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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인사들의 마지막 죽음에 대한 유언 모음

양곡(陽谷) 2024. 1. 31. 07:37

1871년, 스위스 제네바에 살던 아그레노르 폰 가스파린 Agenor de Gasparin 백작이 임종을 눈앞에 두고 있을 때, 슬픔으로 가득 찬 그의 부인이 “나의 사랑 아그레노르, 당신의 뒤를 따라갈게요!”라고 말했다. 그러자 백작은 마지막 힘을 끌어모아 힘겹게 속삭였다. “나의 사랑 발레리! 그건 안 되오! 알다시피 난 원래도 당신이 앞서 가는 걸 좋아하지 않소!”

한때 많은 사람의 사랑을 받던 이 부부의 대화처럼 인간이 죽음의 세계로 떠난 뒤에 남겨지는 것들 중 가장 오랫동안 기억되는 것은 그들이 남긴 ‘마지막 말’이다.

그렇다면 생의 끝자락에 선 사람이 남기는 마지막 말이 세대를 넘어 전달될 만한 가치가 있는 걸까? 또 마지막 말은 어떤 과정을 거쳐 나오게 되는 것일까? 과거에 한 성직자가 죽음을 앞둔 사람에게 악령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죽음에 대한 공포를 이겨낼 수 있도록 빌어주는 순간, 당사자는 이렇게 대답했다. “성직자님, 지금은 새로운 적을 만들기에 적절하지 못한 시점인 것 같군요!”

이런 재치 있는 마지막 발언은 수 세기 동안 여러 나라의 언어로 기록되어 왔다. 죽음을 앞둔 자들의 마지막 말이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지금의 우리에게 전해질 수 있는 이유는 그것이 삶에 대한 재치 있는 농담과 진솔한 고백의 경계를 넘나들며 후손들에게 감동으로, 슬픔으로, 때로는 신랄한 풍자로 강렬하게 각인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인간은 자신의 죽음에 대해 생각하는 존재이며 또 그 순간을 예측할 수 있는 능력도 갖고 있다. 또한 지구상에서 죽은 이를 엄숙하게 매장하는 유일한 생명체이기도 하다. 그래서 인간은 죽음에 대한 경외심과 두려움을 갖고 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죽음의 공포를 완화시켜주던 종교와 철학이 점점 제 기능을 하지 못하고 있다. 대부분의 사람이 죽음이란 또 다른 변화나 삶의 본질에 한 걸음 더 다가가는 것이 아닌 끝 그 자체, 즉 공허로 발을 내딛는 것이라 믿는다. 반면에 ‘모든 인간은 반드시 죽는다’라는 보편적인 진리에 대해서는 우리 모두 공정함을 느낀다. 이는 아마도 인생의 긴 여정 동안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유일한 평등이기 때문일 것이다.

오늘날의 죽음은 과거와 모습이 사뭇 다르다. 통계를 살펴보면 열 명 중 아홉 명이 요양원이나 병원에서 홀로 죽음을 맞이한다. 가족의 임종을 지켜보는 일이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는 뜻이다. 이렇게 되면 죽어가는 사람들은 ‘생의 마지막 단어’를 남길 기회조차 갖지 못하게 된다.

그 밖에도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몇 가지 예를 들어보자면 자연적인 병이나 질환 때문에, 혹은 고령이라거나 심각한 사고의 후유증으로 언어를 쓰지 못하는 경우, 아니면 교통사고 같은 급작스러운 사고로 많은 사람이 아무런 말도 남기지 못한 채 죽음을 맞이한다. 설령 정말 깊은 인상을 남긴 유언이 있었어도 결과적으로는 타인에게 전해지지 못하고 그저 흩어지고 만다. 그 내용을 받아 적거나 전할 만한 사람이 곁에 없었기 때문이다.

지금으로부터 꽤 오래전의 일이다. 독일의 바이에른에서 인턴으로 일을 시작했을 때, 내가 맡은 첫 환자가 3일 만에 사망했다. 그는 알프스에 사는 고령의 농부로 당시에 그를 의학적으로 치료할 방법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그의 죽음이 기정사실화되자 신부가 방문하여 병부 성사를 집도했다. 한 인생의 마지막을 맞이하는 방 안에는 초들이 타고 있었고, 한 수녀가 조용히 고인을 위한 기도를 올렸다. 그들은 의사인 내가 돌아가기를 바랐지만 나는 그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다. 그러나 결국 그러한 분위기를 감지하고 병실을 떠났다. 약 20분 정도 후에 나는 다시 병실로 찾아가 환자에게 물었다. “좀 어떠세요?”라고 질문하자 노인은 감고 있던 눈을 뜨고 내게 말했다. “견딜 만합니다.” 그러고는 영원히 눈을 감아버렸다.

그는 정말로 자신이 한 말처럼 견딜 만했을까? 아마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그가 남긴 마지막 문장 속에 평생의 삶과 행동이 농축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닫기까지 상당한 시간이 흘렀다. “견딜 만합니다”라는 마지막 말은 그의 인생 그 자체를 보여주는 말이었다. 당시 그는 고령이었고 가난했으며 이전에 두 번의 세계대전에 참전했었다. 그러나 단단한 정신과 가치관을 갖고 살아왔기에 그 모든 고난을 이겨낼 수 있었던 것이다. 자신의 인생에 대한 그의 확고한 믿음은 죽음의 문턱 앞에서도 초연하게 “견딜 만합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여유를 보여주었다.



나는 이 책에서 독자가 만나게 될 최후의 발언들을 최대한 정확하게 전하기 위해 가능한 한 많은 자료를 반복해서 조사하고 검증했다. 그런 노력으로 최후의 단어들이 재현되었지만 그 정확성에 이의를 제기하는 견해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누군가의 인생과 업적 그리고 죽음의 배경에 관한 짧은 글은 그 자체만으로 우리를 매료시키기에 충분하다. 한 사람의 인생과 그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하나의 ‘유기체’이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의 근본적인 본성과 그가 남긴 마지막 말은 ‘항상’이라고 볼 수는 없지만 ‘대부분’ 일치한다. 이 때문에 지난 인간의 역사 속에서 유명인의 마지막 말들이 기록되어 왔다. 그리고 그중 많은 것들이 긴 시간을 넘어 오늘날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우리는 인간이 죽는다는 사실은 잘 알지만 정해진 날짜는 절대 알아낼 수 없다. 물론 역사에 길이 남을 획기적인 최후의 발언을 듣기 위해 갑작스럽고 예기치 못한 죽음에 반론을 제기하려는 취지로 이 책을 집필한 것은 아니다. 사람들은 각자의 취향에 따라서 죽음을 맞이하고 싶을 것이다. 누군가는 사랑하는 자손들의 품 안에서 죽음을 맞이하고 싶을 수도 있고, 누군가는 오토바이를 타고 달리다 자유롭게 떠나고 싶을지도 모르며, 또는 잠을 자다 평온한 죽음을 맞이하여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고 싶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러한 죽음은 안타깝게도 후세에 아무것도 남기지 못한다. 그래서 나는 사람들이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이하기보다는 자신의 존재를 증명할 수 있는 마지막 한마디를 남길 수 있기를 소망한다.



나는 이 책에 3,000년 이상의 인류사에서 너무나 친숙하고 잘 알려진 유명 인사들의 유언을 모았다. 그들의 마지막 말은 감동적이고, 아름다우며 때로는 부질없고 허무하기도 하다. 그리고 그 주인공은 종교인, 철학자, 작가, 과학자, 정치가, 예술가 등에 이르기까지 각양각색이지만 그들 모두가 자기 삶의 방식과 생각을 최후의 발언을 통해 보여주었다. 그리하여 우리는 한 사람의 인생을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있다.

죽음은 그 나팔을 미리 불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인생의 마지막 시간을 예견할 수 없다. 그러나 이 책을 통해서 알 수 있듯이, 죽음은 우리에게 최소한 ‘마지막 말’을 남길 시간만큼은 반드시 부여한다.



한스 할터 Hans Halter



부처

buddha, B.C. 560~B.C. 480



세계 4대 성인 중 한 사람이자 불교의 창시자. 지금의 네팔의 카필라바스투성에서 슈도다나와 마야 부인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29세 때 출가하여 35세에 득도했다. 45년 동안 인도 각지를 다니며 포교하다가 80세에 열반했다.












부처 (본명은 가우타마 싯다르타 Gautama Siddhrtha), 이 위대한 득도자는 이미 아주 오래전에 열반에 들었다. 다시 말하면 무 無와 하나가 되었다는 말이다. 그러한 죽음은 불교의 창시자가 가르쳐왔던 것처럼 “존재의 아픔으로부터의 영원한 해방”이며 인간의 가장 고귀한 목표라 할 수 있다.

해탈에 이르기 위해서는 덕을 쌓으며 깨달음을 얻어야 한다. 따라서 일반적으로 불교 입문자가 단 한 번의 시도로 그 경지에 도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또한 부처는 사람은 어떤 모습으로든 윤회를 하며 그로써 그 혼은 끝없는 속죄의 길을 걷는다고 말했다. 그리하여 하녀의 혼이나 공주의 혼도 생전에 쌓은 업에 따라 개미나 코끼리 같은 동물로, 또 식물로 다시 태어나는 윤회의 길을 걷는다는 것이다.

훗날 부처로 불리게 된 싯다르타는 원래 히말라야산맥 기슭에 자리를 잡은 부유한 왕족이었다. 29세의 이 젊은이는 종교적 깨달음을 위해 부인과 자식 그리고 화려한 생활과 인연을 끊었다. 그는 집과 가족을 버리고 고행과 수도를 하며 설교자의 고되고 힘든 삶을 시작했다. 이러한 심경의 변화는 ‘4번의 여행’을 겪으면서 생긴 것으로 전해진다. 여행 중에 싯다르타는 한 노인과 병자, 망자, 고행자를 만났고, 그때부터 인간의 고통에 눈을 뜨고 새로운 깨달음을 얻게 됐다고 한다.

그의 종교적 가르침에 의하면 사람은 죄에 따라 벌을 받고 쌓은 덕에 따라 상을 받게 된다고 한다. 불교는 기독교와는 달리 부처가 살아 있는 동안에도 대성황을 이루었고 그 가르침은 아직까지도 지속되고 있다.

80세의 나이로 죽음에 이르게 되자 부처는 수백 명의 신자들에게 마지막 유언을 통하여 화합과 인내를 강조했다.



“스승이 떠나게 되면

너희는 우리에게 스승이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지 말거라.

내가 너희에게 전한 가르침과 규칙이

나의 죽음 뒤에 너희의 스승이 될 것이다.”



부처의 시신을 화장하던 날, 승려들은 크게 다투었다. 그렇게 보면 부처의 마지막 당부는 제자들에게 큰 위로도, 길잡이도 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어쩌면 부처는 그런 상황마저도 예상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가 남긴 최후의 말은 지상의 모든 논쟁이 부질없음을 의미하고 있기 때문이다.



“태어나는 모든 사물은 덧없으며

언젠가는 죽음에 이른다.”

술탄 살라딘

Sultan Saladin, 1137~1193



이슬람의 정치가이자 이집트 아이유브 왕조의 시조. 쿠르드족 출신으로 1171년에 파티마 왕조를 넘어뜨린 뒤 아이유브 왕조를 창건하여 북아프리카에서 시리아, 이집트, 메소포타미아에 이르는 광대한 제국을 형성했다. 1187년, 십자군전쟁에서 예루살렘을 탈환해 88년간의 프랑크족에 의한 점령 통치를 끝냈다.












알라신은 “이 세상은 정교도 (기독교)들의 감옥이다”라고 가르치며 “이 세상은 무신론자들의 천국이다”라고 말한다. 아라비아의 술탄이었던 유수프 살라딘은 기독교도들과 2번의 참혹한 전쟁을 치른 뒤 기독교 왕국의 수도로 상징되는 예수살렘을 정복했다. 왜냐하면 그의 신이 그렇게 원했기 때문이었다.

이라크 티크리트 출신의 이 작은 남자는 강인한 장군이자 카리스마 넘치는 민족의 영웅이었으며, 동시에 영리한 외교관이었다. 1187년, 그는 유럽의 정복자를 상대로 전투를 벌여 승리를 거두고 알라신의 나라에서 십자군을 쫓아내는 데 성공했다. 이는 몇몇 이슬람교의 통치자들이 그보다 먼저 시도했으나 모두 실패한 일이었다.

살라딘은 유능한 술탄이었다. 살아생전 그는 라이벌이었던 일명 사자왕 리처드 1세처럼 폭군이 아니었다. 훗날 독일의 작가 고트홀트 레싱이 그를 『현자 나탄』의 모델로 삼아 시를 지은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살라딘은 유럽의 침략자들에 대항하는 가장 강력한 세력이었을 뿐만 아니라 아랍 지역에서 폭군이 아니었던 첫 번째이자 마지막 군주로 평가받는다.

그가 55세의 나이로 발진티푸스에 감염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모든 국민이 눈물을 흘렸다. 살라딘은 거의 4주 동안 죽음과 실랑이를 벌여야 했다. 현자들이 그의 곁에 앉아 “알라 외에 다른 신은 없다”와 같은 말들이 담긴 『코란』을 밤낮으로 읽어주었다.

그러나 1193년 3월 4일, 그의 궁전 위로 태양이 서서히 떠오르던 그 순간 그는 눈을 감았다. 죽음에 임박하여 살라딘은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이제야 유수프가

그의 감옥에서 해방됐구나.”

율리우스 카이사르

Gaius Julius Caesar, B.C. 100~B.C. 44



로마 공화정 말기의 정치가·장군. 폼페이우스, 크라수스와 함께 삼두정치 (고대 로마에서 세 지도자가 동맹하여 행한 전제 정치)를 맺고 로마의 최고 관직인 콘술에 취임했다. 시간이 지나 크라수스가 전쟁 중 전사하고 삼두정치가 붕괴되어 폼페이우스와 대립했으나, 카이사르가 승리하며 마침내 무소불위의 권력자가 되었다. 그가 추친한 원정을 중심으로 하여 쓴 역사서 『갈리아 전기』, 『내전기』가 있다.












카이사르는 로마 역사상 가장 뛰어난 인물이자 가장 많이 주목받은 정치가이다. 사실상 전 로마를 대표하는 인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후 2,000년이 훌쩍 더 지난 지금도 그는 전략이 풍부한 정치가이자 장군으로 추앙받으며, 그가 쓴 책 『갈리아 전기』는 세계 각국의 언어로 번역되어 널리 알려져 있다.

카이사르가 살해되던 당시 그에게 붙은 직함은 종류부터 다양했다. ‘딕타토르 페르페투아 Dictator perpetuus (영원한 독재자)’, ‘임페라토르 Imperator (황제)’, ‘폰티펙스 막시무스 Pontifexmaximus (최고 성직자, 오늘날의 로마 교황이 당시에는 그렇게 불렸다)’ 또는 최고 재판관으로 불리기도 했다.

그의 초상화는 동전에 새겨졌고, 모든 신전에 그의 대리석 동상이 세워졌으며, 심지어 그의 생일은 국경일로 지정되었다. 이 모든 명예가 로마의 원로원 의원이자 최고 권력자인 그에게 주어졌다. 그러나 권력이 크면 클수록 적대 세력도 커지는 법이다. 카이사르의 막대한 권력과 명예는 결국 그를 제거하려는 음모로 이어졌다.

기원전 44년 3월 15일, 그는 음모의 희생양이 되었다. 카이사르가 의원석에 앉는 순간, 손에 비수를 든 십여 명의 의원들이 그를 에워쌌다. 한 반역자가 평소에는 감히 손도 대지 못하던 최고 권력자의 어깨를 붙잡았다. 카이사르는 그들의 행동에 몹시 분노했다.



“이건 반역이야!”



카이사르가 거세게 소리쳤다. 그러나 첫 번째 비수가 그를 힘껏 찔렀다. 죽어가던 카이사르는 살인자들 사이에서 둘도 없는 친구, 정치가 마르쿠스 브루투스를 발견하고는 나지막이 외쳤다.



“브루투스, 너마저도….”



약 1분 정도의 시간이 지나고 이 위대한 로마인은 생을 마감했다. 브루투스는 그다음 해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카이사르의 죽음 이전은 물론이고 이후에도 로마의 권력자들과 지성인들 사이에서는 권력 다툼이 끊이지 않았고, 그때마다 수없이 많은 희생자가 생겨났다. 그리고 로마 제국을 카이사르만큼 통치하는 이는 보기 힘들어졌다.


빈센트 반 고흐

Vincent van Gogh, 1853~1890



네덜란드의 화가. 1880년에 화가가 되기로 결심하고 브뤼셀, 헤이그 등지에서 하층민의 모습과 풍경을 화폭에 담았다. 이후 파리에서 작품 활동을 하다가 대도시의 생활에 싫증을 느껴 아를로 이주했다. 그곳에서 고갱과의 생활이 시작되었으나 이 또한 순조롭지 못했다. 종종 발작을 일으켰으며 면도칼로 귀를 자르기도 했다. 강렬한 색채로 본인만의 독특한 화풍을 확립했으며 「별이 빛나는 밤」, 「해바라기」, 「감자 먹는 사람들」 등의 명작을 남겼다.












어느 화창한 일요일, 아를에서 권총으로 자신의 가슴을 쏜 반 고흐. 그는 사람들에게 인정받지 못한다는 좌절감, 거듭된 실패로 인한 절망감 그리고 지속적인 우울증에 시달렸고 끝내 자신을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현재 그가 남긴 작품의 값어치는 한 작품이 수억 달러에 이르는 수준이지만 당시만 해도 이 위대한 화가는 참혹할 정도로 가난에 찌들어 살았다. 심지어 그는 죽음을 눈앞에 두고 10장의 그림을 정말 터무니없는 가격에 팔아버리기도 했다.

세상을 뜨기 얼마 전, 자기면역성 (자신의 조직 성분에 대하여 면역을 일으키거나 과민성인 상태 -옮긴이) 충동에 휩싸인 고흐는 스스로 왼쪽 귀를 잘라버렸다. 그리고 제 발로 정신병원에 찾아가서 입원했다. 본인이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았다고 생각하게 됐고 이후 모든 것이 공허하게 느껴진 것이었다. 어느 누구도 그를 멈추거나 제지할 수 없었다.

고흐는 죽어가면서 항상 자신을 돌봐왔던 동생 테오에게 마지막 부탁을 남겼다.



“부탁이니까 울지 마.

이게 우리를 위한 최선의 방법이야.

슬픔은 영원히 남는 거야.

난 이제 집에 가는 거라고.”

체 게바라

Ernesto Che Guevara, 1928~1967



쿠바 혁명을 이룬 공산주의자·남아메리카의 지도자. 1955년, 멕시코에 머무는 동안 카스트로와 함께 쿠바 혁명에 참가했다. 카스트로가 정권을 잡은 뒤 게바라는 국립 은행 총재, 공업 장관 등을 역임하며 ‘쿠바의 두뇌’라 불렸다. 1965년부터는 볼리비아에서 무장 게릴라 부대를 조직하고 통솔했다.












게릴라에게는 세 가지가 필요하다. 적을 위한 권총, 사후의 명성을 위한 일기장 그리고 행복을 느끼기 위한 굵은 시가.

그러나 아르헨티나 출신으로 쿠바의 성공적인 해방을 이끌어온 영웅이자 혁명의 주인공인 게바라에게는 병든 폐를 위한 스프레이와 천식용 필터가 추가적으로 필요했다. 어렸을 때부터 몸이 약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러한 핸디캡은 아프리카와 남아메리카에서 혁명 전쟁을 치르면서 입은 11번이나 되는 부상에 비하면,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았다.

장발 머리, 거뭇거뭇한 수염이 트레이드마크이고 ‘체 Che’라는 별칭을 갖고 있던 게바라는 젊은 나이에 총탄에 맞아 숨을 거두었다. 그러나 카리스마 넘치는 모습의 그를 담아낸 한 장의 라이카 사진은 사후 수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이 기억하고 있다. 수많은 이들의 가슴에 불을 지핀 그는 대학에서는 의학을 전공했으며 졸업 후 의사가 되었으나, 우연히 여행을 하다가 노예와 빈민의 삶을 보고 빈부격차의 현실을 접하고 큰 충격을 받아 사회주의에 눈을 뜨게 되었다. 한때 볼리비아의 산악 지역이었던 히게라의 순진한 농부들은 그를 신과 동일시했다. 검은 베레모를 쓴 게바라를 가난한 이들의 성자로서 존경했다. 히게라는 신마저 저버린 아주 작은 둥지 (약 500명의 인구가 살던 곳)로 모든 문명으로부터 단절된 곳이었다.

1966년에서 1967년에 이르기까지, 게바라는 히게라와 그 주변 지역에서 군사 독재 정치를 펼치며 볼리비아인들이 국가와 교회, 군대 그리고 미국에 대항하는 데 관심을 갖도록 노력했다. 그러나 그 노력은 수포로 돌아갔다. 게바라는 히게라의 작은 학교에서 불꽃같은 생을 마감하게 된 다 (오늘날 이 학교는 기념관이 되었다).

그의 혁명 과정은 한 편의 드라마와 같다. 처음에 46명의 게릴라로 구성된 그의 작은 군대는 사막에서의 고투와 굶주림 그리고 거듭된 전투로 인해 그 수가 12명으로 줄어들었다. 그들은 더 이상 국민들로부터 도움을 받지 못했으며 보유한 장비마저 모두 고장 난 상태였다. 갈 곳 잃은 무리들은 CIA 요원들에게 정보를 얻은 2,000명의 볼리비아 경찰들에게 추격을 당했다.

마지막 순간, 게바라와 그 무리는 깊은 산속으로 유인당해 총격전을 벌였다. 그 와중에 게바라는 발에 총상을 입었고 그 순간 “쏘지 마시오!”라고 적을 향해 소리쳤다.



“나는 체 게바라이고, 시체보다는 나를 산 채로 체포하는 것이 당신들에게 더 좋을 것이오.”



당시 볼리비아에는 공식적인 사형과 같은 형벌이 없었으며, 안전이 보장된 감옥도 없었다. 그는 세계적인 구명 활동을 통해 죽음을 모면할 수 있다고 생각하여 항복 결정을 내린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판단이었다. 다음 날 아침, 그의 하늘은 무너져 내렸다. 그를 체포한 경찰들이 예상 밖으로 신속하게 결정을 내렸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이 혁명가를 가능한 한 빨리 제거하는 것이 낫다고 판단했다. 그때 게바라는 학교에 감금되어 있었다.

정오가 되자 마리오 테란이라는 볼리비아의 하사관이 그가 머물고 있는 방으로 들어왔다. 하사관은 자발적으로 처형 집행을 지원했지만 막상 그의 앞에 서자 침착한 모습을 보일 수 없었다. 게바라가 그를 보며 말했다.



“당신이 날 죽이려 왔다는 것을 알고 있소.

떨지 말고 그냥 방아쇠를 당기시오.

당신은 단지 사람 한 명을 죽이는 것뿐이오.”



그렇게 혁명가는 삶을 마감했다. 그에겐 눈앞에 닥쳐온 종말이 ‘혁명 그 자체의 종말’이 아니라 단지 ‘한 사람에게 다가온 종말’에 불과했던 것이다.

찰스 다윈

Charles Robert Darwin, 1809~1882



진화론을 정립한 영국의 생물학자. 영국 해군 측량선 비글호에 박물학자로서 승선하여 남아메리카, 남태평양의 여러 섬과 호주 등지의 지질 및 동식물에 대한 세밀한 관찰을 통해 생물의 진화를 확신하게 되고, 그를 바탕으로 1859년, 역사상 가장 중요한 고전으로 손꼽히는 『종의 기원』을 펴냈다.












영국의 신사 찰스 다윈은 일찍이 산호초, 조개삿갓, 양란, 지렁이, 피리새, 곤충을 잡아먹는 식물과 사람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미지의 섬 또는 인간의 감정 변화에 대한 책을 출판했지만 당시에는 모두 호응을 얻지는 못했다. 그러나 이 자연과학자는 단 한 권의 책 『종의 기원』으로 무려 기독교의 근간까지 뒤흔들었다. 마치 코페르니쿠스가 천문학적 세계관으로 세상을 혼란에 빠트렸던 것처럼 말이다.

그 후 약 16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몇몇 독실한 기독교 국가에서는 ‘다위니즘 Darwinism’이라 불리는 종의 기원에 관한 이론, 종의 투쟁과 존재에 대해 가르치는 것을 금하고 있다. 다윈의 논리는 성경의 7일에 걸친 창조설을 일종의 신화로 치부하고 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다윈은 케임브리지대학에서 신학을 수학하고 시험을 통과하여 영국의 국립교회에서 성직자로 활동할 수 있는 자격을 취득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윈은 성직자가 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