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문명사 연재 21. 19세기 유럽의 정치와 종교 (Continued 2)
(b) 국민주의와 국가통일 (1850-71)
프랑스 나폴레옹 3세: 루이 보나파르트(재위 1848-73)는 나폴레옹 1세의 조카이며, 스위스군 장교로 복무하면서 정치 경제 사회 분야를 공부하고, 런던 브라질 뉴욕을 여행하였다. 1838년 런던으로 망명하고, 1840년 소수 인원으로 프랑스에 침투하였으나 체포되어 전복 음모로 종신형을 받고 복역 중에 지방의 신문 잡지에 기고하고, 저술 빈곤의 퇴치(1844)를 출간하였다. 1846년 영국으로 탈출하여 프랑스의 정치발전을 지켜보며, 2월혁명으로 수립된 제2공화국에서 1848년 12월 74.2% 지지로 대통령에 선출되었다. 그는 1851년 12월 친위 쿠데타로, 26,000명 반대자를 체포하여 식민지로 축출하거나 여타지역으로 유배를 보내고, 언론 검열을 강화하여 위반하면 벌금을 부과하고 3회의 경고로 발행을 중지시켰다. 1852년 1월 보통선거에서 압도적 다수의 지지로 10년 임기의 대통령에 선출되었고, 국민투표를 통해 12월에 제2 프랑스 제국의 황제 “나폴레옹 3세”가 되었다. 그는 프러시아의 침공으로 1870년 9월부터 1871년 3월까지 포로가 되어 평화협정으로 석방되고 영국으로 망명하여 1873년 1월 병사하였다.
정치체제: 루이 나폴레옹은 자유를 약속하고 여론을 검토하여 선전하면서 경찰력으로 통치하는 권위주의적 독재자로서, 남성 보통선거로 민주주의적 인기에 의해 정권을 유지하였다. 의회는 6년마다 선거를 하였고, 정권(여당)은 1852-69 기간에 승리하였으나, 선거마다 반대표 수가 점차 증가하였다. 1860년대에 자유주의적 양보로 정치적 망명자들이 돌아오면서 언론통제를 약화하고 파업과 공공집회를 허용하였다. 국민의회의 의석을 1/3로 축소하여, 도시 노동자 의석비율을 축소하고 농촌 의석을 확대하였다. 클럽의 결성을 금지하고 논설의 출판은 허가를 받았다. 하원은 매 분기 1회 개원하고 법안을 토의하나 입법권은 없었으며, 법적 훈련을 받은 비선출직 정치 외교 군사의 엘리트(기업 대표 24%, 지주 19%, 상위 관료 26%, 군인 8%, 법조인 13% 등)가 입법과 정책을 지배하였다. 가톨릭교회와의 관계는 실리적 관점에서 공화정 보다 우호적이었다. 1863년 교육부장관 듀레이는 가톨릭이 현대교육에 장애가 된다고 보았다.
경제정책: 나폴레옹 3세는 영국에 후진한 프랑스 경제의 현대화에 초점을 두고 경제성장을 위해 주식시장을 활성화하며 투자은행의 신용을 확대하고, 도로-철도-항만-운하를 건설하며, 기술개발과 교육 훈련을 강조하였다. 국내시장을 개방하여 국제적 경쟁을 통하여 산업이 효율적으로 성장케 하였다. 1852년부터 경제호황으로 정책 대부분이 좋은 성과를 거두었다. 철도는 1851년 3,500Km에서 1870년 20,000Km로 성장하여 항만과 연결하고 연간 1억 명을 수송하였다. 아메리카와 아시아에 해상으로 연결하는 마르세유와 레 하브레 항구를 건설하여 증기선 수를 3배로 증가하고, 1859-69년 수에즈 운하를 건설 개통하였다. 파리시가를 재건축하는 공사를 진행하여 수만 명의 노동자를 고용하며, 위생을 개선하고, 식수를 공급하며, 도시의 교통순환을 원활히 하였다. 1852년 파리에 최초의 백화점 르봉 마르셰가 출현하여 세계 각국 주요 도시에서도 뒤따라 유행하였다.
대외정책: 나폴레옹 3세는 해군과 식민지부를 신설하고, 15척의 증기기관 순양함을 건설하여 병력수송 함대를 편성하였다. (1) 크리미아 전쟁은 1853-56 기간에 러시아가 발칸에 진출하기 위하여 터키령 몰다비아와 왈라키아를 침공하여 터키와 전쟁이 시작되었다. 러시아의 발칸 진출에 위협을 느낀 영국과 프랑스는 러시아에 전쟁을 선포하고 오스트리아는 중립을 취하였다. 러시아는 크리미아를 거점으로 연합군과 싸웠으나 대패하여 20년간 유럽 관계에서 사라졌다. (2) [이탈리아] 프랑스와 피드몬트-사르디니아 왕국이 동맹하여 1859년 오스트리아 군대를 이탈리아에서 축출하는 전쟁에 돌입하였다. 황제가 프랑스군을 이끌고 알프스를 넘어 롬바르디에서 오스트리아군을 축출하고 화평을 하였다. 프랑스군 8,000명이 로마에 주둔하여 교황을 보호하고, 오스트리아군은 베네치아로 퇴각하였다. (3) 뉴칼레도니아(1853-54)를 점령하여 식민지로 1897년까지 22,000명의 범죄자와 정치범을 보냈다. (4) 프랑스 총독은 1854-65년 세네갈강 연안을 따라 일련의 항구와 다카-세인트루이스 간에 철도를 건설하였으며, 도시에 학교 도로 교량 상수도를 만들었다. (5) [중국] 프랑스는 영국과 함께 제2차 아편전쟁(1858-60)에 참전하였다. 1858년 영불 연합함대는 광둥 해안을 포격하고, 북부 발해만 입구에 상륙하여 영국-프랑스-러시아-미국과 함께 천진 조약으로 중국은 6개 항구를 유럽에 개방하고, 기독교 선교를 허용하며, 아편 수입을 합법화하였다. 중국 정부가 조약의 이행에 저항하자, 영불 연합군 8,000명이 프랑스 장군의 지휘하에 1860년 봄 천진에 상륙하고 가을에 베이징에 입성하여 10월에 제2 천진조약을 체결하였다. 중국은 유럽과의 무역을 위해 추가적 11개 항구를 개방하고 유럽인의 치외법권을 허용하며, 베이징에 유럽국가의 대사관을 개설하였다.
(6) [조선] 1866년 프랑스 신부가 설립한 조선의 천주교회에 고종은 칙령을 선포하여 선교사 12명 중 9명과 함께 국내 천주교도 8천 명을 처형하였다. 살아남은 리델 신부가 중국으로 탈출하여 프랑스 대사관에 박해 소식을 전하고 (병인양요) 그해 11월 로즈 제독이 지휘하는 프랑스 함대 7척이 강화도를 점령하여 신부 살해에 대한 처벌과 통상조약을 요구하였으나, 조선의 무력대응으로 40 여일 만에 퇴각하였다. (7) [일본] 1867년 프랑스 군사 사절단이 일본에 도착하여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 군대의 현대화에 기여하였다. 프랑스의 레오니 버니는 현대식 조선소를 설계하여 오늘날 요코스카 해군기지가 되었다. (8 ) [베트남] 가톨릭 선교사 살해를 응징하고 프랑스 군대의 주둔을 강요하기 위해 1858년 베트남 전쟁을 개시하고 다낭과 사이공을 점령하였다. 프랑스가 대대적으로 침공하여 1862년 뜨득 황제는 항복하고 사이공 조약으로 3개 성 할양, 전쟁배상금 지불, 프랑스 전함의 메콩강 자유 항해, 기독교 포교 특권, 3개 항구의 무역 개방, 프랑스 승인하에 베트남 외교 등에 합의하였다. 프랑스는 타이와 미얀마를 제외한 인도차이나반도를 식민지로 만들었다.
(9) [멕시코] 공화국은 혁명과 내전으로 경제가 악화하여 외채상환이 중지되자, 프랑스는 영국 스페인과 함께 1861년 베라크루스항을 봉쇄하고 멕시코정부에 채무상환을 압박하였다. 영국과 스페인은 협상으로 합의하여 철수하였으나, 프랑스는 내륙으로 진출하여 멕시코시티를 점령하고 1864년 막시밀리안을 황제로 하여 멕시코 제국을 수립하였다. 그러나 멕시코군의 거센 저항과 먼로주의에 입각한 미국의 지원, 그리고 1866년 프러시아가 오스트리아에 승리한 여파를 예상하여 프랑스군은 퇴각하였다. (10) [알제리]는 1830년 필리프가 식민지를 수립하여 1852년에 전 지역에서 식민지 통치가 이루어졌고, 수십만의 유럽 이민자 절반이 프랑스인이었다. 1860년경 유럽 인구의 증가로 새로운 이민이 급증하였으며, 식민지를 군사정권으로 개편하여 개혁을 시도하였으나, 1864년 아랍인의 반란으로 방해를 받아 85,000 병력으로 진압하였다. 1865년 종교를 포기하는 조건으로 아랍인에게 시민권 요청을 허용하였으나 부정적 효과를 가져왔다.
이탈리아의 통일: 전술한 바와 같이 이탈리아는 1814년 카르보나리당이 혁명운동을 조직하여 1820-21년 양 시칠리아 왕국과 피드몬트에 반란이 일어나고, 1830-31년 교황령을 포함하여 반도 여러 지역에서 반란이 일어나 오스트리아군이 진압하였다. 1848년 시칠리아 반란은 롬바르디-베네치아 지역에 폭동을 유발하여 오스트리아군과 전투를 하였으나 제1차 독립전쟁은 실패하였다. 자유주의와 국민주의의 세력이 이탈리아 통일을 성취하기 위하여 꾸준히 노력해 왔지만, 오스트리아군이 이를 진압하였다.
피드몬트-사르데냐 왕국의 빅토르 임마누엘 2세(재위 1849-78)가 왕위를 계승하여 1852년 카밀로 데 카보를 수상에 임명하였다. 그는 경제정책으로 도로 운하 철도를 건설하고, 신용을 확대하여 새로운 산업에 투자를 촉진하고 기업을 지원하였다. 경제가 발전하고 세입이 증가하여 왕국은 군대를 무장하고, 1856년 크리미아 전쟁에서 영국과 프랑스의 동맹으로 싸웠다. 제2차 이탈리아 독립전쟁으로, 1858년 카보 수상은 나폴레옹 3세와 동맹하여 이탈리아반도에서 오스트리아 군대를 축출하기로 합의하였다. 카보는 오스트리아를 자극하여 1859년 4월 전쟁을 시작하고, 오스트리아군이 피드몬트 수도에 입성하기 전에 프랑스군이 증원되어 오스트리아군을 격퇴하였다. 협상을 통하여 오스트리아군은 롬바르디를 피드몬트에 양도하고 베네치아로 퇴각하였다. 프랑스는 약속대로 1860년 사부아와 니스를 취득하고, 이탈리아반도에서 영향력을 확대하였다.
1860년 이탈리아반도는 피드몬트-사르데냐 왕국, 교황령(로마), 양 시칠리아 왕국, 베네치아(오스트리아 지배)의 네 세력이 있었다. 주세페 가리발디(1807-82)는 마치니의 영향으로 카르보나리당에 가입하고 1834년 피드몬트 반란에 가담하여 사형선고를 받고 브라질로 망명하였으며, 남아메리카에서 1836-48 기간에 게릴라 전쟁을 경험하고 이탈리아에 돌아와 1848-49년 혁명투쟁에 이를 활용하였다. 그는 1860년 5월 천명의 빨간 셔츠 자원부대와 함께 시칠리아 동부에 상륙하여 3일 만에 세력이 4,000명으로 증강되어 메시나를 공격하고 시칠리아를 정복한 후, 해협을 건너 기차로 나폴리에 입성하고, 환대를 받으며 9월에 양 시칠리아 왕국을 접수하였다. 임마누엘 2세가 군대와 함께 로마를 거쳐 나폴리로 남진하자, 가리발디는 내전을 피하여 지휘권을 그에게 인계하고 자신의 농장으로 은퇴하였다. 이탈리아는 통합되었고(베네치아 제외), 1861년 3월 의회는 임마누엘을 왕으로 선출하고 로마를 수도로 선언하였다. 1866년 오스트리아-프러시아 전쟁으로, 베네치아 주둔한 오스트리아군이 철수하였고, 프랑스는 로마에 주둔한 경비병을 철수하여 이탈리아는 통일을 이루었다.
독일의 통일: 비엔나 체제에서 독일연방은 신성로마제국을 계승하여, 독일어를 사용하는 39개의 군소 국가로 형성된 느슨한 연방으로 오스트리아와 프러시아가 경쟁하였다. 1848-49년 독일혁명은 프랑크푸르트 의회가 제정한 자유주의 헌법으로 통일된 국가를 건설하려 시도하였으나 황제가 거부하여 실패하였다. 크리미아 전쟁(1853-56)과 이탈리아 전쟁(1859)은 영국, 프랑스, 오스트리아, 러시아의 국제관계를 흔들어, 프러시아는 1857년 헬무트 본 몰트케를 참모총장에, 1859년 알베르트 폰 룬을 전쟁장관에 임명하여 군대를 개편 개혁하고 국방전략을 재수립하였다. 빌헬름 1세(1861-88)가 왕위를 계승하여 오토 폰 비스마르크(1815-98)를 수상 겸 외무장관에 임명하였다. 그는 베를린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하고 프랑크푸르트 의회에 프러시아 대표, 러시아 대사, 프랑스 대사를 역임하고, 군비를 확장하여 외교가 군사력으로 지원되는 철혈정책을 추구하였다.
덴마크와의 전쟁(1864): 1863년 덴마크 정부는 슐레스비히 공국과 홀스타인 공국을 병합하였다. 프러시아와 오스트리아는 두 공국에 대해 독일 연방의 영유권을 주장하며, 덴마크가 그들의 영유권을 포기하고 슐레스비히에 주둔하고 있는 덴마크 군대의 철수를 주장하였다. 덴마크는 노르웨이와 스웨덴의 소수 병력을 지원받았으나 열세하여 독일이 승리하고, 프러시아는 슐레스비히를 오스트리아는 홀슈타인을 지배하였다.
오스트리아-프러시아 전쟁(1866): 비스마르크는 독일통일을 위해 오스트리아를 배제하는 소 독일주의를 추구하고, 오스트리아는 대 독일주의를 지향하여 독일 연방 내의 주도권 전쟁이 불가피하였다. 메테르니히는 비엔나 체제를 주도한 보수주의자로 유럽의 자유주의와 민족주의 운동에 구체제가 붕괴할까 두려워 무력으로 간섭하였다. 오스트리아와 전쟁을 위해 1866년 4월 이탈리아 주재 프러시아 대표는 프러시아가 오스트리아와 전쟁을 시작하면 서로 지원할 것을 약속하였다. 러시아는 이 전쟁에서 중립을 취하고, 프랑스는 멕시코에 집중하여 여력이 없어 중립을 유지하였다. 결국, 오스트리아가 패하여 프러시아는 북독일 연방을 결성하고, 이탈리아는 베네치아를 합병하며, 오스트리아는 독일 연방으로부터 분리되어 주도권을 상실하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으로 바뀌었다.
프랑스-프러시아 전쟁(1870–71): 프러시아의 비스마르크는 오스트리아와 전쟁에서 승리한 후, 독일 연방 내의 독립국들을 통합하기 위하여 (유럽에서 지배적 위치를 유지하려는) 프랑스를 자극하여 전쟁을 선포하도록 유도하자, 프랑스는 1870년 7월 전쟁을 선포하고 프러시아를 침공하였다. 프러시아의 군사력은 병력, 훈련, 군사 지도력에서 프랑스보다 우세하고, 현대기술 특히 철도와 포병을 전쟁에 효과적으로 이용하였다. 프랑스는 동부전선(메츠와 세단 전투)에서 패하고 나폴레옹 3세는 포로가 되었다. 프러시아는 프랑스의 국가방위 임시정부(공화정)와 협상으로 1871년 1월 18일 전쟁을 끝내고 파리에 입성하여 베르사유궁에서 독일제국을 선포하고 빌헬름 1세가 초대 황제가 되었다. 5월 10일 프랑크푸르트 조약으로, 프랑스는 50억 프랑의 전쟁배상금을 약속하고 알자스-로렌 지방을 독일제국에 양도하였다. 이로 인하여 독일에 대한 적개심이 제1차 및 2차 세계대전에까지 연장되었다. 반면 프러시아의 승리는 독일제국의 군사적 우위에 대한 확신과 함께 유럽의 세력균형에 1945년까지 영향을 주었다.
러시아 제국 1850 이후: 알렉산더 2세(재위 1855-81)는 크리미아 전쟁 중에 37세로 부친을 계승하여 러시아 황제로서 피터대제 이래 가장 도전적인 개혁을 추진하였으며 무정부주의자들의 폭탄테러로 사망하였다.
알렉산더 2세의 개혁정책: [농노해방] 러시아는 농노제를 강하게 유지하였으나 산업혁명이 시작되면서 농노들은 임금노동자보다 생산성이 낮고, 농번기에는 공장을 떠나 농촌으로 돌아가기 때문에 공업 성장이 지체되어, 기업가들은 농노를 해방하여 임금노동자를 보충하도록 정부에 요청하였다. 생산성 저하뿐만 아니라, 급증하는 노동 수요와 과격한 농민반란으로 지주와 관리들이 살해당하고 농업이 위기를 맞이하여 지주계급이 붕괴하였다. 크리미아 전쟁의 패전은 러시아의 사회체제가 유럽보다 후진한 농노제도 때문이며, 농노제도는 비인간적이며 야만적이라는 여론이 일어났다. 황제는 1861년 봉건제도를 폐지하여 2,300 만의 농노를 지주로부터 해방하고 농토를 재분배하였다. [지방통치제도(젬스트보)] 러시아는 지방 자치기관의 난립으로 행정제도가 효율성을 상실하여, 지방통치를 관료와 귀족에게 더 오래 위임할 수가 없었다. 1864년 황제는 지방자치법을 제정하여, 각 주와 군에 젬스트보(지방의회)를 설립하여, 지주 도시민 농민의 3개 계층이 공동체로 임기 3년 의원을 선출하고, 이들이 집행기관을 구성하는 제도로서 각 지역 주지사의 통제를 받았다.
[사법개혁] 사법제도가 불공정하여 서유럽의 모델, 주로 프랑스의 사법제도를 따랐으며, 다른 나라의 제도들도 받아들였다. 1864년 제국 정부는 만인이 평등하다는 원칙으로 신분제도를 철폐하고, 사법부를 행정부에서 분리 독립시켜, 원로원 중심으로 단일기구로 개편하였다. 재판관의 해임을 금지하고 판사의 독립성을 보장하였다. [교육개혁] 1864년 초등학교에 관한 법령을 선포하여 초등학교를 설립하고 기본교육을 확대하며. 학생 수 증가로 사범학교를 설립해 교사를 양성하였다. 중등교육 과정은 고전 중학교(8년제)와 실업학교(6년제)로 구분하였다. 1871년 모스크바 등 12개 제국대학에 1,541명이 수학하였다. [군사제도] 크리미아 전쟁의 패인은 인접 국가와 적대적 관계, 병력 동원 및 수송능력 부족, 장교의 부족, 봉건제도와 농노의 존속, 군사기술의 후진에 있었다. 농노제도를 폐지하고, 1874년부터 각 계층에서 병력을 징집하며, 전국을 15개의 군관구로 편성하고, 예비군을 유지하며, 지역별 특수성을 고려하여 작전을 수행하였다. 전략철도를 건설하고, 장교단의 군사교육을 강화하며, 육군유년학교를 설립하여 모든 계층에게 입학을 허용하였다.
러시아의 외교정책: 크리미아 전쟁에서 오스트리아는 영국-프랑스 동맹에 대해 러시아에 중립을 유지하여, 프랑스-오스트리아 전쟁(1859)에서 러시아가 중립을 취하고, 오스트리아는 프랑스에 패하여 이탈리아 지역에서 영향력을 상실하였다. 오스트리아-프러시아 전쟁(1866)에서 오스트리아는 패하여 독일 연방 내에서 영향력을 상실하였다. 미국 남북전쟁(1861-65)에서 러시아는 (영국에 적대하여) 북부 연합군을 지원하고, 러시아의 발트 함대와 태평양 함대는 각각 뉴욕과 샌프란시스코에 입항하여 겨울을 보냈다. 나폴레옹 3세는 영국을 지원하기 위해 1856-71 기간에 러시아에 적대적 정책을 취하였으나, 프랑스-프러시아 전쟁(1870-71)에서 독일에 패하여 프랑스는 알자스-로렌 지역을 독일에 빼앗겨, 러시아에 우호적으로 접근하였다. (1) 러시아-터키 전쟁 (1877-78)은 영국과 프랑스의 지원으로 러시아가 승리하여, 산스테파노 조약으로 크리미아 전쟁에서 상실했던 흑해 해군력을 회복하고, 오토만 터키가 지배하던 루마니아, 세르비아, 몬테네그로의 독립과 불가리아의 자치권을 인정하였다. 베를린 회의(1878)는 비스마르크의 주재로 6개 강국(러시아, 영국, 프랑스, 오스트리아-헝가리, 이탈리아, 독일)이 참가하여 산스테파노 조약에 다음을 추가하였다. 불가리아 공국은 영토가 대거 축소되고 오토만은 루멜리아와 마케도니아를 회복한다; 러시아는 터키로부터 할양받은 영토 일부를 반환한다; 오스트리아가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의 관할권을 갖는다; 영국은 오토만으로부터 키프로스의 관할권을 받는다.
(2) 코칸드, 현대 키르기스스탄은 1709년 부하라에서 독립하여 1774-98년 청나라에 조공을 바치는 보호국으로 1822-42년 영토를 크게 확장하였다. 러시아의 이 지역 침투를 방지하기 위하여 1841년 영국은 코놀리 대위를 현지로 보냈으나 체포되고, 이를 구출하기 위하여 1842년 스코다트 대령을 보냈으나 모두 처형되었다. 향후 20년간 내전으로 정권이 약화하자 1868년 러시아가 타슈켄트와 쿠잔드를 함락하고 종속국으로 만들었다. 한편, 1878-79년 영국은 아프가니스탄을 보호국으로 만들었다.
(3) 폴란드의 반란(1863-64): 폴란드는 프러시아, 오스트리아, 러시아에 의하여 1772, 1793, 1795년 3회에 걸쳐 분할되었고 제3차 분할에서 러시아는 리투아니아 영토를 얻었다. 1830년 11월 폴란드 육사 청년 장교들이 바르샤바에서 반란으로 일어나 러시아-폴란드 전쟁으로 발전하였다. 반란세력은 입헌왕국을 세우고 7만 병력을 동원하여 러시아군 18만 명과 대적하였으나 진압되었다. 30년 후인 1861년 리투아니아에서 애국시위가 발전하여 러시아 제국군대와 충돌하자, 알렉산더 2세는 계엄령을 선포하였다. 1863년 1월 폴란드-리투아니아의 농민-노동자-신부가 연합하여 적색당을, 자유주의 지주와 지식인들이 백색당을 조직하고 연합하여 바르샤바에 지하정부를 수립하고, 러시아 정규군 30만에 대항하는 게릴라전을 전개하여, 650회의 전투에서 25,000 폴란드군이 사망하였다. 반란이 실패하여 396명이 처형되고 근 2만 명이 시베리아로 유배되었으며, 수만 명이 투옥되거나 탄광노역을 하고, 여러 지방으로 강제 이주하였다.
영국 빅토리아 시대 (1837-1901): 빅토리아는 18세에 왕위를 계승하여 63년 7개월간 대영제국을 통치하고 하노버 왕가를 마감하였다. 빅토리아 시대는 정치적으로 개혁법(1832)을 통과시켜 선거구를 현실적으로 조정하고, 종교적으로 비순응교회(감리교나 복음교회 등)에 의하여 고도의 도덕적 기준을 요구하는 종교 운동이 있었고, 이념적으로 조지아 시대의 합리주의에 저항하여 (종교, 예술, 사회적 가치에서) 낭만주의나 신비주의를 지향하였다. 과학 기술의 발전과 의학과 병리학의 발전은 국력을 신장하여 번영을 가져왔다. 영국의 인구는 1851-1901 기간에 근 2배로 증가하였으나, 아일랜드는 흉년과 이민으로 감소하였다. 영국은 아시아와 아프리카에서 제국주의 식민지를 확장하고 오스트레일리아, 캐나다, 뉴질랜드에 자치권을 부여하며, 미국과 전쟁을 피하고, 크리미아 전쟁 이후에 강대국들의 전쟁에 개입하지 않았다. 국내정치에서 휘그당(자유주의)과 토리당(보수주의)이 경쟁하였고, 새로이 노동당이 등장하였다.
파머스톤(1784-1865)은 휘그당의 자유주의 정치인으로 1830-51 기간에 외무장관, 1855-65 기간에 (새로 형성된 자유당으로) 수상을 역임하였다. 국가는 영구적 동맹이 없으며 영구적 이익만 있다고 말하여 국민(민족)주의를 상징하였다. 그는 1830-31년 런던회의에서 벨기에 독립을 유도하고, 1855년 크리미아 전쟁에서 터키를 지원하여 러시아를 견제하며, 의회가 인도 정부 법안을 통과시키도록 하여 동인도회사를 국유화하였다. 1860년 영불 연합군이 베이징으로 진격하여 남경조약(1842)에 명시한 자유무역을 중국에 요구하였다. 미국 남북전쟁 기간에 중립을 지켰으나, 영국 조선소는 남부군에 선박을 공급하였다. 북부 해군이 영국 우편 수송선에 탑승한 영국 외교관 2명을 체포하여 항의하자 수 주 후에 그들을 석방하여 사건을 종료하였다. 슐레스비히-홀스타인의 영유권 전쟁에서 영국은 덴마크를 지원하였으나, 프러시아가 덴마크를 침공할 때에 전쟁에 불개입하였다.
개혁법(1867): 1866년 영국 보수당이 집권하여 더비와 디즈레일리가 내각을 이끌었다. 1867년 의회는 개혁법을 제정하여 하원 선거를 위한 투표권을 확대하여, 도시 선거구에서는 매년 재산세나 임대료를 10파운드 이상을 지불하는 사람과, 농촌 선거구에서는 토지소득 5파운드 이상 또는 임대료 12파운드 이상을 지불하는 사람에게 선거권을 부여하여 유권자 수가 100만에서 200만으로 증가하고, 인구 1만에 1명의 대의원을 의회에 보내 선거구가 조정되고 의원 수가 증가하였다.
글래드스턴 제1차 내각(1868-74): (1) 아일랜드 농토의 지주는 대부분 영국에 거주하고, 소작인과의 임차계약에서 특정 소득 조건으로 보상 없이 소작권을 상실하여, 소작인이 토양을 개선하려는 동기가 없어 생산성이 하락하였다. 아일랜드 토지법(1870)은 퇴거 소작농에게 토지개량에 대한 보상을 지급하였다. 1869년 아일랜드는 국가교회를 폐지하여 성공회로부터 가톨릭교회를 해방하였다. (2) 교육법(1870)은 초등교육을 최소비용으로 모두가 받을 수 있게 하였고, 1880년에 의무교육으로 전환하였다. 대학 시험법(1871)을 제정하여 학생들이 종교적 시험으로부터 해방되었다. 위원회 명령(1870)으로 공무원은 공개경쟁으로 채용하였다. 육군 징집법(1870)은 12년의 군 복무를 6년은 현역, 6년은 예비역으로 하였다. 재판법(1873)은 영국 사법체계를 일원화-단순화하였고, 투표법(1872)은 최초로 비밀투표를 보장하여 투표권을 뇌물로 매수할 수 없게 하였다. (3) 알코올음료의 판매에 면허제를 도입하고 소비를 제한하려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앨라배마 청구(1869)는 미국 내전 시 영국 조선소가 남부군에 지원한 선박으로부터 북부군이 받은 피해에 대해, 미국 정부가 영국에 손해배상을 청구하였고, 영국 정부는 총 $1,550만을 미국 정부에 지불하였다.
미국의 내전과 재통합: 노예노동: 1815-61년 미국의 북부는 산업화를 추구하여 도로 항만 철도 운하 증기기관 등의 교통 인프라에 투자하고, 은행과 보험 등 금융산업과 광범위한 저비용 통신망을 구축하며, 전신과 함께 신문 잡지 서적이 널리 가용하였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남부 경제는 대농장에 기초하여 노예 노동력으로 면화와 같은 상업용 작물을 재배하였다. 1860년경 북부에서는 84%의 투자가 제조업에 이루어졌으나 남부에서는 노예 매입금액이 토지개량 투자금액보다 많았다. 남북전쟁 직전에 남부 백인의 개인당 부(富)는 북부보다 2배가 많았고, 미국 최대 갑부의 60%가 남부에 살았다. 1810-60 기간에 면화 생산량과 매출액은 모두 근 25배로 증가하고, 생산의 93%가 노예노동에 의존하였다. 1808년 노예 수입을 금지하였으나, 노예는 같은 기간에 백만에서 4백만으로 증가했다.
남북전쟁은 노예제도를 지지하던 남부 7개 주가 남부연합을 결성하여 미합중국과 결별을 선언한 뒤, 사우스캐롤라이나 찰스턴의 섬터 요새 포격으로 시작하여 1861-65년 전쟁에서 북부군이 승리하고, 미국 전역에서 노예제도를 폐지하였다. 남북전쟁의 요인으로 노예제도 이외에도 (1) 남부와 북부의 경제, 사회구조, 관습, 정치적 가치가 상이하였다. (2) 북부는 제조업 중심으로 도시화 되어 보호무역주의 정책이 필요하였으나, 남부는 농장 중심의 농업사회로 자유무역을 추구하였다. (3) 남부에서는 각 주가 연합에 자유로 가입-탈퇴가 가능하였으나, 북부는 이를 거부하였다.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1861-65)은 1863년 11월 게티즈버그에서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부는 지구상에서 절대 멸망하지 않는다”라는 유명한 연설을 하여 북부군의 사기를 북돋웠다. 남북전쟁은 미국 역사상 가장 참혹한 전쟁으로 군인 36만 명 이상이 사망하고 무수한 부상자가 발생하였다. 다양한 군사 장비를 사용하였고, 총력전과 참호전은 제1차 세계대전에 적용되었다. 이 전쟁으로 연방정부의 역할이 강화되었다.
캐나다의 건국: 16~17세기에 영국과 프랑스는 어업과 모피 무역을 위해 캐나다에 정착촌을 세웠다. 7년 전쟁으로 영국은 케이프 브레톤을 제외한 대서양 연안 노바스코샤 지역을 장악하였다. 미국 독립전쟁으로 영국령 북미는 뉴파운드랜드, 노바스코샤, 프린스 에드워드 섬, 퀘벡으로 줄어들었으나, 영국은 1848년 브리티시 컬럼비아와 1849년 밴쿠버를 식민지로 만들었다. 1867년 영국 하원에서 대영 북아메리카 조약이 통과되어 영국령 북미의 4 식민지(온타리오, 퀘벡, 뉴브런즈윅, 노바스코샤)는 연합의 형태로 캐나다 자치령이 되었다. 1867년 여타 영국령 북미 식민지는 캐나다 동맹으로 합류되거나 편입되어 1880년까지 유지되었다. 서부 캐나다의 정착과 발전에 대륙을 횡단하는 태평양 철도 건설이 크게 공헌하였다. 캐나다는 1881-85년 기간에 동부 캐나다와 브리티시 컬럼비아 사이에 약 20,100Km의 철로를 건설하여 미국철도망에 연결하였다. 철도 건설을 위해 중국에서 이주해온 노동자 15,000여 명이 작업에 투입되었다.
일본의 개방: 일본인들은 16세기에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선교사들로부터 유럽의 문물을 전달받았고, 수천 명이 기독교를 받아들이고, 동인도와 유럽까지 여행하여 유럽을 알게 되었다. 1603년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에도에 본부를 두고 강력한 막부를 수립하여 1867년까지 권력을 유지하였다. 이들은 1640년 모든 유럽인을 축출하고 소수의 네덜란드 상인을 나가사키에 체재시켜 유럽의 창구가 되었다. 점차 사무라이는 평민들과 구별되는 이름뿐이고 모두 가난하였다. 에도(도쿄)는 1800년경 인구 백만의 도시로, 사무라이 신분은 매수할 수 있어 사회 계층의 벽이 무너지고, 불교는 기울어 세속화되며, 일본 재래의 신토 신앙이 회생하였다. 서구의 사상이 나가사키를 통해 들어오고, 소수가 네덜란드어를 배우며, 기독교 서적을 제외한 의학과 과학 서적을 수입하였다. 1745년 네덜란드-일본어 사전이 완성되고 시계, 안경, 벨벳, 모직, 망원경, 기압계를 수입하였다.
가난한 귀족은 새로운 출구를 찾아 군인이나 관료로 들어가고, 상인들은 서방과 무역을 원하며, 학자들은 서구 과학과 의학을 배우려 하고, 애국자들은 서구의 총포에 무방비가 되는 일본을 두려워하여, 새로운 개념을 받아들이려는 국민적 주장이 일어났다. 1853년 매튜 페리 제독이 4척의 전함으로 도쿄항에 입항하여 미국과의 자유무역을 요구하였다. 거대한 미국의 군함은 일본인들을 놀라게 하였고, 1854년 가나가와 조약으로 일본은 2개 항구를 미국에 개방하고, 1860년 수 개의 항구를 추가 개방하여 치외법권을 부여하는 자유무역을 허용하였다. 일본은 국력의 약세로 불평등 조약을 체결하였음을 인지하였다. 이러한 정치, 경제, 사회적 변화 속에서 마지막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의 정치력이 무력화되어, 1867년 사임하고 에도시대의 군사정권을 종식하였다. 왕권의 회복은 1868년 1월 3일 황실의 수도인 교토에서 쿠데타에 의하여 군사정권 축출을 공시하고, 국가의 통치권은 젊은 천왕이 직접 통제하여, 45년간의 메이지 시대(재위 1868-1912)를 열고 일본을 근대화하였다. 요시노부의 잔여세력이 저항하였으나 1869년에 천왕의 군대에 항복하여 내전은 종식되었다.
TO BE CONTINUED
(c) 국가 권력의 성장과 제국주의 (1871-1914)
제국주의의 국가별 분석
(d) 유럽 제국의 군대와 전쟁 (1815-1914)
(e) 유럽국가의 종교와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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