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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사 9- 계속2/ 재미 학자 Hugo W. Kim

양곡(陽谷) 2023. 6. 17. 23:24

문명사 연재 9. 중세 유럽(750-1400)의 경제사상 (계속 2)

(e) 중세 유럽대학의 출현

로마제국의 멸망 이후, 6세기경 이탈리아는 외세침략과 인구감소로 교육체제는 세속의 학교가 일부 생존하였고, 나머지는 대부분 개종을 위한 훈련이나 신부양성을 위한 학교였다. 가톨릭 신학자들은 세속적 교육에 대해 적대적이고, 교회는 지적 개발이나 지식 전달 보다 종교 교리에 의한 도덕적 훈련에 치중하였다. 800 년경 찰스대제의 교육개혁으로 성당, 수도원, 소교구, 수녀원에서 소년 소녀들의 일반교육을 위한 학교를 열어, 7개 교양과목을 가르쳤다. 10세기에 수도원학교 기능이 약화하고, 프랑스는 찰스대제의 궁전학교(후일 파리대학)가 발전하였으며, 영국은 캔터베리 왕립학교가 발전하였다. 11세기까지는 소위 베네딕트 시대로서, 유럽의 교육은 주로 수도사들이 담당하였다. 사회가 점차 질서를 회복하여, 인구증가와 함께 상업과 공업의 발전은 과학과 이론교육을 촉진하였다. 사회적 변화는 신학, 법학, 의학, 사회과학의 이론과 실제에서 고등교육을 요구하였으며, 현존하는 사립학교들은 대학으로 발전하였다. 대학은 석사와 학생들의 학교조합(Guilds)으로, 1088년에 볼로냐대학을 시작하여, 1206년에 파리대학이 설립되고, 그 후 옥스퍼드와 케임브리지 대학이 파리대학의 모형으로 설립되었다.

대학의 발전은 교회와 군왕에 의해 다르게 기대되었다. 교황은 이단적 교리에 반대하는 자신의 입지를 강화하고, 세속적 권력에 대항하는 교황의 세력을 통합하며, 교황청에 봉사할 인력을 보충하기 위하여 대학에 관심이 많았다. 또한, 각국의 왕과 제후들은 정치조직을 강화하기 위하여 대학이 지적역량을 준비해 줄 것을 기대하였다. 중세 대학의 사회적 역할은 주로 교회, 정부, 사회에서 지도자들이 합리적 형태로 일하도록 훈련하는 것이었다. 대학의 과목 이수, 시험, 학위는 해당 분야의 자격증으로, 대학에서 강의를 허용하였으나, 학위가 특정직업을 개업하는 권리를 부여하지 않았다. 그러나 자기실현의 욕구, 지식인의 명성, 정치 종교 보직의 선발과 임명의 특혜로 학생이나 부모들에게 매력이 있었다. 인문학, 과학, 문학 등은 종교적 교리에 제약은 있었으나, 방해받지 않은 사상과 감정에 의해 학문이 소분야로 발전하였고, 문예부흥과 종교개혁의 여명이 되었다. 중세 유럽의 대학은 문명을 향한 지적발전의 원동력이 되었다.

유럽대학은 1378년에 28개였으며, 1500년에는 63개로 증가하였다. 유럽 살레르노(Salerno)에서 10~13세기에 최초로 의학을 가르쳤고 나폴리 대학에 통합되었다. 볼로냐(Bologna) 대학은 11개 단과대학에 학생 86,500명으로 널리 알려진 문과대학이며 법학이 유명하고, 외국 학생 조합으로 권익이 보장되었다. 파리(Paris) 대학은 1150~70년에 기존의 성당학교가 발전한 것으로 1208년까지 많은 부분이 추가 설립되었고, 석사의 수가 증가하여 가르치는 사람의 도시가 되었다. 석사의 대다수는 신학, 법학, 의학, 인문학의 교직원으로, 점차 수도승(Monks), 수도사(Friars), 박사(Doctors)의 시대로 변모하는 과정에 있었고, 교황은 영향력을 증대하였다. 옥스퍼드 대학은 파리대학의 모형으로 1167년에 설립되었으나, 성당이나 수도원에 의해 추진되지 아니하여, 석사들과 학자들은 성직 통제로부터 독립적이었다. 케임브리지 대학은 1209년에 시작하였고, 교황의 법령으로 확인되었다. 영국의 대학들은 14세기 정신세계를 지배하였다.

중세 대학은 교회나 국가에 의해 또는 공동으로 설립이 허가되었고, 통제규칙은 정신적 혹은 세속적 직권에 의하여 영향을 받았다. 황제나 군왕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교황-추기경-주교는 중세 대학의 업무에 많은 개입을 하였다. 파리대학은 4개의 교수단으로 신학, 법학, 의학의 상위 교수단, 인문학의 하위 교수단을 구성하고, 14세기까지 교황은 파리대학의 신학독점을 보호하고, 여타지역에서 신학 교수단 창설을 반대하였다. 사립대학의 재정은 내부자원(입학비와 졸업비, 학위 수여 등 감사 표시, 국가의 지원금, 헌금)과 외부자원 (성직봉급, 국왕봉급, 유산, 보조금, 대학 자산)으로 충당되었다. 국립대학은 국왕이 직접 재정을 지원하였다. 독일은 1480년 이후 석사학위 취득자가 (정부, 교회, 학교의) 수요 보직을 초과하였다. 졸업생의 경력은 출생과 재산에 의존하고, 졸업장은 특권 계급에 주는 작은 장식이었다. 변호사와 의사는 수입이 좋았고, 인문학의 석사는 교직에, 교회법 학자는 교회에 주로 기용되었다. 학문적 순례로 학생과 교수는 함께 유럽 각국에 수학여행을 하였으며, 여행자들은 도로, 교량, 여관, 마차뿐만 아니라 요금, 통과세, 세금, 여타 수수료 문제에 접하여 현실을 체험하였다. 유럽대학은 대부분 파리대학의 모형으로 위의 4개 교수단(의학, 법학, 신학, 인문학)을 구성하였고, 그중 인문학의 7개 교양과목은 문법, 수사, 논리, 산수, 기하, 천문, 음악이었다.

(f) 중세 과학과 문학: 문예부흥의 여명

과학과 기술: (1) 수학: 피보나치는 그의 저술 (1203)에서 힌두의 십진법을 최초로 유럽에 소개하여, 기독교 세계에 수학을 재생시켰다. (2) 지리학과 지질학: 제럴드는 제3차 십자군 설파를 위해 웨일스와 아일랜드 지방을 여행한 후, 사람과 장소에 관한 기록을 남겼다. 노르웨이 시거드왕은 60척의 십자군으로 팔레스타인에 도착하여 모슬렘과 싸웠고 발칸-독일-덴마크를 경유 노르웨이에 돌아와 모험적 여행기를 썼다. 마르코 폴로의 여행기도 유명하다. (3) 물리학: 오르다누스는 3편의 수학 논문에서 지구 중력에 관한 공리를 발전시켰다. 시력의 연구로 유사 안경을 발명하였다. 모슬렘은 1093년경에 나침판을 이용하여 항해를 유도하였다. (4) 화학: 로버트는 아랍어의 연금술을 1144년에 라틴어로 번역하여 유럽에 소개하였다. (5) 기술: 화약의 이용, 수직 풍차, 유사 안경, 기계적 시계의 발명, 수차의 개선, 건축 기술, 농업기술 등의 발전이 있었고, 이는 고대 로마와 비잔틴의 유산과 함께 이슬람-인도-중국과의 무역에서 교차적 문화교류를 통하여 적용하고 발전시킨 기술이었다.

의학의 재생: 중세 초기의 의학 지식은 수도원이나 여타 장소에 보존된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저술에 기초하였고, 치료를 위하여 교회와 신에 희망을 거는 획일적 태도로서, 병은 운명-죄악-별의 영향으로 오는 산물이라고 잘못 인식되었다. 12세기 후반에 의학은 이론적 지식의 실체가 되었고, 대학에서 훈련된 의사에 의하여 질병을 치료하는 것이 제도화되었다. 질병은 악행에서 오는 것이 아니며, 자연적 원인으로 사람 사이에 전파되고, 잘못된 생활행태가 건강을 해친다고 하였다. 아비센나의 의학 저술은 그리스, 인도, 아랍 의술을 요약하였다. 질병 치료는 기독교와 우상숭배 의학 관념이 공존하고, 치료이론은 유머(Humourism), 약초(Herbalism), 정신치료(Mental Doctors)가 있었다. 약초는 흔히 만성 질병을 고치는 연고나 음료로 제조 사용하였다. 십자군 전쟁을 종군한 의사는 부상자를 검사하여 사망과 생존을 판정하였다. 최고의 외과의는 대학에서 해부를 시도하였고, 조직적 신체 절개를 집도하였다. 병원은 프랑스와 영국에서 다수 개업하여 질병을 치료하였으며, 통상 병원은 질병 치료부, 허약 여성 치료부, 피복 식품 관리부로 행정직을 구성하여 관리하였다.

문학: 문예 부흥의 서곡: 중세교회가 주도하는 서부 및 중부 유럽의 모든 교육에서 라틴어가 지배하였고, 교육받은 사람들은 저술에서 라틴어를 사용하였으나, 일반인들은 자국어를 사용하였다. 역사와 문학에 관한 여러 저술이 있으며, 12-~13세기에 서부 유럽에서 가장 널리 읽은 책으로는 장미의 로맨스(1230), 황금의 전설(1259-66), 여우 르나르(12세기 후반)이며 후자는 당대 인간 사회를 풍자하는 동물들의 이야기이다. 문예 부흥의 서곡으로 알려진 작품들은 다음과 같다.

(1) 단테의 신곡(Divine Comedy, 1302-20): 단테가 안내자를 따라 지옥-연옥-천국으로 여행을 하면서 신화나 역사상 인물들을 만나 대화하며, 신학과 철학의 틀 속에서 죄와 벌, 기다림과 구원을 묘사한다. 단테의 생애에서 그의 망명은 지옥이었고, 학문과 저술은 연옥이었으며, 희망과 사랑은 해방이며 행복이었다. 지옥은 변옥, 색욕, 폭식, 탐욕, 분노, 이단, 폭력, 사기, 반역이었고; 연옥은 구원을 받을 영혼이 죄를 참회하고 천국행을 기다리는 곳이며, 천국은 지상의 낙원에 도착하는 것이다.

(2) 페트라르카의 서정시(Cazoniere, 1341-48)는 2부로 나뉘어, 제1부는 라우라의 생전에 쓴 시로 소네트 225편, 칸초네 21편 등 합계 246편이며 제2부는 그녀 사후의 시로 소네트 90편, 칸초네 8편 등 합계 100편으로 되어있다. 라우라는 그가 생애에서 사랑했던 진실한 여성으로, 아름다운 육체를 가졌으나, 사후에 한 줌 흙으로 변하는 슬픔을 안고 있다.

(3) 보카치오의 데카메론(Decameron, 1349-52, 1370-71): 흑사병 이후에 7명의 여성과 3명의 남성이 피렌체 교외의 궁전에 피신하여 하루 10편의 이야기를 10일 동안(총 100편) 돌아가며 말하게 한다. 이는 많은 사랑의 이야기와 연애 사건으로 행복 혹은 불행으로 마감하게 된다. 이를테면, 제4일의 둘째 이야기는, 수도사 알베르트는 한 베네치아의 젊은 여성이 신이 그녀에게 사랑에 빠졌다는 것을 믿게 한다. 그는 자신에게 천사가 들어와 있는 척하며 그녀와 밀회를 즐긴다. 그러나 그의 술수는 들통이 나서 사람들로부터 몰매를 맞고 수도원 감옥에 갇히게 된다.

(4) 초서의 캔터베리 이야기(The Canterbury Tales, 1387-1400): 31명의 순례자 그룹이 런던의 어느 여관에 모여 캔터베리 사원으로 순례를 떠난다. 여관집 주인이 안내자가 되어, 왕복하는 길이 지루하지 않고 재미있는 길이 되기 위하여, 각 순례자가 두 가지씩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게 된다. 그들은 당시 사회 각층을 대표하며, 이야기는 도덕적 이거나 유쾌한 것 등 다양하고, 그 주제는 사랑, 결혼, 가정의 화목 등을 포함한다. 또한, 어떤 이야기는 흑사병 이후에 추락한 교회의 권위에 대한 의문을 제기한다. 문예 부흥에 관하여는 다음 장에서 논의한다.

(문명사 연재 9. 중세 유럽(750-1400)의 경제사상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