남성에 대해 6년간 현역 복무하고 9년간 예비역을 의무화하였다. 평시에는 상비군을 소규모로 유지하여 군인들은 농부의 신분을 지키고, 기술을 배우며 문자를 해독하였다. 군사교육체계를 개혁하여, 군대에 징집된 모든 사람은 초등교육을 받았다. 개혁이 있기 전까지 러시아군은 영구적 병영이 없이 땅굴이나 오두막에서 지냈다. 중국 의화단 사건(1899-1901) 동안에 러시아는 만주지역을 평정하고 철도를 지키기 위해 10만 병력을 동원하였다. 1904년경 러시아 병사 1인당 비용은 독일 병사들의 57% 수준이었고, 러시아군은 1883-1903 기간에 1500회가 넘는 시위진압으로 사기가 추락하였다. 러일전쟁에서 일본에 패하여, 1905-06년 동안에 러시아군은 400회가 넘는 반란이 있었다.

미국 육군 및 해군(1800-1914): 영국과의 전쟁(1812-15): 비엔나 체제 참조. 멕시코와 전쟁(1846-48): 제국주의 전쟁 참조. 미국 내전(1861-65): 국민주의와 국가통일을 참조. 스페인-미국 전쟁: 제국주의 전쟁을 참조. 미국군의 현대화: 미국 해군은 1882년부터 의회로부터 자금을 승인받아 각종 현대식 전함을 건설하였고, 1910년 견습제도를 수립하여 대부분 수병은 외국 용병을 모집하였다. 1890년대에 미 해군은 알프레드 마한의 해군력 전략을 적용하였다.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은 해군력을 세계 전장으로 확대하였고, 전쟁장관 엘리후 루트는 육군을 현대화하였다. 그는 참모총장을 군의 관리자로, 일반참모를 기획자로 하는 체제를 세우고, 육군사관학교를 확장하고 육군대학과 일반 참모부를 창설하였다. 진급 절차를 변경하고, 병과학교를 창설하며, 장교 능력을 개발하기 위하여 참모와 지휘관 사이에 보직을 순환하였다. 브래들리 피스크제독은 함포와 포술의 새로운 사격 통제기술을 개선하였다.

***알프레드 마한(1840-1914)은 컬럼비아대학에서 2년 수학하고 해군사관학교에 편입하여 1859년 졸업하고 해군소위로 임관되었다. 그는 1861년 남북전쟁에 참전하여 전함에서 복무하였고, 1865년 대위로 진급하여 해군대학의 역사와 전술학 교관으로 강의-연구-저술을 하였으며, 1886-89 기간에 학장으로 봉직하고 1896년 퇴역하였다. 남북전쟁에 참전했던 해군 대령들을 1906년 일괄 진급시켜, 마한도 준장이 되었다. 그의 대표적 저술은 해양력이 역사에 미치는 영향(1890)과 해양력이 프랑스혁명과 제국에 미치는 영향(1892)이며, 그의 전략적 통찰력의 영향으로 미국 해군은 전함 건조기술을 발전시키고 건함경쟁을 시작하였다. 당시 최신의 기술혁신은 잠수함 건조였으며 USS 홀란드가 1900년 진수하였다.

마한의 해양력 이론은 해군력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그는 해양력을 지배하는 국가가 세계를 지배할 수 있다고 하였으며, 마한의 사상은 해군력(군사적 측면)과 해상 교통로와 수송능력(경제적 측면)을 포함하는 개념이다. 마한에 의하면 영국이 압도적 해군력이 있었기 때문에 세계의 패권 국가가 될 수 있었고, 반면 프랑스는 육군력에 집중하여 19세기에 식민지를 상실하였다고 보았다. 해양력을 강화하기 위해 마한은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1) 미국은 대양에 나가서 작전 수행이 가능한 대양해군이 필요하다. (2) 미국은 물자와 연료공급의 유연성을 가지기 위하여 해외 해군기지가 필요하다. (3) 미국은 해군력을 신속히 이동시키기 위하여 대서양과 태평양을 연결하는 파나마 운하를 건설해야 한다. (4) 하와이에 식민지가 필요하다. 마한의 사상과 구상은 미국의 군사전략과 정책에 영향을 주었고, 독일과 일본도 유사한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정치 군사적 측면에서 해양력 발전을 평가하고 조율하면서, 마한은 해양력을 발전시키는 데는 좋은 정치나 해군의 지도력이 지리적 위치보다 중요하지 않고; 해양력에 관하여 정치적으로 분석하는 단위는 단일국가보다 여러 국가연합이며; 마한의 경제적 이상은 자급자족보다 자유무역에 있었고; 전략적으로 지리적 영향을 인정하는 것은 성과에 영향을 주는 우발적 힘의 평가로 조율된다고 보았다. 마한은 자국 영해에서 강력한 전함을 집중하는 일반적 원칙으로, 원양에서 전력을 최소화하는 전략을 주장하였다.

TO BE CONTINUED

(e) 유럽국가의 종교와 정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