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지와 관련된 정치와 시사

이승만 대통령의 외교와 홍보

양곡(陽谷) 2023. 1. 27. 23:47

03. 外交와 弘報의 達人 -  李承晩 대통령의 미국 國賓 여행기
    
“국가홍보는 외교관만이 아닌 국민의 몫”  

   “과거 40년간 우리가 국제적으로 정당한 대우를 받지 못한 것은 세계 모든 나라가 우리와 접촉할 기회가 없었던 까닭입니다.

세계가 일본인들의 선전만을 듣고 우리를 판단해 왔었지만 지금부터는 우리가 우방들의 도움으로 우리 자리를 찾게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가 우리말을 할 수 있고, 우리 일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세계 모든 나라는 남의 말을 들어 우리를 판단하지 말고 우리가 하는 일을 보고 우리의 가치를 우리의 중량대로만 판정해 주도록 요청하는 바입니다.

 “우리 정부와 민중은 해외 선전을 중요히 여겨서 자유와 평화를 사랑하는 각국 남녀에게 우리의 올바른 사정을 알려 줘야 합니다.
이렇게 서로 간에 양해를 얻어야 정의가 상통해 교제가 친밀해질 것이며, 이는 우리의 복리만 구함이 아니요, 세계 평화를 보장하는 것입니다.”  
- 1948년 초대 대통령 취임사 중에서

  이승만(1875~1965) 대통령은 1948년부터 1960년까지의 재임기간 중에 전부 6차례 외국을 방문했다.
1948년 10월, 맥아더 장군의 초청으로 일본을 방문한 것을 시작으로 일본만 세 차례 방문했으며, 6·25전쟁 중인 1953년 1월 자유중국 방문, 1954년 7월 미국 방문, 그리고 1958년 11월 월남 방문이 그것이다.

 요즘은 정상외교가 매우 잦아졌지만 반세기 전만 해도 외교활동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했으며, 초청국이나 방문국 모두 범국가적인 행사였다.

 특히 이승만 대통령의 미국 방문은 우리 대한민국 국가원수로서는 첫 미국 방문이었고, 더구나 방문 형식이 정상외교의 형태 중 가장 높은 격식의 의전이 따르는 국빈방문(정상외교에는 국빈방문 이외에 공식방문, 실무방문 등이 있음)이었다.

 국빈방문의 경우 통상적으로 21발의 예포 발사, 양국 국가 연주 등 공식 환영행사, 국빈만찬(남자는 검정 혹은 흰색 나비넥타이와 연미복 착용), 의회 방문 및 연설, 정상 간 선물 교환, 양국 간 공연 등 문화교류 행사가 수반된다.
때문에 적어도 방문이 시작되기 2~3개월 전부터 초청국과 방문국의 외교부와 공관에서는 방문 일정 등 세부사항에 대해 준비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런데 이승만 대통령의 미국 국빈방문의 경우, 준비 기간이 겨우 1개월 남짓밖에 되지 못했다.
물론 한미 양국 간에는 6·25전쟁 휴전 이후 1년 이상 방미에 관한 이야기가 오갔다.
그러나 실제로 이 대통령의 방미 의사가 미국 측에 전달된 것은 1954년 6월 15일 제네바 회의가 성과 없이 끝나고, 당시 회의에 참석했던 양유찬 주미 한국대사가 미국의 수도 워싱턴으로 귀임한 이후였다.

 사정이 이러하니 준비 기간이 짧을 수밖에 없었지만 이승만 대통령과 경무대, 외무부, 그리고 주미 한국대사관, 미 국무부는 한미 양국 간의 첫 국빈방문 행사를 차분하고 철저하게 준비했다.

당시 주미 한국대사관에서 실무를 총괄했던 한표욱 공사는 그때의 준비상황을 ‘이승만과 한미 외교’(1996)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해 놓았다.

 “당시 외부부가 업무를 관장했으나 모든 훈령은 거의 이 대통령이 직접 내렸다.
대통령 연설은 자구 하나하나를 경무대의 허락을 받아야 했다.
대통령이 타고 올 비행기를 물색하고 교섭하는 문제도 쉽지 않았다.

우리도 대한민국 항공사(KNA)가 있었으나, 비행기가 낡은 고물이었다.
미국은 최신형 공군기를 내줬다.
비행기는 100명이 탈 수 있었고 기내에서 서울과 교신할 수 있는 통신시설도 있었다.”

 사실 이승만은 외교, 특히 홍보에 있어서 대한민국은 물론 세계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달인이었다.

망명 시절 40여 년간 그의 외교와 홍보활동은 접어 두고라도 1948년 7월, 초대 대통령 취임사는 달인으로서의 탁월한 재능을 잘 증명해 주고 있다.

 “과거 40년간 우리가 국제적으로 정당한 대우를 받지 못한 것은 세계 모든 나라가 우리와 접촉할 기회가 없었던 까닭입니다.
세계가 일본인들의 선전만을 듣고 우리를 판단해 왔었지만 지금부터는 우리가 우방들의 도움으로 우리 자리를 찾게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가 우리말을 할 수 있고, 우리 일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세계 모든 나라는 남의 말을 들어 우리를 판단하지 말고 우리가 하는 일을 보고 우리의 가치를 우리의 중량대로만 판정해 주도록 요청하는 바입니다.”

 “우리 정부와 민중은 해외 선전을 중요히 여겨서 자유와 평화를 사랑하는 각국 남녀에게 우리의 올바른 사정을 알려 줘야 합니다.
이렇게 서로 간에 양해를 얻어야 정의가 상통해 교제가 친밀해질 것이며, 이는 우리의 복리만 구함이 아니요, 세계 평화를 보장하는 것입니다.”

 필자는 당시 취임사에서 가장 강조됐던 부분이 바로 국가 홍보에 국민이 앞장서야 한다는 이 대목과 이에 앞서 나오는 외교에 관한 부분이라고 본다.
즉, 국가 홍보와 외교가 외교관이나 특정인의 몫이 아니라 국민 전체의 책무라는 것이다.
63년 전의 이 취임사는 우리 국가 위상이 그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높아진 오늘, 아니 대한민국이 존속하는 한 우리 국민들이 늘 되새겨 보고 실천에 옮겨야 할 명언으로 보인다.

 아무튼 이렇게 방문 준비가 구체적으로 마무리 되어가자 1954년 7월 14일 양국 정부는 이 대통령의 방미를 공식 발표했다.

대한민국 대통령의 국빈방문에 대해 미국 언론은 비상한 관심을 갖고 있었다.
7월 15일자 워싱턴포스트의 보도를 보기로 하자.

 “이승만 대통령이 다음 주에 미국을 국빈방문한다고 7월 14일 주한 미국대사관이 발표했다.
브리그스 대사는 토요일, 이 대통령 방미 준비를 돕기 위해 워싱턴으로 향할 예정이다.
이 대통령은 아이젠하워의 초청에 감사하지만 이번 방미의 중요한 이유는 개인적인 관심사가 아니면서 한국과 미국이 적에 대한 공동조치를 취하는 데 합의한다면 자유라는 대의의 선양에 큰 진전이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승만은 대통령에 취임하기 전 벌써 40년간을 미국에서 망명생활했다.
그러나 미국에서의 독립운동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힘들었다.
미국 대통령을 비롯해 여야 지도자와 미 국무부 등의 인사들을 만나기가 힘들었고, 국권을 잃은 국민으로서의 푸대접을 받을 만큼 받았다.

더구나 광복 이후 정부수립, 6·25전쟁과 휴전에 이르기까지 이 대통령에 대한 미국의 괄시는 심각했었다.

 그러나 이승만 대통령은 그런 데에 주눅이 드는 위인이 아니었다.
비록 미국에 불가피하게 신세를 지고 원조는 받더라도 할 말은 하고 할 일은 해 버리는 인물이었다.

 좋은 예의 하나가 반공포로 석방이다.
이승만은 미국이 자신의 의사에 반해 6·25전쟁을 휴전으로 마무리하려 하자, 휴전 직전(1953년 6월 18일) 일방적으로 포로를 석방해 미국은 물론 전 세계를 놀라게 했다.
이는 죽음을 각오하지 않고는 할 수 없는 엄청난 일이었다.

 그러나 그의 이런 행동은 막가파식의 만용이 아니었다.
철저히 계산된 외교와 홍보활동이었다.
그의 말과 행동은 동양과 서양의 학문 및 교양을 두루 갖춘 당대 최고 지성인으로서의 자존심과 당당함을 바탕에 깔고 있었다.

 이승만은 만 나이 4살 때, 3개월 만에 천자문을 외는 신동이었다.
또 동양의 고전을 공부해 13살 때 과거시험에 첫 응시한 후 수년간 도전했었다.
하지만 관직에의 길이 실력만으로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과거를 포기하고 20살의 나이에 서양학문과 문물을 배우고자 배재학당에 들어갔다.

 곧 이승만은 조국의 근대화에 눈을 뜨게 되며 선구적인 개혁운동에 가담한 대가로 종신형을 선고받지만, 다행스럽게도 5년 7개월간 옥살이 끝에 석방돼 1904년 11월 미국행 배를 타게 된다.
미국에서 그는 조지 워싱턴 대학에서 학사, 하버드 대학에서 석사, 프린스턴 대학에서 박사학위 등 전 과정을 놀랍게도 5년 만에 마쳤다.

 이후 무려 35년간을 미국에서 조국 광복을 위해 헌신하다가 광복 후 귀국했다.
그리고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이 됐고 귀국 후 9년 만에 국빈으로 초청받아 자신의 제2의 고향인 미국에 가게 됐다.

그는 앞서의 워싱턴 포스트의 보도대로 개인의 관심사 때문이 아니라, “자유라는 대의를 선양”하러 미국에 간다는 자신감을 마음 속에 품고 있었다.
그는 당당한 대한민국의 대통령이었다.

- 이동복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