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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남 근현대 시문학] 차마 그리운 고향 광주, 광주를 노래한 시인 김태오게시기간 : 2025-03-07 07:00부터 2030-12-31 23:59까지등록일 : 2025-03-05 13:01
조회수 : 47재단법인 한국학호남진흥원
호남 근현대 시문학
내 홀로 뫼에 오르니
고향은 모든 사람이 돌아가고 싶은 곳이다. 나는 산에 올랐다. 산에 오르고 보니 고향이 그립고, 구름에 마음을 실어 고향을 찾아간다. 그 옛날 풀밭에 송아지 뛰놀고, 꼴망태 매고 꼴을 베노라면 사람 소리에 놀란 꿩이 달아나던, 그지없이 평화로웠던 곳이 바로 고향이다. 마을 앞을 흐른 시냇물에 물레방아 돌고, 뻐꾸기 지저귀며 파랑새가 되는 곳, 옛날의 행복했던 꿈결을 간직한 고향을 차마 잊을 수 없다. 산에 올라 하늘 바라보며 향수에 젖는 나는 누구일까? 평화롭고 행복했던 곳, 잊을 수 없고 그립기만 한 고향, 차마 그리운 그곳은 어디일까?淸凉한 鄕愁가 서려····· 먼 하늘로 떠도는 구름 故鄕 찾아 가리. 송아지 뛰노는 草原에는 풀피리 소리도 어울렸다. 꿩 날리고 꼴망태 메고 아리랑 조로 도라 들다. 마을앞을 흐르는 시냇물아 배뱅뱅 도느냐 물레방아야 앞산 버꾸기 지금도 우느뇨 파랑새 훨 훨 날러라. 그옛날 행복은 한낱 꿈결이어 그래도 못잊는 내 故鄕 힌구름 떠도는 저 하늘가에 내 맘을 매여 두다. 「故鄕」전문 동요 작가로, 시인의 길을 걷다. 「故鄕」의 시인 김태오의 작가적 출발은 동요였다. 그는 광주에서 전국에서 처음으로 조선소년운동을 시작했고 1917년부터 동요를 썼다. 그때의 작품은 「그림자」, 「겨울아침」, 「눈온아침」인데 “가난하고 설음 많은 우리 농향(農鄕)의 어린이들을 어떠한 방법으로써 앞길을 열어줄까”1) 하는 고민에서 시작되었다. 김태오의 동요 중에 잘 알려진 동요로 「봄맞이 노래」와 「강아지」가 있다. 동무들아 오너라 봄맞이가자
너도나도 바구니 옆에끼고서 달래냉이 씀바귀 나물캐오자 종다리도 높이떠 노래부르네 동무들아 오너라 봄맞이가자 시냇가에 앉아서 다리도쉬고 버들피리 만들어 불면서가자 꾀꼬리도 산에서 노래부르네 「봄맞이 가자」전문2) 우리집 강아지는 복슬강아지
동요 「봄맞이 가자」는 시골의 봄 풍경을 아주 잘 드러내는 동요다. 지금은 볼 수 없는 풍경이지만 광주가 농촌이었던 1920년대 풍경으로 동무들과 나물을 캐러 다녔던 시절을 회상시켜 준다. 한때 교과서에 실렸던 동요지만 동요를 누가 썼는지 기억하는 사람은 드문 것은 아이러니다. 동요 「강아지」도 마찬가지다. 시골집에서 함께 살았던 강아지들이 늘 따라다니던 추억을 되살려 주고 강아지와 함께 마을을 돌았던 기억을 더듬게 한다. 읽는 독자들을 어린이로 돌아가게 하고 욕심 없이, 티 없이 맑게 뛰어놀았던 어린 시절을 그대로 옮겨놓는다. 동요야말로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필요한 노래가 아닌가 싶다. “아케 이저버렷든 아동 생각이 은근히 가슴 속에 떠돌”3)아 마음의 평화를 가져다주는 동요를 “소년문학 건설의 기초”로 인식하고 있었던 것은 선구적이었다. 그가 민족운동뿐만 아니라 동요창작에 심혈을 기울인 이유였을 것이고 한국문학사에서나 아동문학사에서도 개인 시집이 많지 않았던 1933년에 호를 붙인 동요집 『설강 동요집』4) 을 낼 수 있었던 동력이었을 것이다. 동요창작뿐만 아니라 「동요 잡고 단상」5) 과 「현대 동요 연구」등에는 동요의 개념을 규정하고 창작이론을 제시하면서 아동문학을 이끌어 나갔다. 동요란 무엇인가, 일부분을 옮긴다.어머니가 빨래가면 멍멍멍 쫄랑쫄랑 따라가며 멍멍멍 우리집 강아지는 예쁜강아지 학교갔다 돌아오면 멍멍멍 고리치고 반갑다고 멍멍멍 「강아지」전문 동요란 것은 예술적 냄새가 풍부한 어린이들 노래이니, 마치 종달새가 맑아케 개인 푸른 하늘을 볼 때 노래 부르지 않고는 견댈 수 없는 것과 같이, 제절로 터저나와서 부르는 어린이들 시(詩)를 동요라고 한다. 영원히 없어지지 않는 아동성이 잇고, 가장 숭고한 예술적 가치가 잇는 것은 물론이오, 어운(語韻)까지 음악적이어야 하며, 따라서 동요 유희로 할 수 잇는 것이어야 할 것이다.6)
동요는 ‘부르지 않고는 견댈 수 없는 것과 같이, 제절로 터저나와서 부르는 어린이들 시(詩)’다. 그리고 ‘아동성’이 있어야 하고 ‘예술적 가치’가 있어야 하며 ‘음악적’이어야 한다. 동요를 잘 쓰려면 첫째로 “느낌(感興)이 생기고 사랑스러운 맘(愛着)이 생기고 노래 쓸 맘이 생기는” “예술감”이 있어야 하며, 둘째로 “한번 놓치면 붓잡기가 어려운” “상상(想像)의 시상(詩想)”7)이 있어야 한다. 오늘날의 동시와 다른 개념을 갖고 있는 ‘동요’다. 그러므로 동요는 쓰기 쉬운 시가 아니라 쓰기 어려운 시였다. 그의 동요는 소년운동으로 저항했던 항일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그의 소년운동은 1918년 여름 ‘양파정’에서 동지 10여 명이 모여 소년단 조직하여 소년운동의 고고의 성을 울리면서 시작되었다.8) 전국에서 처음으로 시작된 소년운동이었다. 그는 소년운동에 진력했고 전국적인 소년운동가로 입지를 굳혔다. 그래서 1927년 5월 17일 오월회와 소년운동협회가 서로 손을 잡고 경성에서 발긔대회를 열었을 때 “참가단테는 사개련맹테와 륙십사개 단테”였는데 창립준비위원으로 “남천석, 방정환, 정홍교 최청곡 제씨외 칠인”9)과 함께 선출되었고, “조선의 어린 영들을 위하야 아동 옹호 기관인 소년운동의 고조를 의미한 소년회 간판이 지금에 이백여 단체”10)의 통일에도 앞장섰다. 또한 정지용, 윤극영, 한정동, 신재항, 고장환, 유도순 등과 함께 ‘조선동요연구협회’를 창립11) 하여 동요운동을 전개했다. 뿐만 아니라 전남소년연맹 조직을 위해 무등산 증심사에서 비밀회합을 갖던 중 체포되어 유혁, 조병철, 강자수, 고장환, 정홍교와 함께 보안법 위반으로 투옥되기도 했다.12) 광주에서 경험을 토대로 “경성의 소년운동단체의 간부직을 맡고, 소년운동과 관련된 논전을 서슴지 않” 13) 은 소년운동의 실천적 이론가였다. 그는 동요와 동화와 동극과 평론을 아우르면서 스펙트럼이 넓은 작가로 종횡무진했다. 한편으로 북문밖교회(중앙교회))의 광주서북여자 야학원원장14) 으로, 광주소년연맹의 위원장으로, 신간회 광주지회의 간사15) 로, 광주청년동맹 위원으로, 광주기독교청년회 총무간사로도 활동했다.16) 광주를 읊다. 그는 천상 광주 사람이다. 시적 출발도 광주였고 그가 쓴 많은 시편은 고향에서 출발하여 고향으로 귀착되었으니 말이다. 1939년 김태오의 시집17) 의 서문을 쓴 정인섭은 「『草原』의 靜影」에서 “향수가 그 어느 작품에서든지 직간접 느껴진다”면서 “정드린 고향을 떠날 수 없는 시경을 그 창작 기저로 하고 있어 그것을 상상이라는 꿈과 낭만적인 수법”이라고 간파하였다. 시 「懷古의 情」은 김태오의 향수가 고스란하다. 동무여!
김태오의 시에 자주 등장하는 공간은 단연 ‘양림’과 ‘광주천’과 ‘무등산’이다. 양림은 지금의 사직공원 주변의 동산으로 그가 처음으로 동지들과 더불어 소년 운동을 시작하기로 결의한 곳 ‘양파정’이 있는 양림 동산이다. ‘광주천’은 지금은 물놀이할 수 없는 곳이 되었지만 그때는 수정처럼 맑은 물에서 ‘웃통’을 벗고 물장구를 치며 벌거벗고 놀았던 곳이다. ‘무등산’은 모두가 기운차게 뛰어놀 수 있었던 곳이다. 노루를 잡으러 뛰어다녔고, 토끼몰이를 하러 뒹굴었던 곳이다. 이렇게 그가 쓴 많은 시에는 고향인 광주의 추억과 향수로 가득 차 있다. 다음의 글에서는 광주의 역사를 가슴에 안고 있는 그를 보게 된다. 다소 길게 인용함으로써 그가 품었던 광주의 모습을 가늠해 보기로 한다.그때가 발서 옛날이엇구려! 『아까시야』 욱어진 楊林숩속으로 거닐면서 꽃 香氣맡으며 노래부르노라면 매암이는 덩달어서 가닥으로 어우러질 때 우리는 다시금 발을 돌리어 웃텅을 벗어붙인채 불모래 강변을 내달어 물속으로 와닥닥 뛰어들어가- 헤염치며 크나큰 波紋을 일으키고 물장구치고 물싸홈하고 그리고 또- 물을 한숨에 쑥 드리켯다가 확 내품어 버리면 七色 무지개 아름답게 설 때에 우리는 손뼉치며 뛰지 안엇는가요 앗다 벌거벗고 자유롭게 놀던 그때 말이여요 동무여! 그때가 발서 옛날이엇구려 (중략) 솜뭉치같은 하-얀 눈송이가 시름없이 퍼붓는 어느 겨울날- 학교에 가서 여러 동무들과 눈싸홈하고 집에 도라오아서 동무와 같이 눈사람 만들어 놓고 이웃집 아이들에게 자랑하던 그때라던지 여러 동무들이 방망이 몽둥이 잡히는 대로 메어들고 씩씩하게 산에 뛰올나 노루며 토끼잡든 그때 앗다! 기운차게 뛰며 놀던 그 無等山말이여요 「懷古의 情」부분18) 오늘은 달 밝은 밤, 그리고 八月 秋夕이다. 아직 南國에는 기러기의 消息은 없으나, 제법 싸늘한 바람에 寒氣가 도는 품이 北天에서 기룩기룩 달 밝은 밤, 높다란 秋空을 훝고 그야말로 맑은 主人公인 기러기가 날러오는 듯한 맑은 밤이다. 그러기에 나는 밤잠을 이루지 못하고 두 벗과 가치 瑞石城 문허진 옛터 社稷壇에 올라 울적한 懷抱를 씻으러 햇던 것이다.
이 작품은 서울 중앙보육학교 교원으로 재직하고 있을 때 고향에 내려와서 쓴 글이다. 친구 2명과 같이 ‘瑞石城 문허진 옛터 社稷壇에 올라 울적한 懷抱’를 풀고 ‘옛날의 歷史的 遺跡을 더듬어’ 쓴 즉흥시에는 역사의 뒤안길을 걷는 이의 쓸쓸함과 애닮픔의 ‘수심’이 가득하다. 역사가 흐른 뒤에도 기억하고 전승해야 할 시대정신을 상실한 것에 대한 회한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하지만 수심을 걷어내고 광주천에 스민 달빛과 나눈 대화에는 추석날 밤의 풍경과 하나 된 심정이 한없이 평화롭다. ‘不動橋 쇠다리’에 앉아 ‘푸른 밤 그 中에도 맑은 달밤 힌빛과 푸른 빛으로 繡노은 듯한 맑은 月影이 물 우으로 떨어지는구나. 그리고 가벼운 微風이 살살 물 우로 기어가는구나. 달은 물 우에서 하늘하늘 춤을 추고, 물결은 金波銀波를 이루며 실줄기 같은 문의를 짓고 노래하며 흘러가면서 잇구나.’에서 절정을 이루는 달빛과 광주천의 조우는 그의 결 고운 언어로 빚어낸 명문이다. 그의 맑은 심사는 「달밤」에도 담겨있다. 나운영이 곡을 붙여 가곡으로 유명한 작품으로 「달밤」 전문은 다음과 같다.(중략) 하얀 달빛은 자최없이 大地 우에 떨어지고 잇고나. 그리고 저편 老松이 푸르른 곳에 달빛이 새여 나리여 꿈같은 그림자를 던지고 잇고나. 불어오는 가을바람에 솔닢이 洋琴을 치고, 온갖 잡풀 욱어진 풀에서 가을의 뭇버레들이 애닯은 심포니를 演奏하고 잇다. 眞珠 같은 이슬방울이 반짝반짝 光彩를 내는 풀밭을 거닐고 잇을 때, 달빛은 유난히도 히고 푸른 빛으로 이 땅을 노려보고 잇더구나. 뭉게뭉게 서리어 깊은 잠 속에 빠진 듯한 그윽한 밤이다. 나는 다시금 발을 돌리어 不動橋 쇠다리에 앉은 몸이 되엇다. 푸른 밤 그 中에도 맑은 달밤 힌빛과 푸른 빛으로 繡노은 듯한 맑은 月影이 물 우으로 떨어지는구나. 그리고 가벼운 微風이 살살 물 우로 기어가는구나. 달은 물 우에서 하늘하늘 춤을 추고, 물결은 金波銀波를 이루며 실줄기 같은 문의를 짓고 노래하며 흘러가면서 잇구나. 「예 城터의 仲秋明月」부분19) 燈불을 끄고 자려하니
가곡으로 널리 알려진 시 「달밤」은 “중앙여자전문학교의 부학장인 시인 김태오 선생에게서 시집 『초원』을 받아 보고 그 중 「달밤」이 마음에 이끌리어 구상 끝에 16일 밤 「달밤」을 완성하여 19일 JODK(경성중앙방송국)의 방송을 통해서 첫선을 보였는데, 독창자는 그의 아내 유경손이었고, 피아노 반주는 나운영 자신이 하였다”20) 김태오는 “홍난파 선생에게 바이올린 레슨까지 받았던 분인지라 남달리 음악을 깊이 이해”21)하고 있었다. 아름답고 정겨운 달밤의 풍경을 읊은 것은 추석날 밤의 밝고 맑은 광주천의 달빛을 보고 쓴 것이라면 지나친 과장일까.휘양창 窓門이 밝으오. 門을 열고 내여다 보노니 달은 어여쁜 仙女 같이 내 뜰우에 찾어 오다. 달아 내사랑아 내 그대와 함께 이 한밤을 애기하고 싶고나. 어데서 흐는 短簫소리 淸涼타 달밝은 밤이오. 솔바람이 선선한 이밤에 달은 외로운 길손 같이 또 어데로 가려는고. 달아 내사랑아, 내 그대와 함께 이 한밤을 同行하고 싶고나. 「달밤」전문 연구자로 생을 마감하다. 광주에 거점을 두고 전국을 오가며 교직에 몸을 담은 것은 1921년 의주에 있는 양실학원에서 시작되었다. 숭일학교에서도 재직했던 그는 1931년 4월 중앙보육학교의 교원이 되면서 서울 생활을 시작했다. 중앙보육학교는 1945년 중앙여자전문학교로 바뀌었고 김태오는 임영신과 공동설립자 겸 교수로 참여했다. 그가 교육자로 연구에 집중하게 되면서 작품 창작을 멈춘 대신 연구에 몰두하여 ‘미학’에 대해 무관심이 했던 때에 『미학개론』22)을 내는 “첨단”23)을 걸었으며 김지하도 “어느 전람회에선가 ‘미학개론(김태오)’이라는 책을 부상으로 받았는데 중학교 땐 어려워서 읽을 엄두를 못 내고 있다가 (서울 중동) 고등학교 때 우연히 집어 들었다. 그때도 뭐가 뭔지는 잘 모르겠는데 파보면 재미있는 학문이라는 생각24) 으로 미학을 전공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는 『미학개론』에서 시작하여 『민족심리학』(동방문화사, 1950), 『심리학』(동국문화사, 1954), 『교육학개론』(을유문화사, 1955), 『교육심리학』(을유문화사, 1956)로 이어졌다. 그러니까 그는 우리나라 ‘미학’뿐만 아니라 ‘심리학’, ‘교육학’ 분야에서 초석을 다진 학자였다. 그의 연구는 선구적인 것이었고 도전적이었다. 1903년 7월 16일 전라남도 광주군 광주읍 금계리(광주시 동구 학강동 124번지)에서 김윤흥(金允興)과 김덕연(金德然)의 차남으로 태어나 성장하고 광주를 노래한 광주의 첫 시인의 자리에 있던 그에게 국가보훈부는 소년운동과 대동단 사건 등 독립운동의 공적을 인정하여 ‘1963년 건국공로훈장, 1993년에는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했다.25) 학자로 살다가 세상을 떠나던 날 「古雪崗 김태오博士 永訣式」장에서는 시 「고향」이 울려 퍼졌다. 참고문헌 1) 김태오, 「머리말」, 위의 책, 한성도서, 1933. 5쪽,
글쓴이 이동순2) 원문의 제목은 1930년에 쓴 「봄맞이노래」이며, 원문이 부분적으로 수정되어 약간 다르다. 3) 김태오, 동아일보, 1929. 7. 1. 4) 김태오, 『설강 동요집』, 한성도서, 1933. 5) 동아일보, 1929. 7. 1.~1929. 7. 4. 6) 아이생활』, 1932.7.~1932.10. 7) 김태오, 「현대 동요 연구」, 『아이생활』, 1932. 10. 8) 김태오, 「소년운동의 당면과제」, 조선일보, 1928. 2. 12. 9) 동아일보, 1929. 1. 4. 10) 동아일보, 1927. 7. 29. 11) 동아일보, 1927. 9. 3. 12) 동아일보, 1929. 1. 4. 13)최명표, 「‘조선적’ 소년운동의 논리와 실천- 김태오의 소년운동론」, 앞의 책, 선인, 2012. 211쪽. 14) 동아일보, 1929. 1. 7. 15) 동아일보, 1927. 11. 1. 16) 동아일보, 1928. 5. 3. 중외일보, 1928. 5. 3. 17) 김태오, 『草原』, 청색지사, 1939. 18) 김태오, 「懷古의 情」, 동광』, 1931. 5. 19) 동아일보, 1934. 9. 27. 20) 「가곡순례」, 『새농민』, 1988. 9. 56~57쪽. 21) 「가곡순례」, 『새농민』, 1988. 9. 56~57쪽. 22) 김태오, 『미학개론』, 정음사, 1949. 23) 진중권, 「김태오 『미학개론』읽기」, 『인문학의 싹』, 인물과사상사, 2011. 344쪽. 24) 허문명, 「허문명기자가 쓴 김지하와 그의 시대」, 동아일보, 2013. 4. 9. 25) 김태오는 「승전가」를 비롯한 3편의 친일시를 썼다는 사실이 확인되어 독립운동의 공적을 퇴색시켰다. 조선대학교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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