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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문명사 연재 21. 19세기 유럽의 정치와 종교/PhD. Hugo W. Kim

양곡(陽谷) 2023. 8. 18. 23:21

세계문명사 연재 21. 19세기 유럽의 정치와 종교
사진은 본인의 저술: 국민국가의 건설과 산업화 (1815-1914)

나폴레옹 몰락 이후 유럽은 구질서로 복귀하려는 반동세력과 새로운 혁명세력 간의 대립, 국민주의의 부상과 통일국가의 건설, 국민주의와 산업혁명이 결합한 제국주의의 발흥, 그리고 산업화로 인한 빈부격차와 마르크스주의의 선동이 역사의 중심에 있었다. 유럽의 콘서트는 강대국들이 세력균형으로 국경을 유지하려는 일반적 합의로서, 비엔나 체제는 유럽이 구질서로 회귀하여 평화와 안정을 유지하려는 복고주의적 합의였으나, 자유주의 혁명과 민족주의 통일로 국제적 세력균형이 개편되었다. 본 연재는 (a) 비엔나 체제의 반동과 혁명(1815-50) (b) 국민주의와 국가통일(1850-71) (c) 국력 신장과 제국주의(1871-1914) (d) 유럽 제국의 군대와 전쟁 (e) 유럽국가의 종교와 정치 순으로 기술한다.

(a) 비엔나 체제의 반동과 혁명 (1815-50)

유럽 콘서트는 프랑스혁명 이전의 보수적 질서로 복귀하려는 반동적 이념에 기초하였다. 제2 파리조약에 의해 프랑스는 7억 프랑의 전쟁배상금을 완불하여, 1818년 전승국 주둔병력 15만이 프랑스로부터 철수하였다. 비엔나 의회는 4국 동맹이 프랑스 점령을 종료하고 프랑스를 동맹에 포함하여 5국 동맹(영국, 오스트리아, 프러시아, 러시아, 프랑스)으로 전환할 것을 합의하였다. 1820년 의회는 오스트리아가 나폴리왕국의 자유주의적 반란을 진압하는 데 동의하고 다음 해 러시아, 프러시아, 오스트리아가 회합하여 오스트리아의 나폴리 침공과 점령을 논의하였다. 1822년 러시아, 프러시아, 오스트리아는 프랑스가 스페인 반란을 진압하는 데 동의하였고 영국은 이에 반대하였다. 또한, 터키에 저항하는 그리스의 반란을 지원하는 러시아가 발칸에 개입하는 것에 대해 영국과 오스트리아가 반대하였다. 비엔나 체제에서 메테르니히가 설계한 (자유주의 폭동을 제압하는) 군사적 개입원칙을 영국이 거부하였고, 유럽 전역에 혁명의 물결이 넘쳐흘러 보수적 질서가 무너지기 시작하였다. 바꿔 말하면, 1815년 비엔나 체제는 프랑스혁명 이전의 보수적 왕정으로 복귀하려는 반동적 이념에 기초하였으나, 프랑스혁명이 유럽 전역에 자유주의(Liberalism) 정신을 퍼트렸고, 나폴레옹 전쟁이 프러시아나 오스트리아 등 정복된 나라에 국민주의(Nationalism)를 일깨웠으며, 산업혁명으로 발생하는 빈부격차는 경쟁보다 협력을 추구하는 이상적 사회주의(Socialism)를 잉태하여, 현실적으로 유럽은 구질서로 회귀할 수가 없었다. 1815-1830 기간 유럽이 보수적 질서에 있었다면 1830-50 기간은 개혁과 혁명의 시대였다.

영국의 반동과 개혁: 영국은 1815-16년 흉년으로 농민들이 궁핍해졌고, 공업 도시에서 수천의 실업자가 발생하고 수백의 기업이 파산하였다. 전쟁으로 국가부채가 증가하여 무거운 세금이 부과되고, 국가 전체가 극도의 빈곤으로 불만이 가득하였다. 정부와 집권당(토리)은 어떤 개혁의 수단이 없이 구태의연한 법 집행으로 대처하였다. 러다이트 운동은 1811-16 기간에 영국 노동자들이 (실업을 가져오는) 노동 절약기술의 발전에 반대하여 섬유기계를 파괴하는 지역적 폭동이었다. 의회는 1815년 곡물법을 제정하여 수입 곡물에 관세를 부과하고 가격 인상으로 노동자들이 생계가 어려워 폭동의 기미가 보이자, 정부는 집회와 보도를 엄격히 통제하였다. 1819년 맨체스터의 섬유노동자들이 수개월 파업을 계속하며 곡물법 철폐와 의회의 개혁을 요구하였다. 거대한 군중이 집결하자 위협을 느낀 지방 장관은 군대가 이를 해산시키도록 명하여 11명 사망과 근 500명의 부상을 초래하였다 (이를 피털루 학살이라 불렀다). 정부는 6개의 법령을 제정하여 급진적 개혁을 위한 집회를 억압하였다.

영국의회는 1830년 선거에서 휘그당이 다수로 권력을 장악하였고, 프랑스의 7월 혁명의 여파로 정치적 변화를 촉진하였다. 휘그당은 혁명보다 개혁이 우선한다는 생각으로 (1) 1832년 개혁법을 제정하여 선거구를 현실적으로 조정하였다. 이 법은 56개 타락 선거구를 없애고 42개 선거구를 신흥 공업지역에 신설하였다. 선거자격은 매년 10파운드 이상 임대소득자로 불변하였으나, 유권자 수는 478,000에서 814,000으로 증가하였다. 이 개혁법은 중상층, 자본가, 제조업자, 교육받은 엘리트가 투표권을 얻어 지배계급인 토지귀족의 이익에 접근하였으나, 재산이 없는 기능공과 노동자들은 아직도 투표권이 없었다. (2) 1834 빈민구제법은 극빈자와 실업자에게 도움을 주려는 의도였으나 게으름을 장려하고 수만의 빈민이 증가하여 실효가 없었다. (3) 1838년 결성한 반 곡물법동맹은 자유무역을 요구하여 계속적 투쟁으로 1848년 곡물법은 폐지되었다. (4) 차티스트 운동(1938-48)은 남성 보통선거권, 대등한 선거구, 투표용지에 의한 투표, 매년 하원의원 선거, 하원의원 급여지급, 투표권의 재산에 의한 제한철폐 등 6개의 인민헌장을 내걸고 정치운동을 전개하였으나, 지도자 간의 분열, 사상의 불일치, 정부의 탄압으로 실패하였다.

프랑스의 개혁과 혁명: 프랑스는 부르봉의 복원 이후에도 중앙집권의 행정제도가 바뀌지 아니하고, 80개 주가 같은 행정구조로 파리에서 임명한 감독관에 의해 엄격히 통제되었다. 혁명에서 가톨릭교회의 토지와 건물은 몰수 매각되었고, 주교는 조정된 교구를 통치하고, 성직자들은 정부의 급여를 받았다. 교육은 중앙에서 통제하고 새로운 기술대학들이 파리에 문을 열었다. 귀족들은 망명에서 돌아와 이전의 토지를 회복하였으나 봉건제도는 사라지고 새로운 직업주의로 능력자가 최고의 직업을 가지고, 반교회주의 정서가 더욱 강해졌다. 대다수 인구는 시골 농부나 도시 노동자였고, 기계나 기술이 없어 산업화 속도가 느렸으며, 군대나 외교에서는 자긍심을 가지는 국민주의가 출현하였다. 루이 18세(재위 1814-24)는 왕정을 복원하였으나 평등의 원칙을 인정하는 나폴레옹 법을 받아들이고, 혁명 당시 매입한 토지재산권을 보장하였다. 찰스 10세(1824-30)는 반동주의 정책을 취하여, 입헌 군주주의자들이 의회를 장악하자 이를 해산하여, 민중에 의한 7월 혁명을 자초하고 영국으로 망명하였으며, 루이 필리프(1830-48)가 중산층에 의하여 왕으로 추대되었다.

필리프는 주로 교육받은 엘리트에 의해 주도되는 완만한 자유주의 국가의 통치자가 되었다. 1830년대와 1840년대에 프랑스는 제조업이 팽창하여 도시지역에 산업 노동자들이 집중되었고, 참혹한 작업환경과 생활여건 및 실업에서 오는 주기적 경제위기는 노동자들의 산발적 폭동을 유발하였다. 정부는 폭동을 군대로 진압하였고, 급진주의자들과 연합하는 자유주의자들의 저항을 억압하고 언론검열을 강화하였다. 1840년대에 프랑스는 산업발전으로 부유한 제조업자와 은행가가 경제를 지배하였고, 투표자격은 재산으로 제한하여 부유한 자본가 계층만이 투표하고, 중산층과 노동자들은 투표권이 없어 정치로부터 소외되었다. 필리프도 점점 왕정주의와 보수주의로 변모하여 의회주의에 반대하자, 자유주의자들은 그에게 등을 돌렸으며, 실망한 대중은 (1832년 영국에서처럼) 보다 급진적 개혁 운동을 전개하였다. 1846년 농업의 흉작과 제조업의 불황은 하위 중산층, 노동자, 농민에게 심각한 타격을 주었고 1847년 말 1/3의 파리 노동자들이 실업자가 되었다. 부정사건, 뇌물, 부패가 판을 치는 가운데 정부가 투표권 확대요구를 계속 거절하자, 투표권이 없는 중산층과 노동자 계층이 분노하였고, 대책 없는 필리프정부에 대해 중상층 시민들도 불만으로 동조하여, 1848년 2월혁명으로 7월에 왕정을 끝내고 제2공화국을 수립하였다.

벨기에의 반란과 독립: 비엔나 의회는 네덜란드 연합왕국(1815-39)을 입헌군주제로 승인하여 북부의 네덜란드(Dutch)와 남부의 벨기에(French)를 통합하고, 오렌지-나소 가문의 윌리엄 1세(1815-40)가 통치하였다. 북부는 암스테르담 중심으로 광범위한 산업혁명이 이루어져 자유무역을 추구하였고, (남부는 보호무역을 추구해 왔으나) 자유무역에 의해 발트해를 통하여 안트워프로 수입되는 곡물 가격이 저렴하여 남부 농업지역에 불황을 초래하였다. 정치적으로 연합왕국의 하원에서 북부가 다수를 차지하고, 남부는 62%의 인구비와는 다르게 의회에서 소수를 차지하여 대표성 저하에 불만이 있었다. 종교적으로 북부는 개신교가 지배하고, 남부는 거의 모두가 가톨릭교인 이었다. 또한, 언어에서 남부는 인구의 절반이 프랑스어를 사용하였다. 1830년 실업이 증가하여 브뤼셀 노동자들은 폭동을 일으켜 약탈하고, 반란이 전국으로 확산하여 그들은 공장을 점거하고 기계를 파괴하였다. 윌리엄 1세는 군대로 진압하여 질서를 회복하였으나, 폭동은 계속되어 급진파들이 지도력을 장악하여 벨기에의 분리를 주장하고, 브뤼셀에서 자신들의 의회를 소집하여 분리를 가결하고 독립을 선언하였다. 1830년 런던회의에서 유럽 주요 강국은 벨기에 왕국의 독립을 승인하였고, 다음 해 그들은 레오폴드 1세를 왕으로 추대하였다. 윌리엄은 군사작전으로 벨기에를 정복하고 영토통합을 시도했으나 프랑스의 개입으로 10일 작전은 실패하였다. 1839년 런던 조약으로 벨기에는 독립하였다.

이탈리아의 반란: 비엔나 체제에서 이탈리아반도는 롬바르디-베네치아 왕국, 사르데냐 왕국, 양 시칠리아 왕국 (1816년 나폴리와 시칠리아가 통합한 왕국), 투스카니, 교황국가를 포함하였다. 카르보나리 혁명군이 나폴리 부근으로 진출하여 피폐장군을 지도자로 추대하고 그의 3개 연대가 1820년 나폴리로 진격하였다. 페르디난드는 새 헌법을 승인하였으나 메테르니히에게 구원을 요청하여, 오스트리아군이 1821년 진입하여 반란을 진압하였다. 피드몬트, 롬바르디, 베네치아에도 반란이 있었으나, 1831년까지 오스트리아군이 이탈리아반도를 진압하여 지배하였다. 이탈리아 왕국들은 카르보나리 혁명조직이 제안하는 민족주의 이념보다 물질적 혜택과 정의로운 법 집행에 더 큰 관심을 가졌다. 그러나 이탈리아의 시민들은 1848년 프랑스혁명의 영향으로 저항을 시작하였다. 주세페 마치니(1805- 72)는 제노아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하고 변호사가 되어서 이탈리아 통일을 위해 활동하였으며 이탈리아 혁명운동의 선봉이 되었다. 1829년 그는 카르보나리당에 입당하고 지하활동을 하다가 체포되어 마르세유로 망명하여 청년 이탈리아당을 조직하고, 1834년 제네바에서 청년유럽당을 창당하여 민족주의 운동을 호소하고 추방되어 런던으로 망명하였다. 그의 저술 인간의 의무(1860)에서, 개인의 권리는 태어나면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며 어려운 과업, 희생, 덕행으로 얻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의 이념과 노력은 이탈리아의 독립과 통일을 이룩하는 데 공헌하였고, 그의 사상은 유럽의 공화주의 운동에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다.

스페인과 라틴아메리카: 스페인은 가톨릭 세력이 지배하였고 토지귀족들이 부패 무능하여 다른 나라보다 많이 후진하였다. 나폴레옹은 1812년 민주적 헌법을 제정하여 절대왕정을 폐지하고, 보편적 남성투표의 원칙, 입헌군주제, 언론의 자유를 확립하고, 토지개혁과 자유기업을 지원하였다. 나폴레옹의 패전으로 인하여 1814년 스페인 왕정이 복원되어 페르디난드 7세는 민주적 헌법을 폐지하고 나폴레옹 이전의 체제로 복귀하였다. 1821년 카디스에서 일어난 군사 반란은 왕실을 전복하여 자유주의 헌법을 복원하고, 자유주의 통치 3년 동안 왕은 가택연금에 있었다. 비엔나 체제에서 스페인에 대한 프랑스의 군사개입에 러시아는 찬성하고 영국은 반대하였으나, 프랑스는 10만 병력으로 피레네를 넘어 스페인의 절대왕정을 복원하고, 예수회와 종교재판을 재개하였다. 한편 (1807년 나폴레옹이 스페인을 점령하여 식민지 통제력이 약화 되자) 아르헨티나의 애국세력은 스페인 지배에 저항하여 1810년 군사정부를 수립하고 1816년 독립을 선언하였다. 시몬 볼리바르(1783-1830)는 베네수엘라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나 유럽에서 교육을 받아 계몽주의 사상을 배우고 스페인 식민지 지배를 끝낸다는 생각을 가지고 돌아와, 정치 군사 지도자로서 1819-21년 베네수엘라, 볼리비아, 콜롬비아, 에쿠아도르, 페루, 파나마의 독립을 주도하였다. 산 마틴(1778-1850)은 아르헨티나에서 태어나 마드리드 귀족학교에 수학하고 스페인군에 입대하여 프랑스군과 싸웠고, 1812년 아르헨티나로 돌아와 군에 투신하여 1817년 칠레를, 1820년 페루를 해방하였다. 멕시코는 1808년부터 저항세력이 반란을 시작하여 1821년 독립을 쟁취하였다. 라틴아메리카는 대부분 독립하고 투자를 유치하기 위하여 종교의 자유를 허용하였다. 이들 국가의 독립에도 불구하고 외국경제력이 국내정책 결정에 많은 영향을 주었으며, 이를 신 식민지주의라고 명명하였다.

독일 연방의 핵심국가는 오스트리아와 프러시아이며, 오스트리아의 메테르니히(1773-1859)는 비엔나 체제를 주도하여 유럽이 구체제로 복원할 것을 시도하였으나, 전술한 바와 같이 프랑스혁명의 유산으로 전 유럽에 확산한 자유주의와 국민주의 물결을 막을 수가 없었다. 오스트리아는 합스부르크 왕가의 영토적 집합으로 형성된 다민족 국가로서 응집력이 약하였고, 1820년 이후 민족주의 독립운동이 격화되자 강력한 통제에도 불구하고 내부적 혼란에 직면하였다. 메테르니히는 1821-48년 오스트리아 수상으로 반혁명적 정책을 유지하였으며, 비엔나 체제의 기획자로서 국제관계에서 군사적 세력균형으로 외교를 실천하였다. 그는 이탈리아와 독일 연방의 국민주의 반란을 강력히 진압하고, 국내적으로 자유주의 이념과 혁명을 억누르기 위하여 1819년 칙령을 선포하여 교육, 신문, 언론을 엄격히 검열하고, 사회적인 불안을 예방하기 위하여 광범위한 정보망을 사용하였다. 1835년 프란시스 사후 그의 아들 페르디난드가 계승하였으나 지적장애로 통치가 불가하여 제국의 지도력이 국가위원회로 위임되고, 메테르니히의 영향력은 감소하였다. 1848년 프랑스의 2월혁명으로 비엔나 체제가 붕괴하여 그는 수상직을 사임하고 영국으로 망명하였다.

프러시아는 1806년 예나 전투에서 나폴레옹에 대패하여 절반의 영토를 프랑스에 빼앗기고 거액의 전쟁배상금을 지불하였다. 프러시아 정부는 패전의 요인이 절대왕정의 약점에 있었다고 인식하고, 강대국이 되기 위하여 계몽주의 이념에 기초한 유럽국가들과 같은 국가개혁을 시작하였다. 정부와 행정을 개편하고 봉건제도를 폐지하여 성공한 농부가 지주가 될 수 있도록 허용하였다. 상업과 공업에서 동업조합의 독점을 억제하여 자유경쟁을 장려하였다. 정부는 귀족의 권력을 약화하고, 군대개혁과 교육개혁을 병행하였다. 1844년 프러시아는 (오스트리아를 제외하고) 관세연합을 결성하여 인접 국가 사이에 모든 관세를 철폐하고, 같은 비율의 수입관세를 적용하여, 관세연합은 프러시아가 독일통일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 프러시아는 1798년 봉건제도를 철폐하였으나 지주 귀족은 이전의 농노들을 저 임금으로 착취하여, 해방된 자유 노동자들의 여건은 봉건제도 철폐 이전보다 더욱 나빠져, 1848년 독일 하층계급의 일반적 생활여건은 1789년 프랑스혁명 시대와 비슷하고, 노동자와 농민들의 광범위한 잠재적 불만이 혁명에 다가가고 있었다.

그리스 독립전쟁(1821-32): 오토만 제국은 1453년 콘스탄티노플을 정복하고 그리스에 발판을 구축하였다. 이탈리아 카르보나리의 영향으로 (그리스 상인이 모이는) 오데사에서 1814년 비밀결사 필레게 헤타리아를 조직하여 서유럽에서 그리스 지지자의 동정을 얻어 반란을 모의하였다. 경제발전과 자유주의 혁명의 영향으로 그리스 정신이 증폭되어, 알렉산드로 입실란티스를 지도자로 1821년 몰다비아에 주둔한 터키부대를 공격하여 그리스의 독립운동을 시작하였다. 그들은 1822년 펠로폰네소스를 지배하면서 그리스 독립을 선언하였다. 터키는 이집트 해군의 지원으로 펠로폰네소스를 침공하여 1826년 아테네를 함락하였다. 발칸지역에 이해가 얽힌 영국, 프랑스, 러시아가 터키와 그리스를 중재하였으나 터키가 이를 거부하자, 이들 3국 해군은 1827년 이집트의 함대를 파괴하였다. 러시아와 터키는 별도로 전쟁(1828-29)을 지속하였고, 1830년 런던회의에서 터키의 보호 아래 그리스왕국이 승인되고, 1832년 터키 술탄은 그리스의 독립을 공식 인정하였다. 그리스는 자유주의 헌법을 채택하고, 복고주의적 러시아가 그리스의 독립을 지지하여 비엔나 체제가 동요하였다.

러시아 차르의 독재: 알렉산더 1세(재위 1801-25)는 계몽주의 사상을 교육받아 총명한 외교정책을 수행하였다. 그는 코카서스의 페르시아 접경과 흑해의 터키 접경에서 우위를 확보하고, 나폴레옹 전쟁에서 동맹국들과 함께 전승국이 되었다. 전후에 그는 점차 보수적으로 기울어 국사에서 고립되고, 종교적 신비주의로 기울었다. 휴가 중에 흑해 지역에서 그가 병사하자, 12월 주의자들은 니콜라스 1세(재위 1825-55)의 계승에 반대하는 반란을 하였으나 진압되었다. 이로 인해 귀족에 대한 불신이 증가하여, 그는 정치적 개혁을 싫어하였다. 니콜라스는 러시아 지도자 중에 최고의 반동주의자로서 관료제도를 강화하고, 검열을 증가하며, 정치경찰로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고, 인접 국가와 많은 전쟁으로 재정적 부담이 증가하였다. 러시아는 페르시아와 전쟁(1826-28)으로 코카서스 지역을 장악하고, 터키와 전쟁(1828-29)으로 지중해 지역에 발판을 구축하였다.

아메리카 합중국의 성장: 조지 워싱턴이 1789년 헌법으로 대통령에 선출되어 행정부를 구성하고 알렉산더 해밀턴을 재무장관에 임명하여 은행을 설립하고 관세와 여타세금을 단일화하여 금융제도를 확립하였다. 알렉산더 해밀턴은 북부의 상공업에 기반을 두고 연방당을 창당하고, 토머스 제퍼슨은 남부의 농업에 기초하여 민주공화당을 창당하였다. 연방당은 정치적 안정과 무역을 위하여 영국과 친화적이고, 공화당은 프랑스와 친화적이었다. 토머스 제퍼슨(1801-08) 대통령은 1803년 루이지애나를 프랑스로부터 매입하고, 존 마셜은 1801-35 기간에 대법원장으로 사법체계를 확립하였다. 영국은 미국과 프랑스 간의 중립적인 무역을 막으려고 해상을 봉쇄하고, 공해상에서 미국 선원을 나포하여 영국해군에 복무를 강요하고, 캐나다 국경지역에서 미국 정착자를 공격하는 원주민을 지원하여, 1812년 제임스 매디슨이 영국에 전쟁을 선포하였다. 영국은 워싱턴을 공격하여 방화하고 해상봉쇄로 미국의 무역을 거의 중단시켰으나 1815년 종전하였다. 의회는 1830년 인디언 이주법을 제정하여 그들을 서부로 이주시켰다. 연방당은 사라지고 공화당에서 민주당이 분리되어 제임스 먼로를 대통령(재임 1817-25)으로 선출하여 영국과 화해하고, 유럽이 미대륙 개입에 반대하는 고립주의적 먼로 독트린을 선포하였다.

TO BE CONTINUED

     1848년 유럽국가의 혁명
(b) 국민주의와 국가통일 (1850-71)
(c) 국가 권력의 성장과 제국주의 (1871-1914)
     제국주의의 국가별 분석
(d) 유럽 제국의 군대와 전쟁 (1815-1914)
(e) 유럽국가의 종교와 정치

REFERENCES

Kim, Hugo W. The Consolidation of Nation States and Industrialization From 1815 To 1914: Nationalism and  Socialism. North Charleston, SC: CreateSpace, 2020, 5-228.

김휘국. 정치철학*경제사상과 함께 읽는 세계문명사. 서울: 한국전자도서출판, 2022, 471-5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