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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사 연재 18. 18세기 유럽의 정치철학 (Continued 3)/ 재미원로학자, Hugo W.Kim

양곡(陽谷) 2023. 8. 6. 12:14

문명사 연재 18. 18세기 유럽의 정치철학 (Continued 3)

(d) 영국의 비물질주의, 회의주의, 보수주의

***조지 버클리(1685-1753)는 아일랜드에서 출생하여 더블린의 트리니티대학에서 1707년 석사학위를 마치고 그리스어 강사로 가르쳤다. 유럽을 여행하고 돌아와 성공회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받고 트리니티에서 신학과 히브리어를 가르쳤고 1721년 사제가 되었다. 1728년 결혼을 하고 아메리카 선교를 위해 로드 아일랜드에 정착하였으나 약속한 자금이 도착하지 않아 1732년 런던으로 돌아갔고 1734년 클로인의 주교에 임명되어 여생을 봉직하였다. 저술 시각의 새로운 이론(1709)은 기초적 광학 이론이다. 그는 경험주의자로 비물질주의(Immaterialism)는 주관적 관념주의 이론이다.

인간 지식 원리(Concerning the Principles of Human Knowledge, 1710): 물질세계는 감각으로 인지하므로 실재한다. 버클리는 감각의 개념이 사물의 개념이나 영상보다 진실하고 강하다고 보았으며 로크의 추상적인 개념의 교리를 회의주의의 세균이라고 비판하였다. 사물의 실제적 감각 없이 어떤 것을 보거나 느끼는 것이 불가능하므로, 사물 감지나 인식과 다른 어떤 감지할 수 있는 사물이나 물체를 생각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추상적 물체나 물질은 의미가 없고 추상적 개념은 이름뿐이며, 서로 유사한 사물의 무한한 숫자에 공통적 이름을 적용하는 유명론이다. 물질의 본질은 모든 시대에 무신론자들의 친구였다. (1) 자연의 작품은 인간의 의지가 아닌 신의 의지로 생산된다. 인간의 정신은 감각으로 인지되지 아니함으로 신의 존재는 상상의 관념으로 마음속에 있으며, 우리에게 계속 영향을 주므로 종교적 회의주의(Skepticism)를 거부한다. (2) 우리가 다른 품질로부터 시간 장소 동작의 추상적 연장을 시도할 때 느끼는 물체는 감각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므로. 우리는 그들을 시야에서 잃어버린다. 추상적 교리(Abstractions)는 지식의 유용한 대부분을 망쳐버린다. (3) 자연철학(Natural Philosophy)은 회의주의를 포함한다. 이러한 불평은 거짓된 원칙에 근거 없이 영향을 받는다. 추상적인 일반개념의 교리와 마음에 없는 물체의 존재로부터 일어나는 잘못에서 수학자들이 다른 사람들보다 관계가 적지 않다는 것을 의심한다. 버클리는 인간 지식 원리의 결론 부분에서 “신에 대한 믿음을 정당화”하려고 노력하였다.

하일라스와 필로누스 간의 세 대화(Three Dialogues between Hylas and Philonous, 1713)에서 전술한 인간 지식의 원리를 방어하기 위하여 회의주의와 무신론자에 반대 견해를 세 가지로 전개하였다. (1) 모든 물질적인 것들은 비 감각적이며 개념에 의해서만 인지된다. 그는 추상적인 개념이나 사물의 일반화를 거부하였다. (2) 실감하지 못하는 물체는 증명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증명된 불가능이다. 그것은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거나 모순을 의미한다. 고로 활동적이며 살아있는 정신에 기초한 구체적이며 지혜로운 현실주의는 물질세계를 추상적 가정과 난해한 현실주의로 대치한다. (3) 그는 물질세계의 실재를 부정한다. 세계는 정신과 개념 외에는 아무것도 아니다. 참다운 사물은 내가 보고 느끼고 지각으로 인지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지하는 것은 하나이고 (Spirit), 존재하는 것은 다른 하나이다(Matter). 물질은 생각하지 않고 인지하지 않으며 활동하지 않는 물질의 절대적 혹은 외적 존재이다. 비 물질주의(관념주의)는 그들이 바로 인지하는 사물이 실재하는 사물이며, 바로 인지되는 사물이 마음에만 존재하는 개념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의 새로운 개념은 칸트나 헤겔에 의해 발전된 독일의 관념 철학의 기초를 형성하는 데 이바지하였다.

***데이비드 흄 (1711-76): 스코틀랜드 태생으로 에든버러대학에서 역사, 문학, 철학 등을 공부하고 프랑스에 건너가 대륙 학자들의 저술을 읽고 26세에 인간의 본성(1734-37)을 출간하였다. 영국에 돌아와 인간의 이해력, 도덕의 원리, 정치적 논설, 영국 역사, 종교 자연사 등 많은 저술을 하였다. 그의 저술은 애덤 스미스의 자유 경제사상과 임마누엘 칸트의 관념 철학에 크게 영향을 주었다. 그는 1752년 에든버러대학 도서관장을 하고 1763년 주프랑스 대사 비서로 일하면서 루소와 교류하였다.

인간 이해에 관한 질문 (1748): (1) 심리학과 경험주의: 철학자들은 이성이 경험적 기초위에 알 수 있는 것을 넘어서 침투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흄은 인간 이해의 좁은 영역을 적합 시켰다. 보일과 뉴턴의 영향으로 흄의 철학은 경험주의(순수이성이 아닌 경험이 사실 내용에 관한 모든 정보의 근원이다)에 기초한다. 인간 마음의 모든 인식은 인상과 개념으로 구분하고; 인상은 감각, 정열, 감정이며 개념은 생각과 추론에서 오는 희미한 영상으로 우리의 마음에서 가슴은 두뇌보다 강하고 생생하다. (2) 인식론: 인간 이성은 개념의 관계와 사실의 본질이다. 개념의 관계는 기하, 대수, 산술의 과학에 있으며 어떤 다른 존재에 의존함이 없이 그 주장은 직관적으로 또는 시범적으로 확실하다. 그러나 사실의 본질에 대한 진위는 (이성이 아닌) 경험 때문에 취득되는 증거에 의존하므로 흄은 귀납법의 딜레마에 직면한다. 인과관계에 대한 신뢰의 기초는 “원인의 추론”에 있다. 회의적 의심에 대한 해결은, 인과관계의 반복된 경험에 기초한 관습의 효과에 두게 하였다. (3) 형이상학: 경험 때문에 원인을 발견할 수 있으나 필요한 관련을 발견할 수 없고, 원인으로부터 결과를 이해하는 추론에서 발견한다. 인간의 선택이나 행동은 불규칙하고 예측 불허하지만, 법치주의 세상에서 예측할 수 있다. 인간 행동에는 형이상학적-윤리적인 문제가 있다. 형이상학적 문제는 인간 행동이 이전의 조건에 연유하여 결정되는가이며, 윤리적 문제는 책망과 변명, 처벌의 체계, 도덕 생활의 특징에 대한 결정론의 함의에 관련된다. 인간의 동기와 행동 사이에 꾸준한 관련이 있어 인간 본성과 심리의 보편적 원칙을 수립하기를 기대한다. (4) 회의주의: 우리가 목표물을 상이하게 인지하면 원인과 결과가 불일치하여, 이성과 감각 사이에 회의주의적 의심이 발생한다. 이를 해결하기 위하여 믿음을 통제하는 관습에 기대었으나, 그의 회의주의적 문제는 칸트가 새로운 관념주의를 구성할 때까지 지속하였다.

도덕의 원리에 관한 질문 (1751): 도덕의 덕행과 악행은 개념의 관계나 사실의 본질이 아니므로 이해의 목표가 아니다. 도덕은 감정적 영향으로 결정되기 때문에 이성이 감성과 연합하여 인간의 의지에 강력한 영향을 주므로 공감(Sympathy)이 도덕의 심리적 기초가 된다. 사회적 덕성은 공통선을 향한 일반적 경향이며, 시민사회를 증진하기 위하여 유용하다. 정치적 논설(1752-58): 사회 안정은 우연이 아니며 인간 본성의 자연적 원리를 단순히 운용한 결과로서 대표자 협의체의 결과이다. 권력과 체제의 영향에 관하여, 파당이나 정당을 제거하는 것은 질병보다 더 나쁜 치료제가 되기 때문에 흄은 그들을 필요악으로 감내하고 받아들였다. 영국의 역사(1754-62): 왕조를 유지하는 정치체제는 지속해야 할 특별한 이유가 없다. 과거에 정부의 기원은 현재의 합법성과 함께 논의해야 할 것이 아니므로, 단순히 법에 따른 통치로서 정의는 현 제도를 합법적으로 만든다. 시장경제에 관한 흄의 견해는 다음에서 별도로 논의한다.

***에드먼드 버크(1730-97)는 더블린 태생으로 트리니티대학에서 수학하고 1750년 런던으로 이주하여 법학 공부를 시작하였으나 유럽을 여행한 이후 저술에 전념하였다. 1763년 윌리엄 해밀톤이 아일랜드 비서장으로 부임하여 그의 개인 비서로 3년간 수행하고, 1766-94 기간에 영국 하원의원으로 봉직하였다. 그는 정치에서 이론가라기보다 실천가(정치가)였다.

미국혁명에 관하여: 저술(Observations on a Late State of the Nation, 1769): 잘못된 영국의 정책이 1760년대 영국과 북아메리카 식민지 사이에 긴장을 초래하였다. 영국이 그 신민들에게 세금을 부과할 권리를 가졌지만, 인지세법은 비현실적이며 폐지해야 한다. 그들이 의회에 간접적으로 대표되고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순진하게도 사태의 심각성을 모르고 있다. 제기된 문제는 제도나 법의 문제가 아니라 영국과 식민지 간에 외교적 실패를 가져오는 지도력의 문제이다. 그러나 버크의 견해는 미국혁명의 급진적 본성을 무시하는 것으로, 사태를 상업적 업무로 간주하고 있으나, 식민지는 인간의 자연적 권리인 자유와 평등을 요구하였다.

아일랜드와 가톨릭교: 버크는 아일랜드인으로 반 가톨릭 처벌법에 의해 기본권과 자유를 거부당하는 가톨릭교에 동정적이었다. 그의 저술(Tracts on the Property Laws, 1765)에서 정부는 부당하거나 피해를 주는(신의 자연법을 비웃는) 법을 만들 권리가 없다. 그러므로 반 가톨릭 처벌법은 나쁘다. 사회의 개선은 설득과 격려를 통하여 추구되어야 하고 강요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였다. 인도와 식민지주의: 영국 정부와 동인도회사의 관계는 인도의 업무를 관리하는데 복잡하게 되었다. 동인도회사의 남용은 너무 크기 때문에 정부의 개입만이 해결 가능하다고 믿었다. 그의 의회 연설(1783)은 동인도회사 이사들을 정부 위원회로 대치하는데 프랑스의 콩도르세, 영국의 헨리 존, 이탈리아의 비코와 같이 기여하였다. 역사가들은 동인도회사와 특히 해스팅스 총독에 대한 많은 문제를 제기하였으나, 버크의 연설은 타국을 통치하는 영국의 적절한 역할과 인도인들을 바르게 취급하고 그들 고통에 대한 참다운 동정의 개념을 반영하였다. 아시아인들의 도덕성은 영국의 도덕성과 같다고 버크는 강조하였다.

프랑스혁명에 관하여: 버크의 저술(Reflection on the Revolution in France, 1790)은 영국 정치와 정치적 문헌에서 철학적 보수주의를 대변하는 반혁명 논문이다. 자신의 개인적 배경이나 정치적 성향으로 그는 귀족과 자본가 계층에 감정이 양립하였다. 철학자 리처드 프라이스가 프랑스혁명에 반응하여 조국의 사랑에 대한 논설(1789)에서 애국심에 대한 기본은 자연적 권리를 식별하는 것으로 첫째 양심의 자유에 대한 권리, 둘째 남용하는 권력에 저항할 권리, 셋째 통치자를 선택하며 위법자를 파면하고 정부를 구성하는 권리를 제시하였다. 이에 대해 버크는 바로 집필하여 1년 후 프랑스혁명에 대한 반응을 발간하였다. 버크는 프랑스에 대항하여 영국 체제를 정당화하기 위해 영국인들이 세 가지 기본권리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첫째 명예혁명의 권리선언은 영국 헌법의 초석으로 신민의 권리와 자유를 선언하고, 개신교도의 왕위계승을 수립하였다. 둘째 권력은 일반적 이익을 위하는 것 외에 다른 목적이 없으므로 왕은 국민의 공복이라는 것을 의심할 여지가 없다. 셋째 국민을 위한 정부를 구성하는 권리는 마그나 카르타(1215), 권리청원(1628), 권리선언(1689)으로부터 왔다. 영국은 상속되는 왕, 상속되는 귀족, 평민 이 선출한 하원과 선조로부터 내려온 특혜, 특권, 자유를 상속받는 국민으로 구성된다. 버크는 프랑스혁명이 프랑스인과 인류에게 치유할 수 없는 재앙이라고 역설한다.

버크는 자본가나 노동자 계층을 두려워하지 않았으나 혁명적 지식인과 전문계층이 새로운 힘으로 사회질서를 개편할까 두려워하였다. 그는 영국에서 단일주의 반대자가 국가로부터 교회를 분리하는 것과 프랑스에서 기독교에 대항하는 지식인들의 협회를 두려워하였다. 사회체제는 도덕과 실질적 사고를 위한 조건을 준비하여, 신성하고 자연적이며 역사적 요소를 통하여 옹호된다고 그는 보았다. 버크는 후반부에서 프랑스혁명의 실험이 공공재정, 국가건설, 군사력 면에서 부정적임을 설명하였다. 버크의 저술에 대한 부정적 반응으로 토머스 페인의 인간의 권리(1790-92), 매리 울스턴크래프트의 여성 권리에 대한 옹호(1792), 윌리엄 고드윈의 정치적 정의와 도덕과 행복에 주는 영향(1793)이 출간되었다. 조셉 마이스터는 프랑스에 관한 고찰(1797)에서 혁명을 비판하고 절대왕정을 지지하였다.

TO BE CONTINUED

(e) 독일의 관념철학과 영국의 공리주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