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대 400년 이어온 경주 최부자의 `노블리스 오블리제'
지금까지 이런 부자는 없었다!
<마지막 최부자 최준의 사진>
1. 스웨덴 국왕이 찾은 식민지 조선의 명문가.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지난 1951년. 스웨덴 의료 참전단의 간호사들이 경주 교동 최부자집을 찾았다.
그들은 곧 최부자집 안채와 부엌 곳곳을 카메라에 담기 시작했다. 이들은 스웨덴 국왕 특별명령을 수행중이었다.
스웨덴 국왕 구스타프 6세. 그는 황태자였던 1926년 황태자비 루이즈와 함께 신혼여행길에 식민지 조선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이때 구스타프는 일본이 자행한 신라시대 고분 발굴에 참여하게 되고 이 고분은 그를 기념하는 뜻에서 스웨덴의 한자식 발음을 빌어 '서봉총'으로 이름지어졌다.
그리고 황태자부부는 당시 경주의 한 고택을 방문한다. 이들은 전통음식으로 뜨겁게 환영해준 조선의 명문가에서 큰 감명을 받았다.
한국에서 전쟁이 일어나자 구스타프 6세는 간호사를 지원하며, 여성전용공간이라 둘러보지 못한 최부자집 안채와 부엌을 촬영해오라 한 것이다.
구스타프 황태자에게 잊을 수 없는 인상을 남긴 식민지 조선의 기품있는 명문가.
12대 400년 동안 덕망으로 부를 지켜온 부자의 대명사, 경주 최부자였다.
흔히 부자 3대를 못간다는 말이 있다. 노력없이 물려 받은 부는 오래가기 힘들다는 뜻이다.
그런가 하면 부자가 천국 가기란 낙타가 바늘구멍 통과하는 것보다 어렵다는 말도 있다. 부자가 된다는 것은 그만큼 주변의 인심을 얻기 어렵다는 것을 의미한다.
돈부자, 집부자, 땅부자... 요즘처럼 부자에 대한 말들이 많았던 시대는 없었다. 갈수록 빈부격차가 심해지는 양극화의 시대. 우리는 경주 최부자의 이야기를 떠올린다.
2. 죄부자집의 가훈들 - 더불어 사는 상생의 삶
경주 최부자. 그들은 어떤 사람들인가?
경주 교동 69번지. 이곳에 12대 400년간 부를 이어온 경주 최부자집이 있다.
최부자집은 사랑채, 안채, 사당 등 영남 북부의 양반가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1970년대 화재로 불타 주춧돌만 남았던 사랑채는 최근 그대로 복원한 상태다.
특이한 점은 사랑채와 안채를 완전히 구분해, 안채로 들어가기 위해선 또 하나의 대문을 통과해야 된다는 점이다.
대지 2천평에, 1만여 평에 이르는 후원, 이 집에 살던 노비 숫자만 100여 명에 이르렀을 만큼 규모가 큰 집이다.
눈에 띄는 건 마당 한 켠에 800석을 쌓아올릴 수 있다는 창고다.
이 집이 최부자집이라 불리는 이유를 짐작케 하는 창고. 그러나 최부자집의 명성은 단순히 부의 규모때문만은 아니다.
예로부터 '활인당'이라고 불리던 특별한 곳이 있다. 경주시 내남면 이조리 활인당터. 이곳에서도 최부자집의 명성의 유례를 짐작할 수 있다.
"교리 최부자 그분네들이 사방 100리안에 굶어죽는 사람이 없게 죽을 끓여 굶주리는 사람들 생명을 유지케 한 자리입니다." - 최상춘(경주 내남면, 69세)
최부잣집의 곡식창고 최씨 일가는 이곳 활인당 터에서
때는 1671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삼남에 흉년이 돌면서 굶어죽는 사람들이 허다했다.
당시 최부자는 사옹원 참봉을 지낸 3대 최부자 최국선이었다.
그는 과감히 곳간을 헐었다. 최국선의 행장에는 그의 철학을 엿볼 수 있는 기록들이 남아있다.
"많은 사람들의 굶주림이 이 지경에 되었는데 어찌 집안재물을 아껴 저들이 죽어가는 것을 보고만 있겠는가?"
배부른 자가 배고픈 자의 절망과 공포를 이해하기란 쉽지 않다. 그 점에서 최부자집은 여느 부자집과 달랐다.
풍년의 기쁨을 함께 누리면 흉년의 아픔 또한 이웃과 함께 감수하는 것이 부자의 도리라 믿었다.
그리고 이때부터 '사방 100리안에 굶어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는 유명한 말이 생긴다. 부자들에게 흉년은 재산불리기에 절호의 기회였다. 형편이 다급한 농민들은 굶어죽지 않기 위해 헐값에 농토를 내놓았다. 이렇게 사들인 논을 흔히 '죽빼미논', 또는 벼 한 섬으로 샀다고 해서 '한 섬 논'이라 불렀다.
그러나 최부자집은 부자들의 삶의 방식과 정반대의 길을 걷는다. 최국선(1631~1682)의 무덤 비문에는 또 다른 최씨 집안의 철학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 있다.
"사람들이 어렵고 급한 사정으로 공에게 담보 잡힌 문서들이 책상 가득하였다... 공이 문서를 태워버리고 더 이상 묻지 않으니..."
각종 담보 잡힌 사람들의 문서를 모두 불태움으로써 담보 잡힌 사람들의 불안을 덜게 해준 것이다.
"갚을 사람이면 이런 담보가 없어도 갚을 것이고 안갚을 사람이면 이런 담보가 있어도 갚지 않을 것이다."
최부자집에는 "흉년에 땅을 사지 마라!"는 또 하나의 가훈이 있다. '재산증식의 도덕성'을 강조한 것이다.
"적어도 조선시대에 진정한 선비, 진정한 양반들은, '우리 모두 더불어 살아야 한다'는, '공동선의식(共同善意識)'이 있었지 않았나 싶습니다.
내가 잘 살려면 형제, 이웃 사촌들이 다 잘 살아야 한다, 이런 논리가 경주 최부자집의 논리 같습니다. 이웃이 편해야 내가 편하지, 이웃이 불편한데 내가 편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 최해진 교수(동의대 경영학과)
이런 전설같은 이야기는 경주 곳곳에서 확인할 수 있다. 경주 청풍루는 원로 유림들이 모이는 곳이다.
"경주 최부자집하면 '만 석 이상 하지마라!'는 가훈이 전해집니다. 최부자집을 이야기할 때 빠지지 않고 나오는 독특한 재산운영 방법입니다." - 이종택(경주시 성근동 76세)
토지가 좁은 영남지방에서 만 석 이상의 소작료는 필연코 무리가 뒤따라 누군가의 원성을 살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소작료를 만 석으로 고정하자 땅이 늘면 늘수록 최부자집의 소작료는 낮아졌다.
최부자집이 부유해지면 소작인의 곳간도 덩달아 불어나는 독특한 경제 형태였다.
이른바 '상생의 경제'였다.
그래서 소작인들은 최부자가 더 많은 땅을 가지길 바랬고 팔 땅이 있으면 앞다투어 최부자집에 알렸다.
"소작인들한테 돌려줌으로써 소작인들도 함께 부유해지고, 서로 안정적으로 부를 유지함으로써 장기적인 안목으로 봤을 때 더 크게 발전할 수 있는 독특하게 재산운영을 했습니다. 즉 '적정이윤이 극대이윤보다 더 유리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 전진문 교수(영남대 경영학부)
안정적인 부를 유지하고 지역사회 신망을 얻자 전국 각지의 손님들이 최부자집 사랑채를 드나들었다. 그것은 과객을 후하게 대접하는 최부자집의 독특한 철학때문이었다.
숙박시설이 많지 않던 시절. 최부자집은 길손들에게 최고의 숙박처였다. 많게는 하루 백여 명이 넘을 정도였다.
당시 최부자집에는 특별한 뒤주가 하나 있었다.
사랑채에 손님이 넘치면, 이 뒤주에서 쌀 한 줌과 과메기 한 마리를 가지고 하인집이나 소작인집으로 가면, 최부자집 손님인 줄 알고 밥을 지어주고 잠자리도 제공해주었다. 손님을 접대하는 하인이나 소작인들은 소작료를 내지 않는 특권을 주었다.
지휘고하를 막론하고 손님은 독상으로 대접했다. 최부자집이 직접 지배한 미역과, 인근 특산물인 과메기가 기본 반찬이었다. 이것은 손님접대 이상의 결과를 가져왔다.
손님을 차별없이 접대해 인심을 얻고 동시에 폭넓은 지식과 문화교류를 통해 다른 지방의 정보를 얻었다. 더 풍요롭고 다채로운 삶의 방식을 추구한 것이다.
또한 최부자집을 다녀간 사람들의 입을 통해 최부자집의 명망이 전국적으로 알려지게 된다.
재산축적의 정당성 확보와 과감한 나눔으로 신망을 얻어 장기적으로 부의 안정적 유지를 마련한 최부자집의 지혜였다.
"어렵고 힘들 때 이웃과 함께 하라!"
이것이 바로 최부자집의 명성을 널리 알리고 12대 400년간 부를 유지할 수 있었던 비결이었다.
3. 최부자 그들은 누구인가?
그렇다면 흔히 말하는 경주 최부자는 어떤 사람들이었을까?
경주 내남면 이조리 <용산서원>. 최부자집의 중시조격인 최진립장군을 모신 서원으로 서원으로써는 드물게 무인을 향사하고 있다.
용산서원은 숙종 37년 임금이 친히 '숭렬사우(崇烈祠宇)'로 사액하여 사액사당으로 출발했다.
당시 무신으로 사액사당을 받은 곳은 이순신과 김시민장군뿐일 정도로 드문 일이었다.
곧이어 최진립장군을 모신 <숭렬사>는 영남 사림들의 뜻을 모아 <용산서원>으로 승격했다.
"무인으로서 향사된 경우가 지극히 희귀합니다. '숭명배청', 명을 숭상하고 청을 배척하는 시대논리는 최진립의 일생과 맞아떨어졌습니다." - 정순우 대학원장(한국학 중앙연구원)
<충의당> 내남면 이조리, 경주최씨 정무공파 종가. 최진립이 살던 종가다.
최진립(崔震立, 1568~1636년)은 무반의 집안에서 태어났다.
종가에 보관되고 있는 최진립의 일대기 <잠아선조실기)>에는 그의 화려한 무공들이 기록되어 있다.
"공이 밤에 수십 명의 집안사람과 함께 문을 막고 불을 놓으니 적이 타 죽고 뛰쳐나오는 자 쏘아죽이고 조총, 창칼을 뺏어 관에 바쳤다." - 최채량(75세, 최진립 14대 종손)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한다.
당시 경주로 들어가기 위해 이조리에 쳐들어온 왜구를 최진립은 밤에 급습하여 화공으로 물리친다.
이후 동생 최계종과 경주 인근에서 의병장으로 활약하며 큰 공을 세운다.
그 공으로 무관직 병절교위 부장(교지)에 제수되 관직에 오르게 된다. 그리고 이듬해 정식으로 무과에 급제한다.
그후 서생포 전투, 도산 전투, 화왕산 회맹 등 영남 인근의 각종 전투에서 동생과 함께 큰 공을 세운다.
전쟁이 끝나자 선조는 최진립의 공을 높이 치하했다.
"임금(선조)은 최진립을 따로 불러 술과 활과 화살을 상주고 여도만호 겸 선전관에 임명하였다." - <정무공실기>중에서
최진립은 경흥부사, 공조참판, 삼도수군통제사, 전라수사 등을 거친다.
1636년 청의 침입으로 병자호란이 일어났다.
당시 공주영장이었던 최진립은 충청감사 정세규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출정을 서두른다.
"임금께서 포위당하고 계신데 늙은 신하가 살기를 도모하겠는가. 내 비록 늙어서 장수가 되기는 부적당하나 능히 갈 수는 있소이다." - <연려실기술>중에서
예순 아홉의 최진립은 임금이 계신 남한산성을 향해 군사를 몰아갔다. 그러나 전투는 중과부적이었다.
경기도 용인 험천전투. 조선군대는 청나라 철기병에게 패퇴했다. 모든 장수들이 퇴각했지만 최진립은 끝까지 항전을 결심한다.
"너희는 나를 따라 죽을 필요가 없다. 난 여기서 한 치도 떠나지 않고 싸우다 죽을터이니 너희는 그렇게 알라" - <연려실기술>중에서
이미 그는 죽음을 각오하고 있었다. 1636년 12월 27일. 정무공 최진립은 그렇게 장렬히 순국했다.
이듬해 인조는 그의 죽음을 애도하여 병조판서에 증직하고 정려각을 내렸다.
두 전쟁에서 큰 공을 세운 최진립에게 인조는 제문을 지어 그를 추모했다.
"국왕은 전 참판 최진립의 영에 고하노니 공은 동국의 인걸이라. 굳센 지조 내 공경하여 성심으로 제주를 보내니 죽지 않은 영혼 흠향 할지어다." - '인조의 사액제문'중에서
<최진립 신도비>는 그의 추모 사업이 얼마나 거국적이었는지 알려주는 귀중한 유물이다.
높이 3미터에, 비를 받들고 있는 거북조각의 크기는 웬만한 무덤크기다.
거북 곳곳에 섬세한 조각은 조선후기 석조예술의 백미를 보여준다. 이 거대한 석조들은 울산 치술령에서 옮겨왔다.
더 의미있는 것은 신도비의 구성이다. 신도비의 발문은 노론 조명겸(趙明謙)이, 비문은 남인 조경(趙絅)이, 비의 음기는 서인 윤심지가 썼다.
서원의 현판은 당대 최고 서예가인 옥동(玉洞) 이서가 썼고, 서원기는 실학자 이익(李瀷)이 써서, 당쟁의 시대에 당파를 뛰어넘은 추모 열기를 보여준다.
비장한 최후와 북벌론의 대두로 최진립은 국가적 영웅으로 떠오르고 경주 최씨 정무공파는 명문가의 기틀을 닦게 된다. 1647년에 청백리로 뽑힐 만큼 청렴한 관리이기도 했다.
용산서원에 모셔진 최진립의 위패 최진립이 사용하던 검
4. 최부자, 그들은 어떻게 부자가 됐을까?
그렇다면 한 가지 의문이 생긴다. 청백리로 이름 높았던 충신집안이 어떻게 조선 최고의 부자의 대명사가 될 수 있었을까?
<한국학 중앙연구원>에는 최근 발견된 최씨 집안의 고문서들이 보관되어 있다.
400여 년간에 최씨 가문에서 작성된 각종 문서들은 말로만 듣던 최부자집의 부 형성과정을 보여주는 소중한 자료로 학계의 비상한 관심을 끌고 있다.
특별히 우리의 관심을 끄는것은 최씨 가문의 재산이 기록되어있는 1620년 '최진립 분재기'다. 30년 차이를 두고 있는 1651년 최진립의 아들 '최동량 분재기'를 비교하면,
최진립의 아들 최동량의 재산에서 노비보다 토지증식에 집중되었음을 보여준다.
"동량 같은 경우는 노비 8명을 분재 받았습니다. 그런데 다른 문서를 보면, 약 한 세대뒤인 30년후에 재산상속을 보여주는 것인데, 노비 8명이 40명으로 늘어나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 안승준 전문위원(한국학 중앙연구원)
전쟁후의 혼란기. 울산농소(蔚山濃所). 그의 땅은 이미 울산에까지 이르렀다.
형산강 유역의 경주 내남 이조리 들판. 경주의 대표적 평야지대다.
최부자집이 터를 잡은 형상강 상류지역은 전쟁이후 버려진 농토와 습지들이 널려 있었다.
양난 이후 피폐해진 경제를 복구하기 위해 조정에서는 농토개간을 독려했고 최부자집은 이런 정책에 힘입어 이조리들을 경작지로 확보했다.
그리고 볍씨를 논에 직접 뿌리는 직파법 대신 모판에 모를 심어 이앙하는 '이앙법(모내기법)'을 도입한다.
'물꼬싸움'이라는 말이 있듯이 이앙법엔 물이 필수적이다. 물이 모자라면 옮겨 심은 모들이 말라버린다. 그래서 조정에서는 수리시설이 확보되지 않으면 이를 절대적으로 금지시켰다.
이조리들에는 수백년전 인공적으로 형성된 수리시설이 있다. 최부자집은 형산강 하류의 수리시설을 이어 중상류에도 농업용수를 확보한다.
1960년대까지만해도 최부자집이 '나무목으로 만든 인공수로'가 수백년을 이어 사용되고 있었다.
이양법의 보급으로 노동력은 1/10로 줄었고 모판에서 모를 키우는 동안, 논에서 보리를 키우는 이모작이 가능해지면서 생산력은 크게 증가되었다.
최부자집의 실학적 가풍은 또 다른 자료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영남대 도서관 <문파문고>.
최부자집이 조상 대대로 보관해온 7천여 권의 유명인사의 고서와 수십 권의 필첩을 기증해 특별히 따로 보관하고 있다.
이 필첩들은 그 양이나 연대로 봐서 조선 최고 필첩으로 부를 만한 학술적, 역사적 가치가 매우 높은 자료들이다.
그런데 여기에 정무공 최진립이 아들 최동량에게 쓴 편지가 한 통 있다. 집안 살림을 맡아 하던 아들에게 보낸 편지로 최진립의 인간적인 면모가 잘 드러나 있다.
며느리의 옷을 지어주려하니 치수를 재어 적어보내라는 시아버지의 자상한 모습이 나타나 있기도 하다.
그런데 뒤이어 흥미로운 구절이 나온다.
"뒤 큰 논은 종들에게 나눠 짓게 하라."
무슨 뜻일까? 이 말 속에 최부자집의 또 다른 농업경영법이 들어있다.
"성과급제도라 할 수 있습니다. 열심히 노력해서 성과가 난 것은 노비가 나눠가진다,
요즘 '논내기'라고 말하는 것으로, 생산력 증대의 한 수단으로써 최씨 가문의 농업경영의 한 방법이었습니다." - 안승준 전문위원
그것은 경영 성과에 따라 종들과 이윤을 나눠가지는 방식으로 이는 노동의욕과 생산성을 높이는 자율적인 농업생산법이었다.
이것은 최부자집이 '마름'을 두지 않는 것과 맥락을 같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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