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의 탄식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
사람은 누구나 하루는 사람이 되고, 하루는 새나 짐승이 되고
또 하루는 물고기나 지렁이가 되다가 풀이 되거나 나무로 되는
법이란 없는 것이다. 이것이 자연이 주는 위대함이다.
나무는 나무의 모습으로 태어 나며 새는 새의 모습으로,
사람은 사람대로 그 모습을 갖고 태어난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라는 선가(禪家)의 화두도
역시 자연을 따라야 한다는 말일게다.
그러나 사람은 자연이 준 모습으로 살기를 원하지 않는다.
코가 낮으며 코를 높이고, 눈이 작으면 눈을 크게 키우고,
가슴이 작으면 가슴을 키우는 성형수술을 서슴치않는다.
이것은 자연을 어기는 일이다.
왜냐하면 자연은 무엇이 예쁘고 무엇이 밉다는
분별이나 비교하는 짖을 모른다.
다만 한 번의 모습을 주고 마는 까닭이다.
인간은 가면을 쓰고 연극하기를 좋아한다.
유전공학이란 최신의 의과학을 이용하여 유전자를 조작하는
창조주의 비밀까지도 서슴없이 행하고있다.
인간이 하느님의 말씀을 거역하여 선악과를 먹고 에덴동산에서
버림받는 저주의 원초적인 죄악을 범한 것과 같은 행위가
이 땅에서 재현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 된다.
유전자를 이용하여 인공적인 인간의 탄생,
소를 코끼리만큼 자라게 한다던지, 소나무에서 사과를 얻을 수 있고
느티나무에서 벼이삭을 맺게 할 수 있을 것이라는
미래 유전자공학이 진행되고 있다.
이렇게 되면 인간의 삶이 지금보다 편하여질까, 아닐까,
오히려 지금보다 더 혼란스런 세상이 올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왜냐면 땀을 흘리고 ,고통의 시간 없이 가만히 앉아서 머리만 써서
살겠다는 인간의 욕심이 바로 종말의 함정이나
덫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자연이 노(怒)하면 사람이란 존재조차도
하나의 티끌처럼 없애버리는 천재지변을 체험하고 있지 않은가,
산들바람이 선선해서 좋다고 말하지만, 한번 노하면 순식간에 태풍으로
돌변할 수 있는 숨은 뜻이 자연에 있음을 알지 않은가?.
들새는 한 알의 먹이를 찾아 수백 번의 날개짓을 해야 하고
굼뱅이는 한낱의 먹이를 찾아 배바닥을 수십번을 굴러야 한다.
꽃잎은 나비를 부르기 위해 밤낮으로 색깔의 변신을 시도한다.
사람도 열 달동안 산고와 인내의 시간을 거쳐 생명을 탄생시킨다.
이 모든 것이 몸을 움직여 자연의 기운을 받아내는
고통과 땀의 댓가로만 얻어지는 것이다.
다시말해, 인간은 쌀로 떡을 만들거나 밥을 지을 수는 있지만
쌀 그 자체를 만들어낼 수는 없다는 것이다.
쌀은 자연의 것이고 밥은 인간의 것일 뿐이다.
인간은 다만 가공하는 재주를 지녔을 분이지
원천적으로 만들지는 못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머리만 써서 살겠다는 인간의 짓은 잔꾀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몸으로 일을 하라, 이것이 바로 자연이라는것,
자연은 우리에게 각자의 모습을 주었듯이
못난사람, 잘난사람, 이쁜사람, 미운사람,
모두똑같이 하나인 것이다.
장자는 우리에게 삶을 주어 일 하게하고 기쁨을 주어 고통을 물리치고
슬픔을 주어 이웃을 위로하고, 넉넉함을 주어 나누는 미덕을 알게하고
사랑을 주어 기쁨을 나누며 살도록 하였다.
하루는 사람이 되고 하루는 짐승이 되는 일이 없듯이,
자연은 단 한 번의 모습으로 살도록 하였음을 말하고 있다.
자연은 이런 삶을 사는 우리에게
시간이 되면 영원히 쉴 수 있는 죽음까지도 마련 하여주었다.
죽음은 영원히 쉬는 것, 이것 조차도 자연만이 할 수 있는 위대함을
엉터리전도사와 장자는 스스로 깨닭기를 간청하고 있다.
거친 숨을 몰아쉬며, 탄식의 소리를 높이고 있다
"자연은 우리에게 모습을 주었다-(잘난사람, 못난사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