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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독의 심연

양곡(陽谷) 2023. 1. 9. 08:39

<낭독의 심연>
                                                            1.
  낭독은 텍스트의 재탄생이다. 그리고, 수용자인 독자가 발신자인 낭독자로 변전한다는 면에서 '독자의 재탄생'이다. 문학은 작가가 텍스트를 탄생시키지만, 그 텍스트는 누군가의 낭독에 따라서 재탄생한다. 그냥 재탄생되는 것이 아니고, 소통적 역동성을 가진, 대단히 구체적이고 개성적인 음성 텍스트로 현신(現身)한다. 그때 소통의 정황과 맥락이 어떠한지에 따라 이 낭독 텍스트는 원전과는 다른 미학적 특성을 드러낼 수도 있다.

  만약 그 낭독자가 작가 자신일 때는 그 ‘낭독 텍스트’는 더더욱 의미 있는 아우라를 지닐 수 있다. 작가의 자기 작품 낭독 버전은 디지털 파일로 얼마든지 유연하게 소통하고 보존할 수 있다.

낭독의 개성과 개별성에 가치를 두기로 하면, 낭독을 잘했다는 것의 기준 또한 다채롭고 역동적일 수 있다. 좋은 낭독을 그냥 표준형 하나로 재단할 일은 아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낭독’을 이해하는 수준은 어디쯤인가? 당신은 낭독을 정의하는 방식을 몇 가지나 가지고 있는가?

일단 누구나 이렇게는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소리 내어 읽으면 낭독이고, 소리 내지 않고 읽으면 묵독이다. 따라서 낭독의 반대는 묵독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이는 매우 불충분한 앎이다. 낭독을 고양하는 아무런 동력도 시사 받을 수 없는 앎이다. 낭독의 진면모와 가치는 파묻히고, 낭독이 안으로 품고 있는 다채롭고도 심도 있는 의미와 기능은 그냥 매장된다.

  묵독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묵독은, 읽는 사람의 사고 전략(Thinking Strategy)를 전제하지 않고서는 성립될 수 없는 개념이다. 그냥 소리 내지 않고 읽는다는 것만으로는 묵독의 교육적 의미와 기능은 조금도 발휘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사고 전략이란 또 얼마나 복잡한 것인가. 묵독의 내적 프로세스가 얼마나 묵직하고 복잡하게 작동함을 어찌 알 수나 있겠는가.

  마찬가지로 낭독도 은하계만큼이나 심원한 세계를 거느리고 있음을 우리는 눈치챌 수 있다. 얼핏 거칠게 정의해도 낭독은 원 텍스트의 표현미학적 재생산이요, 일종의 연출 기제를 수반하는 사회 문화적 소통행위이다. 이쯤 되면 낭독은 그냥 단순한 읽기가 아니라 그 자체가 섬세한 기제를 가진 하나의 표현 장르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2.
  나는 이렇게 말한다. 낭독은 ‘내가 나를 듣는 과정’을 거쳐야 제대로 실현된다. 내가 읽고 있는 것을 내가 듣는다고? ‘읽고 있는 나’를 내가 바라다보며 느낀다고? 그게 도대체 어떤 경지이고 어떤 프로세스란 말인가?

  노래를 연습하는 가수들을 보면, 자기가 지금 부르고 있는 노래를 자신이 헤드폰으로 들으면서 부른다. 내가 부르는 내 노래를 내가 듣기 위함이다. 그래야 가수는 자기 노래를 즐기면서 부를 수 있는 데로 나아갈 수 있다.

  낭독도 그러하다. ‘읽고 있는 나’를 또 다른 나의 자아가 느끼는 과정이 있어야 낭독은 동력을 얻는다. ‘읽고 있는 나’에 대한 일종의 상위인지(上位認知, meta-cognition)가 일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내가 텍스트의 언어 부호를 그냥 소리로 읽어 낸다고 해서 낭독이 되는 것은 아니다. 텍스트의 음운들을 반듯하고 세밀하게 발음하는 일, 단어를 발음할 때 강세와 고저를 적절하게 나타내는 일, 텍스트 내 문장과 대화의 억양을 의미의 분위기에 맞게 구사하는 일, 시든 산문이든 텍스트의 리듬을 문맥(context)에 맞게 살려내며 읽는 일 등등을, 읽는 내가 도무지 느끼고 있지 못해서야 내가 내 낭독의 주인이 되겠는가. 그 낭독이 제대로 길을 헤쳐나갈 수 있겠는가.

  그뿐 아니라, 내 낭독을 듣고 있는 사람(audience)의 반응과 느낌을 내가 감지하는 데에 도달해서야 비로소 내가 ‘내 낭독을 듣는 과정’을 장악하게 된다. 마침내 낭독의 진경에 들 수 있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내 낭독에 올라타서 낭독을 수행(performance)해야 한다. 마치 기수(騎手)가 말에 올라타서 자신의 경주를 운행하듯이 낭독을 운행해야 한다. 낭독하는 동안 내가 내 낭독을 충분히 조정하라는(operating) 뜻이다.

  이는 마치 무대 위에서 노래를 부르는 사람이 노래에 눌리지 않고, 자기 노래를 즐기는 가운데, 자기 노래를 마음대로 통어하고 여유 있게 연출해 내는 경지에 이르는 것과 흡사하다.

또 말을 타는 사람이 처음에는 사나운 말에 끌려다니기도 하겠지만, 차츰 자신이 말을 부리는 기술을 발견(meta-cognition)하면서 자신의 마술 기량을 높여 가는 것에 비유할 수 있을 것이다.

  낭독 기술의 기반은 텍스트의 음운을 분명하게 장악하는 데에서 비롯된다. 음운을 부실하게 실현하고서야 낭독은 한 걸음도 진전하지 못한다.

음운은 그 자체로는 의미를 갖지 못한다. 그러나 낭독자에게는 특정 음운의 소리에도 모종의 뜻이 감지되어야 한다. 음운에도 감정이 있고, 뜻이 있고, 심지어 문화가 스며있음을 감지할 수 있어야 한다.

그 뜻과 감정과 문화는 지금 내가 읽고 있는 텍스트의 맥락이 부여해 주는 것이라 할 수 있을진대, 낭독자는 자신이 지닌 총체적 감수성으로 그것을 정밀하게(초월적으로) 파악하여 연출하는 사람이다.

1935년 시문학사에서 간행한 <정지용시집>에 실린 ‘향수’를 읽으면, 바로 이 구절, “그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를 주목하게 된다. 여기 ‘참하’는 물론 정지용 당시의 표기인 듯하다. 현대어 표기로는 ‘차마’라는 부사로 정리되어 있다. 그렇다면 이 ‘참하(차마)’를 어떤 감정과 어떤 문화 감수성으로 낭독해야 한단 말인가.

  ‘참하’의 ‘참’은 ‘참다’의 ‘참’과 같은 의미 계열에 속하는 것임을 감지하는 낭독자와 그렇지 못한 낭독자는 ‘참하(차마)’를 음운 차원에서 실현할 때 이미 질적인 차이를 보이는 낭독을 한다.

더구나 다양한 시 작품에 등장하는 ‘차마’의 정서적 의미를 다양하게 경험한 낭독자와 그렇지 못한 낭독자는 이 ‘참하’를 낭독으로 실현해 내는 차원이 같을 수가 없다. 인간과 언어에 대한 이런 감수성이 쌓이고 쌓여서 텍스트 전체의 낭독을 질적으로 끌어 올리는 힘이 생겨나는 것이라 하겠다.

  음운의 차원을 지나 형태나 어휘, 그리고 문장의 차원에 들어오면 낭독은 형태, 어휘, 그리고 문장에서 구현해 내고자 하는 ‘의미’나 ‘정서’를 낭독자가 어떻게 해석하고 연출하느냐에 따라 참으로 변화무쌍한 낭독의 경로를 구사한다.

내가 읽은 나의 글도 어제의 낭독과 오늘의 낭독이 다르다. 이 ‘다름’을 두고 다시 수용자들은 평가와 해석을 할 것이다.

  이런 낭독 현상은 나쁘지 않다. 텍스트 현상(또는 문화현상)에 활력을 불어넣고, 해석의 풍성함과 텍스트의 역동성이 수용자 대중에게 더욱 가까이 다가가기 때문이다.

고정된 문자 텍스트에서는 있을 수 없는 현상이다. 낭독 프로세스의 섬세함과 정교함은 이렇듯 텍스트의 실현 양태를 다채롭게 하고, 텍스트의 심연을 깊게 하고, 텍스트의 존재 범주를 확장한다.

텍스트 전체의 차원에서도 낭독은 텍스트를 늘 출렁거리게 한다. 가령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의 첫 문장을 낭독하는 낭독의 연출 전략은 낭독자마다 다를 수 있어야 한다. 이 작품 전체를 어떻게 보려고 하는가에 따라, 텍스트의 첫문장 낭독은 당연히 달라야 한다. 그리고 그것은 낭독 텍스트의 청자들에게 선택과 집중의 매력으로 다가가서 해석의 풍성함에 기여하고, 소통의 확장에 이바지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 작품의 마지막 문장을 어떻게 낭독할 것인가 하는 문제도 마찬가지 관점으로 살펴볼 수(appraisal)  있을 것이다.

이렇게 보면 낭독이란 참으로 오묘하고도 만만치 않은 과업이다. 인지적이기도 하고, 정의적(情意的, affective)이기도 하고, 사회·문화적이기도 한, 그런 과업이다. 적어도 그런 인식론이 필요하다.
  
  3.
기타(guitar) 예찬론자들은 기타 하나가 오케스트라의 기능을 한다고 말 한다. 단일한 악기이지만 이것이 빚어내는 화성과 연주와 반주 기능은, 그 효과 면에서 오케스트라의 위상을 가진다는 말이다. 여기에 빗대어 말한다면, 낭독이야말로 무대가 간편할 뿐이지, 한 편의 연극 연출과 같다고 할 수 있다.

텍스트를 낭독하는 낭독자의 심리적 과정은 연극 연출자의 연출 마인드와 흡사하다. 낭독자는 연극에서 배경의 변화, 사건의 역동성, 인물들의 개성적 성격 등을 목소리 연출로 감당해 낸다. 낭독은 연극이 보여주는 연출의 과정과 효과를 그 나름대로 머금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지금은 텔레비전 드라마에 밀렸지만,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널리 인기를 누렸던 프로그램 형식 중에 ‘입체낭독’이란 것이 있었다. 물론 낭독의 일종이다. 소설의 화자와 등장인물을 성우들이 배역을 맡아서 그 소설을 살아있는 장면처럼 낭독으로 청취자에게 내보내는 것이다.

소설 ‘삼국지’도 라디오에서 일 년에 걸쳐 입체낭독으로 방송하였다. 신문에 실렸던 인기 연재소설도 입체낭독으로 방송하였다. 유능한 성우는 소설의 화자 역할도 하면서 등장인물 두세 명 정도를 해내기도 하였다. 낭독이 한 편의 연극과 같은 연출의 구조를 지니고 있음을 잘 보여주는 예이다.

  요즘 낭독이 유튜브(YouTube)에서 살아나고 있다. 유튜브에는 시나 소설뿐 아니라 매우 다양한 텍스트들이 낭독 프로그램으로 구현되어 사람들의 호응을 얻고 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어떤 극단이 박완서 소설가의 소설을 낭독의 방식으로 극장 무대에서 매우 단촐하게 공연하여 좋은 반응을 얻었던 일도 있다. 나는 이 낭독 공연에 국어교육과 학생들을 열심히 데리고 가기도 했다.
  
  작고한 근·현대 작가들의 문학기념관에 가면 그들의 육필 원고가 인상 깊게 눈에 들어온다. 또 당시 서로 정감 있게 교류가 있었던 문인들 사이에 주고받았던 서간의 육필들도 따뜻한 느낌으로 다가온다.

그러나 이 또한 앞으로는 더 보기 어려운 장면이 될지도 모른다. 이제는 원고지에 육필로 작품을 쓰는 작가는 거의 없다. 앞으로는 더더욱 ‘디지털 글쓰기’와 ‘글쓰기의 디지털화’가 일반화될 것이다.

  언젠가는 지금  오늘의 작가들을 위한 문학기념관도 등장할 것이다. 그 문학기념관에서는 아마도 육필 원고를 발견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육필로 쓴 편지를 발견하는 일도 극히 드물 것이다. 대신 자신의 글을 스스로 낭독하여 오디오 콘텐츠로 접하게 하는 방식이 주류가 되지 않을까 싶다. 육필 대신 육성으로 텍스트를 대하게 하는 것이다.

  시나 수필은 전편을 낭독 파일로 보존하고 전하는 데에 어려움이 없을 것이다. 소설도 작품의 하이라이트 부분을 낭독으로 남기는 기획이 필요하다.

문학작품으로만 국한할 필요도 없다. 작가의 일가나 편지 또는 특별한 의식의 장면에서 기고한 글들도 낭독에 의한 보존과 전달로 그 효과는 각별할 수 있다.

  작가들의 개성 있는 낭독 감수성이 새롭게 기대되는 시대를 우리는 가고 있다. 작가만이 아니라 일반인들의 글쓰기와 낭독도 더 깊은 상호성을 가지고 일상에 녹아들 필요가 있다.

낭독은 표현미학의 차원에서나 예술사회학의 차원에서나 새로운 소통 가치를 만들어 낸다. 낭독의 심연이 더욱 오묘해질 것이다.                                                   <푸른사상 2022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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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은 'Die Lesende(책 읽는 여인)' Jean Francois de Troy 1723/밴드  <세계의 명화>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