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리포트
일생활 균형과 시간주권
노혜진 교수(강서대학교 사회복지학과)
1. 위태롭고 아슬아슬한 일생활 균형 상태
대한민국은 명실공히 장시간 일하는 사회이다. 2022년 통계에 따르면 근로자 1인이 실제로 일하는 시간은 1,901시간으로 나타났고, 이는 OECD 국가 중에서 멕시코, 코스타리카, 칠레 다음으로 길다(통계청, 2023). 그런데 통계청에서 보고하는 연평균 근로시간은 말 그대로 ‘실제 근로시간’, 즉 ‘보이는 시간’에만 국한하여 산출한 것이다. 시간이나 장소의 제약이 없는 근로 환경으로 변화하면서 업무 수행의 편의성을 높일 것으로 기대되었던 스마트워크는 오히려 근로자의 비노동 시간을 침범하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정규 근무시간이 아닌 ‘비노동 시간’에 통신기기를 활용하여 일하는 ‘보이지 않는 근로시간’ 문제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근로환경조사의 결과에 따르면 조사참여자의 17.2%가 정규 근무시간이 아닌 시간에 업무로 인해 매일 통신기기를 사용한다고 응답하였고, 5.2%는 일주일에 1-2회 이상 퇴근 후 자유시간에도 일을 하는 것으로 나타났다(산업안전보건연구원, 2021). 따라서 보이지 않는 시간까지 생각한다면, 근로자 1인이 일하는 연평균 시간은 1,901시간보다 더 긴 형편일 것이다. 보이는 장시간 노동도 채 해결하기 전에 보이지 않는 노동 문제까지 등장함에 따라 자기돌봄과 가족돌봄,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친밀한 교제, 다양한 활동에 참여하면서 삶을 영위하고 가꾸는 것은 여전히 도달하기 힘든 영역인 것 같다.
보이지 않는 노동이 증가함에 따라 일과 삶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상황은 다음과 같은 측면에서 우려할 만하다. 첫째, 시공간의 제약이 느슨해진 상황에서 업무 이외의 시간에 수행하는 노동은 업무의 연속일 뿐만 아니라, 무보수 초과노동 문제를 일으킨다. 무엇보다 근로자가 비근로시간에 업무를 요구받고 이를 수행하면서 일과 삶의 경계가 불분명해지는 상황은 재생산 영역과 공간을 ‘메신저 감옥’, ‘로그아웃 없는 삶’으로 피폐하게 만들고, 동시에 식사, 여가, 수면 등 자기돌봄을 위한 필수 시간을 수시로 침범하면서 파편화시키는 문제로 연결된다. 둘째, 사적영역에서도 업무와 항시적인 연결 상태가 유지될 수밖에 없는 상황은 근로자의 정서적 소진, 번아웃 문제를 일으킨다. 특히 조직규범이 강할 경우 최대한 빨리(ASAP) 응답해야 하는 압력은 더 커지는데, 그로 인해 근로자들의 자율성이나 통제감은 감소하고, 일터로부터의 정서적 회복이 황폐해진다. 셋째, 비근로 시간에 수행하는 추가업무는 개인의 정신건강뿐만 아니라 일가족 갈등 수준을 높이고 일생활 균형감을 낮춘다(노혜진, 2023a).
여전히 OECD 4위로 장시간 근로의 대표주자이지만, 굳이 다른 국가와 비교하지 않고 한국 통계만 시계열적으로만 본다면, 한국인의 연평균 실제 근로시간은 사실 10년 전보다 218시간 줄었다. 또한 고용형태별 근로실태조사에 따르면 2022년 전체 근로자의 초과근로시간은 한 달 평균 7.5시간으로써, 이 역시 10년 전과 비교하면 4.1시간 감소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국민여가활동조사 결과에 따르면 일과 여가생활 간 균형을 이루고 있다는 응답 역시 2016년 35.5%에서 2022년 40.5%로 5%p 증가하였다(문화체육관광부, 2022). 겉으로 보기에는 한국 사회가 일생활 균형을 향해 이동 중인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시공간의 제약이 느슨해지면서 보이지 않는 형태로 노동이 근로자의 생활 영역을 침범할 가능성이 증가하고 있음을 고려한다면, 일과 생활은 언제든지 서로의 영역에 침범이 가능한 위태롭고 아슬아슬한 균형 상태라고 할 수 있겠다.
2. 일가족 양립에서 일생활 균형으로
일생활 균형 상태는 삶의 질을 평가하는 대표적인 기준 중 하나로써 OECD에서 발표했던 ‘더 나은 삶 지수(Better Life Index)’에 속한 11개 영역 중 하나이기도 하며, 사회정책을 통해 달성하고자 하는 성과(outcome)라고도 할 수 있다(OECD, 2020). 그렇다면 일생활 균형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가?
일생활 균형은 ‘일’과 ‘일 이외의 영역’에 적절한 에너지와 시간을 할당함으로써 삶을 구성하는 다양한 영역이 서로 균형을 이루고 있다고 인식함으로써 삶의 만족도가 높은 상태를 의미한다. 또한 일?생활 균형은 일과 일 이외의 영역 간 갈등을 최소화하여 기능을 잘 발휘하는 상태로 정의할 수도 있다. 결국 일생활 균형에서 강조하는 부분은 삶을 구성하는 각 영역 중 어느 특정 영역에서 시간이나 역량을 최소한으로 투입(under-utilized)하는 것이 아니라, ‘적절하게’ 사용하는 것이다. 일과 일 이외의 영역에서 적절한 투입이 전제되었을 때 인간은 좋은 기능(good functioning)을 발휘할 수 있는 상태가 될 수 있다. 개인의 일생활 균형 상태를 가시적으로 파악하고 측정할 수 있는 객관적 도구로써 시간은 가장 적절한 지표가 될 수 있으며, 그런 면에서 OECD에서는 일생활 균형 정도를 ‘시간 사용에 대한 만족도’로 측정한다. 결국 일생활 균형을 지원하고 보장한다는 것은, 특정 영역에 시간을 과도하게 사용함에 따라 다른 영역에서는 충분히 사용하지 못하는 상태가 되지 않도록, 삶을 구성하는 다양한 영역에서 적절하게 시간을 사용하고 조율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것이라 정의할 수 있다(노혜진, 2023b).
일 영역과의 관계 측면에서 시간 갈등이나 상충이 가장 뚜렷한 영역이 가정이기 때문에, 지금까지 일생활 균형은 주로 일가족 균형, 일가족 양립을 중심으로 논의가 전개됐다. 일가족 양립으로 접근할 때 갈등과 상충을 경험하면서 시간 통제권을 발휘하기 어려운 대표 집단이 자녀를 양육하는 기혼여성이기 때문에 지금까지 시간 보장에 관한 논의는 주로 가족의 돌봄시간을 지원하는 정책에 초점을 맞춰 전개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맥락에서 Greenhaus, Collins, & Shaw(2003)는 일생활 균형의 개념을 정의할 때 ‘일과 가정의 역할에 비슷한 수준으로 에너지와 시간 자원을 배분(equally engaged)하고 비슷한 수준의 만족감(equally satisfied)을 느끼는 상태’로 명명하며 균형을 이루어야 하는 삶의 영역을 일과 가정으로만 국한하기도 하였다. 일가족 양립을 중심으로 일생활 균형에 관한 논의가 전개되는 과정에서 돌봄 휴가와 휴직정책과 근로시간 유연화, 돌봄서비스 등이 일가족 양립을 돕는 대표적인 정책으로 강조된 바 있다.
그런데 가족 돌봄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혼자 사는 비혼 노동자, 1인가구의 증가로 대표되는 개인화 시대의 도래와 맞물리며 일과 가족 영역으로만 국한하여서 일생활 균형을 고려하기에는 한계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균형과 조화를 이루어야 하는 분야로 가족돌봄 외에 자기계발을 통한 생산적 여가, 소진된 자아에 대한 자기힐링, 자기돌봄과 건강관리 등 자기재생산을 위한 영역의 중요성이 증가하고 있다(김수영 외, 2022). OECD에서는 웰빙(How’s Life? Well-Being)을 현재의 웰빙수준, 웰빙 불평등, 미래 웰빙에 영향을 주는 요소 등 80개 이상의 지표를 중심으로 국가별 성과를 제시하고 있다. 그중에서 현재의 웰빙은 경제 상태와 삶의 질 등 11개 차원으로 구성되어 있다. 삶의 질은 사람들이 서로 어떻게 연결되어 있고 어떤 활동에 참여하는지, 누구와 어떻게 시간을 보내는지를 중심으로 측정하며, 이 과정에서 일생활 균형, 사회관계, 시민참여 등의 지표를 활용한다. OECD에서 제시한 웰빙 역시 일과 가족 영역을 넘어 자기돌봄 분야를 포괄하여 가족돌봄-여가-일 등 3개 영역을 혼합할 수 있는 상태로 일생활 균형의 개념을 정의하고 시간 사용의 만족도로 측정하고 있다.
3. 일생활 균형을 위해 필요한 시간주권
OECD에서는 일생활 균형 정도를 왜 시간 사용에 대한 만족도로 측정하고 있을까? 삶의 질 지표에서 일생활 균형은 휴가, 무급 노동시간, 근로시간의 성별 격차 등으로 측정하다가 2013년부터 시간사용 만족도를 포함하기 시작했고, 2018년부터는 일생활 균형 지표에 시간사용 만족도 결과만 제시하고 있다. 일생활 균형의 개념 정의가 ‘일과 일 이외의 영역에서 적절한 에너지와 시간을 분배함으로써 각 영역이 서로 조화를 이루고 있다고 인식함으로써 삶의 만족도가 높은 상태’임을 상기할 때 한 개인이 자신을 둘러싼 다양한 삶의 영역에서 요구되는 시간 사이에 최적의 시간 배분을 찾는 것은 삶의 균형을 위해 중요한 과업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서 바로 시간주권(Time Sovereignty) 개념이 등장한다. 시간주권은 전 생애주기에 걸쳐서 삶의 다양한 영역에서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개인이 시간을 어떻게 사용하고 할당할지를 결정할 수 있는 권리와 능력, 즉 시간에 관한 통제권과 자율권을 의미한다. 구체적으로 시간주권은 근로시간을 포함해 삶의 시간, 생활시간을 근로자가 스스로 결정하고 조직할 권리, 노동자들이 자신의 노동시간을 결정할 수 있는 권리, 언제 얼마나 노동할지를 스스로 결정할 권리, 개인이 자신의 시간을 조직하고 결정할 수 있는 상태 등으로 정의된다.
그렇다면 시간주권의 많고 적음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시간주권의 미시적 차원은 여가시간이나 재량시간 측정을 통해 계량화가 가능하다. 시간주권을 강조하면서 시간빈곤을 연구한 브릿지 슐트는 진정한 여가는 자신에게 일정한 통제권과 선택권이 있다고 느낄 때 가능하다고 주장하기도 하였다(Schulte, 2015). 삶에서 생존을 위해 반드시 수행해야 하는 경제활동(economic time), 사회활동(social time), 신체활동(personal care time)등 필수 시간을 차감한 재량시간 개념을 통해서도 시간주권을 파악할 수 있다(노혜진, 2019).
개인의 시간 할당과 배분이 자발적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면, 시간주권을 온전히 행사하지 못하고 일생활 균형의 정도가 낮을 수밖에 없는 맥락과 원인을 찾아야 하는데, 이는 개인적, 조직적, 국가적 차원 등에서 파악해야 한다. 개인적 차원에서는 특히 소득수준과의 연관성을 고려해야 하는데, 시간 사용에서 취약한 집단이 소득수준도 낮다면, 시간배분이 비자발적으로 결정되었을 가능성이 더욱 크다. 국가적 차원에서는 한국이 OECD 국가와 비교했을 때 시간보장 수준이 낮은 유형으로 나타났는데, 시간주권 확대를 위해서는 근로시간 감소, 노동을 보장하는 환경으로서 돌봄서비스 확대, 휴가기간 및 이용률 제고, 휴가의 소득대체율 인상, 휴가의 법적 권리 보장 등은 향후 정책적으로 개선해야 하는 과제이다(노혜진, 2023b). 개인과 국가 사이에는 조직이 존재한다. 이는 개별 근로자의 시간주권을 보장하는 환경을 조직이 얼마나 지원해주는가의 문제이다.
4. 시간주권 보장을 통해 일?생활 균형을 돕는 정책과 사업 중요
유럽연합에서 ‘노동하는 삶에 대한 시간의 새로운 구조화(A New Organisation of Time Over Working Life)’ 보고서를 발표했을 때 노동자의 삶의 질을 높이는 3가지 요소로 소득과 사회보장, 일생활 균형, 시간주권을 강조한 바 있다(Naegele et al., 2003). 이를 사회복지 현장에 적용해 본다면, 사회복지사의 삶의 질을 높이는 3가지 요소 중 소득 및 사회보장은 ‘사회복지사 등의 처우 및 지위 향상을 위한 법률’의 3조 처우개선과 신분보장에 명시된 보수 수준, 적정 인건비 등을 통해 구현될 수 있는 최소한의 장치가 마련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노동자의 삶의 질을 높이는 3가지 요소를 고려할 때 이제는 사회복지사의 일생활 균형과 시간주권을 보장하는 방안은 무엇이며, 그것을 어떻게 구체화할 수 있을지에 대해 더욱 적극적으로 고민하고 모색할 때이다.
참고문헌
김수영, 박준혁, 권하늬. 2022. 1인가구 노동자의 생산-재생산 활동에 대한 사례분석: 개인화된 사회의 자기중심적 생산-재생산 메커니즘에 관한 시론적 탐색, 한국사회정책, 29(4), 105-150.
노혜진. 2019. 시간빈곤과 이중빈곤의 실태와 영향요인: 다양한 시간빈곤 개념 적용, 사회복지정책, 46(4), 65-90.
노혜진. 2023a. 퇴근 후 다시 일하는 근로자는 누구인가, 사회보장연구, 39(1), 61-87.
노혜진. 2023b. 일-생활 균형시간 보장의 유형화, 보건사회연구, 43(2), 192-214. 산업안전보건연구원. 2021. 근로환경조사보고서.
Naegele, G., Barkholdt, C., de Vroom, B., Andersen, J. G., & Kramer, K. (2003). A new organisation of time over working life. European Foundation for the Improvement of Living and Working Conditions.
OECD. 2020. How’s Life? Well-Being. OECD.
Schulte, B. 2015. Overwhelmed: How to Work, Love, and Play When No One Has the Time, Picad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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