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지와 관련된 정치와 시사

전라도의 한(恨) ?

양곡(陽谷) 2026. 1. 26. 20:00


전라도의 한(恨), 언제까지 정치의 언어로 남아야 하는가
‘전라도의 한’은 분명 역사적 맥락을 가진 감정이다. 정치적 배제, 5·18의 상처, 경제적 소외, 문화적 멸시가 오랜 시간 누적되며 형성된 집단적 기억이라는 점은 부정하기 어렵다. 이 한을 이해하고 존중하는 태도는 한국 사회가 반드시 가져야 할 최소한의 도덕적 기반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 한을 다루는 방식이다.
이제 우리는 한 가지 불편한 질문을 던질 시점에 와 있다.
“이 한을 푸는 방식이 과연 공정하고, 공동체를 성숙하게 만드는가?”
세대와 지역을 넘어서는 책임 전가는 정당한가
오늘의 영남 청년들은 군사정권을 만들지 않았고, 5·18을 탄압하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역 담론 속에서 그들은 종종 ‘잠재적 가해자’로 취급된다. 이는 역사적 이해의 문제가 아니라 연좌적 책임 전가의 문제다.
과거를 기억하는 것과, 현재의 타인에게 도덕적 빚을 씌우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다. 한의 공유가 공감을 낳으려면, 그 출발점은 책임의 분리여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이해는 피로로, 연대는 반발로 바뀐다.
정치적 몰표, 한을 푸는 방식인가
전라도 지역의 투표 행태는 오랫동안 특정 정치세력에 대한 압도적 지지로 나타나 왔다. 이재명 후보 시절에도 80%에 가까운 몰표가 이어졌고, 그 결과 오늘날 전라도 지역에서 보수 야당은 사실상 정치적 경쟁력을 상실했다.
대조적으로 대구·경북에서는 진보 성향 정치인도 당선된다. 이 차이는 단순한 이념의 문제가 아니다. 선택지가 사라진 정치는 감시와 견제가 작동하지 않는다. 경쟁 없는 권력은 언제나 유권자를 무시한다.
만약 이러한 몰표가 ‘한을 푸는 방법’이라면, 그것은 정치적 표현이 아니라 정치적 자기 포기에 가깝다.
한의 정치화, 그리고 산업화
한은 본래 인간의 존엄이 훼손되었을 때 생기는 감정이다. 그러나 그것이 특정 정당이나 정치인을 비판 불가능한 존재로 만드는 순간, 한은 치유의 언어가 아니라 면죄부의 도구가 된다.
비판은 ‘배신’으로 몰리고, 실패는 ‘역사 탓’으로 덮인다. 이 지점에서 한은 더 이상 상처가 아니라 정치적 자산, 다시 말해 ‘산업’이 된다. 이 구조 속에서 가장 오래 상처받는 사람은 다름 아닌 그 지역의 시민들이다.
한을 푸는 가장 강한 방법은 피해자가 되는 것이 아니다
전라도가 존중받는 길은 끊임없이 상처를 호명하는 데 있지 않다.
오히려 스스로를 비판할 수 있는 용기,
정치적 선택권을 당당히 행사하는 시민의 모습,
피해 서사에 갇히지 않는 자존의 태도에 있다.
고칠 것이 있다면 고치고, 잘못된 정치에는 지역을 막론하고 책임을 묻는 것. 이것이야말로 한을 존엄으로 전환시키는 가장 강력한 방식이다.
맺으며
전라도의 한은 실재한다. 그러나 그것이 영구적인 도덕적 우위나 정치적 특권으로 작동해서는 안 된다. 한을 기억하는 일과, 한에 매여 사는 일은 다르다.
이제 필요한 것은 더 많은 분노가 아니라 공정한 자기성찰이다.
전라도의 한을 푸는 문제는 특정 지역의 문제가 아니라,
대한민국 민주주의가 얼마나 성숙해질 수 있는가를 가늠하는 시험대다.
한을 넘어 자존으로, 피해를 넘어 책임으로 나아갈 때
비로소 그 상처는 역사가 되고, 공동체는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