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음악

날,세우다 /정지윤

양곡(陽谷) 2023. 11. 12. 06:53

날,세우다
/정지윤

동대문 원단상가 등이 굽은 노인 하나
햇살의 모퉁이에 쪼그리고 앉아서
숫돌에 무뎌진 가위를 정성껏 갈고 있다

지난밤 팔지 못한 상자들 틈새에서
쓱쓱쓱 시퍼렇게 날이 서는 쇳소리
겨냥한 날의 반사가 주름진 눈을 찌른다

사방에서 날아오는 눈초리를 자르고
무뎌진 시간들을 자르는 가위의 날
노인의 빠진 앞니가 조금씩 닳아간다

늘어진 얼굴에서 힘차게 외쳐대는
어허라 가위야, 골목이 팽팽해지고
칼칼한 쇳소리들이 아침을 자른다
(2012 동아 신춘 문예)

//이 시에서 가위의 은유는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시를 쓰는 나에겐 詩로 읽혔다. 시인에게 가위를 가는 행위는 퇴고에 퇴고를 하는 과정이다. '무뎌진 시간'이란 헤이해진 정신의 은유가 되겠다. 가위의 날을 갈듯이 이를 악물고 정진한다. 드디어 한 편의 잘 갈려진 시가 탄생하는 아침이다. - 이해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