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글 등

-이어령이 ---( 2)

양곡(陽谷) 2009. 9. 17. 10:15
(8)

 

왜 아이들은 일어서는 모험을 자청하는가

콩나물 시루가 된 만원 엘리베이터 속에서 이따금 엉뚱한 생각을 해본다.
만약 인간이 다른 짐승들처럼 네 발로 돌아다닌다면 지금 이 엘리베이터는 어떻게 되었을까.
컨테이너처럼 길게 눕혀져 있는 모양을 하고 있었겠지.
사람들은 양 떼 모양처럼 아주 거북하고 민망한 자세로 늘어서 있었을 것이다.
웃음이 나오다가도 아찔한 생각이 든다.

그러면서 인간의 직립 자세의 기원에 대한 프로이트 박사의 가설이 떠오른다.
그것은 항문과 생식기가 있는 엉덩이와 얼굴이 있는 머리 사이를 되도록 멀리 떨어뜨리기 위한 자세라는 것이다.

물론 나도 이미 앞 글에서 기저귀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그리고 아이들이 자연 상태에서 인간적 문화영역으로 진입하기 위해 제일 먼저 하는 것이 대소변 가리는 일이라고 했다.
하지만 나는 결단코 프로이트 박사와 같은 산문적이고 건조한 상상력에는 동의할 수가 없다.

내 기억을 비디오처럼 리와인딩하면 처음 일어서서 웃고 있는 한국 아이들의 모습이 너무나도 생생하게 비쳐지고 있기 때문이다.
말투부터가 다르다.
한국 사람들은 임신하는 것을 아이가 <선다>고 하지 않는가.
말의 이미지를 통해서 보면 한국의 아이들은 어머니 배 속으로 강아지처럼 기어 들어온 게 아니라

당당히 선 채로 아장아장 걸어 들어온 것이다.

실제로도 한국 애들은 엎어 재운 서양 아이들과는 다르다(엎어 재운 아이들이 질식사로 죽는 사고가 잇따르자

요즘 서양에서도 한국식으로 눕혀 재운다).
한국 애들은 누워 지내던 태에서 엎어지는 운동을 하고 다음에는 고개를 들고 누에 벌레처럼 배로 기어가는 단계에 이른다.
일 년 가까이 그런 과정을 제 힘과 의지로 자연스럽게 통과해야만 두 발로 일어서는 마지막 봉우리에 오르게 된다.

중력의 법칙에 따르면 엎드려 기어 다니는 이상으로 편한 자세는 없다.
이 세상 어떤 의자나 책상도 두 다리로 서있는 것은 본 적이 없다.
그런데 왜 아이들은 누가 시키지도 않는데 모험을 자청하는가.
더구나 한국의 장판은 양탄자가 깔린 서양이나 일본의 다다미 방과는 다르다.
한번 넘어지면 콘크리트 바닥이나 다름없다.

그런데도 아이들은 무릎을 찧고 머리를 부딪쳐 울면서도 다시 일어선다.
유난히 정이 많은 한국의 어머니 아버지들인데도 애가 일어나 걸음마를 배우는 순간만은
옆에 떨어져서 추임새만을 한다.
<따로~ 따로~! 따로~ >라고 외치면서 손뼉을 친다.
아이는 다시 일어섰다가는 쓰러지고 쓰러졌다가는 또 일어선다.
그러다가 보라, 이윽고 어느 날 아이는 제 발로 일어선다.
아직 눈물 자국이 마르지 않은 눈에, 볼 위에, 입술 위에 은은하게 어리는 미소를 보았는가.

등뼈를 꼿꼿이 세우고 이 땅의 지평 위에 우뚝 선다.
한 일(一)자의 땅바닥 위에 사람 형상을 딴 큰 대(大)자를 세워 놓은 한자의 그 설 입(立)자처럼, 혹은 한 폭의 깃발처럼.
그런데 서양 아이들은 거의 대부분이 최초로 일어선 순간의 감동을 잘 모른다.
라이스 유크리드라는 사람이 <베이비 점퍼>의 보행기를 만들어 특허(US 8478)를 낸 1851년부터의 일이다.

2002년 아일랜드의 매터병원에서 가레트 박사 팀이 190명의 부모를 상대로 조사한 보고서를 보면

이들 가운데 102명(54%)이 보행기를 사용하고 있다.
그 사용 기간은 중간치로 계산해 생후 26주에서 54주까지 반년 이상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아이들에게 운동을 시키고 빨리 일어나 걷도록 하기 위해 만들어진 장치인데

실제로는 보통 애들보다도 오히려 서너 달 더 늦어진다는 조사 결과다.
거기에 보행기가 굴러 떨어지는 사고도 많이 발생하여 캐나다에서는 이미 십여 년부터 법으로 판매가 금지되어 있다.
미국에서도 그런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그런 이유보다도 더 심각한 것은 제왕절개 수술로 탄생의 자유와 그 권리를 빼앗긴 것처럼
이번에도 일어서고자 하는 자율의 의지와 훈련이 보행기에 의해 무너지고 말았다는 점이다.
호사스러운 보행기 위에서 기기도 전에 먼저 걷는 우리 아이들도 이제는 서양 애들과 마찬가지가 되었다.
언제 일어나서 걷기 시작했는지 아이도 부모들도 모른다.
그래서 요즘의 아버지 어머니들은 <따로 따로 따로>라는 전통적인 추임새의 말조차 모른다.
그것은 곧 첫발을 떼놓고 아직 눈물이 마르지 않은 얼굴에 은은히 미소짓는 한국인의 모습도 모른다는 이야기다.

 

(9) 


업는 것과 업힌다는 것의 문화적 의미

 

일본의 한 소아보건학자는 아이를 업어 기르는 것은 일본과 미국의 인디언뿐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리고 일본 특유의 스킨십을 자랑하면서 아이들을 떼놓고 기르는 서양문화와의 차이점을 강조했다.
하지만 아이를 업는 데 있어 둘째가라면 서러운 한국인들이 바로 이웃에 살고 있다는 것을 모르고 하는 소리다.
일본은 아이를 <온부히모>라고 부르는 띠로 <매고> 한국은 포대기로 <두르는> 그 차이밖에 없다

(아이를 업을 때 조여 <매는 것>과 느슨하게 <두르는 것>의 문화적 차이에 대해서는

이미 기저귀를 논하는 자리에서 밝힌 바 있다).

서양 사람들은 아이들을 낳자마자 요람이나 아기 침대에 떼내어 따로 키운다.
이동할 때에도 유모차에 태워 끌고 다니기 때문에 모자의 스킨십이 부족한 것이 사실이다.
그 대신 아이들은 일찍부터 독립된 한 인격체로서 성장하게 된다.
업은 사람의 뒤통수만 보이는 문화가 아니라 눈과 눈을 서로 마주 보는 소통력의 문화다.

문제는 업는 문화는 스킨십만으로 평가되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아이를 업으면 두 손이 자유로워지기 때문에 부엌일바깥일을 가리지 않고 할 수 있다.
업은 아이 삼 년 찾는다는 속담이 생길 정도로 업은 것조차 모르는 일체감이다.
포대기가 바로 요람이요 유모차이기에 애들은 어머니와 떨어질 걱정 없이 온종일 업혀 다닌다.

어깨너머로 요리하는 것, 세탁하는 것, 바느질하고 청소하는 어머니의 가사와 집안 구석구석을 다 구경한다.
나들이를 갈 때면 바깥 풍경은 물론이고 동네 아줌마의 얼굴과 목소리도 익힌다.
서양 애들이 요람에 누워서 아무것도 없는 천장을 바라보고 있을 때 우리 애들은 엄마의 등에 업혀 세상을 보고 듣는다.

앞으로 살아갈 세상을 어머니의 어깨너머로 미리 느끼고 배우는 현장 학습이다.

새 소리를 듣고, 꽃을 보고, 바람을 타고 오는 모든 생활의 냄새를 어머니의 땀내와 함께 맡는다.
캥거루 같은 유대류보다도 더 밀착된 상태에서 발육하는 아이들은 외로움을 모른다.

어깨너머 세상은 <먹고 먹히는 생존경쟁의 원리>를 <업고 업히는 상생원리>로 바꿔놓는다.
한국의 어머니들도 서양 사람들처럼 아이들을 <베이비 슬링(baby sling)>으로 묶어 매달고 다니는 세상인데도
업는 문화는 한국인의 의식 속에 그대로 따라다닌다.
영화나 텔레비전에서는 그 흔한 키스 신보다는 업어 주는 연기가 최고의 애정표현으로 꼽힌다.
이도령이 춘향이를 업어 주는 판소리 장면과 시차가 없다.
남녀의 경우라면 에로티시즘으로 볼 수도 있지만 국민 소설이 되어 버린 <메밀꽃 필 무렵>의 라스트 신을 보라.
단 한 번의 사랑으로 얻은 동이의 등에 업혀 냇물을 건너는 허 생원의 그 행복 절정의 장면 말이다.

늙으신 어머니를 업고 너무나도 가벼워진 몸무게에 서너 발짝도 걷지 못했다는

일본 시인 이시카와 다쿠보쿠(石川啄木)의 노래에는 국경 없는 감동이 있다.

업고 업히는 문화는 개인 중심의 서구사회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한국인(동아시아) 특유의 집단 귀속의식으로 발전한다.

 윷놀이에서 말판 쓰는 것을 보면 상대방 말은 가차없이 잡아먹으면서도 자기 말들은 넉동산을 한꺼번에 업어 나간다.
그것이 윷놀이의 최고 전략이요 진미다.

업는다는 것은 무엇이며 업힌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리고 우리가 잘 쓰는 <어깨너머로 배운다>는 말의 진정한 뜻은 무엇인가.
업어 주고 업히는 문화를 숫자로 나타내면 어떤 수학공식에도 없는 1+1=1이 생겨난다.
<누이의 어깨너머로 수틀을 보듯 세상을 보자>는 아름다운 시 세계가 열린다.
아무리 추악한 세상이라도 따뜻한 체온이 흐른다.
하지만 내가 처음 홀로 일어서던 날 <따로~따로~따로>라고 추임새를 듣던 <따로의 정신>을 잃으면,
그 개별성과 그 독립정신을 키우지 않으면 <업는 문화>는 한순간에 무너진다.
자아는 의존주의로 빠지고 어깨너머로 본 풍경들은 부정확한 미신이 되고 만다.
공동체의 동질성은 넉동산을 함께 업어 나가는 연고주의와 집단이기주의로 변질될 것이다.

 

 

(10) 

 

  

 돌잔치문화와 꿈

 

오랜만에 돌잔치에 초대를 받았다. 
색동옷과 복건을 쓴 돌잡이를 보면서 처음으로 거기 의젓하게 앉아 있는 한국인의 모습을 보았다.
눈물이 흔해진 나이라 그런지 경사스러운 날에 하마터면 눈물을 보일 뻔했다.
색 바랜 사진 한 장.
그나마 전쟁으로 불타버린 내 돌 사진이 생각나서 그런 것만은 아니다.
모든 것이 변했는데 장례식에 가도 곡소리를 들을 수 없고 결혼식장에 가도 웃음소리를 들을 수 없게 된 세상인데
돌잡이만은 옛날 모습처럼 돌상 앞에 앉아 있다.
하늘의 별들이 일제히 내려와 앉은 것 같은 돌상차림이 아닌가.

그래 나도 돌상 앞에 저렇게 앉아 있었겠지.
아주 작고 반짝이는 그 많은 것들, 이름은 몰랐지만 분명 그것은 붓이고 책이고 무지개 같은 활이었을 거야.
무한대의 기호 모양을 한 것은 장수를 한다는 무명 실타래고
진주알 같이 쌓여 있는 것은 만석꾼이 되라는 흰쌀이었을 것이다.
<얼른 잡아! 저게 다 너의 꿈인 거야. 좋은 걸 골라 잡기만 하면 돼.>
누군가가 속삭인다.

그러나 그것은 환상이고 현실 속에서 내 기억을 일깨워 주신 것은 어머니의 목소리다.
<네가 돌상에서 맨 먼저 잡은 건 붓이었단다.
그리고 낡고 헤어진 천자문 책을 집으려고 했지.>
그때의 말을 나는 정확하게 기억할 수 없지만 흡족한 표정으로 날 바라보시던 어머니의 미소만은 분명히 기억한다.

부귀영화의 쌀과 돈, 권력의 활을 잡지 않고 붓 한 자루 잡았던 나를 기뻐하시고 칭찬해 주신 어머니,
남의 나라처럼 그냥 <퍼스트 버스데이>라고 부르지 않고 유별난 돌잡이 풍습을 만들어 준 나의 조국,
그런 어머니의 아들과 그런 한국 땅에 태어난 것이 고맙고 자랑스러웠다.
어머니의 말씀대로 돌날 붓을 잡은 나는 정말 평생을 글 쓰는 사람으로 살아왔고
칭기즈칸도 아인슈타인도 없는 땅에 태어났으면서도 자랑스러운 마음으로 지금 한국인 이야기를 쓰고 있다.

잠시 흐려졌던 눈이 맑아지자 돌상 위에 놓인 낯선 물건 하나가 눈에 띄었다.
<저건 컴퓨터 마우스 아닌가.>
<예 맞아요. 빌 게이츠가 되라고요.>
돌잡이 아빠는 IT 벤처회사의 간부사원이었다.
의아해하는 내 표정을 읽은 그는 변명을 하듯 말을 이었다.

<요즘 마우스는 명함도 못 내지요.
박찬호가 뜨면 야구공, 박세리가 이길 땐 골프공이 오르지요.
뭐 사라 장이 한국에 와서 연주를 하면 장난감 바이올린까지 등장한답니다.

그런데 요새는 스케이트래요. 유나 킴, 아시잖아요. 김연아말이에요.>

<어차피 책을 잡아도 판검사 되라고 법전일 테고 CEO 되라고 경영책일 텐데 무엇이면 어떠냐.
나처럼 붓을 잡지 않아도 세계에서 제일 가는 사람이 되거라.>
폰 카메라 같은 것으로 누군가 백 년 전부터 돌상을 찍었더라면 아마 한국인의 다양한 꿈 사전이,
시대를 읽는 욕망의 역사책이 생겨났을 것이다.
어느 화가가 말한 것처럼 한국의 밥상을 부감촬영하면 아름다운 그림이 된다.
밥상의 테두리는 액자가 되고 오방색 음식 그릇들은 추상화가 된다.
더구나 돌상은 먹는 음식이 아니라 꿈을 담은 물건들이니 우리 미래를 검색하는 데이터 베이스의 창처럼 눈부실 거다.

예나 지금이나 돌상 앞에 앉아 고사리 같은 손으로 미래의 비전을 잡는 한국인의 모습,
그 시작 속에 우리 문화를 읽는 암호가 숨어 있다.
우리와 비슷한 일본의 돌잡이 풍속과 비교해 보면 알 것이다.

첫째는 상(床)문화다.
한국인의 일생은 <요람에서 무덤까지>가 아니라 <돌상(床)에서 제상까지>다.
그 사이에 초례청, 결혼상이 있고 환갑상이 있다.
그런데 일본은 상이 아니라 다다미방에 돌잔치의 물건을 진열한다.
한국에서는 절대로 돌상에 오를 수 없는 칼(사무라이의 칼잡이 문화)이나 주판(상인들 문화) 같은 것들이다.

둘째는 앉는 문화다.
상 앞에서는 서도 안 되고 누워도 안 된다.
한국의 좌식문화를 상징하는 것이 바로 앉아서 받는 돌상이다.
일본의 돌잡이들은 평생 먹을 양식을 상징하는 떡(잇쇼모찌)을 짊어지고 다다미 위의 돌차림을 향해 걸어가야 한다.
아이가 걸어가는 쪽 물건으로 미래를 점친다.

셋째는 잡는 문화다.
돌잡이는 꿈잡이다.
한국인은 꿈을 꾸지 않고 손으로 잡는다.
<잼잼>과 <곤지곤지>의 애들 놀이에서 쇠젓가락으로 콩알을 집는 손기술까지 모두가 돌잡이의 <잡는 문화>로 상징된다.

같은 젓가락 문화권이라고 해도 일본에는 돌잡이의 개념이 없다.
걷지 못하는 아이들은 돌떡(잇쇼모찌)을 발로 밟게 한다.


 

(11) 

우리 아기 몇 살?


엄마가 물으면 아기는 어렵게 세 손가락을 펴 보이면서 <세~살>이라고 말한다.
그냥 재롱으로 보이지만 실은 한국인이 되는 첫 관문의 시험이다.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는 한국의 속담을 봐도 세 살은 인생의 시작이다.
그런데 왜 그것이 하필 세 살인가?
그 비밀은 공자님만이 아신다.
『논어』 양화편에는 공자님이 제자인 宰我로부터 질문을 받는 이야기가 나온다.
한마디로 부모님의 삼년상이 너무 길다는 것이다.
군자도 삼년상을 지내다 보면 일반 예법을 잊게 되고 음악 연주자도 삼년상을 치르고 나면
몸에 밴 음악을 모르게 될 것이다.
그러니 일 년이면 족할 것이라고 말한다.

그에 대한 공자님의 결론은 아주 간단하다.
<어린애는 세상에 태어나서 삼 년이 지나야 겨우 부모의 품속 생활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러니 누구에게나 부모가 돌아가시면 이번에는 삼 년 동안 자신이 그 곁을 지켜야 된다는
생각이 들 것이다.>
재아인들 삼 년 동안 부모 품에 안겨 자라지 않았겠는가.

부모의 삼년상을 인륜적 시각에서라기보다 생물학적 관점에서 논하고 있는 것이 놀랍다.
배 속에서 나오자마자 벌판을 뛰어다니는 망아지도 있고,
알에서 깨어 나오기 무섭게 하늘로 곧장 날아오르는 앨버트로스 같은 새도 있다.
하지만 인간은 다른 짐승과 달리 삼 년 동안 한순간도 부모의 도움 없이는 우는 것 말고는
고개 하나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존재다.
속수무책 벌거숭이 미숙아로 이 세상에 떨어진 결함 원숭이가 인간이 된 것이라는
아르놀트 겔렌의 말이 거짓이 아니다.
그래서 2000년도 훨씬 이전, 삼년상의 쟁점이 바로 오늘의 三歲兒 교육의 이슈로
직결하게 된다.

그렇다고 세계의 모든 아이가 삼 년 동안 부모의 사랑 밑에 자라고
세계의 모든 사람이 부모가 돌아가시면 삼년상을 치르는 문화를 갖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에도시대 때의 일본 어머니들은 가정형편이 곤궁하면 낳은 아이를 죽이는 풍습이 있었다.
그것을 아이를 신에게 되돌려 준다는 뜻으로 <고가에시(子返し)>라고 불렀고
푸성귀를 솎아낸다는 뜻으로 <마비키(間引き)>라고도 했다.
위험한 낙태보다는 낳아서 죽이는 편이 안전하다 하여 고가에시를 하는
비정한 어머니들도 있었다.
어미가 애를 목 졸라 죽이는 이 거짓말 같은 이야기가 神社의 에마 그림에 남아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다.
수전 핸리의 연구에 의하면 에도시대의 일본 농가는 아무리 가뭄이 들어도
아이를 죽일 만큼은 곤궁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것은 합리적인 가족계획으로 이루어진 것이며 약간의 종교적인 뜻도 작용한 것 같다.
에도시대의 문화 감각으로는 애는 신이 내려보낸 것으로 일곱 살까지는 자기 애가 아니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거기에 식구가 늘어나면 동리 사람의 압력도 작용하여 고가에시는 사회풍습의 하나로
퍼지게 되었다.
유교가 들어오고 막부의 금지령이 내려지기 전까지 말이다.

하기야 위대한 로마시민들도 그랬다.
아내의 임신 소식을 알게 된 전쟁터의 병사 하나가 남자애를 낳으면 훌륭하게 잘 기르고
여자애면 소쿠리에 담아 강물에 띄우라고 한 편지가 발견돼 당시의 자녀관이 어떤 것인지를
짐작하게 한다.
설사 죽이지 않는다 해도 옛날 미국인들은 흑인 노예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들을 노예로 삼았다.
엥겔스의 이야기로는 서구에서 가족을 뜻하는 패밀리아는 원래 로마에서는
노예를 뜻하는 말이었다는 것이다.
이런 골치 아픈 이야기들은 앞으로 수도 없이 듣게 될 테니까
여기에서는 그저 주걱으로 뺨을 때려도 밥풀을 떼어 먹을 수 있어 행복해했던
흥부네 식구가 모두 몇 명이 되었는지 맞혀보는 것으로 끝내기로 하자.

정답은 열두 명.
그렇게 많은 애들을 푸성귀처럼 솎아내는 마비키나 잘못 배달된 물건을 반송하듯
고가에시를 하지 않고 <너 몇 살> <나 세~살> 재미있게 재롱 떨며 사람으로 키운
흥부의 이름을 잘 기억해주기 바란다.
그것이 저출산 시대에 더욱 그리워지는 우리 한국의 아버지요, 어머니의 옛 얼굴이었으니까.
혼자 사람 구실을 하기 위해서는 부모 밑에서 3년은 보호받아야 인간이 되는 이 늦깎이 생물은
이천수백 년 전 공자의 시대와 달라진 게 없다.
다만 변한 것이 있다면 공자처럼 삼년상을 지내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이
이 지구상에는 한 사람도 없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변화요 진화라고 부르는 인간 문명의 역사라는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