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수필가 왕린 씨의 '빨래를 널며'란 글을 소개했습니다. 이를 재미있게 읽은 임정아 수필가는 중국인 수필가가 쓴 글인가 잠시 착각을 하였다고 합니다. 작가의 이름도 그렇지만 글에서도 루신이나 임어당같은 중화향이 조금 배어 있더군요. 폄하가 아니라 정말 좋은 수필이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내가 아주 좋아하는 임어당의 수필 하나를 소개하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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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어당 금혼식 밀월
서로 공경하고 서로 사랑하고 서로 돕는 생활로 일관된 나와 아내는 벌써 반세기 동안 단란한 생활을 보냈다. 서로 이해하고 양해하는 심정으로 점철된 우리의 생활은 고난과 환난속에서 끝없는 사랑으로 이어 갔다.
7월 9일의 아늑한 분위기 속에서 우리는 금혼식 밀월을 맞이했다. 밀월이란 두 사람에게 속한 일이기 때문에 외계의 사람을 초청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뜻밖에 우리 두 사람의 밀월에 적지 않은 사람이 모여서 즐거움을 나누었다.
이것은 장장 50년의 아름다운 풍경의 축소도로도 볼 수 있고, 행복한 혼인의 신랑과 신부의 즐거움으로도 볼 수 있다. 이 기념일을 이름지어 <금옥연>이라 한다. 나는 이 세 글자를 브로우치에 새겨서 아내의 가슴에 달아 주었다.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50년 동안을 잘 다듬어온 사랑의 심볼로도 볼 수 있다.
응접실에 달린 촛불은 우리가 살아 온 50년 동안의 추억을 회상시켜 주듯 유난히 빛났다. 이상하게도 우리 머리를 스쳐 가는 추억의 물결 속에서는 굶주림과 고난과 모든 뜻하지 않았던 일들은 망각의 바다에 자취를 감추어버린 듯했다.
우리는 가난하여 극장에 가서 영화를 구경할 수 없을 때는 도서관에 가서 책을 빌어다가 밤을 새워가며 등불 밑에서 읽었다. 내가 아내 요취 여사와 결혼을 하게 된 동기는, 요취는 나의 동창일 뿐 아니라 요취의 오빠와 나와는 죽마지우였고, 나의 누님은 요취의 둘째 언니와 동급 동창이었던 관계로, 우리 편에서 먼저 청혼을 하자 신부 편에서도 곧 허락해 줘서 약혼이 성립된 것이다.
그 당시 처가에서 나를 평하기를, "이 아이는 인품이 대단히 좋다, 그러나 목사 가정이어서 돈 없는 게 흠이다."라고 하였다.
임씨 집안에 돈 없는 것을 잘 안 처가에서는 내가 약혼을 하고 4년을 지난 후에야 결혼식을 올리게 한 사실로 보아 얼마나 구제도에 가까웠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내가 하버드 대학에서 공부할 때 아내는 병이 나서 병원에 입원했다. 돈은 완전히 떨어지고, 아내의 물건까지 다 내다 팔아 이제는 끼니조차 잃게 되었다. 나는 로울빵을 사다 먹는데 그것도 한 주일 동안을 아껴 가며 먹었다. 지금에 와서도 빵을 보면 속이 느긋거려질 정도이다. 나의 처가는 상당히 이름있는 부자였으며 마카오 고랑포에서 첫손가락 꼽히는 명문이었다.
50년 전 약혼할 때에 아내는 자기 어머니에게, "임씨 집안은 돈이 없지만 그런 건 관계없어요."라고 했다.
이 말에 처가에서는 지체 없이 약혼을 허락했다. 아내는 그때, "임씨에게 일단 출가하면 나는 임씨 집안 사람이다. 결혼 후에 아무리 가난해도 절대로 친정에 가서 돈을 빌려 달라고는 하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50년 동안 아내는 이 결심을 그대로 지켜, 병고로 이역에서 고생할 때도 친구에게 돈을 빌지언정 친정 집에 전보를 쳐서 도움을 구하거나 한 적은 없었다. 말하자면 아내는 결단력과 주장이 센 여자였다고 볼 수 있다.
우리의 결혼 생활을 결론적으로 말하면, 옛 것에서 새것을 찾는 것과 같았다고 할 수 있다. 약혼하기 전에 아내는 문 뒤에 몰래 숨어서, 내가 상하이의 세인트 존스 대학의 배지를 달고 지나는 모습을 보았다. 그 뒤 그녀는 내가 밥을 몇 공기씩 먹는가도 알아냈으며, 때로는 나의 옷을 빨아다 주기도 했다. 나는 아내의 모습을 관심 깊게 보고 두호했으나, 남이 물으면 모른다고 딱 잡아떼었다.
이렇게 4년 동안을 기다리면서 우리들은 열렬한 사랑의 편지를 보내고 받고 했다. 우리 두 사람은 오랜 사랑의 과정을 거쳐서 지금 처가의 활짝 열린 대청에 앉아서 서로 얼굴을 마주 대보며 감개무량해진다. 이때 나의 아내가 하는 말이, "50년 전 약혼한 신랑과 마주 앉으니 이루 말할 수 없이 흐뭇하군요." 한다.
사실 나는 평온한 가정생활을 해 왔다. 부잣집 딸이라고 해서 심리적으로 위압감을 받은 일은 없으며 나는 모든 일에 자신을 가지고 나섰다. 말하자면 아내는 돈 있는 집 딸이었으나 여느 돈 있는 집 딸처럼 교만하거나 으스대는 버릇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이는 그녀가 아주 훌륭한 가정교육을 받은 미덕의 보람인 줄 안다.
우리 두 사람이 50년 동안 아름다운 결혼생활의 비결을 지켜 왔다면 그것은 주고받는 일이었다. 도합 1만 8천여 일 동안에 우리 두 사람은 서로 주기만 하는 기분으로 살아왔다.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낫다는 성경의 말 그대로였다고 볼 수 있다.
나의 아내는 친구들 앞에서 남편의 나쁜 습관이나 지혜롭지 못한 일에 대하여 말한 적이 없었다. 평상시에는 큰소리치다가도 어려운 일을 당하면 모르는 척하는 그런 일도 전혀 없었다. 자기 자신이 그런 생활을 했으니만큼 딸들에게 대해서도 아내는 그 같은 교육을 시켜왔다.
나는 딸 셋뿐이다. 맏딸과 둘째 딸은 문학을 하고 있는데 영국문학과 중국문학에 능하다. 셋째 딸은 과학을 공부했다. 나는 아들이 없는 것을 유감으로 생각지 않는데 아내는 그렇지 않다. 친구들이 아내더러 아들이 없는 것이 유감이 아니냐고 물으면, "나는 참으로 유감이라고 생각해요."를 연발한다.
옆에 앉아 듣고 있던 나로서는 너무 민망해서, "당신은 모든 것이 다 행복하다고 하니 아들을 낳지 않은 것도 행복이 아니오?"라고 반문한다. 사실상 다른 사람이 아들을 많이 거느린 것보다도 내가 딸 셋을 거느린 것이 나에게는 더 이상 비길 데 없는 기쁨으로 생각된다.
마카오에는 외국선이 많이 드나든다. 꽃으로 둘러싸인 길을 지나 미국으로 가는 배의 갑판 위에 오르면 퍽 마음이 가벼워진다. 키를 젓는 사공 같은 우리 가정은 결혼의 배를 타고 세상파도를 헤치고 나가면 황혼의 으스름이 고요히 수평선 위에 내려앉듯이 우리 50년 결혼의 장막은 황혼의 황금빛으로 빛나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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