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례지도사교육

[스크랩] 섹스와 죽음

양곡(陽谷) 2013. 7. 12. 16:50
 

                           <섹스와 죽음>


 섹스와 죽음의 관계는 예전부터 논란의 대상이었다. 현재도 여전히 섹스와 죽음을 관련시키는 것이 여러 사람들의 관심대상이고 이에 대한 관심은 날로 증가하고 있다. 몇몇 언어학자들은 오르가즘을 뜻하는 고대영어가 죽음을 의미하는 고대영어의 뿌리와 동일하다고 말한다. 옥스퍼드 사전은 오르가즘을 격정, 흥분상태(rage)로 설명한다. 프랑스어로 오르가즘은 “작은 죽음(The little death)”를 의미한다. 산스크리트어인 니르바나는 적멸(寂滅)을 의미하는데 이는 “모든 것이 소멸된 상태”를 말한다.

 여러 세기에 걸쳐 많은 시인들이 섹스와 죽음의 관계를 표현해 왔다. 정신의학자나 정신분석학자들도 오랫동안 섹스에 대한 두려움은 곧 죽음에 대한 인간의 두려움이 가장된 것이라 말해왔다. 인류학자들은 종교를 통해 제도화된 성적 금기들은 실상은 죽음을 금기시하기 위한 또 다른 노력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결국은 성적 금기란 결국은 죽음금기와 동일한 의미라는 것이다. 그러한 금기들은 사람들이 비도덕적이기 때문이 아니라 죽음이 상존하기 때문에 결국은 실패한다.


 섹스는 작은 죽음이다.

 사람들은 우리 육체에 대한 지식을 통해 육체와 섹스의 관계가 명백함을 알기위해 굳이 의사나 사회심리학자 등이 될 필요는 없다. 섹스는 육체에 관한 현상이고 육체는 죽음과 분리될 수 없음이 자명하다. 만일 에로틱함이 “육체와 관련된 것”이라면 그것은 죽음이 에로틱한 것이 될 수 있음을 상기시키는 것이다. 이러한 견해는 서구 빅토리아 시대 이전에 섹스와 죽음을 등치시켰던 역사적 경험을 생각나게 한다. “일상의 단절”로서의 죽음과 섹스는 기본적으로 몸이 겪는 경험에 기반한다. 오르가즘이란 모든 것의 상호 구분과 생각과 분리된 물리적 의식이 용해되는 암흑 속으로  침몰되는 것 이외에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성적 오르가즘과 같은 황홀경의 모든 경험은 모든 것의 소멸의 경험이다. 그것은 우리의 인식이 우리를 시간과 공간 속에 한정시켜 일시적으로 체현해서 그렇지 영원이란 개념을 염두에 둔다면 결국은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경험이다. 우리는 시공의 이전이 육체적 죽음의 형태임을 알기 위해 조금 더 나아갈 수는 있다. 공(空)으로의 침몰은 절대적 희열이다. 그래서 진정 참다운 섹스는 황홀을 아는 것이며 동시에 죽음을 알고 삶을 아는 것이다. 우리의 위대한 죽음은 순간의 공포를 야기하지만 궁극적으로는 니르바나에 이르는 문이다. 그것은 모든 것이 소멸하는 상태, 즉 열반이다. 우리의 “작은 죽음들”은 우리의 육체적, 정신적 자아가 소멸되는 섹스라는 작은 황홀경을 통해 이러한 궁극적 여행의 과정을 보여준다.

 소멸은 우리를 두렵게 한다. 그것은 남자든 여자든 어린아이든 노인이든 우리 모두에게 동등한 정도는 아니지만 어떻든 두렵게 한다. 우리는 스스로를 그러한 두려움과 공포 속에 지배받게 하기보다는 우리의 집합적 반응을 통해 소멸을 통제하여 섹스와 죽음을 우리의 통제 하에 두려 노력해 왔다. 섹스와 죽음에 대한 통제 불능이 여자보다는 남자에게 보다 문제가 되는 이유에는 다양한 문화적 원인들이 있다. 특정 문화권에서는 어떤 의미에서 남자라는 것이 힘과 통제력을 가지고 있음과 동일한 의미이다. 반면 성교를 하는 것 -적어도 오르가즘 상태로 가는 것-은 통제력을 잃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인간이란 죽음에 직면하여 통제력을 잃고 나약해지는 존재이다. 따라서 죽음과 섹스라는 관점에서 보면 남자들에 대한 생물학적 요구와 문화적 요구사이에는 기본적인 대치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엄청난 노력이 죽음을 통제하기 위해 가해졌다. 지금도 전 세계적으로 엄청난 에너지가 소멸, 즉 죽음과 섹스를 통제하고 관리하기 위해 쓰여 지고 있다는 사실은 그리 놀랄만한 것이 아니다. 인간은 끊임없이, 죽음 그 자체를 통제할 수 없기 때문에 죽음의 맥락(context)과 세부적인 것(details)들을 통제하기 위해 노력한다. 군대는 언제, 어디서, 어떻게, 어떤 이유로 죽음이 발생해야 하는지를 통제하기 위해 노력하고, 의료체계는 죽음의 시간을 훼방 놓고 죽음 원인을 부정하기 위해 다양한 기계들을 개발하며, 성직자들은 죽음을 궁극적으로 선과 악으로 구분되는 속의 질서에 혼란을 주는, 신속히 잡아들여야 할 것으로 취급한다.


 성적 심상(imaginary;心象)은 죽음통제에 대한 몰입을 반영한다.

 문화적 심상이나 상징들은 이러한 노력들의 결과물이다. 현대사회의 포르노 산업은 죽음과 섹스를 통제하려는 탐욕적 노력들을 반영하며 특히 남자들을 위한 섹스와 죽음간의 관계에서 보여 지는 문화적, 생물학적 수수께끼를 해결하는데 기여한다. 포르노 영화와 잡지들은 비록 그것이 직접적으로 죽음을 다루지는 않지만, 일상적으로 살아있는 주체들을 죽은 객체로 돌려 남자들이 -점차 여자들에게도- 그들의 성을 통제력을 잃지 않으면서 그들이 사정할 수 있는 환상세계로 위치시키도록 하는 것이다. 욕망의 대상 -욕망의 주체가 아니라-이 이미 죽은 세계, 즉 포르노 산업에서 이러한 욕구를 보다 충족시켜주는 성적상황을 상상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시간(屍姦;necrophilia)

 네크로필리아(시체에 성적흥분을 느끼는 것)는 포르노 시장에서도 아주 작은 규모인 것처럼 보인다. 극단적인 공포영화 속의 성도착증환자이다. 그러나 점차 성적 취향에 관계없이 남자나 여자 모두에게 보다 가능한 상태로 되어가고 있다. 몰론 우리 대다수는 한 장의사가 시신을 엠바밍하기 전에 시간을 하는 그 정신 상태와 충동을 상상조차 할 수 없기는 하다. 시간을 하는 자는 죽은 시신에 끌린 것이되 그 이면은 통제력에 대한 열망에 의해 동기화 된 것이다. 죽음조차 자신의 통제력, 즉 자신의 힘 앞에 굴복시키고자하는 유혹은 잠재적 도취, 아마도 강력하기는 하나 현실적으로는 기괴한 일로 인식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실은 우리가 인정하고 싶은 것 이상으로 시간은 우리에게 더 가까이 있다. 조금 다른 차원에서 보면 포르노그래피는 일종의 네크로필리아에 호소한다. 성적 대상으로서의 여성의 성적 이미지는 이미 거의 무생물에 가깝다. 성적 주체로서가 아니라 대상으로서 그들은 숨이 끊겼다. 이들 성적 대상들에게 개인적 삶이 있다면 -결점, 성취물, 실패 등- 그것은 그들 뒤에 있을 뿐이다. 모든 생명력과 개인적 삶이 제거된 상태의 상품화된, 객체화된 대상이 있을 뿐이다. 우리가 포르노에서 보는 것은 영혼이 없는, 그녀가 무얼 좋아하고, 남과의 차이가 무엇이며 의지가 뭐고 퍼스낼리티가 어떠한지를 보여주는 것이라곤 하나도 없다. 오로지 보여지는 것은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시체와 다름없는 육체들뿐이다. 이들 대상들은 단지 이상취향에 대한 하나의 유혹이라고 이야기할 수도 있지만 이러한 괴이한 성적 취향이 점차 시장규모가 커져가고 있다는 것은 분명 놀라운 일이다.

 오히려 인터넷이나 비디오의 “아마츄어 섹스”가 건강한 것일 수도 있다. 자기 진짜 이름과 삶을 가진 일반인들의 실제 성생활을 공개적으로 표현하는 “아마츄어 섹스”와 같은 집에서의 성적 심상들이 발아되고 있는데, 이것이 섹스를 삶의 세계로 되돌리는 건강한 시도라 할 수 있다. 혹자들에게 이것은 개인의 프라이버시 영역을 넘어서는 것이지만, 또 다른 이들에게 이것은 인간 성욕의 인간적 요소를 부각시키는데 오히려 필요한 것이라 주장한다.


 죽음의 패션

 성행위에서 탈생명화하는 과정과 비생물체와의 성교는 정상적인 포르노로 분류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것은 여성들이 비생명체인 마네킹과 닮은 정도에 따라 아름다움이 평가되는 하이패션(high fashion)을 통해 주류 문화 속으로 합류한다. 꾸밈없는 웃음이나 트림, 거친 웃음 등 그녀 자신의 삶을 그대로 보여주는 어떤 몸짓도 실은 교양 있는 모델이 될 자격을 상실하는 것이다. 오로지 천진난만한 무영혼성(soullessness)만이 사회적으로 바람직하고 섹시한 모델로서 대우받을 수 있다. 오로지 자신의 영혼과 개성을 감추고 변장하고 숨기는 여자만이 자신의 몸의 실체를 상실한 대가로 최고의 대접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은 그리 놀랄만한 것이 아니다. 사실, 영혼과 육체는 살아있는 한 한 몸체로 엮여있기 때문이다. 의류회사들에게 상을 받는 사람들의 모습은 자신의 영혼을 굴곡 시키고 자신의 육체를 굶기지 않고는 불가능한 사람들이다. 식욕부진의 결과로 인한 월경 중단은 “뇌쇄적 섹시스타”의 직업병 중에 하나이다.


 스텝포드의 부인들(The Stepford's Wives)1)

 포르노 스타도 아니고 패션모델도 아닌 평범한 부인들 역시 스스로 이 기준에 의해 평가하고 평가될 것이다. 포르노 스타나 패션모델과 -그리고 시신- 가장 비슷하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자유주의적 페미니스트가 아니라 바로 가장 전통적인 부인들이라는 것은 아이러니이다. 어떤 관점에서 보면, 전통적인 수동적 역할의 부인들은 여자를 살아있는 시체로 그리고 있는 흑백드라마처럼 보인다. 장례식장의 용품전시실에서 보여 지는 것처럼 꾸며지고 색칠해져 전시된 “사랑하는 마누라”는 마치 죽은 사람처럼 삶에 대한 의지가 없는 것처럼 그려지고 있다. 그녀의 몸은 자신의 의지를 전혀 드러내지 않거나 남편과의 섹스에 어떠한 요구도 하지 않을 때, 즉 시체와 같을 때만이 매력적인 것으로 여겨진다. 그녀는 불결하거나 계획되지 않은 어떤 것 -피나 땀, 마스카라, 눈물 등등- 도 요구되지 않을 때만이 믿을만하고 매력적인 것으로 생각된다. 진정 살아있는 시신으로서의 아내의 역할은 헐리웃 영화 “스텝포드의 아내들”이란 영화로 만들어져 유명해 졌다. 여러 면에서 가장 이상적인 아내의 역은 대통령 영부인이다. 왜냐하면 노출된 삶에서 자아 아닌 연출된 국모로서 행동해야하기 때문이다. 페미니즘의 만발에도 불구하고- 아니 그것 때문에- 여자들은 그들의 의지와 야심이 성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매력적이지 못함이 재인되고 있고 이것이 그들 고통의 근원이다. 타인에 대한 자아 없는 봉사는 “페미니즘의 상처를 치유”할 수 있고 진정한 평화와 행복을 가져올 수 있지만 도대체 자아에 대한 관심 없는 육체란 무엇이며 고통 받을 능력이 없는 인간이란 무엇이란 말인가? 그것은 곧 시체일 뿐이다.


 살인에 대한 열광

 비유에 의해 네크로필리아를 길들이는 또 다른 죽음과 섹스의 심상이 있다. 이것은 오르가즘과 격정의 관계와 관련된다. 적절한 말이 없기는 하지만 굳이 이름을 붙인다면 "살인광(homicidiphilia)"이다. 이는 현대 포르노 산업에서 거의 감추어져 있기는 하지만 실상은 아주 교묘하게 녹아있어 마치 모든 것을 보이지 않게 하고 있을 뿐이다. 천박한 “스너프” 영화들은 지하로 들어갔지만, 일부 유사한 것들이 인터넷을 타고 다시 등장하고 있다. 그들의 기본적인 개념들은 이 사회에서 제거되지 못하고 오히려 스너프 영화들의 심리적 역학(dynamics)들은 주류 문화 속으로 흡수되어 왔다. 포르노뿐 아니라 음악, tv, 텔레비전 드라마, 탐정 소설. 가족 오락 프로들이 끊임없이 섹스와 살인을 연결시키고 있다. 여자들이 성적인 문제나 성적 매력으로 인해 쇠사슬에 묶이고, 재갈이 물려지며, 발길질에 곤봉으로 맞으며, 총 맞고, 교살되며 칼에 찔리고 질식당한다. 남자들은 차별 없이 “선과 악”을 위해 살해된다. 이것이 현대 대중문화의 한 흐름이다. 섹스와 죽음의 연결은 단지 환상(fantasy)의 문제가 아니다. 성심리적 살인은 우리의 집합적 심상에 종종 떠오르는, 그리고 우리의 조간신문을 가득 채우는 점증하는 사회적 실재들이다.

-수많은 도시에서 여자들이 강간당하고 살해되어 길거리에 버려진다.

-전 세계적으로 성적으로 농락되고 유기되는 어린이들이 무수히 많다.

-전 세계적으로 정치적 살인은 성적 학대와 고문을 동반한다.

-강간과 살인은 역사를 점철해 왔고 많은 분석가들이 제시하는 바와 같이 성적 강박관념이 히틀러의 민족말살 욕구의 뿌리라고도 한다.

 그런데 이것들이 정상적일 수 있다는 거시 문제이다. 이것이 일탈적 성적 취향이 아니라는 것이다. 조사연구들에 의하면 많은 “정상적인” 미국 남성들이 살인에서 성적 이미지를 연상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것은 비유적이고 상상적인 것이 아니다. 실제로 영화나 tv를 통해 그런 장면을 봄으로써 그들의 음경이 발기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남자가 여자를 죽이는 것을 좋아하기는 하지만 누구든 개의치 않는다. 만일 우리가 죽음의 성적 충동을 인정한다면, 그것은 살인의 성적 매력을 수용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죽음을 “죽고 죽이는” 용어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많은 자유사상가들, 특히 페미니스트들은 섹스와 죽음의 관계나 적어도 섹스와 폭력의 관계는 기독교적 문화가 단조해 낸 것이라 주장한다. 그들은 섹스와 폭력의 폭력적 요소들이 다분히 남성적 요소들이며 종종 여성들을 향해 행해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또 이것들이 남성들에 의해 여성들을 공포와 사회적 복종의 항구적 상태로 유지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조장되어 온 것이라 말한다. 페미니스트들은 어떻게 섹스에 대한 우리의 대중적 관념들이 남성적 폭력에 의해 채색될 수 있었는지를 묻는다. 남성적 폭력이 생물학적인 것과 같은 사회적, 정치적 현상은 아니지 않은가?  남성 누드로 장식된 잡지 표지가(남성용 포르노 잡지의 커버에 남성 누드가 실린 적이 있음) 고기 분쇄기에 갈리는 것을 상상하기는 쉽지 않다. 여성들이 남자를 강간하고 구타하는 것 역시 상상하기 쉽지 않다. 살인 장면을 보며 흥분하는 여성들을 생각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여자들은 폭력 없는 섹스를 좋아한다. 여성 분석가들은 역사적으로 초기 문명시대에서는 성폭력에 관한 어떠한 증거도 발견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현대 사회의 성 시장에서 여성의 영향력이 증대해 왔기 때문에 점차 여성취향을 고려해 폭력에 대한 강조가 감소되어가고 있다고 주장한다. 여성 독자들은 보통 폭력적 섹스보다는 로맨틱한 섹스를 좋아한다. 하지만 많은 사회심리적 문헌들이 남성이 성적 공격을 하고 여성이 제지하는 상황을 제시하고 있다. 여성이 그들이 공유하는 인간의 공격성을 대신할 남자를 갖지 못하면, 그들 자신의 섹스에 대항해 행해지는 상호적 폭력에 대한 여성들의 참여가 증가할 것이다. 반면 또 하나의 인간적 본능인 나약함과 순수함을 행할 여성을 갖지 못한다면 남성들은 스스로 그러한 역할을 하게 되는 빈도가 증가할 것이다. 다른 남성에게 행하지는 부드러운 관계가 게이사회에서처럼 보다 폭넓게 형성될 것이다. 폭력과 고문도구들이 게이커플의 중요한 소지품들이라는 사실도 이를 반증한다.

 폭력을 제도화하는 여성의 능력은 논박할 수 없는 것이다. 남자와 동일하게 여성들도 사형제도를 찬성한다. 남자와 마찬가지로 여자들도 일부는 굶고 일부는 호화스럽게 사는 경제제도를 지지한다. 남자처럼 여자들도 인류를 종족과 계층으로 대상화하는 제도들에 참여한다. 남자들을 대신해 여자들이 종종 성역할에서 강요자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여성폭력이 남성폭력과는 달리 성적 요구를 덜 반영하고 있다. 그런데 최근의 연구들은 남성 공격성과 관련되어 있는 것이 테스토스테론이 아니라 에스트로겐이란 사실을 보여준다. 이것은 폭력에서의 성차가 남성과 여성의 생물학적 차이로 인해서가 아니라 문화의 차원에서 서로 다른 아이덴티티에 의해 존재한다는 것을 나타내 준다.


 삶 또는 죽음이 아니라 삶과 죽음이다.

 죽음과 살인이 관련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는 살인과 관련된 단어 없이는 죽음을 알 수 없는 그러한 문화체계를 만들어 왔다. 우리 생각에 우리의 영육이 함께 묶여 있는 것이라면 필연적으로 삶과 죽음의 문제가 아니라 사느냐 아니면 죽는냐의 문제일 것이다. 죽음이 부정될 때 삶도 부정된다. 죽음이 부정되는 한 삶 또한 부정될 것이다. 죽음이 부정되는 한 성적 심상은 시신에 의해 지배될 것이며 성적 탐구는 기계적 조작과 폭력적 광란에 의해 이루어질 것이다. 우리가 죽음의 전체적 양상에 익숙해질 때까지 우리는 진정 우리의 육체에 안락함을 느끼지 못할 것이다. 사실, 우리가 진정 보편적 의미의 죽음 뿐 아니라 개인적으로 필연적인 자신의 죽음을 알게 될 때까지는 우리는 우리에게 유용한 육체적 황홀경을 완전하게 알지 못할 것이다. 기독교적 설정을 떠나 섹스와 죽음과의 관계는 인간의 직관에 의해 영감을 받는 것처럼 보인다. 오르가즘은 육체에 관한 것이지만 죽음은 정신적 살인이나 자아 살해(ego suicide), 상호간의 폭력, 잔인성에 의한 어떤 것의 결과이지는 않다-그럴 필요가 없다. 그것은 소멸과 완벽한 전이의 가능성을 함의한다. 하지만 그것이 모든 것에 대해 우리가 스스로를 보호하고 지켜줄 수 있는 것 역시 아니다.


 섹스는 몸이 영혼과의 관계를 찾는 방법이다

 섹스는 몸이 그 영혼을 찾기 위해 과거의 에고를 억압하는 수단일 수 있다. 그러나 우리 문화에서 성적 황홀감은 주로 그것의 자연적 표출보다는 정신적 열망과 통합의 실패와 관련되어 왔다. 종교 지도자들은 더 나아가 성적 황홀이 육체가 선물이라기보다는 삶에 대한 벌이라는 사실을 스스로나 신도들에게 확신시키기에 바빴다. 그들은 에이즈를 그들 주장의 보편적 실례로 거론해 왔다.  아마도 이것은 그들 또한 죽음이 삶의 가장 충직한 동반자이자 존재의 방식이라기보다는 삶의 적이라 생각해 왔기 때문이다. 죽음은 삶을 순환시키고 삶을 압도한다. 아마도 이것이 죽음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이다. 섹스도 경이롭고 자유로우며 황홀한 것이지만 궁극적으로 끝이 없다. 얼마나 오랜 기간 우리가 우리의 오르가즘을 연기하고 연장하느냐와 무관하게 그것은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그것에 포위되도록 하면 곧 끝나 버린다. 이것은 죽음에도 적용될 수 없는 것인가? 우리는 죽음을 우리가 죽음에 의해 변화되기 때문에 종국적인 것이라 생각함으로써 스스로를 바보 취급하는 것이다.


 섹스는 우리에게 죽음을 연습할 수 있는 기회를 준다

 오르가즘은 이러한 가설을 검증하고 죽음을 연습할 기회를 제공한다. 그것은 우리를 적과 친구가 되고 용서함으로써 적을 “정복할 수 있도록” 해준다. 그것은 어떤 시에서 “그 찬란한 밤에 너무 신사적으로 놀지는 마시오” 라고 역설적으로 표현하도록 허락해 주며, 우리를 부르는 죽음에 감사와 자신감으로 다가갈 수 있도록 해 준다. “작은 죽음”인 오르가즘은 위협이 아니라 약속이다. 그것은 범 우주에 보편적으로 존재하는 모든 것은 죽는다라는 사실을 보증해 주는 약속이다.

(상기 내용은 yahoo.com에서 저작권 불명의 내용을 편역한 자료임; 2007,8,20.)

출처 : 생사학
글쓴이 : 테라로사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