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글 등

이팝나무와 나 /이해우

양곡(陽谷) 2024. 4. 29. 10:16

이팝나무와 나
/이해우

가주의 물 부족으로 모두가 상상하는 물난리의 반대로 물 부족의 난리가 난 지난 몇 해를 지나며, 나무는 목이 말라 시름시름 죽어갔다. 물을 주는 것이 제한된 시기라 편파적 사랑을 줄 순 없었다. 오래가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다. 차를 타고 밖에 나갈 때마다 눈이 마주쳤지만 나무도 나도 우울하기만 한 시절이었다.

살아났다. 살아나도 보통으로 살아난 것이 아니다. 흰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풍족을 자랑한다. 얼마나 호탕하고 화창하게 웃는지 지나가는 이들이 멈춰 서서 인사를 하지 않을 수 없다. 흐뭇하게 바라보는 나에게 이름을 묻는다. 영어 이름을 모른다. 그이들이 떠난 후 찾아보니 Retusa Fringe Tree (리투사 프린지 트리)다. 수많은 나무의 이름을 모른다는 것이 부끄러운 무식은 아니지만 내 집 앞의 나무이니 얼굴이 화끈했다.

엘 니뇨는 스페인어로 꼬마 남자아이를 뜻한다. 바다의 수온이 알 수 없는 이유로(과학자들도 이유를 모른다니 물어볼 이가 없다) 오르는 현상인데, 비주기 적으로 나타나는 이 현상이 시작되었단다. 지구에 큰 변화가 생겨서 생긴 것인지, 아니면 엘 니뇨가 지구에 장난을 친 것인지 모르지만 지구는 이때마다 큰 변혁을 겪었단다. 분명한 것은 이상한 꼬마가 한몫을 했다는 것이다.

가주에는 작년부터 겨울비가 심하게 비가 내렸다. 사실 달력상으로 겨울이지 이곳의 겨울은 한국의 봄과 같다. 지구의 어느 곳에선 이상기후로 강물이 범람하고 태풍이 불어 집이 날아갔지만 물이 심하게 부족한 캘리포니아는 지금까지는 혜택을 받았다. 비록 산사태가 나기는 했지만 득실을 따지면 이익이었다.

이팝나무가 살아난 이유다. 엘 니뇨의 축복을 받고 명랑한 소년 정도가 아니라 변강쇠처럼 일어났다. 이팝나무를 볼 때 마다 미안함과 즐거움이 동시에 일어난다. '그래 자신은 스스로가 돌보는 거야. 넌 네 진력을 다 하였고 그런 널 하늘이 도운 거다.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의 실례가 바로 너다'

이팝나무 뿐일까? 온 산이 푸르다. 이것도 '엘 니뇨'란 꼬마의 장난이다. 공기도 맑고 하늘도 푸르고, 떠가는 구름조차 아름답지만.... 난 안다. 꼬마가 떠나면 다시 가주의 사막 기후가 돌아올 것이고 이 놈은 위험한 불장난을 시작할 거다. 뜨거운 날씨와 건조한 공기. 곳곳에 지옥이 될 것이다. 그리고 저 푸르른 순진무구 덩어리들은 불의 희생양이 될 것이고....

오래전 돌아가진 고모님이 늘 말씀하셨다. '집안이 어렵고 중요한 일이 술술 잘 풀릴 때도 난 교만하지 않았다. 삶이란 파도처럼 밀려오면 꼭 밀려가더라. 좋은 일에, 혹은 나쁜 일에 일희일비하지 말아라. 그저 꾸준히 할 일만 하면 된다.'

조금 전 누군가 '저 나무의 이름이 뭐지요?'하고 또 나에게 물었다. 방금 전 영어 이름을 알았는데, 알았던 기억만 날 뿐 감감하다. 어쩌리? 다시 찾아 본다. Retusa Fringe Tree 다. 슬프다. 젊은 날의 총기는 어디로 떠나셨는가?

아마 내일 또 난 잊을 것이다.

그러면 어떠리?

그저 난 너와 눈을 맞추고 즐겁게 웃던 그 순간만 간직하여도 충분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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