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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사12- 계속2/재미학자 Hugo W.Kim

양곡(陽谷) 2023. 7. 3. 00:36

연재 12. 근세초기 유럽(1400-1715)의 경제와 사회 (Continued 2)

(c) 무역과 수송

수송과 무역로: 지중해 무역: 지중해는 동부에서 콘스탄티노플과 알렉산드리아는 기독교 세계와 이슬람 세계를 연결하고, 서부에서 바르셀로나와 세빌은 스페인 내부로 접근하는 항구였다. 콘스탄티노플은 흑해 연안의 수출을 통제하고, 나일강은 카이로와 알렉산드리아 간의 수송을 촉진하였다. 서부의 곡물 산지는 나폴리와 시칠리아로 자급자족할 수 있고, 동부는 레반트와 이집트였다. 북해산 청어를 소금에 절이거나 말려서 네덜란드 상선으로 지중해 도시에 보급하였다. 스페인은 올리브유, 포도주, 가죽과 가죽제품을 수출하였고, 사이프러스는 설탕을 수출하였다. 지중해 전역에서 금속과 금속제품이 거래되었고, 밀라노는 무기를, 베네치아는 책과 유리제품을, 제노아는 종이를 수출하였다. 양념류는 아덴만-홍해-카이로 또는 호르무즈-메소포타미아-알레포 또는 호르무즈-아랍-소아시아를 경유 지중해로 연결하였다. 포르투갈 상선이 아프리카 남단을 거쳐 안트워프나 암스테르담으로 직접 수송하여 기존의 무역질서를 변화시켜, 17세기에는 네덜란드가 세계무역을 주도하였다.

북유럽 무역: 네덜란드가 사운드 해협을 통하여 북해 루트를 개발하여 기존 함부르크-루벡의 육로수송을 제압하였다. 16세기에 브루게스항의 퇴적으로 안트워프가 무역 중심으로 성장하였다. 1576년 내전에 스페인이 개입하여 무역의 중심이 암스테르담으로 옮겨갔으며, 17세기에 세계무역을 네덜란드가 주도하였다. 곡물은 폴란드 경우 비스와강을 따라 바지선으로 단치히에 도착하면, 네덜란드 상선이 곡물을 선적하여 사운드 해협을 통하여 암스테르담에 하역하고 유럽에 공급하였다.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프랑스와 발트해 지역에서 고물선을 수입하여 독일과 네덜란드 선박으로 운송하였다. 1670년 네덜란드는 발트해와 북해에서 735척(평균 280t) 이 화물을 수송하였다. 플랑드르가 유럽 모직의 중심으로 16세기 수출의 3/4을 차지하였으며, 영국, 아이랜드, 스칸디나비아, 발트해 지역에 수송하여 곡물, 생선, 목재, 양모와 교환하였다. 1601년 런던에 입항한 선박 714척 중에 영국 207척, 독일 40척, 네덜란드 360척이었다. 16세기 중반 선박용 목재가 감소하여 발트해 항-사운드 해협-영국항에 수송하였다.

대양 횡단무역: (1) 포르투갈은 1500년부터 20년간 인도항로를 확보하고, 해군력으로 고아와 같이 요새화된 항구를 건설하고, 호르무즈와 말라카의 전략적 거점에서 모슬렘 선박에 통행세를 부과하였고, 양념류(인도-후추, 세일론-시나몬, 셀레베스-육두구, 보르네오-장노, 몰루카 및 반다-정향) 을 정기적으로 리스본으로 선적하였다. 그들은 인도네시아에서 피복과 양념류를 교환하고, 돌아오면서 동아프리카 해안에서 금과 상아를 후추와 일부 교환하였다. 고아에서 유럽상품을 선적하여 말라카 경유 마카오에서 비단옷 및 팔찌와 교환하고, 일본 나가사키에서 팔고 은을 매입하여, 회항 편에 은이 고가인 마카오에서 금과 교환 하였다. 포르투갈은 1618년까지 매년 대형 선박을 나가사키에 보냈으나, 네덜란드의 공격위험으로 중단하였다. 한편 마카오에서 비단을 구매하여 마카사에서 양념류와 교환하고, 마닐라에서는 멕시코 은과 교환하였다. 고아-리스본 간의 함대 이동은 일기불순에서 오는 바다의 위험, 네덜란드 함대의 공격, 괴혈병이나 장티푸스 같은 질병의 위험, 노후화된 선박의 결함, 낡은 선박에 습관적인 초과 선적, 관리체계의 취약점 등이 문제를 일으켰으며, 위험의 순간에 직업주의와 규율에 따르는 훈련이 부족하였다. 1620-23 기간에 총 34척의 항해 중, 난파 8, 나포 2, 회항 9척이었다. (2) 스페인은 세빌레항에서 식민지로 일용품(공구, 도기류, 포도주, 올리브 기름, 밀가루 등의 식품)을 독점적으로 선적하였다. 1540 년 멕시코와 페루에서 은광이 발견되어 공산품 수요가 증가하였고, 식민지에 의류, 무기, 가정용구, 유리, 종이, 책 등의 공산품을 수출하고, 가죽, 설탕, 염료, 담배 등과 함께 대량의 은을 수입하였고, 멕시코는 페루에 공산품을 팔고 은을 싸게 매입하였다. 스페인은 아카풀코에서 태평양을 횡단하여 마닐라에 멕시코 은과 광둥 비단을 교환하고, 은은 스페인으로 다시 선적되었다.

(3) 네덜란드의 프루이트는 저렴한 건조비, 최다 선적용량, 소수 선원 소요, 운송비 저렴으로 고객을 확보하여, 1598~1602년 사이에 51척이 출항하였다. 동인도회사가 출범하여, 1619년 자카르타를 요새화하고, 1652년 케이프에 식민지를 건설하고 보급기지로 사용하였다. 네덜란드는 포르투갈의 주요거점을 인수하여 무역을 독점하고, 중국 및 일본과 무역을 계속하였다. (4) 영국은 1651년 항해법을 제정하여 영국과 식민지 간에 화물 수송을 하는 외국 선박에 많은 제약을 주었다. 1652년부터 영국과 네덜란드 사이에 3회의 전쟁으로 상선과 어선이 다수 파괴되어 네덜란드는 점차 쇠퇴하였다. 런던의 버지니아 회사는 군사적 훈련을 받은 104명이 금은을 캐려고 1607년 제임스타운에 정착하였으나 실패하여, 1623년 왕실이 인수하고 담배를 재배하여 유럽에 수출하였다. 뉴잉글랜드 지역에는 1620년대 모집한 이민자들이 정착하였다. (5) 프랑스의 식민지는 캐나다, 서아프리카, 서인도, 마다가스카르, 인도, 세일론 지역이며 플로리다의 세인트오거스틴(1565)과 퀘벡(1608)에도 정착하였다. 프랑스인들은 인디언을 경제적 동반자로 생각하였으며, 털과 가죽을 거래하고 인디언 여성과 동거하며 미시시피강을 따라 이주하여 1718년 뉴올리언스에 정착하였다.

신세계를 위한 유럽무역제도: 스페인은 1494년 상인조합(Consulado)을 만들어 양모 수출의 독점을 허용하였다. 모든 수출 양모는 부르고스로 수송하고, 노새의 등에 실어 빌바오 해안에서 북부 유럽으로 선적하였다. 상인연합은 스페인의 모든 수출상품을 독점하여 세금수입을 올렸다. 16세기에 국가부채가 누적되고 아메리카로부터 은의 수입이 증가하여, 물가상승으로 소작인들이 고통을 받았다. 군사주의와 신교탄압은 거의 계속되는 전쟁 속에서 인력과 물자를 고갈시켰다. 양모 가격의 급격한 상승으로 양의 사육은 왕의 관심사였다. 북부 산악지역에서 자라는 메리노 양은 겨울을 나기 위하여 남부 온난한 지역으로 이동하면서 농작물을 짓밟아 피해가 컸고, 곡물 생산 감소로 수입이 불가피하여 곡물 가격이 상승하고 민생이 어려웠다. 1503년 세빌은 무역 독점 체제하에서, 모든 상선은 무장호위를 하였고, 독점과 제한으로 일관된 정책은 탈세와 밀수를 조장하였다. 포르투갈은 조선 설계, 항해기술, 여타 관련된 기술이 우수하였고, 인도항로를 발견한 것은 큰 행운이었다. 그들은 바다를 건너 모험하는 정열, 용기, 탐욕이 있었다. 1530년대 포르투갈의 원양 선박은 300척으로 그 일부가 브라질과 아프리카 항로를 운항하였다. 제한된 선박과 인력으로, 2대양을 모두 거래하기는 어려웠다. 왕은 독점을 집행하는 왕실의 관리나 독점을 대여하고 농지를 경작하는 계약자에 의존하며, 모두 비효율과 속임수가 늘 있었다. 1600년 포르투갈 인구의 1/3이 유대인의 피가 섞여, 종교 재판과 상호의심과 불신이 그들을 수 세기 동안 괴롭혔으며, 결국 이민으로 재산, 숙련 노동, 전문인력이 해외로 유출되었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VOC): 1602년 네덜란드는 영국의 EIC를 참조하여 동인도회사를 창립하여 아시아 무역의 독점을 허용하고, 요새를 구축하여 군대를 유지하고, 현지 통치자들과 조약을 체결하는 권리를 부여하였다. VOC는 1603년 자바의 반텐에 영구적 무역거점을 구축하고, 1611년에 자카르타에 요새화된 항구도시를 건설하여, 전권을 가진 총독을 임명하고(17명의 주주), 인도 위원회를 구성하여 보조하였다. 1604년 영국 EIC가 인도네시아 여러 섬에 진출하여 무역 도전으로 1620년 작은 충돌이 있었으나, 영국군은 철수하였다. 1619 잔 코엔 총독이 부임하여, 반다섬의 토착민을 이주시키고 이민자를 요청하였으나, 희망자가 없어 실패하였다. 아시아에서 유럽상품의 수요가 없어 양념류 구매로 생기는 적자를 해소하기 위해 아시아 삼각무역을 하였다. 인도와 중국에서 비단, 면화, 자기, 피복을 구매하여, 일본에 가서 팔고 은을 매입하며, 인도네시아에 와서 양념류를 사들여 본국으로 선적하였다. VOC는 기독교의 전도를 지원하고, 유럽의 생각과 기술을 아시아에 전파하며, 나가사키 부근 데지마에 무역 포스트를 200년 이상 유지하였다. 포르투갈은 인도에 무역 포스트로 고아를 남겼고, 네덜란드는 케이프타운에 식민지를 건설하고, 무역 포스트로는 페르시아, 벵갈, 말라카, 타이, 캔톤, 대만을 유지하였다. 1669년 VOC는 상선 150척, 전함 40척, 고용인 50,000명, 용병 10,000명, 배당금은 투자액의 40%였다. VOC는 1670년 중일 관계의 변화로 이윤이 많은 일본과의 무역이 감소하였고, 일본은 금은의 반출을 제한하였다. 또한, 제3차 영국-네덜란드 전쟁(1672-74) 이후 해군 해외 주둔이 감소하여 아시아 지역을 영국에 양도하였다. VOC는 1630~70 기간에 년 평균 이윤은 투자액의 18%였으나 1730년 이후 급감하였다. VOC는 경쟁력 약화와 영국과의 전쟁(1780-84)으로 아시아 해군력이 반감하여 1799년에 해체되었다.

영국 동인도회사(EIC): 영국은 1600년에 EIC를 창립하고, 10년간 3회에 걸쳐 개척단을 파견하여, 1명의 총독과 24명의 이사로 운영하는 아시아 무역회사의 기초를 다졌다. EIC는 최초 항해에서 자바로부터 양념을 수입하려고 인도네시아 반탐에 공장을 세워 1683년까지 운영하였다. 한편 인도의 수라(1612)를 중계 거점으로 동부해안의 마칠리파트남에 최초공장을 설립하였다. 무굴제국과의 협약으로 마드라스(1643)를 취득하여 요새화하고, 뭄바이(1668), 캘커타(1690)에 공장을 설립하였다. 주요지역은 요새화하고, 1647년 인도에 23개 공장을 설립 하였다. 네덜란드는 1640- 41년에 포르트갈을 축출하고 믈라카 해협에서 무역을 독점하였다. 그러나 영국과 경쟁이 증가하였고, 영국은 3회의 네덜란드와 전쟁(1652-74)에 승리하여 지배력을 강화하였다. 영국은 면화, 비단, 염료, 초석 등을 수입하고 주로 현찰로 지급하였다. 무갈 황제는 일부 지역 관세를 면제하였고, 1717년부터 모두 면제하였다. EIC는 바탐과 말레이 항구에서 중국 상인으로부터 차를 구매하여 1689년 중국 시아멘섬에서 선적하였다. 네덜란드가 쇠퇴하여 영국은 인도 수출에서 얻은 이익으로 중국 시장에 공격적으로 진출하였다. 영국은 처음 150년간은 수백의 병력으로 무역을 보호하였으나, 1750년에 3,000명, 1778년에 67,000명의 군사력을 유지하는 한편, 인도군을 훈련하였다. 영국 정부는 EIC가 아메리카 식민지에 중국에서 수입한 차를 판매하도록 허용하였다. 이로 인하여 보스턴 티 사건이 일어나 미국 독립운동의 한 발단이 되었다. EIC가 무역적자를 해소하기 위하여 인도산 아편을 중국에 판매하여, 중국은 무역을 제재하고 영국과 무역갈등으로 결국 아편전쟁(1839-41)이 발발하였다.

프랑스 동인도회사(FEIC): 프랑스 동인도회사는 1603년 네덜란드 영국과 같이 주식회사로 창립되어 15년간 인도 태평양 지역에서 무역 독점을 허가하였다. FEIC는 마다가스카르 식민지 개척에 실패하여 부근의 리유니온섬에 항구를 설치하였고, 1719년 인도에 거래를 시도하였으나 파산하고, 재편성하여 1723년 영업을 계속하였다. 무굴제국이 쇠퇴하여, 인도 남부의 지방 통치자들과 동맹 하여 그들의 이익을 보호하는 인도정치에 개입하였다. 1741 년부터 프랑스는 인도와 영국에 대항하여 공세적 정책을 추구하고, 폰디췌리와 찬더나고르 등 수 개의 인도 무역항을 1954년까지 통제하였다. 7년 전쟁(1756-63)에서 프랑스는 영국에 패하였으나 폰디췌리는 불령 인도의 수도로 1761년 탈환하였다. 프랑스 경제는 서인도에서 더욱 많은 이윤을 낼 것으로 보았기 때문에 1769년 프랑스 동인도회사는 해체되었고, 같은 해 루이 16세는 회사부채를 지급하고 국유화하였다. 1785년 주식회사로 다시 전환하여, 거래하는 국가와 7년 동안 독점을 허용하였으나, 프랑스혁명으로 1790년 독점은 폐지되었다.

무역 패턴의 변화: 1450-1750 기간에 지리상의 발견으로 유럽의 국가들이 식민지를 확장하고 무역을 확대하였다. 오토만 터키는 1453년 콘스탄티노플을 정복하여 모슬렘 세력이 기독교 세계에 도전하였다. 유럽 국가들은 아프리카 해안을 따라 인도양을 경유 모슬렘 세력의 중심을 포위하면서 아시아 무역을 지배하였다. 중국과 아랍에서 유입된 기술—나침판, 항해 장비, 총포, 화약—을 발전시켜 전쟁 승패에 큰 영향을 미쳤다. 선박 제조기술의 발전은 큰 함선에 화포로 무장하고 새로운 군사기술을 적용하여 해양제국을 건설하였다. 이러한 정치 경제 군사적 변화가 무역의 패턴에 영향을 주었다. 곡물 거래: 포르투갈은 옥수수의 수출에서 올리브와 포도주 수출로 변화하였다. 스페인은 곡물 부족으로 옥수수를 수입하였다. 네덜란드는 발트해로 곡물을 수송하였다. 폴란드는 밀, 보리, 옥수수를 단치히에 집산하여 암스테르담으로 수출하였다. 1661~1720 사이에 사운드 해협을 통과한 선박의 밀 77.5%와 보리 76.5%가 네덜란드의 선박이었다. 가축 거래: 1601-20 기간에 덴마크로부터 매년 가축 수출은 30,000 은kg 이며, 곡물 수출은 55,000 은kg 이었다. 가축은 최초 사육지역에서 충분히 자라게 하여, 주요 소비지역까지 장거리로 몰고 오면 살이 빠져 소비도시 인근 지역에서 충분히 살찌워서 시장에 팔았다. 양념류 거래: 양념류는 후추, 시나몬, 생강, 육두구, 정향 등이며 약품류는 커피, 차, 담배, 설탕 등으로, 그중 후추가 아시아 거래에 주된 품목으로 네덜란드가 독점하였으며, 동인도회사는 양념류의 생산을 제한하여 독점가격을 유지하였다.

구리 무역: 16 세기부터 유럽에서 구리를 주조화폐로 사용하였고, 화포 제조에도 사용하여 전략적 상품이 되었다. 동전이나 화포 이외에도 구리는 가정용 기구, 부엌 용품, 산업 기구, 선박제조, 합금 기타 다양하게 사용되어 수요가 증가하였다. 유럽에서 스웨덴은 구리를 최다로 수출하였고, VOC는 1623년부터 일본과 매년 20,000-30,000 lbs(네덜란드)를 독점수입으로 계약하여, 일본은 1623년 123,000 lbs를 1626년 300,000 lbs를 수출하였다. 그 후 1638~45년 사이에 일본은 구리를 전략물자로 간주하고 수출을 금지하여, 1672-75년 사이에 암스테르담에서 구리 가격이 절정에 달하였다. 섬유제품 거래: 유럽은 전통적으로 모직 피복이 지배적이었으나 점차 린넨 제품과 혼용하였다. 16세기에 독일 북부의 린넨 제품이 스페인과 신세계에 침투하였다. 1700년 이후부터는 중국의 비단이 유럽에 수입되었다. 17세기에 영국과 네덜란드가 지중해 지역에 피복 수출을 증가하여 이탈리아 수출이 감소하였다. 무역의 균형: 유럽상품은 아시아에서 경쟁력이 약하고 유용성이 부족하여 무기류나 기계류를 제외하고는 수요가 미미하였다. 유럽의 수입은 주로 유럽 자체 안에서나 아프리카와 아메리카에서 공급하였다. 아시아는 은값이 중국과 인도네시아에서 금값의 1/12였으나, 유럽에서는 1/14~1/15이었다. 유럽은 아시아 및 발트해 지역과의 무역에서 수 세기 동안 적자를 유지하였다.

TO BE CONTINUED
(d) 현대 금융 및 재정의 출현 (1500-17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