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기 전부터 이름 있어 당당한 놀랍고 신비한 태아들의 세계
『젊음의 탄생』강연이 끝나자 책을 든 청중이 사인을 받으려고 몰려왔다. 거의 기계적으로 사인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쑥쑥이라고 써 주세요>라고
말하는 여성이 있었다. 놀란 표정을 짓자 <제 아이에게 주려고요>라고 말한다. 군이라고 써야 할지 양이라고 해야 할지 몰라서 물었다. <여자애요, 남자애요.> 그러자 그 여성은 <아직 몰라요>라고 이상한 대답을 한다. 그제야 나는 그 여성의 배가 불러 있는 것을 봤고 그 옆에는
곧 애기 아빠가 될 젊은이가 참나무처럼 서 있는 것을 봤다. 쑥쑥이는 胎名이었던 것이다.
이름이 있으면 태아도 우리와 같이 존재한다. 칠십 평생 처음으로 글씨도 모르는 배 속 아이에게
책 서명을 해 준 것이다. 처음엔 미소를 지었지만 나중에는 눈이 축축해졌다. 요즘 젊은이들의 말로 眼濕이었다. 나와 동시대에 태어난 아이들의 이름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머리에는 기계총이 나고 부황난 얼굴에는 으레 버짐이 번진
그 애들에겐 태명은 고사하고 본명조차 제대로 된 것이 없다. 쇠똥이, 개똥이가 아니면 그 흔한 돌쇠였다. 그래도 남자아이는 천한 이름이라야 오래 산다는 속신 때문이라고 하자. 하지만 여자애들은 갓 났다고 <간난이>, 섭섭하다고 <섭섭이>다.
그 흔한 <언년이>란 이름도 아마 언짢은 년이라는 욕일 것이다. 남과 다른 특성을 나타낸 이름이라 해도 겨우 점이 있다고 해서
점박이고 점순이다.
검으면 검둥이, 희면 흰둥이 그리고 검고 희면 영락없이 바둑이가 되는,
거의 강아지 이름을 짓는 수준이다. 동네에다 대고 <바둑아!>라고 불러 봐라. 틀림없이 대여섯 마리의 개들이 떼를 지어 달려올 것이다. 동명이인의 여자애들이 강아지 이름처럼 그렇게도 흔했으니
이름이 없는 것이나 다를 게 없다.
하지만 요즘 젊은 부부들 사이에 유행하고 있는 태명에는
남녀의 성별도, 누구 성을 따르느냐의 姓氏 문제도 없다. 그저 쑥쑥 자라라고 쑥쑥이, 무럭무럭 성장하라고 무럭이다. 튼튼히 크라고 튼튼이, 기쁘다고 기쁨이 그리고 또 그런 행복과 축복을
받으라고 행복이요 축복이다. 태어나기 전부터 태 안에서 우리와 함께 당당한 쑥쑥이에게
사인을 해 준 덕분에 그동안 잊고 살던 나 자신의 胎兒期에 대해서도 눈뜨게 됐고,
하마터면 빠뜨릴 뻔했던 한국인 이야기에 태아들이 생활하고 있는
신비롭고 놀라운 이야기도 담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양철북』을 쓴 독일 작가 귄터 그라스는 그 소설 첫머리에
자신의 탄생 장면을 세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양수의 어둠 속에서 철퍽거리고 놀다가 갑자기 환한 바깥세상으로
나오면서 처음 보는 불빛이 몇 촉짜리 전구였는지 그 상표가 어떻게 생겼는지를 어제 일처럼 설명해 주고 있다. 그리고 상상력으로 치면 그 못지않은 영화감독 스필버그는
외계인(ET)들을 태아의 모습처럼 보여 준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소설가의 허풍이요 영화 속의 허상이다. 우리와는 다른 공간에서 살고 있지만 쑥쑥이는 분명 외계인이 아니라
우리 안에 있는 內界人이다. 우리가 기억할 수 없는 탄생의 비밀을 풀어 가자면
소설가나 영화감독의 상상력에만 의존할 수 없다. 로물루스 형제를 젖 먹여 키운 수상한 늑대 이야기로부터 시작한
『로마인 이야기』와 좀 더 다른 이야기를 하려면 늑대를 곰으로 바꾸는 상상력만 가지고서는 안 될 것이다. 시인과 과학자가 손을 잡아야만 쑥쑥이가 살고 있는 저 어둡고
신비한 태내 공간의 이야기를 들어볼 수 있을 것이다.
(4)
어머니 몸 안에 바다가 있었네
상상력이 풍부한 시인들은 바다에서 어머니를 본다. 한자의 바다 海자에는 어머니를 뜻하는 母자가 들어있기 때문이다. 프랑스말도 그렇다. e의 철자 하나만 다를 뿐 바다도 어머니도 다같이 <라 메르>라고 부른다. 거기에 인당수 바닷물에 빠져 거듭 태어나는 심청이 이야기, 실험관의 인조인간 호문클루스가 갈라리아의 바다에 떨어져
생명의 기원으로 돌아가는 괴테의 『파우스트』, 그리고 또 <내 귀는 소라껍질 바다 소리를 그리워한다>는 장 콕토의 시에
이르기까지 실로 그 예를 들자면 끝이 없을 것이다. 나 자신도 <어머니를 위한 여섯 가지 은유>에서
<생명의 시원인 모태는 태초의 바다>라고 쓴 적이 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과학자들도 그와 똑같은 말을 한다는 것이다. 그것도 그냥 바다가 아니라 20억 년 전 최초의 생명 세포를 태어나게 한
태고의 바다라고 한다. 이유는 그 바닷물과 어머니의 자궁 속 양수의 성분이 비슷하고
거기에서 생명의 기적들이 생겨나고 있기 때문이다.
海水와 羊水의 미네랄 화학기호를 들여다보고 있으면 겨자씨만 한 胎芽가 되어 어머니의 자궁 속 바다를 떠다니는
내 모습이 떠오른다.
태고의 그 바다는 어둡지만 참으로 고요하고 아늑했을 것이다. 하루에 일 밀리미터씩 자란다는 수정란의 미생물에서 수아가미와
지느러미가 달린
물고기 모양으로 변해간다. 지구 생물의 진화과정으로 본다면 10억 년의 세월이 지나간 셈이다. 그 지느러미가 손과 발이 되고 폐가 생겨나면 물고기였던 나는
도롱뇽 같은 양서류로 변신한다. 정말 손가락 사이에 물갈퀴 같은 흔적도 남아 있다. 그러다가 드디어 손톱, 발톱이 생기기 시작하면 나는
어느새 쥐와 같은 포유류가 되고 그 몸에 뽀얀 잔털이 자라면
영장류의 원숭이 모습으로 진화한다. 그래도 인간이 되려면 아직 수백만 년이 지나야만 한다. 그래야만 나는 세상 밖으로 나갈 수가 있는 것이다.
지금까지 내가 읽은 어떤 서사시도 이렇게 스케일이 크고
놀라운 변신의 드라마를 보여준 적이 없다. 생물학자들의 말이 거짓이 아니라면
우리는 어머니의 바다(양수) 속에서 20억 년, 더 올라가면 40억 년의
기나긴 생물의 계통 발생 과정을 단 10개월 만에 치렀던 것이다. 상상이 되는가.
너나 할 것 없이 빛의 속도로 질주해도 불가능한 그 길고 긴
생명의 여정을 거쳐서 우리는 이 한국 땅에 안착한 사람들이다. 다만 그것을 우리가 모르고 있을 뿐이다.
신화의 관점으로 보면 우리는 동굴 속의 곰이었지만
생물학적 관점으로 보면 바다에 떠 있는 작은 미생물이었다. 한국인이기 전에 먼저 인간이었고 인간이기 전에 원숭이와 쥐와
도롱뇽과 그리고 바다의 물고기였다. 그 바다 생물 중에서도 자신을 보호할 껍질은 물론 가시조차 없었던
脊索생물 피카이어였다는 게다. 못된 바다의 포식자 노티라스의 먹이로 쫓겨 다니다가
물고기로 진화하고 개구리 같은 양서류가 되어 헐레벌떡 육상으로
올라와 파충류와 포유류의 선조가 된 인간의 먼 핏줄이라 했다. 만약 피카이어가 절멸했더라면
우리들 인간도 태어나지 못했을 것이라고 한다. 포식자들에 쫓겨 다니던 물고기 한 마리가 바다에서 육지로
올라오는 슬프고 이상한
생명의 이야기가 어머니의 양수 속에 숨어 있었던 것이다.
태아들도 꿈을 꾼다는 데 그게 사실이라면
우리는 그때 무슨 꿈을 꾸었을까. 지상의 꿈과는 분명 다른 꿈이었을 거다.
프로이트 박사의 분석으로는 도저히 설명 불가능한 순수한 꿈, 초록색 바다의 꿈이 아니면 그냥 하얀 꿈이었을지 모른다.
축제의 불꽃처럼 일시에 생물들이 터져나온
캄브리아기의 바다 꿈이었을까. 그보다도 먼 우주 대폭발의 하늘 꿈이었을까. 분명한 것은 어머니의 몸 안에 바다가 있었다는 것과
그 태아들도 그 안에서 꿈을 꾸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것을 잘 기억해 주기 바란다. 한국인 이야기를 하는데 두고두고 되풀이될 중요한 화두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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