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명사 연재 16. 18세기 유럽의 정치와 종교 (Continued 3)
(d) 프랑스혁명 (1789-99)
프랑스는 유럽에서 가장 선진국이며 파리는 계몽운동의 중심이었다. 프랑스혁명의 시기에 프랑스 인구는 2,500만 영국은 1,000만이었고 파리는 런던보다 작았으나 비엔나나 암스테르담의 두 배였다. 프랑스는 많은 전쟁으로 경제에 재난을 가져왔으며 미국혁명 지원비용은 부채문제를 더욱 악화시켰다. 프랑스는 계몽시대의 자유주의 이념을 미국 지식인들에게 전파하였고 영국에 저항하는 미국인들을 돕기 위하여 자금과 병력을 보냈으며 미국의 혁명정신은 프랑스인이 자신들의 절대왕정을 파괴토록 도왔다. 미국인들은 성문화된 헌법에서 사회계약론에 기초한 공화국을 수립하고 자유주의 이념을 실현하였다. 유럽인들은 미국으로부터 인간의 권리, 자유와 평등의 이념, 민중의 통치권, 종교 사상 표현의 자유, 그리고 권력의 분립이 공상적 이상이 아니라 현실로 구현되는 것을 배웠다. 유럽인들은 미국에서 돌아오는 군인들로부터 미국에 관하여 알기 시작하였다. 프랑스의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이 미국의 독립선언과 헌법에 유사한 개념을 포함하였다는 것을 고려하면 전자는 후자보다 복잡하지만, 미국혁명은 분명히 프랑스혁명에 크게 영향을 주었다고 평가한다.
구정권과 계몽사상: 프랑스의 세 계층, 즉 제1계급은 성직자, 제2 계급은 귀족, 제3계급은 평민으로 구성되었다. 구정권의 범주는 법적 권리나 사회적 지위를 제한하지만, 삼부회의(Estate General)는 1614년 이후에는 열리지 않았기 때문에 정치 사회적으로 쇠퇴하였고, 일어나는 중산층 세력은 특권층의 영향력을 감소시켰다. 제1계급인 성직 계층은 인구 약 10만으로 종교 기관에 종사하는 인력을 포함하고 농지의 20%를 소유하였다. 교회는 마음의 평화를 준비하고 권위에 복종심을 조성하고 공공 교육에 봉사하여 사회질서 유지에 긴요하였다. 국가는 교회가 십일조와 여타 헌금을 받도록 허용하며, 교회의 수입에 세금을 면제하여 교회로부터 상당한 헌납을 받았다. 한편 교회는 소득 배분이 불공평하여 상위 성직자는 부유하고 하위 성직자는 빈곤하여 불평의 근원으로 개혁 대상이 되었다. 수도원이 매력을 상실하여 수도사와 수녀의 수가 감소하였고 교육을 담당해 왔던 예수회는 1773년 해체되었다. 휴그노와 여타 신교도는 아직도 불법이었다. 일반적으로 프랑스 종교는 쇠퇴하였다.
제2계급인 귀족 계층은 40만 명으로 농지의 25~30%를 소유하였다. 루이 15세와 16세의 통치하에서 귀족은 민사, 군사, 법률, 성직의 고위직을 다수 가졌고 투자와 기업(주로 광산과 금속기업)을 소유하여 주요 산업을 통제하였다. 성직 계층과 같이 귀족은 직접세와 토지 소유자에 부과되는 재산세가 면제되었다. 원래 세금은 전시에 통치자를 돕기 위하여 부과되었고, 통치자를 위하여 싸우는 귀족은 세금이 면제되었다. 귀족의 특권은 평등과 효율을 통한 사회 계층 이동에 중대한 장애가 되었고 평민에게 원한이었다. 귀족은 가문으로 상속되었고, 관리가 되거나 왕의 지명으로 귀족이 되었다. 귀족은 상업이나 기능직을 금지하였으나 (의술, 유리공, 광산업, 해양업, 도매업 제외), 자신의 농지는 경작하게 하였다. 귀족의 검(무)은 출생부터 허용되고 귀족의 예복(문)은 관직을 갖게 하여 문관과 무관은 세금 면제와 정책 통제로 정치, 경제, 사회적 특권을 확대하였다. 그들은 특권을 유지하기 위하여 법을 공부하여 법관이나 행정관이 되었고, 왕실의 편이나 부르주아 편을 택하여 동반자가 되었으며, 귀족 간의 결속을 강화하기 위하여 귀족 가문 사이에 결혼하도록 하였다.
제3계급인 평민계층은 2,500만 명으로 직업의 전문성, 교육의 수준, 재산의 차이에 따라 농부, 무산대중, 자본가집단으로 구분하였다. 농부는 프랑스 인구의 75~80%로 35~40%의 농지를 소유하였다. 18세기 프랑스에 봉건제도는 존재하지 않았으나 세금, 십일조, 남아있는 봉건적 부과금, 그리고 귀족의 특권에 대해 분개하였다. 귀족들은 평민의 땅에서 사냥하는 권리를 가졌고, 공공용지를 둘러막아 목장을 만들어 평민들이 자유롭게 서식할 공간을 없애버렸다. 무산대중(Proletariat)은 기술 노동자, 상점 점원, 기타 임금 노동자들로서 임금이 물가인상을 따르지 못하여 생계에 위협을 받았다. 1741~89 기간에 물가는 65% 상승하고 임금은 22% 인상되어 노동자들은 생계를 위한 파업과 반란이 자주 일어났다. 자본가계급(Bourgeoisie)은 상인, 제조업자, 은행가, 전문직 종사자(공무원, 의사, 변호사, 교수, 작가)로 토지를 매입하여 부를 축적하고 지식과 재산이 귀족을 능가하여, 정치 사회적 특권을 누리는 귀족에 대해 항상 불만을 품고 있었다. 그러나 경제활동에서 귀족과 자본가가 공동이익을 위해 통일전선을 구축하고, 공직 매입 등으로 18세기 동안에 6,500명의 평민이 귀족으로 신분이 상승하였다.
프랑스혁명의 배경인 계몽주의 사상의 자유주의 이념은 구정권의 억압과 불평등으로 수 세대 동안 축적된 시민들의 분노에 불을 붙였다. 볼테르나 루소 같은 지식인들의 저술은 대중을 각성시켰고 살롱, 커피집, 도서관의 논쟁은 급속히 전파되어 공공의 정치적 논쟁으로 발전하였다. 신문 잡지 팸플릿은 정치 소식과 논평을 증가하여 보도하였다. 자유주의 이념이 지식인과 보통 사람들의 마음속으로 침투하여 자유와 평등의 자연적 가치를 알게 되었다. 사회계약이 (대의 정부를 창설하는) 미국 헌법에 반영되어 미국의 혁명은 유럽인들에게 자유주의 이론이 실현된다는 것을 시범적으로 보여주었다. 구제도의 실패에 비판이 증가하는 가운데 어려운 경제와 재정은 사태를 더욱 악화시켰다. 예상하지 못한 기후의 변화는 흉년과 기근을 초래하여 다수의 생존을 위협하였다. 영불 상업동맹은 프랑스 제조업에 해가 되었고 실업을 증가시켰다. 1789년 3월 농부들은 세금과 잡부금 납부를 거부하여 국가 부도의 공포를 초래하였다. 계속된 전쟁과 왕실의 사치로 부채가 증가하였고, 부채이자는 국가 예산의 절반이 되어 재정의 붕괴를 피하려고 세금 인상을 위해 왕은 (3부) 계층회의를 소집하였다. 프랑스 사회는 폭풍 속에서 충돌하는 끝자락에 서게 되었다.
혁명과 헌법의 변화: 1788년 8월 루이 16세는 삼부회를 소집하기 위하여 평민계층의 대의원 수를 성직과 귀족 계층의 대의원을 합하여 동수로하고, 남성에게 투표권을 부여하고, 선출된 삼부회 대의원은 계층별로 문제에 대한 대책과 개혁 방안을 건의토록 하였다. 보고서는 배심원에 의한 재판, 우편의 비밀유지, 세금의 완화, 법률의 개정을 요구하였다. 계층별로 성직 계층은 종교적 관용과 교회에 의한 교육의 완전한 통제를 요구하였고, 귀족 계층은 계층별로 앉아 별도로 투표하고 삼부의 모든 계층이 만장일치로 승인해야 법이 된다고 주장하였다. 평민계층으로 농부들은 세금의 삭감, 봉건제도와 봉건 납부금의 철폐, 무료 교육의 일반화, 영주들의 사냥과 동물이 주는 피해로부터 농지 보호를 요구하였다. 평민자본가들은 출생 신분과 관계없이 능력에 따라 직업의 개방, 통행 요금의 철폐, 특권층에 대한 세금 확대를 요구하고, 일부는 교회 재산을 몰수 매각하여 공공부채를 청산해야 한다고 제안하였다. 새로운 삼부회의는 1789년 5월에 성직 308, 귀족 285, 평민 621 대표가 베르사유에서 회합하여 파산 직전의 프랑스 재정에 새로운 세입수단을 모색하였다.
미국의 독립과 계몽주의 이념의 영향으로, 다수의 가난한 성직 대표들과 개혁의 생각을 하는 귀족대표들이 평민대표들과 합세하였다. 성직과 귀족 대의원들이 기존의 특권 유지를 주장하자 삼부회의 평민회는 자신들을 국회(National Assembly)로 선언하고 1789년 6월 17일 투표하여 490:90으로 가결하여 프랑스혁명이 시작하였다. 19일 삼부회의 성직회가 149 대 137로 가결하여 평민회에 통합되자, 귀족회는 왕에게 이를 막아줄 것을 호소하였다. 6월 20일 평민회의 대표들이 회의장에 도착하여 문에 자물쇠가 채워진 것을 발견하고 인접한 테니스코트로 이동하여 헌법이 확고히 수립될 때까지 그들은 회합을 계속한다고 선언하였다. 6월 25일 47명의 귀족대표가 국회에 합세하였으나 왕은 평민회의 요구를 거부하였다. 파리 지역은 407 대의원을 선출하여 새로운 시 위원회를 구성하였다.
루이가 군대를 베르사유에 불렀을 때 군인들은 대부분 자유주의 귀족에 의해 지원되는 혁명 친화적 집단이었다. 왕은 7월 10일 독일과 스위스 용병 10개 연대를 불러 6천 명은 베르사유 1만 명은 파리 주변에 배치하였다. 독일군이 파리에 들어와 주민들을 학살한다는 유언비어가 나돌아 시민들은 자기방어를 위해 공공건물에 들어가 무기를 획득하여 무장폭도가 되었다. 민병대가 조직되고 모집되어 수도를 통제하였다. 7월 14일 화약과 무기를 획득하기 위해 그들은 바스티유로 갔다. 시 위원회 위원들은 협력을 약속한 형무소장과 평화적 타협을 위해 군중에 합세하였다. 그러나 배치된 군인들이 침입자에 발포하여 일련의 오해가 생겨 군중들이 폭도로 변하였다. 침입자들 98명과 감옥 수비대 7명이 사망하고 죄수 7명이 석방되었다. 바스티유 감옥의 함락은 시민의 힘을 나타내는 상징적 행위로서 왕의 군대에 위협을 받는 국회를 구하였다. 왕은 시민 위원회를 새로운 시 정부로 인정하며 왕궁의 군대를 철수시키고 도전적 귀족과 성직자들이 국회에 합류하도록 명하였다. 혁명의 여파로 “산적이 온다”라는 유언비어로 농부들이 무장하고 프랑스 5개 지역에서 8월 초까지 농민반란이 일어났다. 봉건제도를 파괴할 목적으로 지주들이 잡부금과 십일조를 포기하고 의무를 기록한 문서를 파기하도록 요구하였다. 국회는 8월 초순 봉건적 권리와 귀족과 성직자의 특권을 철폐하고 봉건주의가 폐지되었음을 선언하였다. 이것은 핍박받던 평민들이 원하는 개혁의 시작이었다.
8월 26일 국회는 인권선언을 채택하고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자유롭고 평등하다고 선언하였다. 루이는 국회의 선언을 인정하지 않았다. 정치적 혼란과 흉작으로 파리의 물가가 상승하여 1789년 10월 5일 수많은 파리의 여성들이 무기를 들고 시청 앞 광장에 모여 베르사유 궁전으로 난입하고 국왕과 의회에 식량을 요구하는 기본적 생존권을 위한 투쟁을 하였다. 이들의 압력으로 루이는 인권선언을 인정하고 데모대에 이끌려 파리 튈르리 궁전에 가족과 함께 이주하여 루이 일가는 파리 시민의 감시 속에서 살게 되었다. 국회는 성직자의 시민 헌법을 1790년 7월에 공표하여 교회의 재산을 몰수하고 주교와 신부는 시민들이 선출하고 국가가 보수를 지급하였다. 천주교는 국민종교로서 인정되고 여타 종교는 정부의 지원 없이 자유롭게 예배하였다. 그러나 주교 (134명 중) 130명과 신부 (7만 중) 4.6만이 보수를 받기 위한 선서를 거부하여 교회와 의회의 갈등이 증가하였다.
1791년 9월 국회는 새로운 프랑스 헌법을 승인하고 단일 의회가 통치하는 입법의회(Legislative Assembly)를 출범시켜 입헌군주제를 수립하였다. 약 5만의 선거인단을 구성하여 745명의 입법의회 의원을 간접적으로 선출하였다. 의회는 재선을 금지하여 귀족과 성직자는 대부분 사라지고 자본가 계층이 입법의회를 지배하여 전국을 83개 구역으로 나누어 행정을 정비하였다. 혁명적 합의는 성직자들의 불만, 물가상승으로 고통받는 저소득층, 행정 지연으로 (봉건) 잡부금을 내는 농민들에 의해 도전을 받는 가운데 급진적 혁명을 추구하는 자코뱅이 도시의 무산대중과 가난한 농민을 기반으로 지지세력을 확장하여 자코뱅 클럽의 수가 증가하였다. 한편 1791년 6월 루이는 도망치다 잡혀서 파리로 송치되었다. 혁명 파급이 두려운 오스트리아와 프러시아는 동맹을 결성하여 프랑스에 공격을 개시하였고 프랑스도 전쟁을 선포하였으나 보수적 귀족 장교들은 혁명정부에 소극적으로 협조하여 혁명군은 각지에서 패배하였다. 그러나 프랑스군은 9월 20일 발미 전투에 승리하여 적군을 퇴치하고 전투에 참여한 무산계급의 발언권이 증가하였다. 혁명전쟁은 민족주의를 자극하여 지방 의용군이 조직되어 파리에 모여 입법의회를 해산하고 보통선거로 750명을 선출하고, 1792년 9월 21일 국민공회를 구성 하여 중산층이 지배하는 프랑스 제1공화국을 수립하였다.
국민공회 (National Convention, 1792-95): 국민공회는 1793년 1월 21일 콩코드 광장에서 루이 16세를 단두대에 처형하고 구정권을 완전히 끝내었다. 루이의 처형은 국 내외에 큰 충격을 주었다. 영국을 중심으로 제1차 대프랑스 동맹이 결성되어 외국 군대가 프랑스 국경을 위협하였다. 대내적으로 왕당파의 반란, 물가의 상승, 화폐가치의 폭락, 식량의 부족, 전쟁을 위한 새로운 세금, 새로운 군대의 징집, 반혁명적 정서 등으로 소용돌이쳤다. 파리 지방정부는 하급 상공인들이 공동체를 지배하였다. 식량 위기에 아무 정책을 취하지 않는 지롱드파에 분노가 폭발하여 이들은 6월 초 국민공회를 침입하여 지롱드의 지도자들을 체포 처형하고 로베스피에르가 권력을 장악하였다. 그는 공안위원회를 만들어 공포정치로 반대파를 차례로 단두대로 보냈다.
테르미도르의 반동(Thermidorian Reaction): 공포정치가 계속되자 1794년 7월 27일 국민공회는 반대파 바라의 주도로 로베스피에르와 그 일파를 탄핵하여 단두대에 처형하였다. 국민공회는 파리공동체의 간부 70명을 사형에 처하고 공동체는 국민공회에 예속시켰다. 투옥된 로베스피에르 반대자는 석방되고 공평한 재판이 허용되며 급진적 잡지는 사라지고 자코뱅 클럽은 문을 닫으며 급진 좌파가 사라지면서 부르주아 계급이 혁명을 재장악하였다. 프랑스는 공포정치를 끝내고 혁명의 급진적인 단계를 마감하였다. 한편 프랑스군은 징병제를 도입하여 1793년 9월 50만 명에서 연말에 1,169,000명으로 증가하였다. 1794년 프랑스군은 벨기에 연합군을 철수시키고 벨기에와 라인 지역을 점령하였다. 프러시아와 전쟁은 1795년 4월 유리한 평화협정을 하였고 스페인과도 평화를 맺었다.
입헌 공화국과 총재정부(1795-99): 로베스피에르가 처형된 후에 국민공회는 새로운 헌법을 초안하여 국민투표에 부쳐 1795년 9월 27일 공표하였다. 새 헌법은 의회는 양원제로 입법 과정의 속도를 완화하여 단원제의 취약점을 보완하였다. 하원은 500명으로 법안을 초안하고 상원은 (40세 이상) 250명으로 법안을 검토하고 승인하였다. 행정부의 권력은 5년 임기인 5명의 총재에 있으며 하원이 추천하고 상원이 선발하였다. 대의원은 간접선거 방식으로 선거인단 3만 (인구의 0.5%) 을 1차 선출하며, 의회의 의원은 매년 1/3을 교체하여 2/3의 인원은 바뀌지 않아 의회가 보수적 또는 완만한 입법을 하게 되었다.
이처럼 프랑스 정치체제는 상원 250명과 하원 500명의 의원이 입법권을 가지며 5명의 총재 (Directors) 가 행정권을 갖는 입헌 공화국으로 새로운 운영체제에 돌입하였다. 그러나 총재정부는 반대파의 반란에 직면하였다. 우에서 왕국의 재건을 꿈꾸는 왕당파들은 폭력적 수단으로 그들의 교란을 계속하였다. 좌에서 자코뱅은 지속하는 경제 문제로 그들의 세력이 재생될 것이라고 희망하였다. 더욱이 영국의 봉쇄는 상품의 이동을 방해하고 상승하는 물가는 화폐의 구매력을 약화하며 주식가격의 붕괴는 투자자들을 파산시켰다. 내부의 무질서와 외부의 전쟁은 문제가 되는 경제를 더욱 악화시키고 대다수 국민을 가난하게 만들었다. 혼돈과 빈곤은 사회적 불만을 초래하고 공산주의 꿈을 추구하도록 유혹하였다. 그라쿠스 바뵈프(1760-97)의 저술 평등의 음모(1796)는 가난한 대중이 부르주아 정권에 대항하여 무장봉기를 일으키고, 민주적이며 평등한 공산주의를 향하여 변화하는 단계에서 혁명적 독재정권을 수립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그는 체포되어 1797년 5월 단두대에 처형되었다.
한편 국민공회는 나폴레옹을 방위 사령관으로 임명하여, 그는 1795년 10월 포병을 투입하여 왕당파의 반란을 격퇴하고 총재정부 수립을 방위하였다. 총재정부는 1796년 3월 그를 이탈리아 방면 사령관으로 임명하여, 그는 롬바르디로부터 오스트리아를 축출하였다. 1797년 10월 프랑스와 오스트리아는 평화협정을 맺고 오스트리아는 네덜란드와 롬바르디를 프랑스에 양도하고 대신 베네치아와 달마티아를 인수하였다. 이로 인하여 1792년에 결성된 제1 대프랑스 동맹은 해체되었다. 그는 12월에 파리로 돌아왔다. 나폴레옹이 파리에 있는 것이 불안한 총재정부는 그를 이집트 방면 사령관에 임명하여 그는 1798년 5월 16,000해군과 38,000 육군 병력을 다수의 전함과 수송선에 편성하여 카이로에 도착하자 터키는 아무 저항 없이 항복하였다. 그는 1799년 2월 13,000 병력으로 시리아를 공략하고 이집트로 복귀하였다. 그가 이집트에 있는 동안 오스트리아, 러시아, 영국이 제2차 대프랑스 동맹을 구성하여 프러시아의 프랑스군을 축출하고 이탈리아 정복지를 탈취해 갔다. 그는 총재정부가 1799년 5월 보낸 복귀 명령을 받지 못하고 참모들과 함께 파리에 도착하였고 총재정부는 1799년 11월 9일 그를 파리 수비대장에 임명하였다.
프랑스혁명의 유산: 프랑스혁명은 민주주의 이념을 추구하여 구체제를 전복하고 새로운 정치 질서를 창출하였다. 정치적으로 혁명은 자유와 평등을 증진하고 자본가 주도의 공화주의가 실현되도록 장려하는 것이었다. 프랑스 공화주의자들은 두 개의 전선, 즉 빈자에 대항하는 사회적 보수주의자로 또는 우파에 대항하는 진보적 이념 주의자로서 투쟁해 왔다. 18세기에 유럽의 교육 받은 계층은 세계주위에 함몰되었지만, 혁명전쟁은 왕조가 아닌 국가를 지키기 위하여 군사적 징집을 강요하여 프랑스인들이 국가주의(민족주의)를 배우도록 영감을 주었다.
경제적으로 혁명으로 농부들은 몰수된 교회 농지를 저렴한 가격으로 매입하여 번영을 이루었다. 그들의 소유권이나 자본주의는 자신의 재산을 지키기 위하여 무산대중의 사회주의적 공세에 저항하여 그들을 보다 보수적으로 만들었다. 혁명은 구체제 하의 특권으로 형성된 부를 재분배하였다. 새로운 질서하에서 능력이나 특권은 새로운 그룹의 부자를 창출하였다. 평등은 절대왕정의 계층 특권과 공화정에서 숨겨진 혜택과 능력으로 인해 불안전한 균형점을 형성하였다. 산업, 상업, 재정의 확대는 귀족보다 많은 자본과 우수한 두뇌를 가진 부르주아가 승리하게 했다.
사회적으로 구체제의 붕괴는 성직자와 귀족들은 지금까지 누려온 특권을 상실하였다. 많은 귀족이 단두대에 처형되거나 자존심 상하는 직업으로 해외에서 살았고 성직자들은 프랑스를 떠나거나 정치와 경제에서 영향력을 상실하였다. 중산층은 위상이 상승하였고 무산대중은 정치에서 그들의 목소리를 높였다. 언론인과 신문은 공화국 정부에서 여론을 형성하는 데서 학교보다 더 큰 영향력이 있었다.
종교적으로 혁명은 종교의 자유 혹은 비 기독교화 정책하에서 기독교를 합리주의로 대치하여 종교와 정치의 분리를 추구하였다. 교회 토지는 몰수되고 가톨릭 성직자들은 국가로부터 보수를 받았다. 가톨릭 달력은 혁명 달력으로 대치되어 1793~1805 기간에 공식적으로 사용되었다.
이념의 발전: 프랑스는 혁명으로 1792년 공화주의 정부가 수립되었고 공화주의가 왕권주의를 억누르고 민주주의 질서를 건설하여, 자아의식에 의해 민족주의, 자유주의, 사회주의, 공산주의 등의 이념이 발전하고 19세기 정치 경제 사회 종교 모든 분야에 혁명적으로 영향을 미쳤다. 사회주의자나 공산주의자 들은 혁명에 더 긍정적으로 반응하였고, 20세기 중남미와 아시아의 국가들은 민족주의 이념으로 독립을 성취하였다.
TO BE CONTINUED
(e)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시대 (1799-1815)
(f) 유럽의 종교와 정치 (1648-1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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