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對話의 奇跡, 傾聽 》
"관심을 행동으로 나타내는 것이 사랑이다." ㅡ스캇 팩Morgan Scott Peck의 ‘아직도 가야할 길’ 중에서
전장(前章)에서 사랑이 아닌 것들을 살펴봤으니 지금부터는 어떤 것이 사랑인지를 알아보자. 이장의 서론에서 '사랑의 정의는 노력을 내포한다'고 언급했다. 자신을 확장할 때, 한 발자국 더 내딛고 1미터를 더 걸을 때,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게으름이라는 타성이나 두려움의 저항에서 벗어나고자 한다. 자신의 확장이나 게으름과 타성과 싸우면서 움직여나가는 것을 우리는 노력이라고 한다. 두려움에 맞서 나아가는 것을 용기라고 한다. 그렇게 보면 사랑은 일종의 노력이나 용기다.
특히 사랑은 자신이나 다른 사람의 영적 성장을 지향하는 이외에 다른 목적에도 용기와 노력을 쏟아 부을 수 있다. 그러므로 노력과 용기가 필요한 모든 일이 반드시 사랑은 아니다. 그러나 사랑은 우리 자신의 확장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언제나 노력이 아니면 용기이기도 하다. 어떤 행동을 하면서 노력이나 용기가 가미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사랑의 행동이 아니다. 여기에 예외란 없다.
《사랑할 때 가장 먼저 노력해야 할 일은 상대방에게 관심을 갖는 것이다.》
다른 사람을 사랑할 때는 그 사람에게 관심을 기울인다. 즉, 그의 성장에 관심을 갖는 것이다. 이는 우리 자신을 사랑할 때 자기 성장에 관심을 갖는 것과 같은 이치다. 어떤 이에게 관심이 가면 그 사람을 돌보게 된다. 누군가에게 관심을 기울이기 위해 현재 몰두하는 일을 제쳐두는(괄호로 묶기라는 훈육에 대해 설명할 때 언급했듯이)ㅡ여기서 ‘괄호 묶기’는 가능한 한 말하는 사람(話者)의 내면세계를 상대편의 입장을 경험하기 위해, 자신의 편견, 판단 기준, 욕구들을 일시적으로 포기하거나 제쳐두는 것을 말한다ㅡ노력이 필요하고 적극적으로 의식을 바꿔야 한다. 관심은 의지의 행동으로서, 정신의 타성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인 것이다. 이러한 노력에 대해 롤로 메이(Rollo May)는 <사랑과 의지(Love and Will)>에서 다음과 같이 피력했다.
“현대의 모든 정신분석 방법을 다 이용해서 의지를 분석할 때, 우리는 관심이나 의도라는 차원으로 돌아가는 자신을 발견한다. 다시 말해 의지를 발휘하기 위한 노력은 진정 관심을 가지려는 노력이다. 의지를 발휘할 때 나타나는 긴장은 의식을 명료하게 유지하려는 노력이며, 즉 '집중적인 관심을 유지하기 위한 것'이다.”
《관심을 행동으로 나타낼 수 있는 가장 평범하고 중요한 방법은 말을 들어주는 것이다.》
막대한 시간을 듣는 데에 보내면서도 사람들 대부분은 그 시간을 낭비한다. 왜냐하면 대체로 잘 들으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어느 산업 심리학자가 지적하기를, 학교는 아이들에게 미래에 자주 사용할 것은 가르치지 않고 별로 활용하지 않을 것을 가르치는 데 시간을 허비한다고 했다.
기업의 임원이라면 읽는 데는 1시간, 대화에는 2시간, 듣는 것에는 8시간을 할애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교는 학생들에게 책 읽는 법을 가르치는 데에만 대부분의 시간을 할애한다. 말하는 법에는 그나마 약간의 시간이라도 안배하지만 대체로 듣는 법에는 조금도 관심도 없다.
학교에서 가르치는 내용과 졸업 후 할 일이 꼭 일치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학생들에게 잘 듣는 방법은 반드시 훈련시켜야 한다. 듣기를 수월하게 할 수 있게 교육하자는 것이 아니라, 잘 듣는 것이 굉장히 어렵다는 것을 알도록 하자는 것이다. 잘 듣는다는 것은 관심을 실천에 옮기는 것이고 반드시 많은 노력이 필요한 일이다. 많은 사람들이 잘 들을 줄을 모르는 것은 이러한 것을 깨닫지 못했거나 잘 들으려고 노력하지 않기 때문이다.
얼마 전 유명한 사람의 강연을 들었다.
그는 내가 오랫동안 흥미를 갖고 있던 심리학과 종교 관계에 관한 주제로 강의를 했다. 흥미를 가졌던 만큼 나는 그 과제에 어느 정도 전문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강연이 시작되자마자 나는 강사가 위대한 현인이라는 것을 알았다. 모든 사례를 열거해가며 청중이 이해하기에는 난해한 추상적 개념을 이해시키려고 열심인 모습을 접하면서 그의 (청중에 대한) 사랑을 가슴 깊이 느낄 수 있었다. 나도 강사의 열정에 부응해 최대한의 관심을 기울여 강연을 들었고 1시간 반 동안 줄곧 얼굴에서는 땀이 흘러내렸다. 냉방이 충분히 되어 있는 곳인데도 말이다. 강연이 끝나자 머리는 지끈지끈 아팠고 집중하느라고 애써서 목은 뻣뻣해졌으며 완전히 힘이 빠져 녹초가 되어버렸다. 이 위대한 강사가 그날 얘기한 것 중 내가 이해한 것은 겨우 50퍼센트가 될까 말까 한 정도였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놀라운 것은 (미쳐 깨닫지 못했던) 훌륭한 많은 식견을 얻었다는 것이다. 강연장에는 교양을 쌓으려는 사람들이 많이 참석했는데 강연 후 조촐한 다과 시간에 청중 사이를 오가며 그들의 방응을 살폈다. 대체로 그들은 낙심했다. 익히 강사의 명성을 들어 큰 기대를 했지만 그들은 강연을 이해하기 힘들었고 혼란스러웠다는 것이다. 강사는 청중이 원했던 만큼 유능하진 않았다. 어떤 부인은 머리를 끄덕이며 “그는 정말 우리에게 말해준 것이 아무것도 없어요.”라고 장담했다.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나는 이 위대한 강사에게서 많은 것을 들을 수 있었다. 그의 말을 잘 듣기 위해 노력하려는 마음이 있었다는 딱 그 이유 때문이었다. 두 가지 이유 때문에 그런 마음이 생겼다.
첫째는 그의 위대함을 알아보았고 그의 강연이 매우 가치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고, 둘째 그가 들고 나온 주제가 내가 평소에 흥미 있어 하던 것이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의 강연을 깊이 소화하고 흡수해 나 자신의 이해력과 영적 성장을 증진시키고 싶었다. 내가 열심히 들은 것도 (智的으로) 사랑의 행동이었다. 주목할 만한 가치가 큰 사람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를 사랑할 수 있었다. 또한 나의 성장을 위해서 노력할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열심히 경청함으로서) 나는 나 자신을 사랑하는 쪽을 택했다. 그는 선생이었고 나는 학생이었으며, 그는 주는 사람이고 나는 받는 사람이었으므로, 내 사랑은 근본적으로 나 자신을 향한 것이었다. 우리 관계에서 나는 무언가를 얻으리라는 기대감에서 행동한 것일 뿐, 그에게 무언가를 주겠다는 동기는 없었다. 어쨌든 그는 청중 가운데 나의 집중력, 나의 관심, 내 사랑의 뜨거움을 느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그것으로 (그는) 자신의 열강에 충분히 보상받았을 것이다. 앞으로 반복해서 보게 되겠지만, 《사랑이란 예외 없이 양방 통행이며 받는 사람이 줄 수도 있고 주는 사람 역시 받을 수 있는, 서로에게 이익이 되는 현상이다.》
앞의 예는 받은 자로서 경청하는 역할이지만 아주 흔한 경우인 주는 자로서 경청해야 하는 상황도 살펴보자. 예를 들면 아이들의 말을 경청하는 경우다. 이 경우는 나이에 따라 달라진다. 여섯 살 된 1학년 아이를 생각해 보자. 아이는 거의 끊임없이 이야기 할 것이다. 부모가 어떻게 이 끊임없는 조잘거림을 감당할 수 있겠는가?
제일 쉬운 방법은 그것을 금지하는 일이다. 믿지 못하겠지만 실제로 아이들이 얘기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는 가정도 있다. 그런 가정에서는 “아이란 (눈앞에) 보이기만 해야지 지껄여서는 안 된다”는 격언이 하루 24시간 적용된다. 이런 아이는 보이기는 하지만 전혀 다른 사람과 상호 작용하지 못하고 방구석에서 소리 없이 어른을 쳐다보는, 그늘에 가려진 벙어리 구경꾼에 지나지 않는다.
두 번째는 재잘거리는 것을 방관하면서 듣지 않는 방법이다. 그래서 실제로는 아이와 아무런 상호 작용을 하지 않고 아이는 말 그대로 허공에 대고 말하거나 독백을 한다. 이때 아이의 말소리는 단지 주위에서 들리는 소음 정도로서 귀에 거슬릴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세 번째 방법은 듣는 척하면서 하던 일을 그대로 하거나, 하던 생각을 그대로 하면서 아이들을 주목하고 있는 것같이 보이는 것이다. 즉, “그래” 또는 “그것 좋구나!”라며 (아이의) 독백에 보조를 맞춰 적절하다고 생각되는 때에 때때로 소리를 내주는 식이다.
네 번째 방법은 선택적으로 들어주는 것이다. 이것은 특별한 민첩성이 요구되는 행동 유형으로 부모가 듣는 체하는 동안 아이가 무언가 중요한 것을 이야기하는 것 같으면 귀를 쫑긋 세워 들으면서 최소한의 노력으로 쭉정이와 알곡을 구별하기를 바라는 방법이다.
여기서의 문제점은 선택하고 구분해내는 인간의 능력이 그다지 뛰어나지도 능률적이지도 않기에, 상당한 양의 쭉정이를 얻고 많은 알곡을 잃는 경우가 허다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다섯 번째 마지막 방법은 진심으로 들어주는 것이다. 즉, 온 정신을 기울여 아이의 애기를 듣고 , 말 한마디 한마디에 의미를 두어 모든 문장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이러한 다섯 가지 방법은 뒤로 갈수록 점점 더 많은 노력을 요구한다. 그중에서도 다섯 번째 방법은 비교적 노력이 덜한 다른 것에 비해 부모에게 엄청난 에너지를 요구한다. 부모에게 항상 다섯 번째를 따르고 언제나 진심으로 아이의 말을 들어주라고 권할 것이라 생각했다면 여러분은 순진하다. 그렇지 않다!
첫째로, 여섯 살 난 아이는 말을 많이 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므로 부모가 항상 모든 것을 다 들어주려면 다른 일을 성취할 시간이 거의 없다.
둘째로, 진심으로 듣는 데는 커다란 노력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부모가 너무 지쳐서 다른 일을 못할 수도 있다.
끝으로 그 일은 상상 외로 지루하다. 사실 여섯 살의 아이의 조잘거리는 얘기는 대체로 지루하다. 그러므로 바람직한 것은 다섯 가지 전부를 그때그때 균형 있게 맞추는 것이다. 때에 따라서는 아이들에게 그만 말하라고 할 필요도 있다. 예를 들면 그들의 이야기가 다른 중요한 일에 몰두해야 하는 상황을 방해할 때, 다른 사람들에게 버릇없이 굴거나 적대감이나 우월감을 과시하려고 할 때가 그렇다. 흔히 여섯 살짜리 아이들은 조잘거리는 데 재미를 느껴서 조잘거린다. 그런 때에는 반드시 상대방의 반응이 필요한 것도 아니고, 자신에게 이야기하는 것(독백) 만으로 충분히 만족한다. 그러므로 그들을 주목해서 도와줄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러나 어떤 때에는 혼자 중얼거리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부모와 서로 대화하기를 바랄 때도 있다. 그런데도 요구를 들어주는 척만 해도 충족될 때가 있다. 이런 때에 아이들이 상호작용을 통해 얻으려는 것은 대화가 아니라 친밀감이다. 그래서 들어주는 척이 그들이 원하는 ‘함께 있다’는 느낌을 주기에 충분하기도 하다. 더욱이 때로는 아이들 스스로도 대화에 들락날락하기를 좋아한다. 또한 그들도 단지 선택적으로 대화하고 있으므로 부모가 선택적으로 듣는 것을 (차츰) 이해하게 될 것이다. 아이들은 이것을 게임의 규칙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전체 이야기 중에서 여섯 살 아이가 정말 제대로 들어주기를 바라는 것은 작은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부모노릇을 하려면 아주 복잡한 과제가 너무 많다. 그중 하나가 아이의 변화무쌍한 요구에 적당한 태도를 반응하면서 (점차적으로) 완벽에 가깝게 듣고 안 듣고를 조정하는 능력을 지니는 것이다.
이것을 조화롭게 해내기가 무척 힘들다. 왜냐하면 이야기를 듣는 시간이 길지 않더라도 부모가 진심으로 듣는 데 필요한 에너지를 쏟을 의사가 없거나 그럴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아마도 대부분의 부모가 그럴 것이다. 어떤 부모는 듣는 척하고 있거나 기껏해야 선택적으로 들으면서도 진심으로 듣는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자기 기만으로, 스스로 게으름을 감추기 위해 짜놓은 속임수다.
《정말 잘 들으려면 아무리 짧을지라도 굉장한 노력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우선, 그것은 완전한 집중을 요구한다. 누군가의 말을 진심으로 들으면서 동시에 또 다른 일을 할 수는 없다. 만약 부모가 진심으로 아이의 애기를 들으려면 다른 모든 일을 제쳐놓아야 한다. 진심으로 들으려면 그 시간을 오로지 아이에게 바쳐야 한다. 즉, 그 시간은 아이의 시간이 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이때에 자신의 걱정거리와 전념하고 있는 일을 포함해 기꺼이 모든 것을 제쳐놓을 마음이 없다면 진심으로 들을 마음이 없는 것이다.
둘째로 여섯 살짜리의 말에 완전히 집중하기 위해 필요한 노력은 어떤 위대한 강사의 강의를 듣는 데 필요한 노력보다 훨씬 더 크다. 아이의 말은 들쭉날쭉해서ㅡ때로 서둘러 이야기하고 중간은 끊어버리는가 하면 또 반복하기도 하고ㅡ집중하기 어렵다. 또한 위대한 강사의 주제는 청중이 특별히 흥미 있어 하는 것인 반면 아이들은 대체로 어른에게 별 흥미 없는 것들을 이야기한다. 다시 말해 여섯 살짜리의 이야기는 너무 재미없어서 집중에 듣기가 몇 배나 어렵다. 결과적으로 이 연령의 아이 말을 참으로 들어주려면 진정한 사랑에서 우러나오는 노력이 필요하다. 부모에게 그럴 맘이 생기게 만드는 ‘사랑’이 없다면 행동으로 옮겨질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왜 그런 일을 해야 할까?》
왜 우리는 여섯 살짜리의 지루한 이야기에 온통 정신을 집중해서 들으려고 이 모든 노력을 해야 하는 걸까?
첫째로, 그렇게 노력하는 마음은 당신이 아이를 존중하고 있음을 구체적으로 가장 잘 증명할 수 있다. 위대한 강사에게 보인 것과 똑같은 존중을 보여주면, 아이는 소중히 여겨진다는 것을 알고 스스로 소중하다고 느낄 것이다. '네가 소중한 사람'이라는 것을 가르쳐주기 위해선 아이들을 소중하게 여기는 것보다 더 나은 방법도 없고 결국 그 이외의 방법도 없다.
둘째로 아이들은 자신이 소중하다고 느끼면 느낄수록 소중한 것을 더 많이 이야기하기 시작한다.(*나름대로의 비밀도 털어 놓는다ㅡ이점이 앞으로 그 아이를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하다. 옮긴이 註) (그리고 긍정적 반응으로) 아이들은 당신이 기대하는 만큼 행동하려고 노력할 것이다.
셋째로는 귀를 기울일수록, 말하다 쉬고, 더듬거리고, 순진하기 이를 데 없는 그 재잘거림 속에서 아이가 참으로 가치 있는 소리를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 《위대한 지혜는 ‘어린아이의 입’을 통해서 나온다》는 격언은, 진심으로 아이의 이야기를 듣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절대적인 진리로 여길 것이다. 뿐만 아니라 아이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다 보면 아이의 특별함도 인식하면 할수록 아이의 이야기를 듣고 싶은 마음도 더 커질 것이다. 그리하여 당신은 더 많은 것을 알게 된다. 넷째로 아이에 대해서 아는 것이 많으면 많을수록 더 많은 것을 가르칠 수 있다. 아이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을 경우, 미처 배울 준비가 안 된 것을 가르치거나 아이가 벌써 알고 있고 어쩌면 당신보다 더 잘 이해하고 있는 것을 가르치려 하게 된다.
끝으로 당신이 소중하게 생각하고 자신의 특별한 점을 이해해준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아이들은 기꺼이 당신의 말에 순종하고 당신이 그들을 대한 것과 같은 존경을 돌려줄 것이다.
당신의 가르침이 그들의 특성에 적합한 것이면 아이들은 더욱 당신의 가르침을 열망하게 된다. 그리하여 배우면 배울수록 더욱 특별한 인간으로 성장하는 것이다. 이런 과정의 순환적인 성격을 파악했다면 제대로 아는 것이며 사랑의 상호성의 진리를 이해한 것이다. 하강하는 악순환 대신 이것은 발달과 성장의 창조적 상승 순환이다. 즉, 존중이 존중을 창조하고 사랑이 사랑을 낳는다. 부모와 아이가 함께 앞을 향하여 더 빠르고 빠르게 사랑의 2인무를 추며 회전한다.
지금까지 여섯 살 아이를 염두에 두고 이야기해왔다. 더 어리거나 더 큰 아이라 해도 들어주고 안 들어주는 것의 비율이 다를 뿐 그 과정은 근본적으로 똑같다. 나이가 어릴수록 아이의 의사 전달은 더욱 비언어적인 형식을 취하지만, 마찬가지로 완전히 집중해주는 시간이 필요하다. 딴 생각을 하면서 아이와 짝짜꿍을 한다면 잘할 수는 없다. 만약 반쯤 정신을 딴 데 팔면서 짝짜꿍을 한다면, 반쯤은 정신이 딴 데 가 있는 산만한 아이를 갖게 될지도 모른다. 십대 아이들은 부모의 경청시간이 여섯 살짜리보다 시간상으로는 짧을지 모르나, 질적으로는 더욱 귀를 기울여 들어야만 한다. 그들은 목적 없이 재잘거리는 일은 훨씬 적지만, 어렸을 때보다 더욱 더 완전히 집중해서 들어줄 것을 원한다.
부모가 들어주기를 바라는 마음은 자라서도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어떤 삼십대의 능력 있는 전문직 남자는 낮은 자존감과 관련된 불안증세 때문에 치료를 받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그 역시 전문직인 그의 부모가 자기의 이야기를 들으려 하지 않았던, 그의 이야기는 들을 가치가 없고 중요하지 않다고 단정 지었던 여러 경우를 떠올렸다. 이 중 가장 기억에 생생하고 괴로웠던 일은 그가 스물 두 살 때의 일이었는데, 당시 그는 센세이션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긴 논문을 써서 '대학 졸업 때 우수상'을 받았다. 아들에 대한 야망이 컸던 부모는 그의 수상을 매우 기뻐했다. 하지만 논문 한 부를 일 년 내내 거실 한복판에 놔두고, 부모에게 "읽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라는 암시를 종종 주었지만 누구도 그럴 시간을 내지 않았다.
치료가 끝나갈 무렵 그는 말했다.
“부모님께 가서 단도직입적으로 ‘저기, 제발 제 논문 좀 읽어주실래요? 제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좀 알아보고 평가해주세요.’라고 부탁했더라면 논문을 읽었을 것이고 그와 관련해서 저를 칭찬했을 겁니다. 하지만 그런 내 얘기를 들어달라고 구걸하는 꼴이었겠지요. 스물두 살에 부모의 관심을 받고 싶어서 사정사정하며 돌아다닌다면 정말 바보 같았겠죠. 관심을 구걸해야만 하는 상황은 제게 존중받고 있다는 느낌을 주지 못했을 것입니다.”
진심으로 들어주고 다른 사람에게 온전하게 집중하는 것은 언제나 사랑의 표현이다. 진심으로 듣기 위해 꼭 필요한 요소(말 참견하고 싶은 것)는 괄호로 묶는 것이 사랑의 표현이다. 그것은 가능한 한 말하는 사람의 내면세계를 그의 입장이 돼서 경험하기 위해, 자신의 편견, 판단 기준, 욕구들을 일시적으로 포기하거나 제쳐두는 것을 말한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의 합일은 실제로 우리 자신을 확장하고 확대하는 것이며 이러한 경험을 통해 늘 새로운 지식은 획득된다. 더욱이 진심으로 듣는 것은 괄호로 묶기, 즉 자신을 제쳐두는 것이므로 이것은 또한 다른 사람을 일시적으로 완전히 받아들이는 것이기도 하다. 이렇게 받아들여지고 있음을 느끼면 말하는 사람은 상처받을 가능성이 많이 줄어든 것을 느끼고 듣는 이에게 마음속에 간직했건 것을 개방하고 싶은 마음이 더 커진다. 이렇게 됨으로써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이 서로를 더 잘 이해하게 되고, 사랑의 2인무(舞)가 다시 시작되는 것이다. 괄호로 묶는 훈육과 모든 관심을 집중하는 데에는 에너지가 아주 많이 필요해서 단지 사랑으로, 다시 말해서 서로의 성장을 위해 자신을 확장하려는 의지로만 달성될 수 있다. 《대부분의 경우 우리에게는 이런 에너지가 없다!》
사업상 거래나 사교적인 인간관계에서 아주 열심히 듣는다고 생각할지라도 우리는 대체로 마음속에 이미 고정된 의견을 바탕으로 선택적으로 듣는다. 우리는 들으면서 원하는 어떤 결과를 어떻게 얻어낼지, 그리고 어떻게 하면 가능한 빨리 대화를 빨리 마칠 수 있는지, 아니면 더 유리한 방향으로 다시 끌고 갈 수 있는지를 생각하며 듣는다.
《진심으로 듣는 것은 사랑의 행동으로 실천하는 것이므로, 결혼 생활에서만큼 이것이 적합한 데는 없다.》 그런데도 대개의 부부는 상대방의 이야기를 결코 진심으로 듣지 않는다. 그래서 부부가 상담이나 치료를 받으러 왔을 때 치료사가 수행할 주요 과제는 《상대방의 이야기를 듣는 법》을 가르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일은 적지 않게 실패한다. 그들이 기꺼이 투자하려고 했던 에너지와 인내심보다 더 많은 것을 필요하기 때문이다. 상담하러 온 부부들은 처방 중에 시간을 정해놓고 대화하라는 것이 들어 있으면 대체로 놀라고 심지어는 겁을 먹기도 한다. 그것은 멋없고 딱딱하고 어색한 느낌을 주는 것 같다.
그러나 가슴을 열고 대화하기 위해서는 특정한 시간과 조건이 갖춰져 있어야 한다. 운전하거나 요리하거나 피곤해서 잠이 필요할 때 또는 방해받기 쉬울 때나 서둘러야 할 때는 그런 대화를 할 수 없다. 낭만적으로 ‘사랑’에 빠지는 것에는 노력이 필요치 않다.
그러므로 《많은 부부들은 대체로 진실하게 사랑하고 귀를 기울이기 위해 노력하고 훈육하는 것을 감내하려 하지 않는다.》 그러나 노력하면 막대한 기쁨을 누리 수 있다. 진지하게 경청하는 것이 일상이 되자 한 배우자는 진정으로 기뻐하며 다른 배우자에게 거듭 말했다. “스물아홉 해를 함께 살았지만 그런 면이 있다니, 당신을 제대로 알지 못했군요!” 이렇게 되면 비로소 부부의 결혼 생활에 성장이 시작된 것이다.
진심으로 듣는 능력은 연습을 하면 차츰차츰 향상한다. 그러나 노력 없이는 불가능하다. 그래서 훌륭한 정신과 의사에게도 가장 필수적인 것은 진심으로 듣는 능력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50분’의 상담 시간 중 6번 정도는 환자가 무엇을 얘기하는지 (정신과 의사 조차도) 진심으로 듣는 것에 실패한다. 어떤 때는 환자가 무엇을 얘기하는 줄거리를 다 놓치는 때도 있다. 그럴 때 “미안합니다. 잠시 딴생각을 하고 있었나 봐요. 제대로 듣지 못했는데 지금 얘기한 것을 다시 말씀해주시겠습니까?”라고 말해야 하는 경우도 있다. 흥미로운 것은 보통 이럴 땐 환자들이 화를 내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히려 그들은 내가 진심으로 귀를 기울이지 않은 실수에 예민한 것이 바로 진심으로 듣는 데 절대적인 요소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아는 것 같다. 또 (잠깐의) 산만함을 고백하는 건 그 외의 다른 모든 시간 동안에는 진심으로 들었다는 것을 재확인하는 것이기도 하다. 대체로 누군가 진심으로 자기 말을 들어준다는 그 자체만으로 자연스럽게 놀라운 치료 효과가 나온다. 환자가 어른이든 아이든 상관없이 수많은 상담 사례들 중 4분이 1은 문제의 근본 이유가 밝혀지지 않았거나 중요한 분석을 할 수 없는 경우다. 그런 경우에도 처음 몇 달간은 상당하고 극적인 진전을 보인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의사가 자기 말을 진심으로 듣고 있음을 직감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환자 중에는 몇 년 만에 처음으로 누가 진심으로 자기 말을 들어주었다거나 또는 생전 처음 그런 경험을 했다는 사람도 있다.
듣는 것이 현재 관심의 가장 중요한 표현 방법이긴 하지만, 대부분 사랑하는 사이에는 다른 표현방법도 필요하다. 특히 아이들과의 관계에서는 더 그렇다. 방법은 아주 다양하다. 그중 하나는 게임을 하고 노는 것이다. 갓난아이와는 짝짜꿍이나 까꿍을 할 수 있을 것이고 여섯 살 아이와는 요술놀이나 낚시나 숨바꼭질을, 열두 살 아이와는 배드민턴과 카드놀이를 하는 식이다. 어린아이에게 책을 읽어주는 것은 더 큰 아이들의 숙제를 도와주는 것과 마찬가지로 관심을 보이는 행동이 된다. 가족 활동도 중요하다. 영화, 소풍, 드라이브, 여행, 박람회, 축제에 함께 갈 수 있다. 관심을 기울이는 것 중에는 순전히 아이를 위해 봉사하는 것도 포함된다. 네 살 아이를 해변에 앉아 보살피는 것, 열 살 안팎의 아이를 위해 끝없이 차로 데리고 다니는 것이 그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돌보는 모든 형태의 공통점은 이야기를 듣는 것과 마찬가지로 아이와 시간을 함께 보낸다는 것이다. 기본적으로 관심을 갖는다는 것은 시간을 함께 보낸다는 말이다. 관심의 질은 함께 있는 동안 (아이에게) 얼마나 집중했는가에 비례한다. 이러한 활동을 하면서 아이들과 보내는 시간을 잘 활용하면 부모는 아이를 관찰할 수 있는 무수한 기회를 얻고 아이의 상태를 더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아이가) 놀이에서 졌을 때 승복하는 태도가 어떤지, 어떻게 숙제를 하며, 어떻게 배우고, 무엇에 흥미를 가지며 또 무엇에 흥미가 없는지, 어떤 때는 용감하고 어떤 때에 두려워하는지 등을 관찰할 수 있다. 이 모든 것이 자녀를 사랑하는 부모에게는 없어서는 안 될 너무나 중대한 정보들이다. 이렇게 놀이를 하면서 아이와 함께 지내는 기간은 부모가 삶의 기술을 가르쳐주고, 훈육의 근본적인 원칙을 가르칠 수 있는 많은 기회를 제공한다. 아이를 가르치는 데 놀이가 유용하다는 것은 놀이 치료의 근본 원리이기도 하다. 경험이 많은 아동 치료사는 중요한 관찰과 치료 차원의 개입을 위해 아동 환자들과 함께 놀이를 하며 시간을 보내는 데 대단히 능숙하다.
네 살 아이를 해변에서 앉아 지켜보는 것, 여섯 살 아이의 밑도 끝도 없는 얘기를 집중해서 들어주는 것, 십대 아이에게 운전하는 법을 가르치는 것, 배우자의 사무실이나 세탁방에서 있었던 그 날 일을 이야기할 때 진심으로 들어주는 것, 꾸준히 인내심을 발휘하고 가능한 한 많은 것들을 괄호로 묶어두려고 하면서 배우자 내면의 문제를 이해하는 것, 이 모든 것들은 때로 지루하며 대체로 불편하며 언제나 에너지를 고갈시킨다. 그것은 노력이 들어가기 때문이다
좀 더 게으르면 우리는 그것을 전혀 이행하지 않을 것이다. 좀 덜 게으르면 그것들을 더 자주하거나 더 잘 이행할 것이다. 《사랑은 노력이기 때문에 사랑하지 않음의 본질은 게으름이다. 》
《게으름이란 주제는 대단히 중요하다.》 이것은 지금까지 다루어온 훈육과 사랑이라는 주제에 내재된 숨겨진 주제라고 하 수 있다. 마지막에 가서 이 부분을 좀 더 명확하게 다룰 것이다.
* 번역물이라 저 나름대로 읽는 이가 이해하기 쉽게 문장을 조금 고치고, 극히 일부분(특히 괄호부분)을 첨가했습니다.
* 역시 진지하고 진정한 사랑에 따른 행동(경청)은 너무나 중요합니다. 모든 인간관계에 참고할 만한 글이라고 생각합니다. 본문의 예에 더하여 친구 사이, 사내에서, 고객과의 대화에서, 강의에서, 신앙생활에서, 심지어 목회현장에서도 활용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부부관계에서 잘 활용할 수 있지 않을까요? 그리고, 이 글을 한 번 읽고 느낌만 가지는 정도라면 너무 게으른 독서가 아닐까요? 보관하여 가끔 반복적으로 읽을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대화의 기적’(루엘 엘 하우)라는 좋은 책도 있습니다.
"He who has ears, let him hear"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ㅡ마 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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