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지와 관련된 정치와 시사

保守’의 ´敵´은 ´進步´가 아니라 ´親北ㆍ從北´이다

양곡(陽谷) 2025. 6. 20. 11:34

‘保守’의 ´敵´은 ´進步´가 아니라 ´親北ㆍ從北´이다                      

벌써 오래 전의 일이지만, 한때 노무현(盧武鉉) 대통령이 ´진보´ 세력을 공격하는 글을 인터넷 웹사이트 <청와대 브리핑>에 올린 것이 장안의 화제가 되었던 적이 있다. "이것이 무슨 소리냐?" "그가 노리는 것이 무엇이냐?" 등등의 호기심들이 작동되었었다. 언론에 따라서는 노무현의 이 인터넷 글이  당시  ´진보 자성론‘을 제기한 고려대 최장집(崔集章) 교수를 과녁으로 삼은 것이라는 풀이가 제시되기도 했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점이 있었다. 그것은 노 대통령의 그때 인터넷 공격이 소위 ´진보´ 세력에게 상처를 주기 위한 것이 아닌 것을 물론 ´보수´ 세력에게 도움이 되겠다고 쓴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여기서 ´보수´의 입장에 서 있는 필자가 한 가지 분명히 해 둘 점이 있다. 그것은 ´보수´ 세력이 문제 삼는 상대 세력은 일반화되어 있는 ´진보´ 세력이 아니라는 점이다. 노무현 대통령은 임기 중 어느날 연세대에서의 강연을 통해 느닷없이 이 나라 ´보수´ 세력을 싸잡아서 공격한 일이 있었다. 이때 노 대통령은 "자본주의에 사는 한 보수는 약육강식(弱肉强食), 되도록 바꾸지 말자는 것"이라는 막말을 했었다. 그는 "이렇게 이해하면 간명하다"면서 "합리적 보수, 따뜻한 보수, 별놈의 보수 갖다 놔도 보수는 ´바꾸지 말자'는것"이라고주장했었다. 늘 그렇게 하는 것이 그의 트레이드 마크가 되어 버렸지만, 품격에 어울리지 않는 육두문자(肉頭文字)를 동원하여 ´보수´를 비난했던 것이다.

그때 필자는 인터넷 웹사이트에 올린 글을 통해 노 대통령의 ´막     말´을 이렇게 반박했었다.

대한민국은 1948년 건국 당시만 해도 아프리카의 가나에나 견주어지고, 필리핀의 언론에서는  "한국에서 민주주의의 꽃이 피기를 바라는 것은 쓰레기통에서 장미꽃이 피기를 바라는 것과 같다"는 제목의 사설이 쓰여질 정도로 찢어지게 가난하고 또 낙후된 나라였었다. 더구나 북한의 김일성(金日成) 일당이 일으킨 민족적 범죄인 6.25 전쟁이 온 나라를 폐허 더미로 만들어 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은 김일성-김정일(金正日) 부자 독재의 북한으로부터 끊임없이 계속되는 안보 위협 속에서도 "일면 국방, 일면 건설" "싸우면서 건설한다" "하면 된다(Can Do)" "잘 살아보자"는  "정신일도(精神一到) 하사불성(何事不成)"의 강인한 정신력으로 불과 수십 년이라는 짧은 기간 안에 200여 세계 국가들 중에서 11위의 경제대국을 이루어냈다.

이것은 5천년 민족역사를 통해 우리 선조들이 과거 어느 때에도 이룩하지 못했던 기념비적인 변화를 이룩해 냈다는 것을 반박의 여지가 없이 만들어 주는 사실들이다.

문제는 이 같은 엄청난 변화의 주역이 누구였느냐는 것이다. 이 변화의 주역은 노무현 씨가 무엇이라고 헛소리를 지껄여도 이 나라의 ´보수-우익´ 세력이었다는 것은 역사가 기록하고 있다.

우리가 유감스럽게 생각하는 것은 그 과정에서, 더러는 불가피한 필요 때문에, 그리고 더러는 특정한 사람들의 불필요한 사욕(私慾)과 엉뚱한 의욕(意欲) 때문에, 저질러졌던 정도(正道)를 일탈한 행위들로 인하여 적지않은 사람들이 상처를 입는 일이 생겼고 우리 사회에서는 아직도 이 상처의 치유가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예를 든다면, 1970년대의 ´유신체제´와  ´긴급조치´ 같은 것들이다.

그러나, 지금 여러 가지 지수로 표현되고 있는 대한민국의 위대한 도약상은 그 같은 부정적 측면들은 부분적인 것이고 그러한 부분적인 부정적 측면들을 압도적으로 상쇄하고도 남는 긍정적 측면들이 있었다는 것을 계량적으로 증거해 주고 있다.

그동안 소위 ´진보´를 표방하는 세력은 이 같은 대한민국의 변화에 동참하기는커녕 이를 지지해 준 사실이 없다.

대한민국의 오늘을 있게 해 준 몇 가지 대표적 역사적 사건들을 보자. 예컨대, 1965년의 한일 국교 정상화, 1960년대의 월남 파병, 경부 고속도로 건설, 새마을 운동 등이 그것들이다. 이들 사건들 중 어느 하나의 사건에 대해서도 이 나라의 소위 ´진보´ 세력이 지지하고 찬동하거나 동참한 사실이 없다.

김대중(金大中), 김영삼(金泳三) 등 야당 지도자들은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이 경부고속도로를 건설하는 현장에서 길을 막고 누어서 공사 방해를 시도했었던 사람들이다. 만약 그때 그들의 공사 방해가 성공해서 경부고속도로가 건설되지 못했다면 오늘날 대한민국이 무슨 꼴을 하고 있을 것인지를 상상이나 할 수 있을 것인지 궁금한 일이다.

이 나라의 야당 세력, 특히 ‘진보’ 팔이 꾼들은 대한민국이 자금 부족, 자원 부족, 기술 부족을 극복하면서 이 같은 성장과 발전의 길을 개척하는 동안, 그 과정에서 파생적으로 초래된 인권유린, 부정부패, 빈부격차를 시비하는 왈 ´민주화 투쟁´에 전념했을 뿐, 삽 한 자루, 곡괭이 한 자루를 잡아본 사실이 없다는 것이 또한 역사가 기록하고 있는 사실이다.

이 같은 역사적 사실에도 불구하고 필자와 같은 ´보수´ 생각을 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진보´ 세력이라면 배척할 생각이 없다. ´진보´와 ´보수´는 수레의 두 바퀴와 같이 상호 보완적 역할을 하는 것이 옳다고 보기 때문이다.

더구나, 정확하게 말한다면, ‘보수’와 ‘진보’는 서로 역(逆)의 관계에 있는 어휘(語彙)도 아니다. 노 대통령처럼 "합리적 보수, 따뜻한 보수 별놈의 보수 갖다 놔도 보수는 ´바꾸지 말자´다"고 생각하는 것은 더구나 천부당만부당(千不當萬不當)하다. 왜냐 하면 ´보수´란 "바꾸지 말자"는 것이 아니라 서구에서의 ‘보수주의’ 담론(談論)의 비조(鼻祖)였던 영국의 에드먼드 버크(Edmund Burke)가 갈파했던 것처럼 “새로운 변화의 요소들을 완만하고 신중하게 이미 검증된 기존 제도에 접목하자"는 신중론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객담(客談) 꾼들 사이에서는 ”보수(保守)‘는 “끊임없는 ’보수(補修)‘”를 의미하는 반면 “’진보(進步)‘는 ’진짜 보수(保守)‘의 준말”이라는 희언(戲言)이 회자(膾炙)되는 것도 사실이다.  

따라서 이념의 스펙트럼에서 ‘보수’(conservatism)의 진정한 ‘적(敵)’은 ‘급진’(radicalism)과 ‘과격’(extremism)이지 ‘진보’ (progressivism)가 아니다.

특히 우리나라의 ´보수´가 문제 삼는 것은 ´진보´가 아니라 ´친북´이고 ‘종북’일 뿐이다. ´진보´를 가장(假裝)한 위장한 ´친북´ㆍ‘종북’이다. 그것도 2천3백만 북한 동포들을 상대로 하는 ´친북´이 아니라 이 나라를 ´분단국가´로 만들고 6.25 전쟁을 일으켰을 뿐 아니라, 이른바 ‘주체사상’이라는 사이비 사상을 가지고 북한 땅의 2천3백만 동포들을 김일성-김정일 사교집단(邪敎集團)의 광신도(狂信徒)로 만드는 집단적 인간개조를 시행하고, 그것도 모자라서, 이미 거대한 ´수용소 군도´인 북한 땅에서 수십만 명을 정치범 수용소에 가두어 놓고 수백만 명을 굶겨 죽이다 못해 수십만 명으로 하여금 중국 땅에서 유리걸식(遊離乞食)하게 만들어 놓은 이른바  ´수령독재´의 앞잡이 노릇을 하는 ´종북´ 세력일 뿐이다.

우리가 김대중과 노무현 그리고 문재인 등 소위 ‘진보’ 표방 전직 대통령들과 그들을 맹종하는 소위 ‘386’과 ‘586’ 등 ‘종북 주사파’ 세력을 문제 삼는 이유도 그들이 가진 거짓말로 자신들의 행동의 합리화를 꾀하면서 실제로는 오로지 북한 독재정권의 연명을 도와주는 대북 퍼주기에 집착하는 데 그치지 않고 자라나는 청소년들에게 대한민국의 자랑스러운 어제를 오히려 수치스럽게 생각하게 만드는 사이비 교육을 실시하는가 하면 대한민국의 국가안보에 필수불가결의 기여를 해 온 한-미 동맹을 파괴ㆍ무력화시키는 등 대한민국의 뿌리를 뒤집어엎는 데 골몰하고 있기 때문이다.

불행하게도, 이 나라의 소위 ‘386’ㆍ‘586’ 세대들은 이른바 “위수김동”(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ㆍ“친지김동”(친애하는 지도자 김정일 동지)에의 맹목적인 “충성”으로 차돌맹이처럼 머리가 굳어져 있는 ‘인간 화석(化石)’들이다. 대한민국 사회의 ‘허리’ 부분에 해당하는 ‘386’ㆍ‘586’ 세대에 대한 일체의 희망을 접지 않을 수 없는 우리들이 기대할 곳은 ‘386’ㆍ‘586’ 이후 세대, 즉 ‘2030’과 그 이후 세대들의 자성(自省)과 분발일 수밖에 없다. 그들이 이른바 조작된 ‘진보’ 대 ‘보수’의 오도된 프레임으로부터   자유스러워지기를 간절하게 소망한다.  [李東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