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이야기

서울대 사회복학과 창설 50 주년 편찬자료( 권오득 5 기)

양곡(陽谷) 2009. 5. 7. 12:30
 

사회복지학과와  나의 인생행로 ( 5 기 권 오 득/ 63 학번 )


저가 사회사업학과를 선택한 동기는 서울치대 다니던 친구소개로 취업이 잘 되고 월급이 6 급 공무원의 3 배 정도 되고, 선친께서 막연하게 훌륭한 사람이 되라고  말씀하신 영향인 듯하다. 어머님은 경북의대를 가서 지방에서 의사가 되라고 했다.

우리 5 기의 입학성적은 문리대 전체 24개학과중 문과에서 4위였다. 그리고 필자는 6 대 과학회장과, 1979 년 우리학과 총동창회장도 역임했으며, 그때 저가 사회법에 대한 특강( 법대 김치선 교수)과 선배들이 와서 자기분야얘기를 하는 학과심포지엄을 개최한 기억이 엄습 한다. 그 당시는 사회복지법제론 과목이 없었다.


  저는 사회복지학과(전 사회사업학과/1963-1968)를 졸업한 후, 전공한 사회복지분야에서 직장생활을 시작하여, 공무원, 의료보험분야, 그리고 최근에는 대학교수로 봉직하고 있다.

사회복지분야에서 1급 전문사회복지사로서, 외국 원조기관인 양친회 한국지부(Foster Parents Plan. Inc)서울사무소 소장과 한국사회복지협의회 사무총장( 39 세) 등 사회복지

실무계에서 11년 간 일했고, 공무원으로서 보건복지부 사회보장심위원회 연구위원, 사회정화위원회 전문위원, 국무총리 행정조정실, 노동부인천지방노동위원장 등에서 3 급~ 2 급 공무원으로 17년 간 봉직했고, 정부산하 공공법인체인 의료보험연합회(현 건강보험관리공단 & 심사평가원) 상임이사로서 3 년 8 개월 간 근무 했으며,의료보험통합관련법의 제정으로 임원의 임기만료로 퇴임 했다.


  그동안 저가 경험하고 이룩한 것을 요약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첫째, 사회복지분야에서는 미국식 전문사회사업기관에서 저소득층 자활사업, 후원자개발, 민간자원동원(백만인 걷기<모금> 운동) 등 지역사회조직화 사회운동을 주도했으며,한국사회복지협의회에서는 사회복지사업에 대한 대 정부와 국민에게 이해 촉구, 최초의(1979) 아동학대신고센터, 사회봉사안내소와 자원봉사안내센타 등을 설치했다.

 이중에 백만인모금걷기운동은  1973 년 3 월18 일 성남개발걷기운동(그 이후는 백만인 걷기모금운동으로 칭한다)이라는 프로그램명으로 우리나라에서  최초걷기모금운동을 개최했고, 이후 해마다 더 많은 사회복지기관. 단체를 회원으로 영입하여 연합모금(United Way-공동모금)형태로 발전 시켰다.  제 1회는 양친회가 주관하는 행사에서 15 개 사회복지기관들이 연합했다. 이 운동이 명실상부한 외국의 공동모금방법을 채택한 최초의 공동 모금형태였다. 제 1회는 주관은 양친회한국지부( Foster Parents Plan,)와 국제라이온스 309 지구이고, 준비위원회(필자는 위원장으로 6회 연임)를 조직하여 자원봉사자들과 전문사회복지사들이 중심이 되어 추진 했다.  백만인모금운동(Miles for Millions, 또는 Walkathon, 등으로 표시 한다)은 1965년 영국에서 젊은이들이 개발도상국의  불우한 아동들을 돕기 위하여 자신의 돈으로 돕기가 어려우나 그 대신 튼튼한 다리가 있어서 자기다리에 후원자를 주위에서 찾아 1 마일을 걷으면 얼마를 주겠다는 후원금을 확약 받아서 정해진 걷는 코스에 나와 걸으면서 확인을 받아 다시 후원자에게 가서 약속한 후원금을 받아 걷기운동본부에 입금하면 된다. 따라서 조금이라도 더 걷거나, 후원자를 많이 구하면 그만큼 후원금이 많아지게 된다. 그래서 자기 다리에 많은 후원자를 붙이면 걷는자의 다리가 비싸게 된다. 그리고 많이 걸으면 자기 건강상 지구력도 시험해볼 수도 있다. 보통 걷는 코스는 15 Km에서 40 Km 등 지역 실정에 맞게 정한다. 이때에 걷는자는 모금기관에서 보면 모금권유자가 된다. 그리고 걷는코스 길이가 길수록 많은 걷는자를 수용할 수 있기 때문에 모금 행사장이 크게 된다. 걷는 코스에는 확인소가 있어서 얼마나 걸었다는 확인을 해주고, 기업체에서 음료수 와 과자를 나누어 주기도 하고 마지막 종착지점에는 걷는자들에게 위로행사를  주최 측이 마련 하기도 한다.

필자는 1977년 이 운동덕분에 미국 국무성초청으로 크리브랜드주립대와 크리브랜드 공동모금회에서 연구와 연수의 기회를 얻었고. 자비로 카나다와 일본사회복지공동모금회에서도 연수했고 그리고 필리핀에서 개최된 재 5 회 국제사회복지공동모금대회(1979)에 한국 대표단장으로서 이 운동과 모금활동을 소개하는 기조강연도 한바있다. 그 이후 직업은 공직에 있으면서 모금자원봉사자로  한평생 사회복지관련 모금운동과 모금기술연구를 동시에 하게 되었다.

 그러나 최근 중앙일보사가  후원하고 몇 개 기관이 연합하여 옛날의 백만인모금걷기운동을   다시 회생시켜 보겠다고 다문화가족을 위한 백만인걷기모금축제(대회장 최불암)가 2008년 5 월 17일 개최 했는데  필자는 이 운동 고문으로 참여하여 힘을 보탰다.


  둘째, 공무원으로 근무하면서 공직사회 부패방지와 국민의식개혁 캠페인 전개(아! 대한민국 노래 제작보급 등), 노․사간의 분쟁에 대한 알선․조정․중재업무, 각 부처 관련 정책조정 업무 등을 했다. 특기할 것은 공무원생활 동안 대통령특명으로 해외출장을 두 번 수행하고 직접보고 한 적이 있다.


 셋째, 정부산하 공공법인체인 의료보험연합회 상임이사로 의료보험 회원조합관리, 의료비 지급업무, 요양기관 실사를 통하여 부정방지 업무 등을 했다.


  넷째, 대학강의는 사회복지법인 경산복지재단 회장시  2001~ 2007.2.28 까지 평택대학교 사회복지학부에서 겸임교수를 시작으로,  중앙대 사회개발대학원, 숭실대, 경기대, 건국대 가정대, 경기대 행정대학원, 가톨릭대 사회복지대학원에서 출강했고.  강의과목은 사회복지행정론, 사회복지시설론, 산업복지론, 비영리기관마케팅(모금기술론), 사회보장론, 지역사회복지론, 사회복지정책론, 사회복지개론, 사회복지법제론, 사회복지조사방법론, 사회복지역사, 노인요양보호사교육 등이다. 현재 평택대. 경기대, 한국복지문화교육원에 출강하고 있다. 가르친다는 것은 배운다는 것이라고 늘 생각된다.


다섯째, 사회봉사 활동으로 사회복지공동모금회(중앙) 모금분과위원회 부위원장,

경기도사회복지공동모금회 운영위원 겸 배분분과위원장(’02-’06.11), 한국노인요양보호협회 감사, 경기도의회 복지 포럼 자문교수 등 전문직 자원봉사활동을 하고 있다. 현재 비영리모금기술연구회 회장으로 연구, 저술과, 특강활동 등을 계속하고 있다.


끝으로, 잊을 수 없는 일화들은 대학입학시험을 치루고 면소재지에서 6 Km 떨어진 시골고향에서 먼 친척이 알려 줄 합격여부 전화를 가다리고 있는데 연락이 없어서 필기시험은 합격할 것으로 믿고 신체검사를 받기위해 상경차비를 하고 면소재지로 걸어 나가는데 약 1 시간동안 만감이 교차했다. 평생 잊을 수 없는 순간 이었다. 도착하여 한국일보를 보니 합격이었다.  다시 시골마을로 가서 부모님께 고하고 상경했다. 나의 서울대 합격은 의성군내 서부 7개면에서 두 번째란다. 80 호 사는 산촌인데 동네 후원금과 큰 잔치를 열었다. 6 기 박창완 군이 여름방학여행 와서 120 년 된 초가를 보고 계천에 용이 났다고 격려 했다.

저가 공무원시절 면사무소와 나의 시골까지 새마을버스를 4회 운행하도록 조치한 일이 있다. 7개 마을 사람들의 재래시장출입과 학생들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

사회복지학을 공부하여 나의 문제는 물론 사회공헌을 좀 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은사님들과 선후배들에게 감사한다.( 서울대사회복지학과 창설 50 년사 게재원고,2009. 3,8)