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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20.- 유럽(프랑스혁명과 산업혁명)/ PhD. Hugo W. Kim 재미워로 학자

양곡(陽谷) 2023. 8. 11. 10:40

연재 20. 18세기 유럽(프랑스혁명과 산업혁명)의 역사적 교훈

위에서 루이 14세가 사망한 1715년부터 나폴레옹이 몰락한 1815년까지 정치와 경제의 이론과 실제를 4회 연재하였다. 1648년 웨스트팔리아조약은 새로운 세계질서로 유럽 국가의 주권과 영토를 인정하였고, 새로운 국가들은 국가를 국민적 통합수단으로 이용하였다. 유럽은 18세기 이전에 이미 과학이 보편화 되기 시작하였고, 무신론자나 범신론자들이 특정 신의 존재를 부인하는 가운데 종교적 회의주의나 무신론적 풍조가 나타나고 철학은 교회를 과학발전의 적으로 간주하고, 상인 선교사 의사 항해사 등이 여행 체험을 책으로 발간하여 교육받은 유럽인들은 다른 문명과 문화에 대한 이해가 넓어졌다. 자연법사상에 기초한 계약론의 저술들을 출판하였고 프랑스의 지식인들은 자유주의적 정치사상에 영향을 받아 자유와 평등을 중심가치로 삼는 계몽주의 사상이 널리 퍼져, 루소의 사회계약론은 거대한 사상적 충격으로 미국혁명과 프랑스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다.

(a) 18세기 유럽의 역사적 유산

정치와 종교: 유럽의 계몽주의 군주들은 왕권신수설을 내세우지 않았으며 자신들의 정치 권력이 사회 질서유지에 필요하다고 정당화하였다. 이성과 유용성에 기초한 유럽 5강(프랑스, 영국, 오스트리아, 프러시아, 러시아)의 군주들은 영토를 넓히기 위한 전쟁을 계속하고, 국가의 부를 축적하기 위해 식민지를 개척하며, 식민지 전쟁과 유지비용을 충당하기 위하여 과도한 세금을 징수하였다. 이로 인하여 영국은 미국혁명으로 북아메리카 식민지를 상실하였고, 프랑스는 새로운 세금을 부과하기 위하여 삼부회의를 소집하는 과정에서 개혁의 의지를 가진 사람들이 주동이 되어 신부와 귀족의 특권을 폐지하는 새로운 공화국 헌법을 제안하여 프랑스혁명이 시작되었다. 유럽의 군주들은 프랑스혁명에 적대적이었고, 프랑스는 내부 갈등과 외부 위협으로 혼란과 위기가 도래하여, 나폴레옹이 총재정부를 접수하고 집정관으로 권력을 장악하여, 프랑스혁명을 끝내고 군사력으로 유럽을 제패하고 러시아 정복에 실패하여 그의 시대는 막을 내렸다.

일반적으로 영국의 빈민들은 국교의 반대 종파나 가톨릭교, 중산층은 청교도, 귀족층은 성공회 신앙을 가졌다. 프랑스는 종교적 관용이 없이 신교 목사들을 추방하고 20만의 휴그노가 탈출하였으며, 고위 성직자는 귀족으로 정치적 집단이익을 추구하였다. 프랑스혁명은 종교적 자유를 허용하여 정치와 종교를 분리하여, 교회 재산을 몰수하고 성직자들에게 국가가 보수를 지급하였다. 계몽주의 사상으로 이신론(理神論)이 등장하여 자연신은 하나의 신으로 세상을 창조한 후에 계시나 기적 등으로 자연법칙에 간여하지 않으며, 인간은 신의 존재나 우주의 법칙을 이성으로 알 수 있다고 믿고, 상당수 지식인과 정치인들이 이신론을 믿었다. 정치와 종교는 분리되어 웨스트팔리아조약 이후 정치적 동기가 외교정책을 결정하였다. 100년 후 오스트리아계승전쟁에서 구교국인 오스트리아는 신교국 영국과 동맹하고, 신교국인 프러시아는 구교국 프랑스와 동맹하였다.

경제와 사회: 유럽경제는 1650-1750 기간에 계속되는 전쟁, 기근, 질병으로 불황이 왔으나, 다음 100년은 인구가 폭증하여 영국의 경우 소비에서 의식주 수요 증가로 농업혁명을 가져왔고, 농업 잉여로 공산품 수요가 증가하였다. 생산에서 저임금 노동력과 기술 인력이 충분하고; 투자는 중앙은행, 신용 제도, 주식과 채권으로 자본을 조달하고; 새로운 기계의 발명 개선과 증기기관으로 수송 혁신을 가져오며; 석탄과 철광 등 자연자원이 풍부하였다. 시장에서 정부는 사유재산을 보장하고 시장개입을 최소화하며 무역장벽, 이자율, 세금을 낮추어 기업활동을 지원하였다. 영국은 섬유산업과 철강산업을 주축으로 산업혁명을 선도하였다. 나폴레옹 전쟁이 종식된 이후 영국의 농업과 공업기술이 대륙에 전파되어 산업화를 촉진하였으나 대륙의 산업혁명은 속도가 미진하였다. 영국은 경험주의, 실용주의, 공리주의 사상이 사회를 지배하여 대륙의 합리주의보다 산업화에 유리하였다. 대륙은 기술인력을 국가가 다수 흡수하였으나 영국은 사기업에서 효율적으로 이용하였다. 대륙은 프랑스혁명과 나폴레옹 전쟁으로 생산역량이 파괴되었고 자원배분이 왜곡되었으며, 나폴레옹의 대륙봉쇄는 영국보다 프랑스에 더 큰 피해를 주었다. 한편 영국의 동인도회사는 강력한 해군력으로 특히 아시아에서 네덜란드의 무역기지를 인수하였다.

정치와 경제의 변화와 함께 사회적 변화는 교육을 단계적 체계적으로 수행하는 기초위에 이루어졌다. 계몽주의 사상가들은 교육제도의 현대화가 사상과 이상을 전파하는 중심적 역할을 할 것을 기대하였다. 전통적 문법학교는 문법, 논리학, 수사학, 수학, 기하학, 음악, 천문학의 7개 교양과목을 가르쳤다. 대학은 법학, 의학, 과학, 인문학의 4개 전문교육을 하였고 졸업하고 정부 관료나 분야별 전문직에 진출하였다. 일반적으로 대학은 전통주의의 요새로 계몽사상에 친화적이 못 되었다. 영국은 1640년대 남성 30%가, 1750년대 남성 60%가 문자를 해독할 수 있었고 프랑스는 좀 더 낮은 비율을 보였다. 프러시아의 프레데릭 대제는 1763년 초등교육을 의무화하였고, 체육학교는 국가가 지원하여 대학 이전 준비교육을 하였다. 정부는 학생들에게 출석을 강요하고 국가고시를 실시하였으며 교사에게는 자격증을 요구하였다. 인쇄기술의 발전으로 출판이 증가하여 문자 독해율이 높아졌다. 국가는 도서관을 설립하고, 개인들은 커피집, 클럽, 학원, 집회소 등에서 자유롭게 만나서 읽고 배우고 생각을 교환하였다.

정치철학: 계몽주의는 인간의 관념이나 행위가 믿음 미신 계시보다 합리성에 의해 안내되기를 갈망하고, 봉건적 종교적 관습이나 제약으로부터 개인을 해방하고 사회를 변화시키는 이성의 힘에 대한 믿음이며 종교나 전통보다 과학으로 확인하고 성취하려는 사상이었다. 미국혁명은 영국의 침해에 저항하여 대표자 없이 세금을 낼 수 없는 미국인의 독립정신을 방어하며, 영국의 식민지체제를 파괴하고 새로운 공화정체를 수립하였다. 프랑스혁명은 루소의 사회계약론에 영향을 받아, 개인이 자기 권리를 공동체에 위임하고 새로 창립된 정치단체의 일원이 되어 스스로 동의한 의무에 복종하고 시민적 자유를 누리는 사상이다. 법학 분야로 독일의 자연법, 영국의 관습법, 미국의 연방주의가 발전하였다. 조지 버클리의 비 물질주의는 인간은 사물을 지각으로 인지하므로 추상적인 개념이나 사물의 일반화를 거부하였다. 데이비드 흄의 회의주의는 목표와 다른 인지로 원인과 결과가 불일치하여 이성과 감각 사이에 인식에 대한 의심이 생겨 인식론적 회의주의가 출현하였다. 에드먼드 버크의 보수주의는 프랑스혁명에서 지식인과 전문계층이 사회질서를 개편할 것을 두려워하였다.

임마누엘 칸트는 영국의 경험철학이 당면한 인식론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선험적 개념을 도입하고 독일 관념철학 체계를 확립하였다. 지식은 경험으로부터 시작하나, 인간은 경험에서 창출된 일반적 규칙으로부터 선험적 지식을 가지고 있다. 지식은 직관으로 시작하여 개념을 형성하고 관념에 이른다. 우리의 직관은 현상의 표현이며, 우리는 대상의 본성을 인지하는 형식보다 더 알지 못하므로, 감각은 우리 마음의 지각구조에 의해 모형을 만든다. 감각의 개념은 [물 자체]의 혼동된 표현이며 실제 존재의 변조이다. 감각적 직관이나 경험적 개념은 우리의 모든 지식의 요소를 구성한다. 선험적 지식은 경험 이전에 마음속에 존재하는 감각적 직관의 순수한 형태이므로 경험적 내용으로부터 독립적이다. 후천적 경험적 지식은 우리가 감각으로부터 받은 인상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모든 현상의 경험적 내용에 기초한다. 칸트는 선험적 분석을 위해 12개의 범주로 구분하였고, 감각적 인식이 범주에 투영되어 선험적 직관과 결합하여 순수개념의 객관적 실재를 만든다고 하였다. 헤겔은 칸트의 선험적 변증법을 역사발전 단계에 적용하여 역사가 정반합의 작용으로 새롭게 발전한다고 보았다. 영국의 공리주의는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을 추구하는 벤담의 효용이론이다.

경제사상: 전고전 경제학으로 프랑스의 농업경제학자인 케네는 국가의 부를 분석할 목적으로 경제표를 고안 분석하여, 농업의 잉여가 경제성장의 잠재력이므로 세금을 줄이고 농업에 투자하여 생산을 증가해야 한다는 정책을 제안하였다. 튀르고는 농부가 노동임금보다 더 많이 잉여를 생산하여 부가 축적되고, 무역으로 경제발전의 가능성을 증진하며, 가격 이론과 화폐 금융 등에 관한 이론을 제시하였다. 영국의 데이비드 흄과 제임스 스튜어트는 저술을 통하여 인구와 농업, 무역과 공업, 화폐와 금융 등에 관해 경제이론을 전개하였다. 고전 경제학으로 애덤 스미스는 도덕 감정론에서 경제적으로 자기 이익의 추구는 사회의 도덕적 가치를 해치지 아니하고, 시장에서 독점이나 정부개입은 개인의 복지를 감소시키며, 저축과 투자는 고용을 증대하여 복지를 향상한다고 하였다. 국부론은 생산과 분배, 자본축적과 이용, 부의 발전, 정치경제학, 국가의 세입 등에 관하여 광범위한 경제이론을 기술하였다. 분업에 의한 전문화로 생산성을 향상하고, 정부규제 없이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하여 수요와 공급이 이루어 지면 가장 효율적으로 자원이 배분된다고 하였다. 프랑스의 장 바티스트 세는 스미스의 이론을 설명하고 전파하였다.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이 출간되고 근 50년이 지나서 신고전 자본주의가 영국에서 등장하였다. 토머스 맬서스는 그의 인구론에서 인구는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나 생산수단은 산술급수적으로 성장하므로 강력한 인구 억제가 필요하다고 하였으며, 기술혁명의 생산성을 과소평가하였다. 데이비드 리카도는 그의 저술 정치경제학과 세금의 원론(1817)에서, 무역 당사국이 서로 전문화된 비교우위 상품을 교환하면 모두에게 이득을 가져오므로 국제 무역의 증가는 양국에 이롭다고 하였다. 이를테면, 노동집약적 상품을 생산하는 국가와 자본과 기술 집약적 상품을 생산하는 국가가, 양국에서 소비되는 두 상품 총량을 생산하여, 국제 무역으로 교환하면 모두에게 이득이 된다는 이론이다. 그의 이론은 현대 국제경제학에서도 매우 중요하게 다루고 있다. 맬서스는 이론적으로 전통적 지주계급을 지원하였고, 리카도는 자유무역 이론으로 기업가와 자본가에게 동정적이었다.

(b) 정치와 경제의 상호작용

국내문제: 영국의 경우 명예혁명은 권리장전의 서명을 통하여 의회와 국왕 사이에 정치 권력을 나누었고 개신교를 허용하고 종교분쟁을 종식하였다. 독일 하노버 가의 조지 1세가 왕위에 추대되고 그의 아들 조지 2세가 계승하였으며 로버트 월폴이 1725-42 기간에 수상으로 재직하면서, 남해회사 거품 사건 등 어려운 경제 문제를 잘 처리하였다. 반 명예혁명 세력인 자코바이트를 분쇄하여 위협을 제거하고 전쟁과 재정위기를 극복하였다. 월폴은 도덕적으로 부패하고 타락하였으나 재임 기간에 영국은 평화와 번영을 유지하였다. 경제 입법에서 지주와 기업인 간의 타협을 유도하고 토지 세금을 감소하며 사유재산의 침해를 엄벌하였다. 수출 보조와 수입 관세로 상업과 제조업을 지원하였으나, 농촌 노동자와 도시 무산자들의 빈곤에 무감각하였다. 그는 식민지무역을 제한하는 법을 철폐하였다. 프랑스의 경우 루이 15세의 섭정 오를레앙공은 전후에 재정 질서와 안정을 회복하기 위하여 25,000 병력을 퇴역시켜 6년간 세금을 면제하고, 수백의 공무원을 퇴직시켰으며, 부당취득한 군납업자들로부터 거액을 국고에 환수하였다. 재무장관 존 로는 사립 중앙은행을 설립하고 3/4 자본금은 은행권이나 어음으로 보증하여, 미시시피회사의 주식 거품이 사회문제가 되어 그는 물러났다. 루이는 스승인 플뢰리 추기경을 수상에 임명하여 1726-43 기간에 영국 월폴과 화친하고 오스트리아와 화해하며, 폴란드계승전쟁에서 영국을 중립화하고 독일과 이탈리아에서 프랑스의 군사작전을 제한하였다. 1740년 오스트리아계승전쟁에 플뢰리는 마리아 테레사의 계승을 인정하였으나, 1741년 그는 프러시아와 동맹을 허용하였다.

국제관계: 프레데릭 대제와 마리아 테레사: 프러시아의 프레데릭은 유럽의 강국이 되기 위하여 오스트리아 마리아 테레사의 왕위계승에 반대하여 1740년 인구가 많고 자원이 풍부한 실레시아를 침공하고 8년간의 전쟁을 하였다. 프러시아의 군사력과 영토 확장의 야심에 경악한 오스트리아, 프랑스, 러시아, 스웨덴, 작센이 연합하여 프러시아-영국 동맹과 1756년부터 세계전역에서 7년간 전쟁으로 프러시아는 실레시아를 병합하였다.

산업혁명의 정치적 영향: (1) 영국과 유럽 강국은 원자재를 조달하고 공산품을 수출하기 위하여 아시아와 아프리카에 식민지가 필요하였다. 따라서 19세기에 유럽의 산업 국가들은 식민지 제국을 건설하였다. (2) 산업혁명으로 세계는 개발국가와 저개발국가의 두 그룹으로 구분하며, 산업이 선진한 국가는 필요한 자본과 기술을 가지고 후진국에 투자하여 자원을 개발하고 그들의 산업을 무력화하였다. (3) 인구증가와 산업혁명으로 많은 유럽인이 아메리카와 오스트레일리아 등에 이민하여 이들 국가를 유럽화하였다. 이를테면 1900-1920 기간에 9백만의 이민자들이 유럽을 떠나 해외로 이주하였다. 산업혁명은 영국의 개혁운동을 자극하였고, 1833-45 기간에 수 개의 노동법을 제정하여 노동시간을 제한하고, 어린이들의 광산 노동을 금지하며, 노동자들의 건강과 안전에 관한 일반적 규칙을 제정하였다. (4) 산업혁명은 강력한 노동조합운동을 유도하였다. 무역과 제조업에 종사하는 노동자들은 그들 고용주에게 대항하여 자신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무역조합을 결성하였다. (5) 산업혁명은 사회적 그리고 경제적 교리의 발전을 위한 길을 열었다. 맬서스, 리카도, 벤담 등의 학자는 자본주의 체제를 방어하고, 국가가 경제활동을 방해하지 말라고 촉구하였다. 산업혁명의 가장 큰 충격은 사회주의의 출현으로 이는 1848년 카를 마르크스의 공산당 선언에 잘 언급되어 있다.

경제와 프랑스혁명: 프랑스혁명은 경제적 위기에서 출발하였으며 다음과 같은 이유로 설명된다. (1) 문화적으로, 계몽주의 사상은 군왕과 교회의 권위를 세속화하였고, 전통 대신에 이성에 기초한 새로운 사회를 촉진하였다. (2) 사회적으로, 영향력 있는 평민자본가 계층의 등장으로 자신들의 의제를 발전시키고, 성직 및 귀족 계층과 정치적으로 대등하다는 자신을 갖게 하였다. (3) 재정적으로, 프랑스는 7년 전쟁과 미국독립전쟁 참전으로 누적된 외채를 더욱 증폭시켜 루이 16세는 새로운 세금의 부과를 요청하여 왕의 특권을 축소하였다. (4) 정치적으로, 루이는 지방의회로부터 치명적인 반대에 직면하였으며, 이는 특권층 저항의 최전선이었다. (5) 경제적으로, 자유주의 경제학자들이 주장한 곡물시장의 규제철폐로 식품 가격이 오르고 흉년이 겹치어 식품 부족으로 대중의 폭동을 유발하였다. 이러한 요소들이 결과적으로 혁명을 가져왔다.

나폴레옹의 대륙봉쇄: 프랑스가 트라팔가르 해전에 패하여 영국침공이 좌절되었고 영국해군이 프랑스 해안을 봉쇄하자 1806년 나폴레옹은 베를린 칙령을 선포하여 영국과의 무역을 금지하는 대규모의 봉쇄령을 하달하고 1814년까지 집행하였다. 대륙봉쇄는 영국의 유럽대륙 수출이 1802-06 기간에 전체 수출의 55%에서 25%로 감소하였으나 미미한 경제적 피해를 가져왔다. 나폴레옹은 광범위한 무역이 스페인과 영국을 통하여 이루어지고 있음을 인지하고 양국을 침공하였으나, 스페인에 프랑스 주둔군 20만을 묶어두고, 양면 전쟁으로 모스크바를 침공하고 패전하여 몰락하였다. 베를린 칙령은 프랑스 동맹국과 예속 국가들에 영국 상품 수입을 금지하여 영국과의 모든 연결이 단절되었다. 영국 상인들이 많은 상품을 밀수출하였고 유럽 전역에 대규모의 밀수가 성행하여, 무역의 봉쇄는 경제전쟁의 강력한 무기가 되지 못하였다. 무역 상대국인 영국을 상실한 프랑스와 그 동맹국들도 많은 경제적 손실이 불가피하였다.

(c) 이론과 실제의 관계

정치 이론과 정치 현실: (1) 토머스 홉스의 레비아단(1651)은 사회계약론으로 최초로 가장 영향력 있는 저술이며 영국의 내전 시기에 출간되었다. 그는 자연상태의 동물적 상황(내전)은 분열되지 않는 강력한 정부에 의해서만 피할 수 있다고 하였다. (2) 존 로크의 두 개의 정부 논문(1689)은 명예혁명 시기에 익명으로 출간되었다. 그는 혁명은 통치 권력이 의무를 이행하지 못하면 정당화된다고 하였다. (3) 계몽주의는 몽테스키외와 볼테르 등이 프랑스에 자유와 평등사상의 파도를 일으켰으며, 루소의 사회계약론(1762)은 미국혁명과 프랑스혁명에 도화선이 되었다. 볼테르는 이성의 시대에 살았고, 루소는 감성의 시대에 살았다. (4) 미국혁명은 평등의 사상이 지배적 역할을 하였으며 토머스 제퍼슨의 독립선언문(1776)에 건국 정신이 잘 표현되어 있다. (5) 프랑스혁명은 계몽주의 사상가들이 일깨웠고, 특권층에 대항하여 자유와 평등의 자연적 권리를 추구하는 시대정신이 대중동원으로 연결되었다.

경제사상과 실제: 17세기의 중상주의 이론은 경제적 국가주의로 무역독점과 외환통제로 무역흑자를 유지하여 국가가 부를 축적한다고 생각하였으나, 이는 이론적 오류였다. 각국의 물가는 장기적으로 균형을 이루고 무역도 자동조절 되는 추세로 발전하였다. 18세기에 애덤 스미스는 경제적으로 개인의 이윤추구가 도덕적 가치를 해하지 않으며; 시장에서 개인의 이윤추구 동기에 의해 정부개입 없이 자유경쟁으로 수요와 공급이 이루어지면 자원이 효율적으로 배분되어 개인의 복지를 향상하고; 개인의 저축으로 축적된 자본을 투자하면 일자리를 창출하여 소득 수준을 높이고; 분업과 전문화는 생산성을 크게 향상한다고 하였다. 19세기에 산업화가 진전되면서 애덤 스미스의 경제이론이 토머스 맬서스와 데이비드 리카도에 의하여 많은 진전을 이루었다. 리카도는 국제 무역에서 두 나라가 각각 자국의 비교우위 상품을 생산하여 자유무역으로 서로 교환하면 쌍방 국가 모두에게 이익을 가져온다는 이론을 증명하여 국제 자유무역에 크게 공헌하였다. 19세기 산업화는 원자재를 확보하고 시장을 개척하는 수단으로 식민지를 건설하는 제국주의의 시대로 변모하였다.

REFERENCES

Kim, Hugo W. The French Revolution and the Industrial Revolution From 1715 To 1815: The Rise of Liberalism and Capitalism. N.  Charleston, NC: CreateSpace, 2020, 427-447.

김휘국. 정치철학*경제사상과 함께 읽는 세계문명사. 서울: 한국전자도서출판, 2022, 461-470.

(18세기 유럽의 역사적 교훈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