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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사15-계속1/ 재미원로 학자 Hugo W.Kim

양곡(陽谷) 2023. 7. 13. 00:08

문명사 연재 15. 근세초기(1400-1715)의 역사적 교훈 (Continued 1)

(b) 정치와 경제의 상호작용

탐험과 정복: 15세기 말 스페인은 비상한 정열을 가지고 신세계를 탐험하고 정복하여 식민지를 건설하였다. 1519-21년 에르난 코르테스는 아스테카 제국을, 1531-35년 피사로는 잉카제국을 정복하였다. 다음 한 세대의 정복자들은 칠레와 아르헨티나의 해안을 따라 스페인의 정착촌을 형성하여 에콰도르, 콜롬비아, 베네주엘라, 중앙아메리카로 침투하고 아마존 유역과 미국 남부를 탐험하였으며, 태평양을 횡단하여 1571년 필리핀의 마닐라를 건설하였다. 한편 포르투갈은 1497-99년 바스코 다 가마가 인도항로를 발견하고 알폰소 앨버커키는 고아와 말라카를 정복하여 1513년 양념류 산지인 몰루카에 도착하고, 테르나테왕과 계약하여 양념류의 생산 수집 수출의 체계를 확립하였다. 포르투갈 상인들은 1513-14년 캔톤을 방문하고 1557년까지 마카오에 정착촌을 형성하였으며, 1540년대에 일본에 무역과 전도를 하였다. 또한, 1471~1507년 아프리카의 서안과 동안을 탐험하여 본국과 항구들을 연결하고, 1500년 브라질을 발견하여 1530년에 정착촌을 이루어 남미에서 스페인 정착이 없는 유일한 영토가 되었다.

그러나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그들이 개척한 새로운 부(富)를 오랫동안 누리지 못하였다. 처음부터 스페인은 프랑스와 포르투갈의 해상 습격에 그들의 선적을 보호하기 어려웠다. 영국 해적은 카리브해에서 스페인 당국과 첫 충돌이 있었던 1568년 이후부터 무서운 위협이 되었다. 네덜란드는 1516~68년 기간에 큰 해양세력이며 합스부르크 제국의 신민으로 스페인과 북유럽의 항구들 사이에서 중재자의 위치를 누렸다. 네덜란드는 이베리아 국가들을 괴롭힐 동기가 없었으나 스페인에 반란하고(1568), 영국은 스페인 무적함대를 침몰시켜(1588) 이베리아 국가의 해군력이 급속히 약화하였다. 그 후 네덜란드 함대는 스페인 항구를 괴롭혔고 그들 해군은 아시아에서 포르투갈의 상권을 위협하였다. 네덜란드는 자바의 기지건설(1618), 말라카 함락(1641), 세일론에 무역거점 확보(1644) 등으로 인도양에서 주도권을 확보하였다. 같은 시기에 영국은 서인도에서 발판을 구축하고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는 북아메리카에 식민지를 건설하였다. 유럽의 밖에서 모굴이 인도를(1526~ 1688) 만주가 중국(1621~83)을 정복하였다. 한편 오토만 터키의 모슬렘은 콘스탄티노플을 함락하고(1543)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로 세력을 확장하였다.

정치 발전: 카스틸의 이사벨라와 아라곤의 페르디난드가 결혼하여 스페인이 탄생하였다(1469). 찰스 5세는 스페인 왕과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 이탈리아 전쟁에서 프랑스에 승리하여 밀라노와 나폴리를 얻었다. 스페인 필립 2세는 네덜란드 독립을 허용하고(1581), 영국과의 해전에서 패배하여 해군 우위를 상실하였다. 프랑스의 헨리 4세는 오랜 내전으로부터 왕국을 회복하였다. 프랑스는 가톨릭 국가였으나, 국가이익은 교황의 이익과 상이하여 수석장관인 리슐리외 추기경은 30년 전쟁에서 프랑스가 개신교 편에서 싸우도록 하였다. 웨스트팔리아 조약(1648)은 네덜란드와 스위스연방의 독립을 승인하고, 가톨릭 루터교와 칼뱅교에 대해 종교적 관용을 허용하였다. 영국은 젠트리 계급이 세력을 얻어 절대왕정에 대항하여 영국 내전에서 승리함으로써(1640-49), 의회가 정부재정을 감독하고 일반행정을 통제하였다. 이로써 젠트리와 상인계층이 고위정책 결정 과정에서 프랑스의 절대왕정의 정책과 행정보다 능동적이며 직접적 역할을 하였다.

경제 성장: (1) 유럽의 경제발전은 정치적인 통합과 차이를 가지고 진행되었다. 더 큰 통치 권력의 출현으로, 국가의 법규가 도시의 법규를 보완하고 초월하여 전 영토에서 기업이 자유롭게 운영되었다. 따라서 상인, 광부, 제조업자들은 그들의 활동에서 외부인에 대해 차별 없이 지리적 규모를 확장할 수 있었다. (2) 지역 간의 상업이 강화되었고, 대양무역이 증가하였다. 북부 이탈리아에서 남부 독일의 집산지까지 육로수송은 큰 장애 없이 수행되어, 장기간 유럽상업의 주류가 되었다. 결과적으로 해당 지역에 이윤이 축적되어 금전 대출이 좋은 직업이 되어, 국제 금융회사들이 유럽의 광산이나 여타 경제활동을 발전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이러한 형태의 무역과 재정은 (저지대 국가들이 중심이 된) 외환 거래로 보완되었다. (3) 17세기에 저가상품의 대량 무역은 구 형태의 상업을 초과하여, 유럽의 외환 경제는 여타지역의 무역 패턴과 확실히 구별되는 대중적 특성을 가졌다. (4) 아메리카 식민지로부터 전례 없이 유입되는 금과 은은 급속한 물가 상승을 초래하였고, 이는 경제 사회적 전통적 관계에서 강력한 지급능력을 보장하였다. 한 세기에 물가가 2배 3배 4배로 상승할 때 임대인, 임금 노동자, 정부 관리 모두가 실질소득의 막대한 감소로 고통을 받는 동안, 모든 기업인은 이득을 보았다. 물가혁명은 중산층의 부상과 그들 정치력의 신장을 가져왔다.

영국-네덜란드 전쟁 (1652-1674): 네덜란드는 1600년대 초에 가톨릭 합스부르크와 80년간의 전쟁을 해오면서 원거리 해양탐험을 시작하였다. 그들 주식회사는 주식거래 혁신으로 자국과 영국에서 탐험자금을 조달하였고, 북아메리카 인도 인도네시아에 식민지를 건설하였다. 그들의 동인도회사는 수많은 원거리 항해로, 네덜란드 사회는 장교계층이 지식을 축적하여 아시아에서 포르투갈과 함께 주요무역 국가가 되었다. 네덜란드는 상선 플뤼트를 저가로 다량 제작하여 많은 상선으로 발트해 무역을 지배하였다. 1648년 웨스트팔리아 평화조약으로 네덜란드는 대부분 해군을 전역시키고, 이로 인해 도시 간의 불화와 오렌지 공의 갑작스러운 사망으로 공화국은 내전의 위기에 직면하였다. 영국은 1642년 내전의 발발로 해군력이 약화하였지만, 1649년 찰스 1세가 참수되고 올리버 크롬웰이 공화국을 수립하여 해군력을 증강하였다. 네덜란드가 해군력이 강해지고, 영국 근해에서 청어잡이를 하며, 동아시아에서 영국을 밀어내고, 영국 식민지에서 세금부과에 대해 자유무역 원칙으로 항의하여, 영국과 점차 적대적인 관계가 되었다. 또한, 30년 전쟁 이후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약화로 그들의 해외 식민지가 공략할 경쟁이 되었다. 1651년 크롬웰은 특사를 보내 네덜란드가 영국의 새로운 공화국에 가입할 것을 요청하였으나 확답을 얻지 못해 결국 대결정책을 취하였다.

크롬웰이 해군을 증강하고 있을 때 네덜란드는 해군함정을 매각하여 영국은 더욱 큰 전함을 많이 보유하였다. 스페인은 통상 남부 유럽에서 네덜란드 함대를 봉쇄하여 영국해군에 득이 되었다. 영국 의회는 1651년 항해법을 제정하여 외국이 영국무역에 개입하는 것을 금지하였다. 한 해상사고로 영국이 네덜란드에 선전 포고를 하여 제1차 영국-네덜란드 전쟁(1652-54)이 발발하였고 영국이 승리하였다. 양국의 상업적 경쟁은 제2차 전쟁(1665-67)과 제3차 전쟁(1672-1674)을 유발하고, 식민지 전역 해전에서 네덜란드가 승리하였으나 양국의 피해는 심대하였다. 영국과 네덜란드는 해군력이 국가번영의 수단이었다. 후자가 웨스트팔리아 조약 이후 전함을 대폭 축소하는 동안, 전자는 해군력을 강화하였다. 네덜란드는 지난 세기에 포르투갈의 무역기지를 무력으로 인수하면서도 교훈을 얻지 못하고 군사력 약화로 18세기에 자국 무역기지를 영국에게 넘겨주었다.

(c) 이론과 실제의 관계

르네상스와 인문주의(Humanism): 제1세대 인문주의자들 중 일부는 고전의 필사본을 열정적으로 수집하였다. 그들 다수가 교회를 위해 일하는 사제이며 변호사나 도시국가의 고관이었다. 르네상스 인문주의는 실용적 접근이며 스콜라주의와 연계된 현학자로 묘사된 것에 대한 반응이었다. 인문주의자들은 분명히 말하고 쓸 수 있는 시민을 교육하여 공동체의 시민 생활에 참여하고, 사람들이 지혜로운 행동을 하도록 설득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인문과학으로 문법, 웅변술, 역사, 시문학, 도덕철학을 포함한다. 인문주의는 문화적 양식이며 문화적 문학적 유산으로 고전적 도덕철학을 재생하는 프로그램이었다. 르네상스의 인문주의적 구절은 고전철학의 회생에 여러 형태로 영감을 주었기 때문에 르네상스는 인문주의와 연결된다. 마키아벨리는 피렌체 공화국의 외교 군사를 체험하여 군주론을 저술하고, 국방과 군대, 군주의 자질, 군주의 사려와 기회에 관해 기술하면서, 이탈리아 통일은 군대 없이 실현될 수 없다고 하였다.

자연법과 정치적 변화: 자연법은 자연에 존재하는 언제 어디서나 유효한 보편적 불변적 법칙이다. 자연법의 개념은 신의 법으로 나타나고 이로부터 인간의 법이 발원한다. 자연법의 이론가들은 이성과 믿음을 분리하려고 노력하였다. 철학적 진리는 신학에서 틀릴 수 있고 그 반대도 성립한다. 르네상스를 통하여 인문주의의 부상, 봉건주의 몰락으로 절대왕정의 강화, 종교개혁과 개신교의 부상, 신세계의 발견과 식민지 건설, 상인 계급의 출현, 과학의 발전 등 환경의 변화에 따라 자연법 개념이 발전하였다. 정치적 변화의 개념과 정치적 가치는 그 정도에 따라 다르다. 급진주의자(Radicals)는 현실에 대한 극도의 불만으로 기존질서에 대해 즉각적이며 깊은 변화를 원한다. 자유주의자(Liberals)는 급진보다 덜 불만스러우나 아직도 현 체제의 의미 있는 변화를 원한다. 온건주의자(Moderates)는 극단주의적 견해나 중요한 사회적 변화를 거부하는 중도적인 사람이다. 보수주의자(Conservatives)는 기존질서의 변화를 거부하며, 미국의 경우 전통, 공화주의, 작은 정부, 기독교적 가치, 도덕적 보편주의, 개인주의, 자본주의 등을 뜻한다. 반동주의자(Reactionaries)는 현재의 가치를 거부하고 과거의 가치와 제도를 선호하여 이전의 정치적 상태로 돌아가기를 원한다. 역사적 관점에서 중도의 지점에 있는 온건주의자의 기준이 변화한다는 것이다. 1715년의 온건주의가 1815년이나 1914년의 온건주의가 요구하는 현상이나 실재가 같을 수 없다.

중상주의와 자유무역: 중상주의의 이론과 실제는 두 가지 관점에서 평가할 수 있다. 첫째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자유롭고 평등하다. 자유주의에 기초하여 국가 간 무역에서 정부가 개입하지 않거나 개입을 제한하면, 자본주의 이윤을 추구하는 거래가 자연히 이루어진다. 그러나 자연의 이치에 반하여 국가가 인위적으로 이익을 추구하기 위하여 수출을 독점하고 외환을 통제하여 일방적으로 무역흑자로 유지하려는 중상주의 정책은 오래갈 수가 없다. 왜냐하면, 상대방 국가도 계속되는 무역적자로 경제를 유지할 수 없기 때문이다. 둘째 무역흑자가 국가의 부를 가져온다는 이론은 경제학적으로 오류라는 것이 판명되었다. 애덤 스미스는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하여 자원이 배분되어야 잉여와 부족이 생기지 않고 효율적이라고 하였으며, 데이비드 리카도는 무역은 (노동, 자본, 기술 집약적 상품 중에) 각국의 비교우위의 상품을 거래하는 것이므로, 서로에게 이윤을 가져온다고 하였다. 고로 자유무역이 국가 경제에 이득이며 중상주의는 손해가 되는 것이 이론적으로 증명되었다.

(문명사 연재 15. 근세초기의 역사적 교훈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